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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0월03일(목요일, 개천절) 충남 아산시 현충사 탐방일정
탐방지 : 충남 아산시 현충사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 李忠武公 遺墟)
현충사(顯忠祠)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무신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의 영정(影幀)을 갖춘 사당이다. 별칭으로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 李忠武公 遺虛)'라고도 한다. 1967년 3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67년 3월 18일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48
크기 : 유물전시관 총 150평, 본전 총 62평
1967년 3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세웠으며 이듬해 사액(賜額) ‘顯忠祠’를 받았다. 1865년(고종 2)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일시 철폐되었고, 국권피탈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20여년 간 향불이 끊겼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모셨고, 62년에는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였는데, 67년에 준공하여 경내에 본전(本殿) ·고택(古宅) ·정문(旌門) ·유물전시관 ·활터 등이 마련되었다. 69년에는 현충사 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관리와 제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① 유물전시관:총 150평. 화강암 건물로 유물 ·유적의 사진, 거북선 모형, 《난중일기(亂中日記)》 서간첩(書簡帖) 및 《임진장초(壬辰狀草)》, 장검(長劍), 무과급제 교지, 사부유서(賜符諭書), 증시교지(贈諡敎旨), 옥로(玉鷺), 도배(桃盃), 요대(腰帶) 등과 각종 무기가 보존되어 있다.
② 충무문(忠武門):현충사의 정문.
③ 홍살문:현충사 입구에 세운 문으로서 홍문이라고도 한다.
④ 충의문: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현충사 본전으로 인도하는 문.
⑤ 본전:총 62평.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한국식 청기와 철근 콘크리트 건물.
⑥ 고택:이순신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보낸 집. 앞에 충무정(忠武井)이 있다.
⑦ 연지(蓮池):현충사 경내에 새로 만들어 놓은 연못이다.]
탐방코스: [현충사 정류장~현충사~현충사 정류장]
탐방일 : 2024년10월03일(목요일, 개천절)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1분 소요)
07:00~09:40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신도림역으로 간 후 1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온양온천역으로 이동해서 온양온천역 1번 출구로 나옴 [2시간40분 소요]
09:40~09:44 온양온천역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4분, 190m 이동]
09:44~10:00 온양온천역 정류장에서 현충사 정류장으로 가는 970, 971 버스 승차 대기
10:00~10:25 970, 971 버스를 타고 온양온천역 정류장에서 현충사 정류장으로 이동 [25분, 18개 정류장 이동]
10:25~10:31 현충사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 번지에 있는 현충사로 이동 [6분, 419m 이동]
10:31~12:30 현충사(顯忠祠)를 관람
[현충사(顯忠祠)
목차
1. 개요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강점기의 수난
2.3. 8.15 광복 이후
3. 관리
4. 박정희 현판 논란
5. 시설
5.1. 충무문(忠武門)
5.2. 충의문(忠義門)
5.3. 홍살문
5.4. 본전(本殿)
5.5. 구(舊) 본전
5.6. 고택(古宅)
5.7. 활터
5.8. 충무정(忠武井)
5.9. 정려
5.10. 이면 묘소
5.11. 舊 유물 전시관
5.1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6. 외부 링크
7. 대한민국 사적 제155호
1. 개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1967년 사적 제155호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로 지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충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해당 시설의 한글 명칭 끝 글자가 '~사'로 끝나서 이곳을 불교 사찰로 오해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현충사의 끝 글자 '사'는 사찰을 뜻하는 寺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祠다.
본래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던 곳이었으나, 1995년 옛 온양시와 아산군이 지금의 아산시로 통합되면서 현재 행정 소재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다.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다. 이순신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여수시의 충민사(忠愍祠), 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도의 충무사(忠武祠) 등이 그 예이다. 현충사는 그 중 대표격인 형태다.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1598년(선조 34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1706년(숙종 32년)에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의 숭고한 호국충절의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년)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충(顯忠)' 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성역(聖域)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은 숙종이 친필 사액으로 직접 내린 것이다.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강점기의 수난
1865년(고종 2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왕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 명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현충사도 철폐되어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유생들이 충무공의 충성심에 대한 모독과 패륜 행위를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대원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강화함에 따라 현충사는 이를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한때 사라지기도 했었다.
일제 치하에 충무공 종손(13대 종손 이종옥)이 가난해서 고택과 묘소가 포함된 임야, 현충사 부지가 경매에 넘어갔는데, 1931년 5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뜻 있는 인사들이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이후 봉안식을 하고 현충사 사적비를 건립한다.
2.3. 8.15 광복 이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 이순신 장군의 성역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1962년에는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다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유물 전시관' 이 개장되었고, 19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敬域)'을 확장하여 1967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본전(本殿)과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봤던 시절 지냈었던 가옥과 활터가 개장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주변에 살던 일부 주민들은 이주해 현충사 옆에 이주단지를 구성했다.
다만, 이 때 건축 양식과 현충사 내 내부 구조 등이 일본식으로 구성되어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원래 숙종 때 지어진 본전이 중심에서 밀려나, 측면에 화장실과 같이 있는 것처럼 조성된 것도 이 때 현충사 경내의 설계를 일본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엔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하여 현충사 안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개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관리
현재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가 관리 및 운영을 하고 있으며 전 국민 무료 입장이다. 2014년까지는 매주 화요일에 휴관했지만, 2015년 1월 1일부터는 매주 월요일에 휴관한다.
4. 박정희 현판 논란
현충사는 정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정희시절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난 것이 반영되어 종부 최순선은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난중일기의 전시를 중단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 사무소 관계자는 "역사가 더 깊은 왕실 현판으로 교체하는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 현판의 규격이 현재 현판보다 작아 교체할 경우 잘 안 보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2018년까지도 50년 이상을 박정희가 쓴 현충사 현판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쭉 걸어오고 있었다는 소리다. 현충사가 성역화된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와 같은 현충사를 조성한 인물은 박정희다. 박정희 정부가 이순신과 현충사를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했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다니기도 했다.
또한 난중일기는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고 원본은 수장고에 있을뿐 아니라, 종부에게는 유물을 개인적으로 옮길 권리가 없다. 법원이 유물을 팔아먹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충무공파 종중이 제기한 유물 이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누가 쓴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와 "친일행각을 저지른 박정희가 쓴 현판을 현충사에 걸어놓을 수는 없다"라로 나뉘었다.
이와 별개로 충무공파 종중에서는 '박정희 현판 철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 그러나, 숙종의 현판은 본전의 박정희 현판 교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현충사 '구 본관'에 원래부터 걸려 있었다. 즉, 박정희 현판이 숙종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걸려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국가 관리하에 두지 않은 후폭풍이 전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온전히 관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2018년 2월 21일에 당시 문화재청(現 국가유산청)은 신 본전(1967년 건축)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숙종 친필 현판은 1932년 중건된 舊 본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만큼 박정희의 현판이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거꾸로 신 현충사가 박정희 정부의 작품인 만큼 오히려 현판 철거가 역사성과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현판을 함부로 떼는 과정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한 번 났다간 건물에 손상이 가 버린다.
박정희를 둘러싼 논란(구체적으로는 일제 시대 당시의 행적, 충무공 현양의 정치적 이용)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현충사를 다시 성역화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현판이 논란 끝에 존속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점을 참작한 결과로 풀이된다.
5. 시설
현존하는 현충사 건물은 일제강점기 ~ 광복 이후에 지어졌다. 다시 말해서 중건, 복원 형태이므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원형에 비해 유적으로서의 가치는 낮은 편이다.
5.1. 충무문(忠武門)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옥 모습의 문으로,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지시에 따라 세워진 관문이다.
5.2. 충의문(忠義門)
현충사 본전의 정문으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세워졌다가, 1967년 본전이 확장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개축하여 지어진 관문이다.
5.3. 홍살문
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문.
5.4. 본전(本殿)
1967년 현충사 성역화에 따라 확장이전하여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로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과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영기(令旗)가 보존되어 있다.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1973년 우리나라 1호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장우성 화백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은 인물로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다수 출품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됐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에도 이름을 올렸다.
표준영정 지정과 지정 해제를 심의하는 기구인 문화체육관광부 영정동상심의위원회도 복식 고증에 명확한 오류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2010년엔 친일 작가 논란, 2017년에는 복식 고증 오류까지 포함해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해제 신청이 있었지만, 문체부는 100원 동전과 교과서 전면 교체 등 막대한 비용과 사회적 혼란 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2020년 6월 다시 한번 지정 해제 신청이 있었지만,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 요구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사항이기도 하다.
옛 본전 위의 자리에 지금의 본전을 신축하여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옥의 티가 있다면 사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나 새로 만든 본전은 팔짝지붕이다. 당연하게도 구 본전은 맞배지붕이다.
참고로 현재 내걸려 있는 한글 현판은 성역화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으로 예전에 걸려있는 현판은 구(舊) 본전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다. 舊 본전은 현충사 한켠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아일보가 현충사를 새로 중건하며, 1707년(숙종 33년) 숙종이 내려준 현판을 걸고 다시 세운 것이 舊 본전.
5.5. 구(舊) 본전
1707년(숙종 33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어명하에 따라 최초로 지어진 본전이자 예전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던 사당. 숙종이 직접 하사한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는 영정이 1967년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본전으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만 남아 보존, 전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1910년(융희 4년) 일제(日帝)의 탄압 등으로 쇠퇴의 기로 및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가 1932년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들 전국 각지의 모금으로 다시 전면 중건되었고,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규모에 있어서는 처질지 몰라도 역사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가치가 확실히 높은 곳이다.
5.6. 고택(古宅)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상주 방씨)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지금의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상술한 종부의 만행 때문에 경매에 넘어갔다가 덕수 이씨 풍암공파에게 낙찰받았다
(종부의 만행 관련 기사).
[현충사 이순신 장군 고택 부지 경매
뉴시스 기사 등록 : 2009. 3. 25. 11:10
이종익 기자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고택과 무예를 연마하던 10만㎡ 규모의 문화재 보호구역 내 사유토지가 법원 경매로 나와 안타깝게 하고 있다.
25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따르면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61과 산61-1, 100-1 등이 경매로 나와 30일 1차 경매가 실시된다.
경매가 실시되는 이 토지는 문화재로 지정된 현충사 경내의 이 충무공 고택 부지 3필지 7만4711㎡와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와 농지 4필지 등 7건 9만8000여㎡다.
이 토지는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인 A씨의 사유지며 경매 청구권자는 B씨(70)로 청구금액은 7억원이다.
종부 A씨는 8년 전 남편 이모씨가 사망한 뒤 종갓집 재산을 담보로 얻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채무자에 의해 관련 부지가 경매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법적으로 채무 관계가 있는 물건에 대해 응찰할 수는 없고 매입 예산도 없는 실정"이라며 "예산을 확보해 문화재청이 매입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다"고 밝혔다.]
[충무공 古宅 터 덕수 이씨 문중에 낙찰
이우명(연합)
연합뉴스 기사 등록일 : 2009.05.04
덕수 李씨 풍암공파, 천안지원 경매서 11억5천만원에
법원 경매에 부쳐진 충남 아산 현충사 내 이순신 장군 고택 터 등이 덕수 이씨 문중에 낙찰됐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4일 오전 제2호 법정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고택 터 3필지 7만4천610㎡와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 1필지 등 4필지 9만3천여㎡에 대한 2차 경매에서 덕수 이씨 풍암공파(사무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가 11억5천만원에 낙찰받았다고 밝혔다.
이날 경매에는 덕수 이씨 문중 외에 문화재청과 D건설 등 3곳이 응찰했으나 가장 많은 금액(12억2천200만원)을 써낸 D건설은 입찰서류미비(법인등기부등본 미제출)로 탈락됐으며 문화재청은 2차 최저경매가인 10억7천362만7천310원을 써냈다.
경매에 부쳐진 관련 토지 4필지를 덕수 이씨 충무공 파의 상위 종파인 풍암공파가 사들이면서 이순신 장군의 고택 터를 둘러싼 `경매사태'는 일단 진정됐다.
이 충무공 조부(李百祿)를 종파로 하는 풍암공파는 충무공 고택 터를 사들이기 위해 덕수문중을 중심으로 모금운동을 펴 기금을 확보했다.
덕수 이씨 풍암공파를 대표로 입찰에 참여, 낙찰받은 이정환(68) 감사는 "충무공 고택 등을 국가나 타인에게 넘기는 것은 후손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며 "문중의 이러한 뜻이 모여져 관련 기금을 모았다"고 말했다.
풍암공파 이재신(68) 회장은 "지난 3-4월 풍암공파 및 대종회가 회의를 열어 경매참여를 결정했다"며 "문중에서 낙찰받게 돼 후손으로서 장군님께 면목이 섰고 떳떳하게 현충사 경내 고택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경매법정에는 경매참가자와 취재진 등 200여명이 나와 경매현장을 관심있게 지켜봤다.
이날 낙찰된 토지는 이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의 사유지로, 경매는 채권자 김 모씨가 신청했고 청구금액은 7억원, 감정평가액은 15억3천여만원이었으며 지난 3월 30일 1차 경매에 부쳐졌지만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천안=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lwm1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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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 문중으로 간 충무공 고택 터
문화재청 "국민세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 충무공 이순신 고택 부지 경매 사태는 결국 충무공과 같은 덕수이씨의 한 문중이 낙찰받는 형식으로 일단락됐다.
4일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열린 충무공 고택 터 3필지 7만4천610㎡와 문화재보호구역 내 임야 1필지 등 4필지 9만3천여㎡에 대한 2차 경매 결과, 충무공의 증조에게 뿌리를 둔 덕수이씨 풍암공파가 11억5천만원에 낙찰받았다.
이로써 지난 3월25일 충무공 고택 부지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지 한 달여 만에 사태는 종결됐다.
이번 경매 결과는 그동안 문화재청이 표방한 직접 경매 참여를 통한 국가의 매입 방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경매 직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청은 현충사 외부 구역 토지 1필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동산을 정부가 직접 경매에 참여해 낙찰받을 것이며, 응찰가격은 감정평가액인 15억원 수준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법원 경매에 참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에 앞서 정부가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자 문화재청은 법원행정처에 그 가부를 질의해 "가능하다"는 구두 답변을 얻기도 했다.
이런 공언대로라면 충무공 고택부지는 당연히 문화재청에 낙찰되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경매 결과는 달랐다. 이번 낙찰 금액이 11억원5천만원인 점으로 미뤄 문화재청이 제시한 응찰금액은 이보다 낮은 액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경매는 비록 예상하지 못한 D건설의 참여라는 돌발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정황상 문화재청과 덕수이씨 풍암공파가 사전 조율 끝에 '문중 낙찰'이라는 결과를 도출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문화재청 주무 국장인 엄승용 문화재정책국장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
엄 국장은 "소중한 국민세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으며, 더구나 덕수이씨 문중이 적극적으로 나서 충무공 고택을 지키겠다는 데 그것을 외면하면서 우리가 고가에 응찰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직접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표명하긴 했지만, 내부에서는 반대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경매 참여와 이를 통한 낙찰이 선례가 될 것을 우려했다. 사실 충무공 고택부지와 같은 운명에 처한 문화재보호구역은 전국에 산재한다. 이런 문화재보호구역을 정부가 나서 모두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화재청은 이런 사태(경매)가 오기까지 충무공 고택부지를 수수방관한 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충무공 고택부지가 설혹 경매에 나오고, 그것이 문화재청이나 문중이 아닌 제3자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해서, 문화재로서의 충무공 고택 부지가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소유주가 누가 되건 관계없이 충무공 고택 부지는 국가가 그것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문화재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는 엄 국장의 언급은 바로 국가지정 사적으로의서 충무공 고택부지가 갖는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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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덕수 이씨 풍암공파 이재신 회장
(천안=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고택 터를 지킬 수 있게 돼 충무공 할아버지께 면목이 섰다"
경매로 나온 충남 아산 현충사 이 충무공 고택 터 등을 낙찰받은 덕수 이씨 문중 풍암공파의 이재신(李載信) 회장은 "앞으로는 종회에서 재산을 관리하며 국민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이 회장과의 문답.
--이순신 장군 고택 터 경매에 참여한 동기는.
▲이 충무공의 후손으로서 충무공을 욕되게 할 수 없어 지난 3월30일 충무공 조부(李百祿)인 풍암공파 회의를 열고 4월에는 덕수 이씨 대종회를 열어 모금 등을 통해 기금을 마련, 입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국가에서 매입해 관리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을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 매년 음력 11월, 충무공 제사를 비롯한 조상들의 제사를 고택에서 매년 5차례 지내는데 자신의 집에서 지내야지 남의 집 등에서 지내서야 떳떳하겠느냐. 당연히 이 충무공 제사를 지내는 고택은 종회 소유로 있어야 한다.
--향후 관리에는 문제가 없나?
▲문제없다. 앞으로는 종회 소유로 등기돼 개인에게 넘어갈 수 없다. 또한 풍암공파에는 기금도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없다.
--종가집 며느리 최씨가 이 충무공 관련 소장유물을 문화재청에 보관토록 했다. 이에 대한 종회의 입장은?
▲유물은 도난 등의 걱정이 없는 현충사에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현충사 터에 이 충무공 유물전시관을 따로 짓는 것으로 안다. 그곳에서 안전하게 전시돼 국민들이 많이 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7. 활터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활터로 이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수령 약 500년 이상.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충청남도 보호수(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있고 충무공이 늘 사용했다는 과녁판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안내 지도원의 안내에 따라 충무공이 사용했다던 과녁을 향해 직접 국궁 체험을 할 수가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가서 체험하길 바란다.
5.8. 충무정(忠武井)
충무공과 가족들이 고택에 살던 시절에 사용했던 우물가로 원래는 이름이 없는 우물가였으나 충무공이 전사하고 '충무(忠武)' 라는 시호(屍號)가 내려지면서 그의 시호를 본떠 충무정이라 불렀다.
현재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관람객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5.9. 정려
충무공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정려로 본래는 마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 성역화 사업으로 위치를 바꿔 옮겨놓았다.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그의 조카인 이완, 후손인 이봉상과 이홍무, 이제빈 등 충신 4명과 효자 1명의 정려가 걸려있다.
5.10. 이면 묘소
고택과 활터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곳으로 1597년(선조 34년) 충무공의 외가가 있는 아산에 각종 해전에서 패해 복수심에 쳐들어 온 왜군을 상대하다 수적열세에 전사한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의 시신을 모셔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기 외할아버지(방진), 외할머니 곁에 모셨으므로 왜군에 당한 치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5.11. 舊 유물 전시관
거북선을 비롯해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 및 유품들을 전시했던 곳으로 성역화 사업 중인 1962년에 세워졌으나 노후와 등의 이유로 2011년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건립된 이후에 철거되었고, 그 흔적은 현재 舊 본전 옆에 남아있다.
5.1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충무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이자 국립 박물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기존 '舊 유물 전시관'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새로 지은 건물로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도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충무공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 9월부터 전면 개편을 위해 휴관 중이다.
6. 외부 링크
한국어 위키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한국어 위키백과: 현충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산이충무공유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충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 이충무공 유허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산 이충무공 유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현충사
두산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7. 대한민국 사적 제155호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는 국보76호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보물 1564호 16점 (선무공신교서, 기복수직교서 등)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순신(李舜臣)
조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양력)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양력)
제1·3대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26일 ~ 1597년 3월 14일 (양력)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양력)
본명 이순신(李舜臣)
자 여해(汝諧)
호 기계(器溪), 덕암(德巖)
시호 충무(忠武)
출생일 1545년 4월 28일
출생지 조선국 한성부 건천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
사망일 1598년 11월 19일
사망지 조선국 경상우도 노량해협
작위 충무공(忠武公)
관직 정2품 정헌대부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본관 덕수
부모 아버지: 이정(李貞)
어머니: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草溪卞氏)
배우자 : 방진(方震)의 딸 방수진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부안댁
자녀 정실 부인 상주 방씨 소생
장남: 이회(李薈)
차남: 이열
삼남: 이면(李葂)
장녀: 덕수이씨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소생
서자: 이훈(李薰)
서자: 이신(李藎)
서녀: 덕수이씨
서녀: 덕수이씨
조선군 복무기간 : 1576년 ~ 1598년
근무 조선 수군
최종계급 :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지휘 삼도수군
주요 참전
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타 이력 : 명 정1품 수군도독
서훈 :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였으며 한성 출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 훈련원 봉사(종8품), 함경남병사 군관, 훈련원 참군(정7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함경도 조산보 병마만호(종4품), 전라감사 조방장, 선전관,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태인현감 겸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거쳐 정헌대부(정2품상계)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이르렀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1581년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가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선조 20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가 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3]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생애 전반
어린 시절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1545년 4월 28일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첫째부터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 이순신(李舜臣), 이우신(李禹臣)으로 지었다.
증조부 이거는 정언, 이조좌랑, 통덕랑 수(守)사헌부장령, 1494년 연산군이 세자시절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초에는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 장악원정, 한학교수를 지냈으며, 연산군 초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순천도호부사, 행호군을 거쳐 최종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조부 이백록은 중종 때 평시서봉사를 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던 중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이정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 그의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뒤늦게 무관이 된 아버지 이정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1573년(선조 6) 병절교위를 거쳐 1576년(선조 9) 종5품 창신교위를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초계변씨는 생원 변함의 딸이었다.
무과 급제
1565년 이순신은 방씨(方氏)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만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 제4인[5]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급제 후 1576년 12월에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6][7]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발포수군만호 재직 중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의 미움을 받았다. 성박은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게 했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성박은 후임자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고,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이순신을 밉게 보았다. 이용은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용은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는데, 전라도도사(都事)로 재직 중이던 조헌(趙憲)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여 수정하게 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이용은 생각을 바꾸어, 함경남도 남병사로 전근한 뒤 1583년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하였다.
1582년 1월 발포만호로 재직 중일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고흥군에 왔다. 이때 서익은 발포진을 찾아가 군기보수 불량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나 곧 복직하였다. 1583년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추천을 받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한편 그를 유심히 지켜본 병조판서 김귀영은 1579년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첩으로 주려 하여 불렀다. 그러나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느냐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
1587년(선조 20년)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 9월 1일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했는데 고작 수십명의 병사들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으며 반격하여 무찔렀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를 북병사 이일(李鎰)은 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하였다. 처음부터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이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의 비판으로 문책받고 그해 10월 해임, 결국 투옥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경록과 이순신을 투옥한 뒤, 1587년 10월 10일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다.
이일은 장계를 올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이경록과 이순신을 모함했다. 그러나 이때 이경록 등을 변호한 이는 이억기 등 소수였다. 10월 16일 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조정에서는 백의종군하게 하여 입공자속(立功自贖)할 기회를 주라고 권고하였다.
선조는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선조가 당대 조선의 맹장인 신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이일은 정치적으로 신립과 같은 파벌이었으므로 선조는 신립을 분노하게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경록과 이순신을 처벌은 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 시켰다. 선조가 이일의 모함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조치였으며 만약 이일의 모함을 선조가 몰랐더라면 이경록과 이순신을, 이일의 건의대로 참수형에 처했을 것이다.
명백히 이순신은 싸워 이긴 것이며 모든 잘못이 이일 혼자에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일에게 처벌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처벌했다. 조선군 11명 전사와 160명이 포로로 잡힌 것은 이일이 그렇게 한 것이며 이순신과 이경록은 이를 뒷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을 뿐이다. 실제로도 이순신은 이일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이일이 이를 거절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현재도 녹둔도의 일은 용인 이씨 가문에서 계속 왜곡하고 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의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珍島郡守)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 이순신은 일본은 섬이니 일본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 함대는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9일(음력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21일에 한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몇번을 주저하다가 1593년 10월 1일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옥포 해전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일본군이 보유한 군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파천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일본군이 황해도까지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천 해전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바로 사천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두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고, 또한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다.
이순신 함대는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일본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 크기의 배 0척 작은 크기의 배 100척을 공격하였다. 16일(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의 함대는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8월 12일(음력 7월 6일)에 출발하여 당일 노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8월 14일(음력 7월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함선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학익진을 펼친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네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산채로 매장한 최악의 제독으로 평가한다.
웅포 해전
이순신 함대는 1593년 3월 12일(음력 2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 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의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4월 11일(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舊 여천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5월 26일(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14]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명량 해전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 것으로 파악된다.
"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해남 명량대첩비>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병사하고, 사망 직전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전사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의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15]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 1598년 12월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6월에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3월에 인조는 그에게 '충무(忠武)'[16]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해남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7월에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순신의 최종 직함은 아래와 같다.
-국문 :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
-한문 : 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水軍節度使 兼三道統制使 諡 忠武公 李舜臣
-풀이 :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직함을 받은, 조선국의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으로 추봉되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품계와 정1품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청,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의 영사 관직이 추증되었으며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된, 생전에 정2품 정헌대부 품계와 종2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고 충무공 시호로 추시된 이순신
가계
이순신의 조부 품앙공(楓巖公) 이백록(李百綠)은 중종 14년(1519년) 학행이 높고 문장 기절을 지녀 기묘사적에 들어갔다. 중종 17년(1522년) 임오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으로 생원이 되었으며 같은해 사마 행검으로 생원 선교랑 참봉에 천제되었으나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성균관 생원을 거쳤으나 문과 급제는 하지 못하였고 선교랑 평시서봉사를 지냈다. 중종 35년(1540) 품행의 문제로 탄핵되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서 여생을 보내다 중종 39년(1544) 중종의 국상에 결례를 범한 오해(삼남 이귀(李貴)의 혼사시 주육설판)로 의금부에서 곤장으로 복초(服招) 당한 후 녹안되었으며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들 이순신의 조부 품앙공(楓巖公) 이백록(李百綠)이 중종 14년(1519년)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한 뒤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즉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훗날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 현충사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으로 전해진다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내는 줄거리는 허구다.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인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8명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恩津)(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방에 있는 가옥과 토지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 상주 방씨(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고택 역시 이순신이 자신의 할아버지 백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증조부 : 이거(李琚), 사헌부장령, 한림, 홍문관 박사, 순천부사, 병조참의
조부 : 이백록(李百祿), 선교랑 평시서 봉사
조모 : 초계 변씨(草溪卞氏), 변성(卞誠)의 딸
부 : 증 좌의정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1511~1583)
모 : 증 정경부인 초계 변씨(草溪卞氏, 1515~1597) - 변수림(卞守琳)의 딸
형 : 이희신(李羲臣, 1535~1587), 증 병조참판
형수 : 증 정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 강세온(姜世溫)의 딸
조카 : 이뢰(李蕾, 1561~1648), 찰방
조카 : 이분(李芬, 1566~1619), 병조정랑
조카 : 이번(李蕃, 1575~1668), 효릉참봉
조카 : 이완(李莞, 1579~1627), 의주부윤겸의주진관병마절제사, 증 병조판서, 시호 강민(剛愍), 정묘호란 전사
형 : 이요신(李堯臣, 1542~1580), 증 호조참판동의금부사
형수 : 증 정부인 청풍김씨(清風金氏), 김대신(大頣)의 딸
조카 : 이봉(李菶, 1563~1650), 선무원종공신 2등, 경상도병마절도사겸 오위도청부 부총관, 평안도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삼척포첨사
조카 : 이해(李荄, 1566~1645), 선무원종공신 2등, 훈련원주부
동생 : 이우신(李禹臣, 미상), 참봉
제수 : 온양 조씨(溫陽鄭氏)
충무공 가계
이순신은 한성을 떠나 외가와 처가(온양 방씨)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과 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의 처가는 상주 방씨(온양 방씨)이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년~1572년)이 중매를 섰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그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충무공이순신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1567년 출생), 이울(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더러 점까지 치며 방씨 부인을 염려하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 1598년 (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教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장인 :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방진(方震) - 온양 방씨 22세손
부인 : 정경부인 상주 방씨(尙州 方氏; 온양 방씨)
장남 : 이회(李薈, 1567~1625) 선무1등공훈, 훈련원 첨정, 증 승정원 좌승지
며느리 : 증 숙부인 광산김씨
손자 : 이지백(李之白) 승정원 좌승지 추증
손자 : 이지석(李之晳, 차남 이예의 양자로 입적)
손녀 : 윤헌징(尹獻徵)에게 출가
차남 : 이예(李䓲, 1571~1631) 형조정랑, 증 승정원 좌승지
며느리 : 증 숙부인 신창맹씨
삼남 : 이면(李葂, 1577~1597) 증 이조 참의, 정유재란시 왜군과 교전 중 전사
딸 : 홍비(洪棐)에게 출가 - 청난공신 홍가신(洪可臣)의 아들
첩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서자 : 이훈(李薰, 1574~1624) 무과, 증 병조참의, 이괄의 난 진압 중 전사
서며느리 : 숙부인 순천김씨 김춘여의 딸
서손자 : 이지구
서자 : 이신(李藎, 미상~1627) 무과, 증 병조참의, 정묘호란시 종형제 이완과 함께 전사[23]
서녀 : 임진(任振)에게 출가
서녀 : 윤효전(尹孝全)에게 출가
인물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한 반면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必死則生必生則死)는 것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군영 순시 중에 자신이 담당하던 업무에 소홀하였던 일선 지휘관은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몇번 있다.[24]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아군의 승리에 더 관심이 깊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권율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권율은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이 무기들로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제독의 복식이나 이순신 제독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녹둔도 사건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났다. 고작 수십명의 보병으로 1천 기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해서 이겼는데 휘하 병력이 100명 이하인 상황이라면 개인 무예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가
사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국내 이순신의 평가
선조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말을 남기며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류성룡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효종
효종이 경연 자리에서,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고 하였다.
정조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무인(武人)이지만 또한 '선정(先正)'으로 일컬었고 보면 선정을 꼭 유현에게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김육
효종 임금에게,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충신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으니,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입니다."고 아뢰었다.
오윤겸
제문에서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홍석주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의 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에서 홍석주는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국외 이순신의 평가
다음은 이순신에 대한 국외의 인물들이 내린 평가다.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 이순신 문서에 의하면 도고 헤이하치로의 발언은 일본에 직접적인 사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퍼트린 얘기라고 기술되어 있다.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스승입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李舜臣覚書)》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회고록에서
유산
유적
대한민국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사적이 14개가 있다. 이 가운데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옛집은 이순신 제독이 혼인 후 살고 그 후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덕수 이씨 충무공파의 종가집이다.
난중일기 (국보 제76호)
여수 진남관 (국보 제304호)
이순신 유물 일괄 (보물 제326호)
아산 이충무공묘 (사적 제112호)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3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4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232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안에는 현충사가 있다.
남해 충렬사 (사적 제233호)
통영 충렬사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 (사적 제381호)
여수 석천사[37][38]
정읍 충렬사
순천 충무사
저작물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 유고 전집으로 정조의 어명으로 교서관(校書館) 관리 유득공(柳得恭)의 주도 아래 찬수를 시작하여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되었다.[39] 14권 8책의 활자본.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기술한 전쟁 일기.
《임진장초》(壬辰狀草)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초상과 명명
-1970년 이후부터 발행된 대한민국의 100원 동전에는 이순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폐지된 500원 지폐에도 이순신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 묘사된 이순신은 사후 추서된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린 초상화를 넣은 것이다.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이순신의 생일을 기리고자 제정한 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은 그 급의 제1번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현재 6척이 건조되었다.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대한민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는 1968년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있다.
-서울 중구 인현동(건천동)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 자리는 이순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서울에는 충무로라는 번화가가 있으며, 그 곳을 지나는 지하철역은 충무로역이다.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충무로도 이순신을 기념하여 지은 도로명이다.
-서울 중구 흥인동에는 공연장, 갤러리, 컨벤션센터, 체육시설 등을 갖춘 종합예술시설인 충무아트홀이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는 한때 충무시와 통영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충청남도 아산시의 이순신종합운동장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순신대교. 길이 2.26km의 현수교이며, 2개의 주탑 사이의 경간(徑間) 길이가 1,545m인데, 이는 이순신이 태어난 해인 1545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작품 속 묘사
서적
-1923년 《이순신전》(李舜臣傳):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서 1923년 2월에 박은식(朴殷植)이 편저하여 발행하였다.
-1992년 《구국의 명장 이순신》: 최석남이 쓴 이순신의 전기,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ISBN(13) : 9788909002318
-1998년, 소설가 김탁환이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불멸》을 발표하였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묘사, 역사 왜곡 등에서 많은 논란을 일었다.
-2001년,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칼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순신 : 폴른 어벤져(Yi Soon Shin : Fallen Avenger)》은 미국의 만화작가 온리 콤판이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이순신을 접한 후 감명받아 만든 만화이다. 총 1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있다.
영상
-1985년 MBC의 《조선왕조 오백년》에 시리즈인 《임진왜란》(5회)을 방영하였다.
-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KBS 1TV에서 이순신의 생애와 인간적인 면모를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을 방영하였다. 이순신의 가족사, 이순신 인물묘사, 조선 장수, 일본 장수 인물묘사, 역사 고증 등 역사왜곡 등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2005년에는 민준기 감독, 박중훈 주연 이으로 남북한의 군인들이 시간 여행을 해 이순신과 조우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오락적으로 그린 영화 《천군》이 개봉되었다.
-2008년 뮤지컬 《이순신 (뮤지컬)》
-2008년 4월 26일 KBS 1TV 《한국사 전》에서 '난중일기 인간 이순신의 기록 (3부작)'을 방영하였다.
-2009년 4월 18일 KBS 1TV 《역사추적》에서 '최강 수군의 비밀 - 이순신의 사람들'을 방영하였다.
-2009년 6월 14일 SBS 《SBS 스페셜》에서 '1592 침묵의 거북선'을 방영하였다.
-2010년 7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잃어버린 쌍룡검을 찾아서 -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진실)'을 방영하였다.
-2013년 MBC에서 방영된 퓨전 사극 구가의 서에서 유동근이 연기하였으며 남자주인공인 최강치(이승기)의 멘토이자 좌수사 영감으로 나온다.
-2013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은 이순신 제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또 KBS드라마 광고천재 이태백의 원래 제목은 '광고천재 이순신' 이었다. 이 드라마 또한 이순신 제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2014년 이순신과 관련된 전투 중 명량 해전을 극화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개봉하였다. 이 작품은 아바타가 가지고 있던 역대 한국 개봉 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갈아 치웠다.
-2022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한산도 대첩을 소재로 하였다.
-2023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을 소재로 하였다.
게임
-2000년 발매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더 컨커러스에는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조선의 유력인물은 이순신이다.
-2010년 10월에 발매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문명 Ⅴ》에서는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이 2011년 8월에 DLC로써 추가되었는데, 여기서 대한민국의 고유 유닛으로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등장한다.
-앞서 거론된 《문명 Ⅴ》의 확장판의 개념으로 2012년 6월에 발매된 《문명 Ⅴ신들과 왕들》에서는 기존에 등장하던 '위대한 장군'과는 별도로 해군 유닛에게 특수한 효과를 부여하는 '위대한 제독'으로 세계적인 해군 제독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이순신이 등장한다.
-남코에서 개발한 대전검술격투게임 소울칼리버에서 이순신은 등장인물인 성미나의 아버지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기타 관련
-이순신 밥상
-이순신 프로젝트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드라마
KBS
충무공탄신특집극 《이순신》 (KBS, 1977년) - 김흥기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 김명민 (아역 : 유승호)
대하드라마 《징비록》 (KBS1, 2015년) - 김석훈
5부작 드라마 《임진왜란 1592》 (KBS1, 2016년) - 최수종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 김무생
월화드라마 《구가의서》 (MBC, 2013년) - 유동근
SBS
대하드라마 《임꺽정》 (SBS, 1996년) - 정태우(특별출연)
대하드라마 《왕의 여자》 (SBS, 2003년) - 권태원(특별출연)
영화
《성웅 이순신》 (1962년) - 김승길
《성웅 이순신》 (1971년) - 김진규
《난중일기》 (1978년) - 김진규
《천군》 (2005년) - 박중훈
《명량》 (2014년) - 최민식
《한산: 용의 출현》 (2022년) - 박해일
《노량: 죽음의 바다》 (2023년) - 김윤석
뮤지컬
《이순신》 (2008년 ~ 2013년) - 민영기
《영웅을 기다리며》 (2009년) - 박호산, 임기홍
《영웅을 기다리며》 (2009년) - 배성우, 최성원, 이필승
《영웅을 기다리며》 (2010년) - 박호산, 이건영, 김대종
《영웅을 기다리며》 (2012년) - 손광업, 조휘
《영웅을 기다리며》 (2013년) - 박호산, 임기홍, 원종환
《영웅을 기다리며》 (2015년) - 임기홍, 원종환
《영웅을 기다리며》 (2016년) - 정동진, 김민건]
12:30~12:36 현충사 버스 정류장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6분, 419m 이동]
12:36~13:00 현충사 버스 정류장에서 온양온천역 정류장으로 가는 970, 971번 버스 승차 대기
13:00~13:25 970, 971번 버스 를 타고 현충사 버스 정류장에서 온양온천역 정류장으로 이동 [25분, 18개 정류장 이동]
13:25~13:29 온양온천역 1번 출구로 이동 [4분, 190m 이동]
13:29~13:40 온양온천역에서 신도림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3:40~16:20 1호선을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신도림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합정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2시간40분 소요]
현충사 안내도
[현충사&온양온천역]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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