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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김이듬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 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 피가 흐르는데 핏자국이 달무리처럼 푸른 시트로 번져가는데 본능이라니 보름달 때문이라니 조용히 해라 진리를 말하는 자여 진리를 알거든 너만 알고 있어라 더러운 인간들의 복음 주기적인 출혈과 복통 나는 멈추지 않는데 복잡해죽겠는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 나는 말이야 인사이더잖아 아웃사이더가 아냐 넌 자면서도 중얼거리네 갑작스런 출혈인데 피 흐르는데 반복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큰 문이 달린 세계 이동하다 반복적으로 멈추는 바퀴 바뀌지 않는 노선 벗어나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대형 생리대가 필요해요 곯아떨어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나 내 외투 안으로 손을 넣고 갈겨쓴 편지를 읽듯 잠꼬대까지 하는 이 죽일 놈을 한방 갈기고 싶은데 이놈의 애인을 어떻게 하나 덥석 목덜미를 물고 뛰어내릴 수 있다면 갈기를 휘날리며 한밤의 철도 위를 내달릴 수 있다면 달이 뜬 붉은 해안으로 그 흐르는 모래사장 시원한 우물 옆으로 가서 너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드레스 리허설
그녀가 출전할 때
눈을 감아요 나는
내가 안 봐야 그녀가 이기거든요
드레스 리허설까지만 지켜보고
나는 퇴장합니다
오늘 새벽 프리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볼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어요
피겨 퀸은 빙판 위에
댄싱 퀸은 콜라텍에 (밀양강 놔두고 무심천가에 와서 노래하는 일을 다시 시작한 밀양 이모, 환갑 다 된 과붓집이 위장하듯 화장을 하고 레깅스로 강조한 엉덩이 흔들며 노래하는 꼴이란,
이천 원 입장료로 온종일 죽치고 노는 노인들의 콜라텍에서 쌍쌍이 눈이 맞아 모텔도 가고 공원도 가는 옛날 공단 지역 창고 같은 곳에서, 춤도 아니고 들썩임도 아닌 이상한 스텝을 밟는, 뭐야, 도살장으로 실려와 죽음을 눈치채자 교미에 열을 올리는 돼지들 같잖아요, 안 와도 되는데 뭐하러 왔나? 네 에미가 가보라든? 옷은 이게 뭐냐, 애늙은이같이, 중략, 자칭 댄싱 퀸)
그 허구 속에 자기가 있다고 말하라 했다던 보르헤스처럼
보든지 말든지
당신이 믿는 실체라고 하는 게 사라져야
실체가 나타난다는 말
분장 뒤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그녀가 경기를 할 때 나는
오후 세 시의 스톡홀름 낮처럼 어두워져서
눈보라 치는 감라스탄 구시가 골목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눈앞의 투명 프롬프터를 읽듯 대사를 전달했죠
죽을 때까지 적을 수는 없거든요
쇼는 계속되고 촛불은 많아요
그녀가 내게 입김을 불어 꺼줍니다
매월당은 김시습을 연기하고
연극하세요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을
스웨덴 숲에서 내가 쇼를 할 때 (홍대 앞 파티 용품 가게에서 사서 가져간 삼천 원짜리 은색 가면을 이탈리아 가면으로 오인하여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 내 얼굴을 숨기자마자 스스로를 망각할 수 있었으므로, 일종의 정신병, 후략)
김연아는 김연아가 되고 싶죠
맨주먹은 주먹의 반대말
맨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시즌 스웨덴 거리 촛불 사이 드문드문
아니스캔디가 든 유리 항아리 옆에 잠시
쇼윈도를 바라보면서 나는 홑겹입니다
내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구청 창작교실이다. 위층은 에어로빅 교실, 뛰고 구르며 춤추는 사람들, 지붕 없는 방에서 눈보라를 맞는다 해도 거꾸로 든 가방을 바로 놓아도 역전은 없겠다. 나는 선생이 앉는 의자에 앉는다. 과제 검사를 하겠어요. 한 명씩 자신이 쓴 시 세 편을 들고 와 내 책상 맞은편에 앉는다. 수강생과 나는 머리를 맞댄다. 어깨를 감싸는 안개가 있고 나는 연달아 사슴을 쫓아가며 총을 쏘는 기분이다. 전쟁을 겪은 후 나는 총을 쏘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잖아요. 이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노인이 내민 시에 칼질을 한다. 깎고 깎여서 뼈대만 남은 조각상처럼 노인은 앉아 있다. 패잔병의 앙상한 뺨을 타고 곧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분노로 불신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아니다. 선생님, 방금 그 작품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시를 쓸 수가 없어 유명한 시인의 수상 작품을 필사해봤어요.
내 머리는 떨어진다. 책상 위에는 첨삭하느라 엉망이 된 유명 시인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마치 왜 그렇게 비싼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품 브랜드 가방 같다. 노인이 나를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쓴다.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이름을 가리면 걸작을 못 알아보는 내 식견으로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덤빈 걸까?
아우라보다 아오리 벚나무 아래 사과 놓고 노파 조시나 죽으셨나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락말락 덧없는 간극 덤불 부스러기 줄 하나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 갈 데가 없어 타는 버스 한내1길발111번 한 노선밖에 타도 그만이고 안 타도 그만 맨 뒷자리 창에 기대어 비스듬히 바라보는 오래된 취미 어쩐지 나는 무호흡의 깊은 잠을 내린 곳은 신의주 시내 수영복이 든 비닐 가방을 들고 누구를 기다리는 나 손 흔들며 오는 남자 희미한 얼굴 번져나가는 살결, 햇살이 혀끝으로 그를 핥고 아마 우리는 아주 평범한 연인 사이 수줍고 어색하게 풀장도 가고 포옹도 하는 눈을 뜨네 나는 아우라가 사라지네 운전기사 쪽으로 굴러가는 푸른 아오리 가망 없는 도망 깨어난 나는 데스데모나 팥쥐 애너벨 리 살아난 바리데기 현실은 꿈 없는 예외적 시간 사라진 방앗간에서 불어오는 고추 마르는 냄새 어둠의 선물 어둠은 노래를 선물한다 그림자는 뾰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뾰족하고 갸름한 형태로 지상에 한순간 퉁명스레 엎드린다 상냥한 바람일수록 촛불은 잘 사윈다 너의 그림자가 내 마음을 찌른다 사라질 수척함이여 어두운 강을 따라 걸어갈 때 누군가 지나간 유행가를 불렀다 그렇게 어두운 건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늦은 밤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 모두는 노래하고 싶어졌다 어두웠기 때문에 촛농이 심지를 덮은 후에도 시골 창녀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유등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데드볼
나빴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가 난 순간도 없습니다
커브를 그리거나 직구로 가거나
묵직하게 굴러갈 때도
누군가를 해칠 의도가 없었습니다
다친 후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 선수처럼
실밥 아래 상처가 있어도
부르면 두말없이 살아납니다
손가락 끝으로 쥘 때도
몸 깊숙이 누군가를 맞힐 때에도
나는 당신의 확장된 몸
깨달을 수 없는 나의 진심
나를 죽은 공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전력으로 날아갑니다 나는 바로 그 지점
당신의 온몸이 우주의 한 점으로 모여 마주치는 찰나
담장을 넘어
두꺼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갑니다
붉은 실밥 사이로 날개를 꺼냅니다
터지는 환호성과 탄식으로 뒤섞인 주말의 그라운드를 지나
전광판이 없는 시간 속으로
해변의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며 시간의 잔물결 너머로
날마다 설날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다소 이상한 사랑 자두가 열렸다 자두나무니까 자두와 자두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꼭지가 있다 가장 연약하게 처음부터 가는 금을 그어놓고 두 개의 세계는 분리를 기다린다 이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듯이 난 말이지 정신적인 사랑, 이런 말 안 믿어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 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시시각각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 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 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 자두나무는 자두를 열심히 사랑하여 익히고 떨어뜨리고 나는 사랑을 붉히고 보내야 한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망설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피의 10일간 그 섬에 가서 돼지를 잡자 우물가에서 돼지 잡아 넘쳐흐르는 내장까지 나눠먹자 했죠 천일염도 한 포대씩 받아오자 했죠 그 친구 죽고 나면 그 돼지 누가 잡아 따듯한 콩팥을 나눠줄까요 하늘 높이 올라가는 방광을 주세요 당신은 번역하고 칼럼 쓰느라 약속을 잊으셨지요 얘기해주세요 그날이 어땠는지 누가 어떻게 종지부를 찍었는지 춘원도 육당도 몰라요 당신이 말해줘요 직접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늙어 죽어갑니다 나는 요즘 애 영어가 급하죠 참는 건 아니에요 재떨이가 담뱃불을 도마가 칼을 참는다고 비약하지 마세요 이 날짜에 비상해지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필요 없는 물건도 훔치고 싶어요 팬티 내리고 생리대를 똑바로 놓지만 뛰어다니는 날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피의 일주일이 지나면 피임 날짜나 세는 요즘 애라서 당신은 고향에 내렸던 비상계엄령에 관해 우물과 시장에 관해 말하지 않나요 나는 보챕니다 불타는 파출소 옆에서 자궁을 꺼내 하늘 높이 차올리고 싶은 날이니까요
시집『히스테리아』(201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