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명 칼럼이다
전라의 앵벌이 경제에 대한 글인데 전국민 특히 전라인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남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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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체제의 사실상의 출발은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의 화려한 팡파레 아니었을까? 당시 올림픽의 성공은 대한민국이 좀더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투명하고 합리적이고 국제화된 나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선언한다는 의미였다고 본다. 그게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민주화의 의미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 1987년 체제는 이후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우리는 1987년 체제의 종말을 보고 있다.
바로 부안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 대회의 실패를 보면서 그렇게 느낀다. 청소년들이랑 몇몇 어른들이 캠핑하며 노는 프로그램이 좀 망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체제의 종말씩이나 거론할 일이냐? 이렇게 말할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 것을 보고 천하에 봄이 온 것을 안다는 말이 있다. 중국식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그 원리는 여론조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단 1천 명 정도의 국민에게 질문을 던져 얻은 답변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한 나라의 여론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간단한 현상에도 거대한 시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잼버리 사태는 이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대한민국이 이런 대회를 준비하고 수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이 대회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구멍이 생겼고 그걸 미리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건 매우 심각한 변화이고 이런 변화가 이미 체제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봐야 한다.
잼버리 대회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 등 해양문명 국가들의 청소년 교육은 기본적으로 전쟁 교육이다. 그래서 영국의 이튼 등 명문 사립학교의 교육과정은 지식보다 체력 단련에 초점을 맞춘다. 매일 아침 냉수마찰도 그중 하나다.
이런 서구 국가 상류층 자제들의 핵심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야외 체험이다. 그게 바로 스카우트이고 잼버리이다. 사실상 전투 훈련인 것이다. 세계 잼버리 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다음 세대 그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청소년들에게 이번 새만금 잼버리 대회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치명적으로 망쳤다. 이 후과는 대한민국 모두가 감당할 몫이지만 그래도 책임소재는 따져야 한다.
그 책임소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새만금이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것이 2016년 LG CNS가 새만금에 3800억원을 투자해 여의도 4분의 1 면적의 스마트팜 단지를 만든다고 했던 계획이다. 당시에도 새만금은 텅 빈 땅이었고 이 땅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전북 지역의 숙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땅에 스마트팜 단지가 세워진다고 하니 비로소 새만금 문제의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여겨 필자도 적극 환영했다.
하지만 계획 발표 3개월 만에 LG CNS는 앞발 뒷발 다 들고 포기 선언을 했다. 전국의 농민단체가 현지에 몰려와 머리띠 두르고 반대 시위를 했고, 전북의 여론도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반대의 명분은 ‘재벌의 농업 진출 반대’였다. 성추행으로 민주당에서 쫓겨난 박완주가 당시 전농과 함께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나중에는 전북도 의회가 반대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웃기는 것은 LG CNS가 LG그룹의 IT서비스를 책임지는 회사였다는 점이다. 즉 농업 회사가 아니었고 당시 추진했던 스마트팜 컨셉도 농사가 아니라 스마트팜 관련 기술과 설비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LG CNS는 “스마트팜 설비에서 생산되는 부산물(농산물)은 전량 해외로 수출하겠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하지만 전북 사람들은 마이동풍이었다.
스마트팜 단지는 친환경인 데다 전북 지역 농업과의 시너지 그리고 첨단 IT와의 접점도 기대할 수 있었다. 스마트팜 단지가 새만금 일대에 들어서면 일종의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연관 산업체의 입주나 관련 인프라의 투자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북은 이 사업을 거부했다. 이후 새만금을 살린다며 나온 제안이 ‘카지노 유치’였다. 현재 전북지사인 김관영이 내놓은 기획이었다. 스마트팜과 카지노 가운데 어느 게 더 좋은 프로젝트일까? 강원랜드가 초래한 재앙이 보이지도 않나?
스마트팜 단지가 좌절된 당시부터 전북은 세계 잼버리 대회 유치에 나선다. 전북도청은 1991년에 성공적으로 치러진 강원도 고성 잼버리의 사례를 사전 조사했다. 고성이 고지대여서 무더운 여름 날씨를 피할 수 있었고 주변의 산세가 도전정신 함양이라는 잼버리의 목표와도 적합하다고 판단,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무주 태권도원을 적극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조사 결과는 전북 정치인들에 의해 뒤집혔다고 한다. 무엇보다 새만금 간척지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세계 잼버리 대회를 유치해 새만금 개발의 명분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문재인 정권 당시 세계 잼버리 대회 유치를 명분으로 2018년 4239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새만금 고속도로가 착공됐다. 이밖에 1조1293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고속도로 연계 지방도로 건설사업이 기다리고 있다. 군산공항을 대체할 새만금 국제공항을 2028년까지 완성한다는 목표로 8077억원의 예산이 배정돼 있다. 이 예산들을 모두 합한 규모는 2조6천억 원에 이른다.
이 밖에 세계 잼버리 대회에 들어간 1천억 원과 지반공사 2천억 원, 동학기념공원 등을 모두 합치면 이 대회 하나로 20조 원대의 인프라 투자를 전북이 끌어당겼다는 계산이 나온다.
희한한 것은 이런 교통 인프라 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새만금 일대의 공항과 고속도로, 지방도로는 어떤 사람들을 어디로 실어나른다는 것일까?> 저 인프라 투자의 키워드는 새만금이다. 그런데 새만금은 텅 비어있는 땅이다. 세계 잼버리 대회 유치가 인프라 예산을 따내는 명분이 됐지만 대회는 열흘이 지나면 끝난다. 이후에는 쓰레기 치울 일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인프라 투자일까? 설마 새만금의 태양광 패널 보려고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고속도로 달려서 찾아온다는 것일까?
새만금 스마트팜 사업의 좌절과 세계 잼버리 대회 그리고 새만금 국제공항과 고속도로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바로 <호남이 먹고사는 방식>이다.
교통 등 사회자본 인프라는 다른 산업과 산업을 연결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의미가 있다. 그걸 위해서 거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된다. 하지만 새만금 국제공항과 고속도로, 지방도로는 그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인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이 인프라들의 진짜 목적이 바로 ‘돈을 쓰는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즉, <전라북도와 부안 등 새만금 일대에 돈을 뿌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북도민들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설비 즉 스마트팜 단지가 들어서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대신 오직 ‘부가가치를 땅에다 쏟아버리는’ 국제공항과 고속도로, 지방도로 건설에 올인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생산하는 일은 싫고 일회성으로 국가 예산을 따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교통 인프라를 건설하면 그 인프라를 따라 생산 시설도 들어온다고 우길지 모르지만 전북도민들이 이미 스마트팜 단지를 거부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런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다.
이런 현상은 전라북도에 그치지 않는다. 원조는 광주라고 봐야 한다. 아시아문화전당, 광주비엔날레, 광주형 일자리(광주글로벌모터스), 한전공대, 영암 F1 등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젝트들의 공통점이라면 자체적으로 수익성을 갖추지 못하고 계속 정부의 제도와 예산 지원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5.18의 피’라는 상징자산의 지원이 없으면 성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광주도 복합쇼핑몰 입주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전북과 비슷하다. 기업의 생산적인 투자는 거부한다는 얘기다. 그 대신 생산성 제로일 수밖에 없는, 아니 제로여야 하는 프로젝트를 유치하고 그 프로젝트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으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정부 예산을 따먹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호남 인적 자원의 특수성이 이런 구조를 고질화하고 있다. 호남은 1980년 5월의 비극 이래 좌파 정치투쟁의 진지 역할을 해왔다. 특히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의 승리는 이 지역의 정치 지형을 확고하게 결정지었다. 정치적 승리의 경험과 이 지역의 척박한 산업 환경은 이 지역 청년들의 진로를 일방적인 정치적 경로로 만들었다.
<기업체 등 생산적인 진로보다 상징 조작과 선전 선동, 조직화 등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시됐고 이는 지역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대학 시절부터 이런 활동으로 훈련받은 청년들이 대거 배출됐고 이런 청년들은 기업보다 시민단체, 노조, 정당 등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기업의 투자 자체를 꺼리는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다른 지역도 정부 예산을 따오는 데 사활을 걸다시피 한다는 점에서 호남만의 특수 현상이 아니라는 반박도 있다. 맞다. 대한민국 다른 지역도 생산적인 일보다 정부 투자에 목을 매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이것도 실은 1987년 체제의 승리자인 호남의 영향이 확산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호남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지역은 국가 예산 따오는 것이 여러 경제 활동의 일부일 뿐이지만, 호남은 이것이 거의 유일한 경제 활동이다>. 1987년 체제 이후 이 지역의 경제 활동은 대부분 국가 예산 따오기로 시작해 다시 새로운 국가 예산 따오기로 마무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모델이 지속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과거에는 이런 프로세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호남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전제에서 성립하는 모델이었다. 호남의 인구가 적고 소득 수준도 낮아서 별로 큰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식은 유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호남이 1987년 체제의 승리자이자 오너의 위상을 확실하게 굳히면서 다른 지역들도 호남의 모델을 따라 하고 호남처럼 정부 지원을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한민국의 호남화’ 현상이다>. 이건 대한민국 몰락으로 가는 직통 코스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1987년 체제는 호남과 주사파의 결합으로 지속 가능해졌다. 양자를 강력하게 결속해주는 매개체가 5.18이다. 그래서 호남과 주사파는 5.18의 위상과 정당성을 수호하는 데 적극 협력한다. 5.18을 활용해 호남에 경제적 혜택을 안겨주고 나아가 5.18에 대한 도전을 불법화했다. 호남에 대한 비판을 ‘호남 혐오’로 매도한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무너지고 있다. 세계 잼버리 대회 사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5.18로도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이제 변화가 불가피하다. 호남의 문제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호남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호남 혐오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호남을 혐오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호남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호남은 분명한 실체이고 대한민국 근대화의 그늘이다. 이 사실마저 부인하면 안 된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