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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73;1-23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바로 산다고 항상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낮에만 살지 않고 어두운 밤에도 살아야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항상 밝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두운 일도 주십니다. 그 어두운 터널을 잘 지나가면 다시 밝아지듯이, 어두운 일을 만날 때 잘 이겨내야 새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에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면 새봄에 싹을 틔우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겨울의 찬바람을 견디고 이긴 나무가 봄에 싹을 틔우고 새 잎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믿음을 지키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캄캄한 터널을 만납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시편 기자는 이미 결론부터 시작한다. 그는 이미 체험을 통해서 [ 모든 과정을 통해 ] 이만한 수준에 이르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침체, 무서운 번민, 쓰라림이 무엇인지 잘안다. 사실..그는 “ 자신이 흔들렸다. ...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기 때문 이다.
[ 질병, 어려움, 심각한 괴로움, 불경건한 자와 대조해 보니 ... 고민이 깊어집니다. 그런데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3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4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6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8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형통하지 못하는가?”
- 이것 무엇냐?
고통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섭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 자신이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침체, 무서운 번민, 쓰라림]은 큰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은 “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합니다. 오죽 하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으라 고 합니까?
우리는 늘 주님의 시선, 천사의 시선을 느껴야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달릴 때, 골퍼들이 골프장에서 골프할 때, 축구선수와 야구선수들이 축구장에서, 야구장에서 시합을 할 때 관중들의 시선을 느끼며 경기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선뿐 아니라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의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은 천사입니다. 사람은 구름 위에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을 만나도 천사들의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유혹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오죽하면“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교만한자을 부러워 했다]
유혹이 힘은 우리의 판단력을 읽게 한다.
이것은 마귀의 술책입니다.
사단은 “마음을 정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무슨 유익이 있는냐? 13절] 속삭인다.
마귀도 예수님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 주지만 범죄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물리쳐야 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고 싶은말은 “ 하나님은 선하시다.
또한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분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그 답이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왜 하나님께서 곤경을, 칼을, 풍랑을, 목마름을,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수고].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6편도 다윗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
그는 하나님이 분노와 진노로 자신을 책망하고 징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는 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간섭’이다.
사랑하면... 그 대상을 가만히 방치해 두지 않는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이 절대 곁길로 못 가도록 계속 지키시고 간섭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을 많이 겪은 것도, 그런 ‘간섭의 사랑’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스라엘같이 기적 속에서 살아온 민족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 나오고,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을 얻은 족속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수난의 연속이었던 민족도 또 없습니다.(주변 나라들은 한 때 흥했으나 결국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한 적은 없지만, 놔두고 계속 고생 속에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게 이겁니까?
홍해를 가르고 나와서 뭐 좀 나은 줄 알았더니 광야였고,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전쟁이었고,
거기서 언제나 싸워야 했던 블레셋이 있었고,
애굽이 있었으며, 나중에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페르시아에게 그리고 로마에게 당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나치한테 당하고...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언약백성이었고, 하나님이 늘 사랑하신다는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억수로 시키신 것입니다.
히12: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는 구절은
히12:7~9 ‘징계’란 말은 이제 잘 키워야 합니다.
중생해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징계’, 즉 ‘아들 만들기’를 통해 끊임없이 다듬어져야 합니다.
영어로 번역한 discipline(디서플린)은 ‘훈육, 징계’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아들을 만들되, 엄하게 다룬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마음이 정결한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단서가 붙는다 “ 마음이 정결한자에게” [“마음이 맑은]
우리는 “ 중심에 진실을 품어야 하고 숨긴 죄악”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 내가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중심이 하나님께 정직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권리가 없다.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 정결한자란? [“마음이 맑은]
“ 하나님만 절대 의지, 신뢰 하고 ,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개석 총통은 어렸을 때 평범했습니다. 군에도 평범한 군인으로 들어갔습니다.그런데 그가 다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한 후에 아침 식사를 할때까지 공부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놀면서 그냥 시간을 보낼 때
그는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총통이 된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 하나님만 절대 의지,신뢰 하고 ,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게 됩니다.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겜에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창35;1]
하나님은 야곱의 신앙에서 예배 회복을 요구하셨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공격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그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라반과 같이 온 사람들은 무장해서 야곱을 치러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무사하게 되고 평화조약을 맺고, 서로 입 맞추고, 축복한 후에 헤어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후유! 고비를 넘겼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 집, 고향으로 가려니 라반의 위험보다 더 엄청난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의 위험입니다.
에서는 싸움꾼이요 사냥꾼입니다. 그가 칼을 뽑으면 야곱이 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반은 싸울 수 있는 상대이지만 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 에서를 만나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피해 고향으로 가지 않으면 에서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말씀의 길을 택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나가면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가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어차피 한 번 죽을 목숨이니 말씀을 따라 살다 죽으면 좋을 줄 믿습니다.야곱이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가는 길에서 엄청난 광경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눈을 열어 주시니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빽빽하게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칼에서 구원 받았고, 신령한 눈이 열려 천군천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이 은혜를 경험한 바로 잠시 후 그는 어려운 곤경에 처합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형님이 자꾸 부담됩니다.
‘형이 나만 죽이고 말까? 내 아내랑 아이들까지 다 죽일까?
내 종들까지 다 죽일까? 재산만 빼앗을까?’
너무 근심이 된 야곱은 그냥 있을 수 없어 종들 중에서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하는 몇 사람을 택하여 형에게 보냈습니다.
“내 형님에게 가서 ‘주의 종, 주의 아우 야곱이 외갓집에서 20년간 붙여 살면서 복을 받아 큰 떼를 이루고, 이제 고향으로 오는데 형님에게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라고 전해라.”
그렇게 말할 때 에서가 어떻게 하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종들이 빠른 걸음으로, 아마 말을 타고 달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다 보니 에서가 400명 군사와 더불어 한 마디 말 없이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종들이 야곱에게 달려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주인의 형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무장한 군사 400명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에서가 야곱을 환영하러 온다면 무장해서 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을 용서했다면 400명 떼를 이끌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400명의 군사가 떼를 지어온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바들바들 떨면서 급히 재산을 둘로 나누어 한 떼는 앞에, 한 떼는 뒤에 두었습니다. 앞의 떼가 에서에게 당하면 뒤의 떼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제게 명하여 제 고향 제 족속에게 돌아가라 하셨고,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어찌 형의 400명 군사의 칼 앞에 서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진리, 사랑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요단강을 건널 때는 지팡이 하나만 갖고 갔지만 이제 거부가 되어 두 떼를 이루어서 왔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제가 죽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 형의 칼에서, 제 형의 손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제가 두려워함은 형이 와서 저와 제 처자를 칠까 함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전에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아, 네 씨를 셀 수 없는 바다 모래처럼 많게 하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혜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제가 이렇게 형님의 칼 앞에 섰습니까?”
사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근심, 걱정, 눈물, 한숨, 두려움, 염려가 없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 합시다.“산 넘어 산이고 강 건너 강이다.”
야곱은 형과 형의 군사 400명 앞에서 죽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죽었거니 해도 하나님께서는 살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결국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자녀에게 “ 징계 중에서도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요, 우리을 선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셨고, 사막 길을 건널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쓴물을 만날 때도 함께 계셨고, 오아시스에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될 때만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옳소이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면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결국 악인은 [18-20절]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악인들이 평안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다. 악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재앙은 졸지에, 한 순간에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한 순간에 황폐케 하시고 전멸케 하신다
주께서 깨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에는 그들의 부귀 영광과 권세를 멸시하실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멸망할 것이다.
[21-23] 내 마음이 산란하며(잇캄메츠)[쓰라리며, 괴로우며](BDB)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잠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쓰라리고 괴로웠다.
그는 자신의 우매 무지함을 깨닫고 자신을 “주의 앞에 짐승”이라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