이미 우리가 볼 것은 다 봤다 / 최규리
새벽에는 우유가 필요해요
불쑥 튀어나오는 이방인이
가슴에 비수를 꽂기 전에
태양이 뜨기 전에
흘려보내야 해요
신발 안에 들어온 작은 돌멩이가
하루를 얼마나 피로하게 했는지
우유 거품으로
매끈한 감정을 만들어야 해요
부드러운 결을 가지려고
씻고 또 씻어요
죽이는 상상과
죽임을 당하는 감정은 같아요
돌이킬 수 없는 바퀴가 되어
앞집으로 옆집으로
굴러가는 소용돌이를
태양이 뜨기 전에
아침이 되기 전에
하얗게 지워야 해요
칼과 우유는 같아요
비릿한 피 냄새가 나요
살의가 계속된다면
우유를 욕조에 채워봐요
몸을 담근다고
하얀 몸이 되지는 않겠죠
그래도 흰 것의 감정이 있잖아요
매끄러운 감정이 되기 위해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요
끓이고 뜨거워질수록 비릿한 우유는
꾸덕꾸덕해지고
응고되어도
단단한 감정이 되지 않네요
끈끈한 불쾌가 또 몰려와요
희고 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알아버렸어요
처음부터
흰 것은
흰 것이 될 수 없었던 아이
살짝만 스쳐도 더럽혀지는
가여운 색이라는 것
어떤 색이라도 받아줘야 하는
무게를 가졌다는 것을
아이는 감정불가의 비릿한 맛을
마시며 자랐어요
새벽에 도착하는 우유를
현관에서 꺼내 올 땐
아침이 오기 전에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욕조에 우유를 채우며
피로 가득한
감정과 바꾸기 위해
새벽에는 우유 샤워를 해요
태양이 뜨기 전에
당신을 만나기 전에
최규리
2016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질문은 나를 위반 한다』『인간 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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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가 볼 것은 다 봤다 / 최규리
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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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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