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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동아시아 청나라 초기 국제정세
영웅본색 추천 0 조회 1,471 11.03.20 14:55 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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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20 15:58

    첫댓글 콕싱아는 국성야의 서양식 발음이 아니라 당시 중국어 발음에 가까웠을 겁니다.

  • 11.03.20 16:06

    콕싱아(Koxinga 혹은 Coxinga)는 요즘에는 별로 안쓰이는 19세기식 웨이드-자일스법 표기에 따른 서양식 발음이 맞아염.

    요즘에는 중국어의 서양표기는 병음법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안쓰지만, 저런 고유명사 같은 경우에는 서양에서 원래 저런 표기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걍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 11.03.20 16:31

    글쎄요. 표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대만에서 쓰이는 민남어의 발음에 굉장히 가깝다고 생각됩니다만. 중국 모든 곳에서 북경어를 쓰는 건 아니죠.

  • 11.03.20 16:00

    -_-a 조금 무리수인듯 싶은;;;;

    이론적으로는 대한민국 노동계급 전체가 단결하여 전국가적 레벨의 파업을 벌이면, 국가가 군대를 동원하여 민중 전체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군대가 아무런 이의 없이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 한은 원하는 변혁은 다 이룰 수 있지만... "단결"과 "연대", "연합"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우니까요..

  • 11.03.20 16:02

    동감입니다. 청나라 하나 잡자고 저 세력이 다 뭉칠 가능성은...

  • 11.03.20 18:28

    저 명나라 전함에 있는 사진은 정화의 기함아닌가요ㅡ? 만약 저 배가 정화의 기함이라면 모든 명나라 해군이 저걸로 무장할순 없죠 ;;

  • 11.03.20 20:56

    "이에야스 님이래 30년! 간신히 얻은 천하태평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정말 마음에 와닿는군요...ㅠ;; 비슷한 시기에 기껏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와 서인정권들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 11.03.21 08:43

    까놓고 보면 인조정권도 광해군정권의 [줄타기 외교]를 답습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외교분야에서는 광해군대의 담당자들이 유임되어 기존의 정책을 답습하는 형태를 보이죠...^^; 인조정권이 호란을 '자초'했다는 식의 논리는 이미 한물 간 상태입니다. 이 시기 동아시아사 권위자인 한명기 교수는 이 당시 조선의 상황을 "명, 청사이의 종속변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호란의 원인은 청의 '팽창정책'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흔히 인조정권이 [친명사대]로 나대는 바람에 청을 자극하여 호란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 11.03.21 08:55

    광해군의 이른바 '중립외교'라는 것은 [기회주의 외교]로써, 청(후금)이 조선에 싸움을 걸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한 정책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렇게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광해군 시기의 토목영건 등으로 피폐한 조선의 국력과, 명의 세력이 아직은 건재했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명나라에 은퍼주기 관행을 심화시킨 것은 정작 광해군 그 작자였습니다. 여기에 청태조 누르하치가 조선에 적대적인 감정이 덜한 "온건한 입장"에었다는 것이 맞아 떨어져 광해군식 외교가 굴러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해군 당시의 토목영건은 그냥 궁궐 몇개 지은 수준이 아닙니다. 궁궐영건에 들어간 몇달치 철의 양이 일년동안 대포를 주조할 수 있는

  • 11.04.14 00:38

    양이었고, 편법적인 증세로 인민을 줘어짜다 못해 얼른 걷어 올리라고 전국에 '조도사'를 파견하기까지 합니다. 이건 뭐 만력제의 '광세사' 뺨치는 짓거리죠...-_-; 광해군은 요동에 1만3천 조선군 보내놓고, 궁궐지을 돈 안올라 온다고 난리치던 놈입니다. 오히려 [반정]이 안일어나는 것이 이상할 정도죠. 정작 이런 무리한 토목사업에 제동이 걸리고 감세가 행해진 것은 '인조반정' 이후의 일입니다.

    인조정권은 광해군을 축출하면서 '친명사대'를 앞세웠지만, 오히려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앞에도 얘기했듯이 후금과의 외교는 기존노선(광해군식 기회주의 외교)을 답습하고요.

  • 11.03.21 09:09

    근데 대륙의 정세가 급변합니다. 즉 청이 조선을 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생겨난다는 것이죠.

    1. 만주의 대기근과 몽골인의 대거 투항으로 청은 급속한 인구증가와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 조선을 삥뜯을 필요성
    2. 몽골왕공들을 회유하기 위해 지급하던 중국산 고급품 수입의 길이 명과의 전쟁으로 막혔다(모문룡까지 뒈짐). -> 조선을 통하여 우회조달할 필요성
    3. 조선에 유화적이었던 누르하치가 죽고 '강경파'인 홍타이지가 즉위했다. -> 조선을 손봐줄 필요성
    4. 명의 제1우호국이자 명나라 책봉체제의 주요일원인 조선을 떼어놓아 명 중심의 '천하질서'를 흔들 필요가 있었다. -> 결국 조선을 친다!

  • 11.03.21 09:10

    5. 관외를 장악한 상황에서 배후의 조선을 아예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 조선을 뭉갤 필요성

    여기다 청이 조선을 자극하기 위해 '칭제'까지 하는 상황이니,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처음에 발끈하던 인조정권도 나중에는 전쟁이 두려웠는지- 청과 화해하려고 박로가 이끄는 사신단이 북으로 올라가는 와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헐~ 말하자면, 인조 때에 일어난 호란은 어떻게 보면 [광해군식 기회주의 외교의 말로]인 셈입니다.

    물론 인조정권이 병신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광해군 정권이 정상적이거나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에요...^^;

  • 11.03.21 12:14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급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서인들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요시했고, 이들은 광해군의 중립적인 대외정책을 기존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명나라에 대한 전통적 의리를 지키려 했다.(위키백과) 저는 위와 같이 알고 있었는데, 학계에서도 인조정권이 광개군정권의 외교정책을 답습한다고 인정하는 분위긴가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 달라서...ㄷㄷ;;

  • 11.03.21 20:36

    아스토레아// 위키는 사실 뭔 학술적으로 완벽한 뭔가가 아닙니다. 게다가 기존에 알려진 것이 이미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뿐이지- 학계의 그것과는 다른 경우가 다반사죠...^^;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한명기 교수의 저서를 추천드립니다.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가 상당히 괜찮습니다.
    사실 인조정권의 '친명배금'은 [국내용]의 성격이 강합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후금(청)이 명나라 변경을 바르고 있는 상황에서 강적의 뒷통수를 박박 긁는 나라는 없죠. 인조정권은 후금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것은 물론, '춘신사, 추신사'라는 정기적인 사절파견도 했습니다. 근데 후금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 11.03.21 20:49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예컨대 후금의 요구로 '개시무역'을 시작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죠. 상황이 이러니 요령껏 교역품목이나 교역품의 질을 줄이거나 조절하는데, 여기에 후금이 길길이 날뜁니다. 조선도 엄연한 하나의 나라이고, '국익'을 위해 움직이는지라, "요령껏..." 상황에 대처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후금과의 사이가 틀어지죠 점점...
    근데 홍타이지가 나중에 여기에 쐐기를 박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황제국이다. 우리를 택하던지 명을 택하던지 해라!"...-_-; 이렇게 '줄타기 외교'의 줄이 끊어집니다. 조선은 결국 명을 택했지만, 여전히 청과의 관계를 조율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11.03.21 21:03

    사실 이때쯤 되면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의 의도를 굳힌 상태였습니다. 칭제를 조선에 통보한 것 자체가 조선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어요. 어차피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계산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인조정권은 청의 칭제에 분노하여 전국에 '척화선전교서(국내용 선전포고)'를 공포했고, 이게 청에도 알려진 상황이었지만- 청과의 화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전쟁은 피해야죠 어떻게든... 결국은 박로를 정사로 하는 사절을 심양으로 파견합니다만, 이들이 올라가는 와중에 청의 침공이 시작됩니다...-_-; 심지어 청의 침입 와중에도 정묘란처럼 화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론의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얻을 지경...

  • 11.03.21 21:03

    인조정권의 대후금(청) 외교나 양차 호란기의 대처를 보면, 뭔 "앞뒤 없는 친명배금"과는 거리가 꽤나 멉니다. 후금을 되도록이면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대명외교를 염두에 두고 후금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요즘 학계에서는 예전처럼 인조정권의 '자극'을 양차 호란의 원인으로 들고 오는 식의 서술이 점점 망하는 추셉니다. 시야가 [국제관계]로 이미 넓어진 상황이에요...^^;
    인조정권의 외교가 반정을 계기로 급변했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서인정권이 '명분'에 집착했다는 것도 사실은 오햅니다. [대동법]의 시행과정을 보면, 서인정권도 나름 개념찬 정치세력이죠.

  • 11.03.21 21:04

    광해군대의 북인정권이나 현종-숙종대의 남인정권도 까고 보면 뭔 개방적이고, 이상적이며, 개념찬 정치세력으로 보기에는 참 껄끄러운 점이 많습니다...-_-; 조선의 쇠퇴는 사실 영정조기의 서인주축의 '재야산림'의 무력화와- 반대급부로 부상하는 경화사족의 대두 및 경화사족의 벌열화 -> 세도정치로 흘러가면서 심화된 것입니다. 근데 이걸 '서인정권'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서인탓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꽤나 뿌리깊게 남아있는 상황이에요. 악평을 받는 송시열 같은 '유교탈레반'들도 사실은 대동법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이들이 기득권과 유교탈레반의 상징으로 대동법까였다고 보았지요.

  • 11.03.21 22:42

    그렇군요....검색 좀 해보니 이러한 내용이 대충 토탈워 카페 뿐 아니라 유로파 카페에서도 전에 다뤘던 내용이군요.. 개인적으론 광해군을 되게 좋아했는데...기회되면 한명기 이분의 책 좀 읽어봐야 겠네요...

  • 11.03.21 23:27

    처음 알았네요. 저도 나름 광해군빠였는데 흠.................

  • 11.03.20 23:29

    왠 러시아 설명에 1차대전 러이사군이.......

    http://blogfiles.naver.net/20101224_223/jaechan7_1293200059671OeiOM_JPEG/%C1%A6%B8%F1_%BE%F8%C0%BDi8.JPG

    얍 17세기 말기의 러시아군

    http://blogfiles.naver.net/20101224_78/jaechan7_1293199967335b0qfw_JPEG/%C1%A6%B8%F1_%BE%F8%C0%BDi6.JPG

    코삭

    http://blogfiles.naver.net/20110118_243/jaechan7_1295320773315jPk2J_JPEG/%C1%A6%B8%F1_%BE%F8%C0%BDLC3.JPG

    만주 기병

    http://blogfiles.naver.net/20110118_150/jaechan7_1295320773899X09kv_JPEG/%C1%A6%B8%F1_%BE%F8%C0%BDLC6.JPG

    티벳

  • 11.03.21 02:20

  • 11.03.21 11:00

    무리수(...)

  • 11.03.21 11:41

    글제목 자체의 무리수는 있습니다만 영웅본색님의 글은 그 당시의 국제 사회의 격변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청에서 명나라로 변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조선에겐 비극이었지만) 러시아가 등장하고, 다른 시대 못지않게 혼란이 지속되는..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이었다는 점은 잘 알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제목을 바꾸시면 어떨까요

  • 11.03.21 23:29

    일단 흥미롭네요 ㅋㅋ

  • 11.03.22 18:16

    뭐 조선, 일본, 정성공, 준가르 할 것도 없이 그냥 오삼계가 좀 더 대담하였다면 삼번의 난 때 청나라가 이미 끝났을 가능성이 높지요. 강희제와 그 대신들은 오삼계가 경정충의 철번과 같이 순순히 철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삼계의 반란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삼계는 반란을 일으킨지 3개월만에 호남을 석권하고 호북까지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그와 동시에 청 초기 명장인 왕보인을 포섭하는데 성공, 섬서지방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 11.03.22 18:21

    이 때 아직 청나라가 병력을 정비하지 못하여서 호북을 통해 북경으로 진격하면 청나라를 함락시킬 수 잇었던 상황이었지만, 오삼계의 전략적 목표가 반청복명, 즉 청의 타도가 아닌 자신의 권력을 인정받고 남부지역을 할양받고자 하는 것이어서 그는 젊은 강희제가 자신의 군사력에 놀라서 교섭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게 군대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결국 패하게 됩니다. 정씨 정권도 정경 때에 삼번의 난에 개입해서 겨우 복건지방에 진격하였지만 상지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결국 삼번과 연합하지 못하고 삼번의 난 이후 청나라에게 밀려 버리게 됩니다.

  • 11.03.22 18:21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지만, 오삼계가 좀 더 적극적인 전략적 목표를 세웠다면 아마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11.03.22 19:10

    또한, 조선, 일본, 준가르는 삼번의 난 당시에 오삼계가 연합을 하려고 시도해도 할 수 없는 내부사정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당시 현종 떄로 임진왜란과 양 호란 떄 입은 전란의 상처, 효종의 무리한 국방강화책으로 인한 내부의 피폐를 열심히 복구하고 있던 때입니다. 일본은 4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쯔나 시대로 태평성대의 시기였기는 했으나, 일본 자체 시스템 상, 원정을 나갈 수 없던 상태였지요. 에도막부 때 일본은 '휴전' 상태였습니다. 그냥 쇼군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다이묘들이 머리를 숙인 것으로 만약 위의 2개가 없어지게 되면 언제든지 전쟁에 돌입하는 그런 상태였지요(메이지유신 떄 일본이 그렇습니다).

  • 11.03.22 19:08

    만약 이에츠나가 정복욕에 불타서 도쿠가와 직속부대를 중국에 파견해 버린다면, 다이묘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려 권력이 무너져버리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는 밖으로 진출할 수 없는 정부가 되어 버립니다. 준가르는 1665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에 빠져들어서 삼번의 난 때는 도저히 청과 붙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유능한 지도자인 갈단이 비록 권력을 잡기는 했지만 내부수습을 하고 1670년대에는 카슈마르, 하미, 투르판을 정벌하면서 세력확장에 착수합니다. 즉, 삼번의 난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도저히 청과 붙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 11.03.22 19:09

    즉, 애초에 조선, 일본, 준가르는 내부사정 떄문에 도저히 오삼계와 손을 잡고 청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지요. 위의 가정들은 재미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 11.03.22 20:01

    본문보다 유문기님과 삼한갑부님의 리플이 더 영양가 있는 것 같네요. 살이 됩니다.

  • 11.03.26 14:22

    (2)

  • 11.04.04 01:28

    만렙 강희제.ㅠㅠㅠㅠㅠ

  • 11.05.15 14:08

    그런데 이때 청나라 황제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강희제 아님감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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