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3
12월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대림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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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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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SWyhno4sVI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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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과거에는 무염시태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 저도 한때 무슨 뜻인가 의아해했고 알쏭달쏭해 했습니다. 한자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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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피정 센터에 와서 평생 안해보던 일을 참 많이 합니다. 눈만 뜨면 하는 일이 화장실 청소요 이불 빨래, 쓰레기 분리 수거요, 장작 패기입니다.
어제는 건장한 청소년들이 우르르 놀러 온다고 해서 종일 쓸고 닦고를 반복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숙소를 세팅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특별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이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교황님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의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무염시태 교리는 너무나 큰 신비와 베일 속에 가려진 알쏭달쏭한 교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교리라고 합니다.
무염시태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원죄없이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훨씬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좀더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무염시태 교리 앞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의혹을 품다보니 마침내, 1858년 성모님께서는 프랑스 루르드에 직접 발현하셔서 무염시태 교리를 당신 입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 부터 7월 16일까지 총 18번에 걸쳐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셨는데, 마지막 발현 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 벨라뎃다야,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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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HkIdKSKY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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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 어머니가 되실 자격이 있다는 근거는?>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인사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은총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에게 떠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니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덴동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도 죄가 없다면 은총이 가득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가 다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이 없는 이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이들은 주님께 자신들을 떠나주십사고 청합니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어떤 피정 교육에 들어갈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서 꼭 일등 하셔서 우리 성당을 빛내셔야 해요!” 장난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하면 누구나 느끼듯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이는 은총이 가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은총은 곧 ‘자격’입니다. 은총을 가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무르려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그것은 자격 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은총은 기도로 오는데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말은 자신 안에 이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라고 이 세상에서 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격인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은총으로 당신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주님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만큼 합당하지 못합니다. 저도 술을 마시고 용기백배하여 성당에 올라가 성모상으로 보았지만, 성모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 때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아니면 성모 마리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 자격이 없어집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하고 성령을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5회’에 보면 중2 남자아이인데 호흡 곤란으로 4년째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나서 그 상처 때문에 학교 가기를 거부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이 꾀병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런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 진짜 그런 병이 든 것처럼 믿어진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에게 이것저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요? 부모는 너무 착하고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다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이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부모의 약함은 내 힘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교만에서 나옵니다. 권위를 내세워야만 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교만입니다.
금쪽 처방을 받고서도 부모는 “너는 할 수 있어”, 혹은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줍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도움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조금 따라주다가도 힘에 부치면 이내 폭발하고 맙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아이가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부모의 탓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합당한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합당한 부모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격’이신데 그 자격을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성령의 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자격을 잃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자격이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은총을 지니셨기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아드님을 키울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상징이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온갖 폐물을 주며 아드님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 종에게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자신이 가져온 폐물로 꾸며주었습니다. 이것이 ‘은총’이고 이사악을 만날 ‘자격’이 됩니다.
여기서 레베카가 아브라함의 종을 위해서 종과 종이 몰고 온 낙타들에게 물을 주는 시간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은총으로 자격을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자격뿐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자격을 잃습니다. 자격 자체가 기도로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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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변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묻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께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158명의 숭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대도 이렇게 변명하였습니다. ‘경찰이 있었어도, 안전조치를 했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린 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무고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과 그 유족들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전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으면서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들이 멸종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노예로 전락하였고, 숲은 파괴되었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카인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나중에는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이 오면 신앙을 저버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았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우는 시간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100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그런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구세주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믿을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기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평생 동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순명입니다. 변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순명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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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리아의 고백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우리도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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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와 그녀를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만, 두 인물의 대화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관하여는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축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와 어떻게 연결 지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여인으로 소개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그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또는 ‘은총을 받은 이’)는 마리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그가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 주셨으며, 이러한 하느님의 보호로 마리아께서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본기도, 예물 기도, 감사송 ‘마리아와 교회의 신비’ 참조).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깨끗한 마리아를 선택하셨고 성령을 파견하시어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 은총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마리아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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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외방전교회 하유설 요셉 신부님]
<사랑한다>
신학생 때 마더 데레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내 손을 잡을 때 강한 힘과 친절함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그분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에 그분과 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축복의 눈길을 경험했다고 본다.
인도에서 마더 데레사 품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며 축복 속에 죽어갔다는 말을 실감했다.
축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성숙한 여성과 남성의 특성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축복」이라는 책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을 배우게 되었다.
(눈으로 바라보기)
먼저 우리의 오감을 사용하는 축복이다. 마더 데레사와 만났던 경험처럼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은 아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축복이다.
(손잡기)
육체적인 접촉은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아주 필요하다.
(말하기)
예수님은 축복하시며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다. 부자 청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고,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시고, 많은 이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능성을 믿기)
다음 단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의 가능성을 믿기인데, 이는 그 사람들에게 특별한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축복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미래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축복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축복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제자들 각자의 소중함을 보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 달성하기까지 축복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번 대림절에 누가 나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받은 축복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또 나는 누구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지, 배우자에게 이렇게 하였는지?
몇 년 전부터 여동생이 가족끼리 전화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로 제안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실천하고 있는데, 동생이나 어머니에게 이러한 표현을 함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사랑스럽고 축복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음을 체험한다.
가족이나 수도 공동체는 축복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축복을 주고받는 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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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겸손하신 어머니>
노예와 종은 둘 다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 의한 종속상태냐 아니면 스스로 낮춤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노예는 여러 가지 이름, 형태로 있어 왔습니다. 아주 심할 때는 모든 자유가 주인에게 속해 있어서, 심지어는 ‘죽는 것도 주인 맘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요즘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현장 체험을 하신 어느 분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데 심지어는 점심밥도 서서 먹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이주노동자가 하소연을 하길래 기숙사에 가 보니, 아주 작은 단칸방에 세 명씩 밀어넣은 것을 보고 ‘교도소보다도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한 종속, 예속상태는 하루 빨리 벗어날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낮춤을 표현하는 ‘종’의 자세는 누구나가 가져야 할 겸손의 모습입니다.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우위권을 놓고 논쟁을 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동방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우위권과 맞먹는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종들의 종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겸손이 존경을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세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마땅히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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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홀로
이루실 수 있는
당신께서
굳이
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니
비록
보잘것없지만
저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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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이 그만큼 소중합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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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가 중요한 시험을 망쳤습니다. 좋은 결과가 아니라서 크게 실망했는데, 이 아이의 엄마도 크게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실망한 부모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큰 실망은 아이일 텐데, 부모가 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부모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구속된 것입니다. 아이의 실패가 곧 자기의 실패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을 돌보기보다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시험 망친 건 너야. 잘 봤어야지.”라면서 외면하는 부모입니다. 이때에는 부모나 아이 각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관계라는 것은 구속된 것도 아닌 또 고립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속상하지? 실망하는 걸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 좋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마음 잘 추스르고,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함께 살펴보자. 엄마 아빠가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이렇게 말하는 관계가 된다면,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남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게 됩니다. 함께하기에 힘낼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관계는 가족, 친구, 이웃…. 모든 사람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 만드신 관계 역시 이 차원에서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거부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그 소식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고 해서, 돌을 던져 공개 처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과 함께하지만, 자율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내세우시며 자기 인생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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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물듦에 대하여>
오늘 축일의 본기도는 축일의 의미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그러니까 우리도 동정녀 마리아처럼 죄에 물들지 않도록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첫째 독서와 연결하면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본받지 말고 새로운 아담이신 주님과 새로운 하와이신 마리아를 본받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드는 존재입니다.
나는 죽어도 다른 물들지 않고 내 색깔대로 살 거야 할지라도 같이 살다 보면 물들기도 하고 물들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야청청 물 안 들겠다고 하기보다는 물이 들되, 하와의 물이 아니라 마리아의 물이 들기로 마음먹는 것이 더 현명하고 오늘 축일을 잘 지내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늘 강론도 이 의미만 간단히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오늘 축일의 의미를 끙끙대며 묵상했는데 전에 했던 얘기 빼고, 안 한 얘기를 하려다 보니 좀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어려운 얘기는 집어치우고 이렇게 간단히 물듦의 의미만 나누기로 하였는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의미를 알고 싶으시면 전에 올린 강론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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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께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채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독서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 얘기가 나오고, 미사의 본기도와 감사송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심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런데 원죄가 왜 인간에게 있는지 저는 반문을 합니다. 왜냐면 모든 것의 시작은 다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인간이 무엇을 했다면 시작의 시작은 하느님이니 다 하느님 덕이거나 탓이지요. 그러니까 원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러하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점을 설명할 때 부모와 자식 관계를 자주 예로 듭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부모의 사랑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 사랑하는 쪽이 항상 지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겠다고 우겨도 결국 지고 맙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잘못을 하고 계속 잘못을 해도 꼼짝 못 합니다. 어디서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낳은 것이고, 그렇게 키웠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잘한 것은 하느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하고 잘못한 것은 인간이 잘못한 거라고 하는데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잘하라고 하셨고 잘못을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지만 잘하려 해도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축일의 뜻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의 시작은 하느님이고, 선택하신 분도 하느님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1,4-5)
보통 사람인 우리도 천지 창조 이전에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하물며 우리 인간의 구원자를 잉태하실 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랑으로 선택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보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답게 마리아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나이다.”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로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분이십니다. 신명기를 보면 찌르는 것도 나요, 고치는 것도 나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지만 은총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은총을 주시는 것만 사랑이 아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신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에 은총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시기에 사랑할 수도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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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
한 밤중 일어나면 우선 강론 쓰기전 인터넷의 뉴스 기사들을 대략 찾아 봅니다. 선과 악의 치열한 전쟁터같습니다. 국내 상황이 더 그러합니다. 무지의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때로는 선의 세력이 참 미약해 보입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사회요 분열과 갈등의 사회요 흡사 내전 상태를 연상케 하는 현실입니다.
주변 곳곳에서 참 힘들게 사는 이들의 사연도 끝이 없습니다. 많이 아프고 병들고 불안과 두려움중에 하루하루 희망없이 살아갑니다.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평화입니다. 정말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어가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갑자기 우리 요셉 수도원의 최 빠코미오 원장의 부친인 최재목 야고보 형제님이 81세를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도원에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인생 노년에 치매의 병고로 잠시 고생하시다가 마침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참 선량하고 진실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고인의 빈소는 대구 파티마 병원 장례식장 403호이고, 장례미사는 12월9일 금요일, 대구 만촌3동 성당에서 오전 10시에 거행됩니다.
너무 진실과 사랑을 잊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참으로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자기를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영혼 없는 유령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1.“깨어 있어라”, 2.“회개하여라”, 대림1,2주일의 주제에 이어 다음 대림3주일의 3.“기뻐하여라” 세 주제가 우리 삶의 지표가 됩니다. 정말 이렇게 깨어 회개하여 기쁘게 참으로 살아야 할 절박한 시절입니다. 이런저런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저절로 절박하게 대두 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띠는 중요한 주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을 한결같이 인내하며 참답게 살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성모님이 그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성모님이 답을 줍니다. 성모님처럼 살면 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너무 경사스런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교회때부터 시작됩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다음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된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런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오늘 성모님 대축일 미사 감사송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성모님 아름다운 영적 삶을 요약합니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는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성모님을 통하여 티없고 흠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의 시작을 알려 주셨나이다.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저희 죄를 없애시는,
죄없으신 어린양 성자께서 나셨으니,
주님께서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피조물 위에 들어 올리시고,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미리 정하셨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내용인지요! 한 분의, 한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삶에 대한 부단한 자극이 됩니다. 성모님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도 샘솟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요, 이렇게 살아야 참나의 참된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다음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은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은총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은총의 빛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무지와 무의미, 허무주의의 어둠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은총이 가득한 이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은총에 이어 총애가 역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이요, 하느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우리 임을 철석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은총으로 충만한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얼마나 은총 가득한 사랑스런 인간 존재인지, 은총 덩어리 삶임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본질은 은총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아 은총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도록 합시다.
둘째, “찬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총의 깨달음에서 저절로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의 삶이 하느님을 닮은 참나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미, 찬양의 맛으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병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찬미와 찬양뿐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 모두가 한결같이 찬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찬미가는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바로 이 찬미가중 두 대목이 주목됩니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은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역시 우리의 영예로운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은총의 존재이자 찬미, 찬양의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을 때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찬양입니다.
셋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평생 순종의 삶을 사셨던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었습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선종의 죽음입니다. 성모님의 순종이 다음 고백에서 결정적으로 입증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의 응답후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홀가분하게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일을 못하십니다. 상대방인 인간의 자발적 사랑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순조로워졌으니 하느님은 마리아가 너무 고맙고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의 전구는 예수님도, 하느님도 거절하기 힘들 것입니다.
참 자랑스럽게도 창세기에서 비겁했던 아담-하와 부부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마리아의 통쾌한 순종입니다. 이로부터 마리아의 출현까지 그 장구한 세월을 견뎌내신 하느님의 사랑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실낙원이 마리아의 순종으로 복락원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그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기까지 성모 마리아를 닮아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성모님은 물론 예수님과 일치를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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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8) -사회 교리 주간-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탄생예고'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하느님 구원 사업에 결정적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그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아들 예수를 품을 성자의 합당한 거처로 삼으십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하지만 마리아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엄청난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 결정적 순종으로'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모무염시태, 곧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라는 교리에 결정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품을 태가 결코 죄에 물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또한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이 되신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본기도)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하느님께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숨어 버린 아담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아담들'을 부르십니다. 지금 나를 찾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 모든 죄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바로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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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oX0Vyo1ty8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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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
하느님을 잉태할
마리아의 잉태는
원죄없는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마주치게 되는
은총의 신비입니다.
은총으로
이끄시는 분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의 신비는 또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침범당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깨끗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원죄로도
꺾을 수 없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지극한 사랑은
깨끗한 마음안에서
서로를 비추게 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이
한국 교회에게도
베풀어주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불가능이 없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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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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