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환 梁槿煥 (1894 ~ 1950)】 "단도로 민원식을 처단하는 의거를 수행"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은천면(銀川面) 연남리(蓮南里)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명은 양삼성(梁三成)·양태환(梁泰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8세인 1911년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고, 이후 황해도양잠전습소에서 수학한 후에 조선보병대에서 복무하였다.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는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 그리고 인력거를 끌며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참정권운동을 표방하여 중의원(衆議院) 의원 선거법 시행 청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도쿄에 온 국민협회(國民協會) 회장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부참의 민원식(閔元植)의 처단을 결의하였다.
1921년 2월 10일 신문기사를 보고 민원식의 도쿄 방문을 알게 되었다. “참정권을 획득하려는 운동은 조선독립운동을 크게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민원식의 행동을 이천만 동포의 치욕으로 여겼다. 그의 몽매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민원식을 직접 만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2월 14일 그가 머무는 호텔이 도쿄스테이션 호텔임을 알아내고 두어 차례 방문하였으나 만나지를 못하였다. 2월 16일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국민협회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날 오전 10시 전화로 니혼대학에 유학중인 이기영(李基寧)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후, 유학생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환영행사를 열고 싶다는 명목으로 면담을 요청하였다. 면담이 성사되어 그날 오전 도쿄철도호텔에서 민원식을 만났다. 동우회의 취지와 성격을 적은 메모를 보여주며 논쟁을 하다 참정권운동 및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대한 격론으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민원식을 상대로 참정권운동의 허구성과 친일 매국행위를 질책하며 그를 만나기 전 구입한 단도로 민원식을 처단하는 의거를 수행하였다.
그해 2월 24일 상하이(上海)로 탈출하고자 나가사키항(長崎港)에서 상하이행 일본여객선에 승선하려다 일본 수상경찰에 잡혀서 도쿄로 호송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22년 5월 4일 도쿄공소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과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하였고 활달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도쿄감옥 등지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3년 2월 11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