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예천군 삼강리 산 8-1번지 발굴 현장, 차순철 연구원의 호미에 돌 하나가 걸려들었다. ‘돌도끼 같은데...’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고 현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0여분의 솔질 끝에 정체를 드러낸 것은 주먹도끼였다. 거친 타격면에 선명한 날(blade)의 흔적, 구석기가 분명했다. 근처에서 유물을 수습하던 연구원들이 달려오고 현장은 환호에 가득 찼다. 안동 마애리, 상주신상리에 이어 경북에서 세 번째 구석기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는 조심스럽게 돌도끼를 집어 들었다. “이건 화산암입니다, 구석기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전기(前期) 유물이죠. 한반도에서 이른 시기에 경북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증겁니다. 또 예천엔 화산이 없으니 구석기 때 이미 외지인이 드나들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8만년전 예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선사시대 예천의 문명을 일구었던 귀한 손님을 찾아 삼강리로 떠나보자.
◆구석기 전기~중기 석기 유물 확인=낙동강이 선물한 문명, 삼강리유적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삼강나루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처럼 세 강의 합수지점으로 옛부터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길목이었다.
깊이 4.5m, 5개 문화층으로 확인된 유적에서는 모두 159점의 석기가 출토됐다. 석기 제작에 사용된 돌은 대부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규암, 석영, 자갈돌들이었고, 단면찍개, 양면찍개, 주먹찌르개, 주먹도끼, 주먹대패, 톱니날, 뚜르개 등이 확인됐다.
이중 관심을 끈 것은 10여점에 이르는 구석기 전기(前期) 유물이었다. 약 8만년 전 석기 공작 형태로 구분하는 전기 구석기에는 보통 주먹도끼, 찌르개 등이 많이 나타난다. 동국문화재단 김남호 연구원은 “맨 밑 토층에서 확인된 5문화층은 가장 오래된 지층으로 여기서 출토된 도끼와 찌르개는 구석기 전기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외 1~4문화층에서는 약 4만년전 구석기 중기(中期) 문화층이 확인돼 이곳에서 8만~4만년전에 선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한반도에서 200여곳의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지만 구석기 전기유적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유적이 워낙 희소해 편년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석기 공작의 발전과정을 규명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구석기 전기 유적지의 존재 여부는 이역민의 자부심과 긍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대 선사인 교통로 였던 삼강나루=삼강리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화산석의 일종인 안산암 이었다. 예천 주변엔 화산이 없었고, 백두산, 제주도, 울릉도까지 가야 화산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천에 없는 화산석이 삼강리에서 발견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이 될까.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 구석기 전기에 삼강나루에 거주했던 선사인이 외지에서 온 이주민일 가능성, 둘째는 8만년 전에 이미 백두산계 주민과 문화 교류망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다.
어느 경우를 가정하여도 고대에 예천 선사인들이 외지인들과 교류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구석기 당시 삼강이 북방-한강-낙동강을 연결하는 교통로였다는 다른 단서는 없을까. 전문가들은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발견된 좀돌날과 흑요석을 주목한다.
좀돌날은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시베리안 계통 북방 유물이고 흑요석은 백두산에서만 출토되는 화산석이다. 월성동의 이 유물들은 후기 구석기에 대구에 북방계와 백두산-한강-낙동강을 연결하는 교역망이 형성되었다는 증거이다.
이 좀돌날 문화는 후에 낙동강을 거쳐 부산-대마도-열본열도로 연결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삼강리는 한반도 선사유적지를 넘어 북방-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교통로의 한 축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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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영남지역에 구석기 전기의 존재를 처음 알린 상주 신상리 유적에 이어 삼강리 유적은 지역에 구석기 전기 문명이 실재했음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삼강리유적은 전기부터 중기까지 유적을 아우르고 있어, 경북지역 특히 낙동강 상류지역의 구석기 문화의 특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고학자들은 구석기 문화의 유입 통로로 강을 주목하고 있다. 삼강이 마침 낙동강의 상류에 위치해 있어 그 가능성은 커진다.
선사시대의 강은 ‘물위의 고속도로’로 불렸다. 차순철 연구원이 ‘삼강유적지 주인공들이 한강을 통해 남하한 북방계 이주민일 가능성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뱃길을 통한 문화 유입을 가정할 때 전문가들은 북방문화의 유입루트로 시베리아-백두산-한강 루트를 주목한다. 특히 한반도의 전기 구석기 유적지나 백두산 화석인 흑요석의 발견지도 대체로 이 경로와 일치하고 있다. 남한강까지 내려온 북방계 구석기인들의 다음 루트는 바로 낙동강으로 연결되었을 것이고, 그증거가 바로 안동, 상주, 삼강리 유적인 것이다.
100여리 물길을 이어주는 삼강나루터는 조선시대 부산 다대포까지 물자를 나르던 영남 교통의 요지였고, 삼강주막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관문인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이었다.
2016년 삼강리 인근에 경북도청이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사시대부터 사통팔달로 물류를 열어갔던 삼강리가 다시금 경북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이미 선사시부터 예정됐던 일인지도 모른다.
낙동강 상류에서 한반도 내륙수운을 열어갔던 삼강리 주막, 어쩌면 그 최초의 손님은 8만년 전에 북방의 노꾼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