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7주일설교 고린도전서15:12-28(부활이 없다면)
본문: 고린도전서15:12-28
제목: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오늘은 고린도전서15:12-28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희망이 이 땅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19절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제일 불쌍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불쌍한 존재입니까?
왜 이런 말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주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자
복음의 핵심이라고 확증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 믿고 있습니까?
그 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부활임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미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으면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보다 먼저 죽은 믿음의 선조들
먼저 가신 조부모, 부모님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믿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세만 있지 죽은 후에는 모른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렇게 믿는자들은
세상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자들
교회 안에 있다는 자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1.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주장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살아나 계신다고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 곧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자가 자신이 죽은 후
부활이 없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교회에 속한 신자들입니다.
세상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신자가 그렇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신자가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발생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불 꺼진 등대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고
그런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됩니다.
2.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발생한 적이 없는 헛소문이라면
교회든 신앙이든 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사도들의 선포가
쓸데 없어지고, 그 부활을 믿은 성도들의 믿음 역시
소용 없어지고 맙니다(14절).
그것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설교와 선포와 믿음이 쓸데없어 진다면
이처럼 슬픔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부활의 증인들을
하나님에 관한 거짓 증언으로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마당에
그들 모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선포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15절).
이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교회의 신학적, 제도적 토대를 허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합니다.(16절)
그리스도가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성도들의 믿음은 쓸데없는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로 가져다 준
죄에서 해방 역시 한낱 환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죄사함 받지 못하니
성도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7절).
성도들이 경험한 회심과 새로운 삶 자체가
생겨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 곧 죽은 신자들은
괜한 희망을 가지고 죽은 망한 존재들입니다.
부활이 없으니 죽음과 함께
그들의 존재는 끝나 버린 것입니다.(19절)
부활이 없음에 대한 파장은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기둥이 무너지면
현재의 기둥도 무너집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부활의 소망에 기대어
지금의 고난을 인내합니다.
그 소망이 부질없는 꿈에 불과하다면
그 때문에 고생을 자초한 성도들의 삶이란
가상하지만 부질없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페테 한트게라는 사람은
소망 없는 불행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소망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이 소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엉터리 소망에 기댔다면
참으로 그건 비극적입니다.
잘못된 부활 교리가 퍼뜨리는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해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부활 신앙은
참으로 비극적이며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20-28)
현재가 전부라면 모든 것은 덧없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온 것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대단하다는 사람 다 죽지 않습니까?
대단하다는 것 다 무너지지 않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이 절망의 시나리오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실을 무시한
만들어진 허구의 산물이다라는 말합니다.
요즘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여러 말들을 합니다.
한강 작가는 우리의 역사인 4.3 사건를 배경으로
‘작별하지 않는다’ 와 5,18 광주 사태를 배경으로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을 가지고 말들이 많습니다.
꾸며낸 이야기다라고 합니다.
없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썼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드라마도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데 동감합니까?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강 작가가 왜 그런 소설을 썼습니까?
그리고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고
노벨 상을 주었습니까?
저는 소년이 온다를 오디오 북으로 들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이야기입니다.
저는 20대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단지 소설이고 허구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먼 역사도 아닙니다.
그것을 경험한 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때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믿기 어려운 부활은
얼마나 부정하려는 자가 많고 믿기 어려웠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전무후무한 역사의 예외가 아니라,
모든 죽은 신자의 첫 열매입니다.
곧 죽은 신자들은 망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부활의 첫 열매 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20절)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신자의
미래 부활을 위한 첫 열매가 되시었습니까?
21-28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선 바울은 로마서5:12-21과 유사한
아담-그리스도의 유형론을 활용합니다.
아담의 대표하는 역할과
그리스도의 대표하시는 역할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미래 신자들의 부활 사이를 연결합니다.
죽음이 사람을 통해 오듯이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아담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사실에서
미래에 관한 원리를 발견하는 논증입니다.
현재 실재인 죽음은 아담 곧 사람을 통해 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사람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곧 모든 사람은 아담을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사람을 통해 온다면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사람을 통해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이미 부활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이 놀라운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에덴의 아담이 죽음의 열쇠이듯,
빈 무덤의 그리스도는 미래 부활의 열쇠입니다.
그분은 모든 이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라는 생각은
자칫 부활에 대한 성급한 기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살아나셨다며
그리고 그분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라면
왜 우리는 지금 그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우리는
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성도들이 죽음으로 끝난 것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봄에만 네 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것도 보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부활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런 죽음의 지배 앞에서
부활은 없다는 체념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성급한 체념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부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사실인즉슨 모든 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듯이 부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급할지 몰라도
구원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이 단계들은 모두 각자 자기 순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우선 바울은 두 단계를 소개합니다.
제일 먼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체 부활이라는
상상에만 존재하는 실체의 부분의 성취하는 뜻이 아니라
차례대로 이루어질 부활의 제일 첫 사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차례대로 이루어질 부활의 제일 첫 사례입니다.
그 다음은 누구일까요?
그분의 재림 때 그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 와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은 신자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모든 인류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의 부활입니다.
아담을 통한 모든 사람의 죽음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사람의
부활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 것 자체가
신자들의 부활을 논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마지막이 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신자들이 죽음에서 부활하면,
그러면 마지막입니다.
이 때는 그리스도가 악의 원인이 되는
모든 우주적 통치자들,
곧 지배자들과 권력들과 능력들을 정복하신 후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때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를 발아래 밟으신 후
왕권을 아버지께 드리실 것인데
그때까지 그분이 직접 왕으로 통치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정복하고 멸망시키실
마지막 원수는 죽음입니다.(26절)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부활케 하심은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정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죽음이 더는
그분을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에 대한 죽음의 통치 역시
끝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곧 죽음에 대한 승리는
모든 과정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이 최종 승리와 더불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모든 것을 자기 발밑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시8:6)
시편의 원래 문맥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통치 아래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시8:6-8)
그런데 바울은 이 시편의 인간을 원형적 인간,
곧 메시야-그리스도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구절을 그리스도가 모든 원수를
정복하실 때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정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아들에게 정복되면
아들도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통일될 것입니다.(28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가 모든 것, 곧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정복하시리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미래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 신앙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불행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것이 불행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까?
주일마다 이렇게 나와서서 예배 드리고
또 많은 시간을 드려서 봉사하며
많은 물질을 드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세상에서 별의 별소리 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살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모든 것을 다 정복하시고
우리의 부활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복음14:1-3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에게 부활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
불행이 아닌 행복한 여러분의 신앙이 되고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