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둘러 둘러 다니시려니 쬐금은 힘도 드셨겠지만,
"환상적" 여행 코스란 생각이 듭니다.
역시 아직도 원환이형 체력은 여전하신것 같습니다.
제가 1학년 MC때 팔공산에서 불로동까지 걸어 온적이 있는데
앞뒤로 휘젖고 다니면서 독려하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앞, 뒤에 배낭 하나씩 메고 말입니다.
괴물적인 체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특유의 춤(?)과 아울러서.
근데 그때는 항상 그렇게 MC끝에는 팔공산에서 불로동 까지
걸어오는 걸로 알고, staff들이 가자는데로 순진하게(?) 무작정 따라
걸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그후 한마디 할게 생겼습니다.
'야, 내가 소시적에 말이지, 팔공산 꼭대기에서 불로동 회집까지
걸었는데 말이지, 그 괴물적인 체력을 가진 8대 ...'
나이 드시더라도 그 깡다구 체력 늘 보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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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그냥 용기를 내어서 지리산을 향했다.
어떻게 가다보니, 섬진강이 먼저 나왔네.
더듬어, 더듬어, 들어간 곳이 재첩국 할머니집. 덮밥에는 재첩 비빔밥 + 재첩국이 나오네.
오랜만의 재첩국이었구나.
순천 송광사에 들렀단다.
조계산 송광사, 불보사찰=통도사(진신사리 봉안), 법보사찰=해인사(팔만대장경) 승보사찰=송광사(16국사를 배출),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 삼보 가운데, 나머지는 유물이고, 승보 사찰은 사람으로 비롯된 사찰이니 훨씬 더 유명하겠지. 시원한 법당에 앉아서 한시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앉아서 부처님 얼굴(미륵불[앞으로 오실 미래불], 석가모니불[현세를 대표하는 부처님], 연등불[바로 이전에 왔었던 부처님, 32대?]과,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모든 중생이 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노라고 서원하고, 지옥 입구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지장보살,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 천수천안(천개의 손, 천개의 눈)으로 세상 고통을 다 보고, 듣고, 잊게 해주신다는 관세음보살, 이렇게 쳐다보며 그냥 삼매경에 빠져들어본다.
물한모금 얻어마시고는 지리산으로 향한다.
천은사 쪽으로 올라가면 노고단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길을 선택했다. 우와, 천미터 높이, 운산 위로 펼쳐지는 장관, 소름이 끼칠듯이 싸늘한 산바람에, 마냥 머물고 싶었지만, 벌써 해는 뉘였뉘였 어둠을 제촉하고 있기에, 뱀사골(피아골)을 통해서 지리산을 벗어났다.
어둠 속에서 그냥 달려서 다시 섬진강 입구, 하동에서 하나의 밤을 맞이한다.
아침과 함께 비바람이 거세지기에, 그냥 진주까지 갔다. 해안을 찾아 계속 가다보니, 진해도 나오고, 해안을 계속 따라 가다보니, 삼성 자동차 공장도 나오는데, 을숙도(철새도래지)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 시절, 어느 겨울날, 친구들과 방문했다가, 그냥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갈대밭과, 질퍽한 늪의 풍경 외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왔었던 추억을 되내이며,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역시 을숙도는 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듯.
부산, 영도는 아직도 그대로이다. 동삼동, 해양대학교를 지나, 태종대, 동백섬, 등대 밑의 자갈마당을 한바퀴 돌아서, 북쪽으로 향한다.
연산구, UN묘지 근처, 오륙도가 보이는 바닷가, 국민학교 3-4학년 시절 이곳에서 보낸 여름, 겨울 방학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이곳 바닷가 풍경, 근처에 나환자촌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단다. 단지 그 옛날 닭장들이 지금은 가구공장으로 바뀌어서 가구단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노인분의 말이 조금은 씁쓸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 어린시절, 바닷가에서 군인 아저씨들이 오륙도까지 헤엄치고, 그 동네 아이들과 함께 자동차 튜브를 타고 헤엄치던 그 바닷가가 이제는 웬지 먼먼 얘기로만 남아 있을 뿐, 그 많던 멍게, 해삼, 소라, 등등, 물론, 저 바다 속에는 아직도 그들의 후손들이 번식을 하고 있겠지만, 바닷가 풍경이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니, 모든 것들이 새롭고 낯설게만 느껴진다.
나오는 길에, 부산의 그 유명한 밀면집이 있었다. 가야밀면이 최고이긴 하지만, 이곳도 체인점이어서 비교적 그 맛을 간직하고 있는듯, 얼음 둥둥뜨는 밀가루로 만든 밀면은 국수와는 다른 쫄깃함과 냉면과도 같은 얇은 맛이 깔끔하기만 하다. 시원하게 한그릇을 먹고, 만두를 포장해서 차를 북쪽으로 몰아간다.
마음은 급하고, 아니, 나는 일도 욕심은 많고 능력은 딸리고, 놀러 다니는 것도 이렇게 마음이 급하니, 도무지 휴가를 온건지, 무슨 답사를 가는건지, 아니, 이것은 일종의 국토 순례에 해당되는 일이다. 울산에 그래도 몇번인가 통화를 하고 얼굴이 마주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래도, 나를 기억하고 반겨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 나도 인생을 그렇게 실패하고만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나를 기억해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지금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10년, 20년, 아니 늙어서 기력조차 쇠했을 때에도 반겨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서, 혜란이네 꽃가게에서, 화영, 지현이(중학교 동창들)를 만나서, 시내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빗물이 창을 흠뻑적시면서 떨어지는 풍경을 들여다 본다. 바로 그 시의 한 구절 뒤로 나타나던 그런 풍경이 아니던가.
그리고, 참고로, 정인수는 휴대폰 번호가 바뀌었으면, 신고를 해야지, 그리고, 바뀐 휴대폰은 들고 다녀야지, 집에도 놓고 다니면 안된다.....
마음은 급하고, 서둘러 일어선다는 것이 벌써 11시를 넘기고 있다.
감포 근처까지 가서 잠을 자게 된다.
아침, 바닷가에 차를 세워놓고, 마냥 비내리는 풍경과 파도 치는 모습,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마냥 시간이 흘러간다. 다시 북쪽으로, 호미곶(호랑이의 꼬리), 일본인들에 의해 호랑이가 토끼로 둔갑을 하고, 이곳 이름도 장기곶이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그래서 최근에서야 호미곶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그곳에 등대, 등대박물관이 있었다.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서다가, 동해 바다는 어느곳에나, 같은 모습으로 파도를 던져주고 있었다.
영덕까지 올라가서야, 이제 휴가의 마지막 날임을 깨닫고, 서둘러 서울 방향으로 돌리려는데, 방송에 막힌 길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곳곳에 산사태, 물난리, 영월의 동강을 보고 가야겠다던 계획을 바꾸어 안동을 통해서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섰지만, 터널이 토사붕괴로 완전히 통제라고,, 자다가 가다가, 문경 이화령 터널을 통과한 것이 오늘 새벽 3시50분 바람같이 달려서 인천 집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 동숙자들이 눈이 휘둥그래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서둘러 밥을 먹고 출근을 한다.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짧기만 한 시간 속에서 많은 곳들을 돌아보느라,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보람찬 여정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