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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DNA
갈라디아서 6:7-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어느새 7월, 또 하나의 절반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껴 둔 두 개 중 하나이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뚜벅뚜벅 걸어간다. 누구도 시간의 옷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교회가 정한 전통적인 두 번의 감사 절기 중 하나이다. 맥추감사와 추수감사는 평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습관을 들이려는 경건한 의도일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은 365일 날마다 감사절이길 소망한다.
감사는 전염병과 같다. 생각해 보라. 내가 먼저 고마움을 표시하면 상대방도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작은 정성이라도 선물하면, 같은 마음이 돌아온다. 감사는 외롭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확대되고, 확산되는 것을 보면 감사의 ‘밴드왜건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감사하면 감사한 일만 생기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만 생긴다’라는 말은 지당하다. 행여 내 이유 없는 불평의 습관이 내 운명이 되지 않도록 평소 감사하는 말과 습관으로 나를 길들여라. 이것이 사람 사는 원리이다. 감사는 내 앞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판단이나 경험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때마다 그런 부요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1)
오늘 갈라디아 본문은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교리적 설명을 하다가 잠시 곁길로 나간다. 믿음의 원리도 사람살이의 세상 이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어느 나라에든 비슷한 속담이 있다. 지극히 보편적인 사상이다. 불교 용어로는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고도 한다.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파종과 수확의 법칙은 자연질서에서 어김이 없는 이치이다. 허긴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유월 장마에 돌도 큰다’는 말도 통한다. 사람은 자연원리와 더불어 생각의 부피를 키운다. 그래서 공감의 범위가 비슷한 법이다.
지혜의 보고인 시편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그 배경은 바벨론 포로 귀환이다. 삶에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심은 대로 거둔다’는 같은 원리가 통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보면 종 세 사람 중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심고 거두는 간단한 법칙을 무시하였다. 결국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 혹은 ‘무익한 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에게 나 보란듯, 남 보란듯 결과를 허락하신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연이치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예수님의 비유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누구나 공감하기 때문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농부가 씨 뿌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밭을 오르내리며 씨를 흩뿌리는 방법인데, 씨앗이 바람에 날려 여러 곳에 떨어진다. 어떤 것은 밭 밖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씨앗이 담긴 자루를 노새 등에 얹고 자루 한 귀퉁이를 조금 찢거나 구멍을 낸 다음 노새가 밭을 오르내리도록 하면서 저절로 씨를 뿌리는 방법이다. 아주 게으른 농부의 방식이다.
농부가 뿌리 씨앗은 어디에 떨어졌는가에 따라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등 네 가지 상황을 맞는다. 이 네 가지 상황도 결과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열매를 맺는가 맺지 못하는가로 구분한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란 하나의 그룹은 열매를 얻지 못한 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여러 경우는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의 비유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낭비와 실패한 ‘길가, 돌밭, 가시덤불’의 경우와 열매를 맺는데 성공한 ‘30배, 60배, 100배’(마 13:8)의 경우, 즉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한 것이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농부들에게 결실의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미리 실패를 가정하고 씨앗을 뿌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열매를 맺는 일은 단지 운수나 행운이 아니니, 기회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원리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멀쩡한 콩과 팥이 나를 배신하는 경우도 있다. 번번이 겪는 현실은 내 선택이나 내 의지와 다른 경우도 많다.
유감스럽게도 뿌린 씨앗마다 다 열매를 거두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실패가 두려워 씨앗 뿌리기를 포기하는 농부는 없다. 크든 작든 모든 결실의 시작은 파종이요, 모든 열매는 씨앗으로부터 자라나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2)
누구나 생명 있는 사람은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청소년들은 나중에 자신이 씨앗과 같은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어른들은 서로 “아무개 씨”라고 부른다. 명심해야 한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씨앗이다. 그 씨앗을 그냥 묵혀두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바울은 내가 어떤 목적에 따라 씨앗을 뿌렸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따라온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뿌리 씨앗은 당장은 그 실체가 보이지 않으나, 부메랑처럼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말하기를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고, 사람은 그가 한 일을 보아 안다”고 하였다.
이미 내 인생의 밭에 씨앗이 뿌려졌다. 사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씨앗의 성분과 속성이 있다. 장차 어떤 열매를 맺을지 나도 모른다. 그러니 내 인생의 밭에 뿌려진 씨앗을 살펴보고, 기대하라. 아직 발아도 하지 않은 채 묵혀두고 있지 않은지, 내 삶의 자리를 살펴보라. 심지어 씨앗은 수천 년 동안 보관하기도 한다.
그런 잠재력, 가능성을 키워라. 어떻게 할 것인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다. 씨앗은 가장 소중한 삶의 알맹이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당장 결실을 구하지 못하지만, 다만 씨앗을 뿌릴 수 있다. 하루아침에 크는 열매는 없더라도, 하루하루 희망이 자라나는 것을 누릴 수 있다.
누구나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감사를 고백하고, 느끼고, 달콤하게 여기며 사는 인생은 얼마나 다행한 존재인가? 감사의 씨앗을 뿌려라. 그것을 ‘희망의 DNA’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막 4:31)든, ‘한 알의 밀’(요 12:24)이든 믿음으로 심는 모든 씨앗에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담겨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DNA’이다.
다음 주간 3일 동안 사강지방 성회에 초대를 받았다. 사강지방은 화성시 송산면과 서신면의 포도로 유명한 지역이다. 어느 지방에서 나 같은 위험인물을 강사로 부를까? 게다가 부흥회 경력은 커녕, 그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나는 겁이 더럭 났다. 결국 성회의 내용을 개혁하자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나는 3일 내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평소 내 십자가 사랑에도 씨앗이 있었다. 그 씨앗은 바로 우리 부모님이 뿌리신 것이다.
3년 전에 어머니가 소천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문서 하나를 찾아냈다. 평소 일기를 쓰던 어머니는 놀랍게도 자신의 반평생을 요약한 자전글을 남기셨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어머니가 교회에 출입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남다른 열심을 내던 중에, 덕포리 속회가 나뉘면서 처음으로 속장을 맡으신 모양이다.
“한번은 성탄절이 됏는데 우리 속회에서 떡을 한시루 쩟다 위에다 까망콩을 십자로 놓고 해갔다 교회서도 덕포 2속이 떡해 왔다고 목사님 장로님들 모든 성도들이 칭찬을 하셨다”
성탄절에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담아 속회에서 백설기를 한 시루 준비한 모양이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시루에다 떡을 쪘다. 쌀가루를 차례차례 얹고 맨 위에 까망콩으로 가로세로 십자 모양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먹는 떡이니 십자가를 올려야 하는 줄 알았다고 하신다. 나는 어쩌다 밥을 풀 때면 먼저 십자가를 긋는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십자가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에는 우리 어머니의 교회 사랑, 십자가 사랑, 예수 사랑의 DNA 때문이구나 싶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의 DNA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의 DNA가 있는 집안은 행복하고, 매사에 잘 될 것이다.
3)
7월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무엇 즐거운 이벤트가 없을까 궁리하였다. 그런데 마침 커다란 이벤트가 우리를 찾아왔다. 요즘 러시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몹시 불편했는데, 기쁨의 소식도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설과 결이가 부모님과 함께 찾아와서 색동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니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혹시 이 가정과 만남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그 씨앗이 궁금하지 않은가? 무슨 씨앗으로 인한 열매인가?
2001년 여름에 러시아 쌍뜨뻬쩨르부르그 한글학교를 방문하였다. 2년 전에 방문했던 일로 독일에 있는 한인들이 그곳 한민족한글학교를 후원하였다. 두 번째 방문한 이유는 당시 교장 선생인 리나탈리아 집사님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람의 풍물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우리 역량상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 교회가 중심이 되어 복흠지역 민중문화모임이 후원하고, 교인들이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땅에서 최초로 아리랑문화교실의 문을 연 것이다. 풍물도구 구입, 전문강사 초청, 교육진행 비용, 나중에는 풍물팀 의상까지 모두 부담하였다.
그런데 풍물 강습이 얼마나 시끄러운가? 시작하자마자 강습장인 학교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지역 교육청으로 항의 전화를 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교육부 관리가 다녀가고, 호의를 베푼 러시아 151학교 교장조차 난감해 하였다. 한글학교 책임자인 리나탈리아 선생님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사정을 하였다. 다른 장소로라도 옮겨보려고 진땀을 흘렸다. 먼저 교사들과 부산하게 논의하였다. 발트 해변으로 나가자, 시골농장 따차를 빌리자. 그러나 좋은 대안이 아니었다.
이제 포기할 생각을 하고 모든 학생들을 모아놓고 형편이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겨우 2, 3학년에 불과한 러시아 아이들이 해결안을 냈다. 그것은 예상 밖의 생각이었다. “엄마를 데려오자!”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뛰어갔고, 엄마의 손을 붙잡고 돌아왔다. 엄마들은 동네 주민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이튿날에는 교육부를 설득하려고 방문하였다. 학생들은 그날 저녁부터 양해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나서 감쪽같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엄마를 데려오자!” 이것이 대안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애들의 생각에는 엄마가 나서면 다 된다고 믿었다. 그만큼 어머니라는 백은 든든하다. 마치 예수님의 어머니가 나선 것 같았다. 예수님과 장단을 맞추니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해 시작한 풍물팀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오래지 않아 세계 타악기 대회에서 준우승하였다. 그 활약상이 한국 SBS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타리로 소개된 적도 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일에 함께 했다는 기쁨이 있다. 리나탈리아 선생님의 겨레 사랑과 한글 사랑은 대를 이어 딸에게도 이어졌다. 그 열매 중 하나가 결이와 설이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되 낙심치 말고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씨뿌리는 우리는 한낱 자기만 먹을 낱알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역사의 땅에 씨를 뿌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
오늘 내가 맺은 열매는 과거 뿌린 무슨 씨앗이 원인일 것이다. 그것은 ‘감사의 DNA’임에 틀림없다. 내가 이룬 모든 좋은 결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면, 그것이 또한 아름다운 씨앗이 된다.
우리가 평소 하는 말 또한 씨앗을 심는 일이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그러니 축복하라. 그 축복의 말은 부메랑과 같아서 그 사람에게 가지 않으면 내게 돌아오는 법이다. 그러니 늘 감사의 마음, ‘감사의 DNA’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복을 주시길 빈다. 그리하여 날마다 감사의 씨앗을 뿌리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감사로 부요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