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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편 121: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3hikVW3fgYw&t=91s
누구에게나 희망은 중요합니다. 한 과학자가 물이 2/3정도 채워진 동일한 크기의 항아리 두 개에 쥐를 한 마리씩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항아리는 뚜껑을 닫아서 빛을 완전히 차단시켰습니다. 그리고 다른 항아리는 뚜껑을 살짝 열어서 빛이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뚜껑이 열린 항아리 안에 있던 쥐는 하늘도 볼 수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나는 음식냄새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 뚜껑이 닫혀 빛이 차단된 항아리에 갇혀있던 쥐는 5분도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뚜껑이 열린 항아리에 갇힌 쥐는 실험이 종료된 36시간동안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실험에서 두 쥐가 처했던 상황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빛의 유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 희망의 차이였습니다. 한쪽은 희망이 없었고, 다른 한 쪽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보이고 음식냄새가 들어온다는 작은 희망이었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 하나가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쥐보다 몇 백 배의 생존시간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하는 분입니다. 그 배경을 잠간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17세 때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징집되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다 망해버리고 가족들도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목사님이 그에게 성경을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는데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치료 받고 은혜를 입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다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보고 자기의 절망과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몰트만 박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몰트만은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자 ‘나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가 있구나, 나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그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할 수 있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고, 나는 가족을 잃었지만 다시 나를 통하여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소망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몰트만은 그 어둡고 캄캄한 절망에서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하여 광명한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대 절망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창하는 신학이 ‘희망의 신학’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입니다.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 15개의 시들은 표제어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갈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리 이방에 거주할 때에도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자인 경우에 12살이 되면 의무적으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차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되면 동리의 많은 남자들이 어울려 함께 출발하여 성전에 가서 예배하고 돌아왔습니다. 멀리 흩어져 살던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대개의 경우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90m의 높은 고원지대입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해발 -350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1140m를 올라가야 합니다.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유대광야가 있는데, 이 유대광야에는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고, 양이나 염소가 먹을 수 있는 풀이 조금 나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광야 길을 가다보면 인적이 드문 곳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는 강도들이 종종 출몰했습니다. 강도들은 숨어서 순례자를 기다리다가 해를 가하고 가진 물건을 빼앗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남자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1-2절의 말씀으로, 도움을 구하는 순례자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은 3-8절 말씀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실한 고백입니다. 이 시는 대화체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와의 대화입니까? 시인과 시인 자신과의 대화일 수도 있고, 시인과 곁에서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타인과의 대화일 수도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 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산’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①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시 125:2입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②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이었습니다. 시온산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는 말은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쪽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던 이유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눈을 들어 바라보기를 원하는 산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산들이냐 아니면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분이시며 자기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스라엘을 도우셨던 하나님, 시편 기자의 도움이 되셨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도우시는 분이신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1.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2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준 사건이 천지창조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도 창조하셨고 하늘의 새와 들의 짐승들 그리고 수많은 수목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드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광대하고 섬세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하이라이트는 사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흙을 빚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5대 축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는 뜻을 품고 기도하고 전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초월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모세입니다. 제가 왜 모세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하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홍해 바다를 갈라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셨고, 메추라기를 보내주셔서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하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을 요약한 말씀이 시 90:17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하늘에서 햇빛이 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모세에게 임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힘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바이런 제니스(Byron Janis)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때 그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이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기적입니다. 그가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당신은 평생 손을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의사의 그런 말을 들으면 낙심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니스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자기가 회복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고쳐주셔서 자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자기가 장애자로 사는 모습을 그리지 않고 자기가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그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하나님께서 그의 믿음과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꿈에 본 것처럼 멋지게 피아노를 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것입니다.
하루는 기자가 그에게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게 용기를 주셨고, 저는 기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 믿었습니다. 저에게는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제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제니스에게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2.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3-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일을 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일하다보면 지키고 피곤합니다. 그러면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지치지 않으시고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쉬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제가 군대에서 신병 시절에 소대 최고참하고 근무를 나갔다가 졸다가 걸린 일이 있습니다. 그 고참이 한 번 봐줬는데 그만 또 졸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곤란하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군대에서 신병 시절에는 왜 그렇게 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내 교육을 할 때 고참들은 자기 밑에 있는 병사들 조는 것 감시하느라 졸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병들은 고참들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서 졸다가 많이 혼이 납니다.
제가 내무반장을 할 때 병사들이 근무를 잘 서고 있는지 순찰을 나갔다가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항상 졸다가 걸리는 후임병이 있었는데 그가 그날도 졸다가 제게 걸렸습니다. 제가 그의 버릇을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등 간단한 기합을 주고 전방에 보이는 소나무를 몇 차례 돌아오게 했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그에게 힘이 드니까 총을 내려놓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초병이 몸에서 총을 내려놓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군기가 바짝든 그가 제가 총을 내려놓고 소나무를 돌라고 하니 정말로 총을 내려놓고 소나무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 그의 총에서 총알이 들어있는 탄창을 빼내서 제 주머니에 숨겼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탄창을 제거하려고 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엄청나게 당황했었습니다. 사람은 일하면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면 졸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졸거나 주무시지 않습니다. 24시간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여기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가운데서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요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함께 하시니 평안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딤후 3:12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우리 생각에는 경건하게 살면 문제도 없고 박해도 없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살면 세상은 박해합니다. 마귀는 공격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신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른쪽은 남쪽입니다. 앞이 동쪽이기 때문에 오른쪽은 남쪽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집을 짓거나 살 때 남향을 선호했습니다. 그 이유는 겨울 난방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입니다. 겨울이 우리나라 봄 기온 정도고 여름에는 너무나 덥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겨울에만 다녀왔는데 여름에 다녀온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 더워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살 때 남향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쪽에서 그늘이 되신다고 하니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크롬웰이 젖을 먹던 아기 시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크롬웰의 유모가 크롬웰을 데리고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습니다. 유모는 크롬웰에게 젖을 배부르게 먹이고 요람에 눕혀 푹 잠들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뜰에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보니 큰 원숭이가 자고 있는 어린 크롬웰을 안고 지붕위로 올라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모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 일 났어요. 도와주세요. 원숭이가 아기를 떨어뜨리면 아기는 죽어요.”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와 지붕 위에 있는 원숭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집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롬웰은 깨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저걸 어떻게 하죠? 원숭이가 크롬웰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크롬웰은 죽어요.” 이 때 할아버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아기를 주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모두가 합심하여 크롬웰이 무사하기를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고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원숭이가 아이를 안고 땅으로 내려오더니 아이를 땅에 눕혀놓고 다시 지붕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어 쉬었습니다.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크롬웰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일 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도와주시지만 실제로 문제를 만나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사 41:10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에 밀려 믿음을 놓아버립니다. 환경에 눌려서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음은 방파제와 같습니다. 방파제가 튼튼하면 파도가 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파제를 치워버리면 파도에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에게 역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저를 따라합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방패이시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나의 방패라는 사실을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한 남자 아이가 아빠와 함께 동물원에 갔습니다. 아빠가 아이를 사자 우리에 데리고 갔습니다. 두 사람이 사자 우리로 다가가자 누워있던 사자가 일어서서 두 사람에게로 달려가며 “어흥~”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가 기겁을 하고 얼굴을 새파랗게 되어서 “으악~”하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빠가 아들에게 “왜 그래?”라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사자가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잖아요.” 아빠가 아이를 안심시켰습니다. “사자만 보지 말고 사자와 우리 사이에 있는 철창을 봐라. 철창이 막고 있으니 사자가 고함을 쳐도 철창 때문에 우리는 절대 안전해.” 맞습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문제와 환난이 있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담대하십시오. 사건과 환경을 보고 쫄지 마시고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람군대는 엘리사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를 잡을 작전을 세웠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갔었을 때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밤새도록 첩첩히 둘러쌌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나가서 보니 아람 군대가 완전히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천지에 아람군대의 마병이 가득하고 아람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는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벌벌 떨며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큰 일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우리를 첩첩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저들보다 많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 사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종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가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과 불말과 불병거가 온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군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3. 영원하신 하나님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십니까? 영원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영원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한 마을의 추장이 늙고 병이 들어 후계자를 선정해야 했습니다. 용감하고 씩씩한 청년 셋을 불러다 말했습니다. “저 높은 산꼭대기에 갔다가 오라. 그 증거를 가지고 오는 사람 중에 한 명을 후계자를 세우겠다.” 세 청년은 추장이 되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며 추장이 말한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산 위에서 각기 증거를 하나씩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한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고산식물을 증거로 가져 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평지에서는 볼 수 없는 산꼭대기의 돌을 증거로 가져 왔습니다. 마지막 청년은 눈동자가 충혈 되어 뛰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그의 말을 듣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그를 후계자로 정했습니다. 마지막 청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장님! 저 산 너머에 기름진 평야가 있습니다. 우리 부족은 여기 살 게 아니라 저 산 너머로 옮겨 가야 합니다. 저는 저 산꼭대기에서 우리 부족의 갈 곳을 보고 왔습니다. 우리 부족의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착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미래는 천국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만 진짜 우리의 종착지는 천국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를 도우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 4:1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영원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만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감사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