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구 류완희 약력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류(柳), 이름은 완희(完熙), 자는 공벽(公壁),호는 적구(赤駒)ㆍ송은(松隱)ㆍ유주(柳州)이며,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한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초등학교] 교장을 한 학수(學秀)이다.
선생(先生)은 고종38(1901)년 11월 25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내사면 송문리에서 태어나 1920년에 관립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 본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중학시절부터 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법률가가 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신문사의 기자(記者)로 활동하면서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파헤치는 기사를 쓰는 한편 시(詩)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23년 4월 경성일보(京城日報) 편집부 겸 학예부기자로 활동했고, 동아일보(東亞日報),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조선일보(朝鮮日報)의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그 후 경성여자미술학원과 조선문학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의 폐간과 함께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평안북도 강계에서 홍문사 총지배인을 하였고, 1948년 교통부에서 촉탁을 하다가 고향 용인에서 용인중학교 초대 교감, 1955년 3월 2일 송전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때 송전중학교, 태성중고등학교 등의 교가(校歌)를 작사(作詞)하였다.
1955년 12월부터 1956년 8월까지 서울신문사(新聞社) 편집국장을 지냈는데 이때 3.1절, 6.25, 8.15 등의 기념시(記念詩)를 신문에 발표하였고, 1956년 9월부터 1960년까지는 세계일보(世界日報)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유주(柳州)라는 필명(筆名)으로 야담(野談)을 발표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인 용인으로 낙향(落鄕)하여 1964년 2월 17일 용인시 양지면 송문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묘소(墓所)는 용인에 있다.
선생은 경성전수학교 재학(在學) 때 야구(野球) 선수로 활약하여 심신을 단련하여 하였고, 1925년에 평기자 중심인 민주언론단체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에서 퇴사(退社)하였으나 1925년 11월 2일 시대일보에“객관주의예술과 주관주의예술”을 발표하면서 문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30일 시대일보에“거지”를, 1926년 4월 개벽(開闢)에 적구(赤駒)란 필명(畢命)으로 여직공(女職工), 희생자(犧牲者), 찰나(刹那), 향락시장(享樂市場)을 발표하였으며, 전(前) 시대일보기자(時代日報記者) 명예훼손죄로 3개월간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그 후“나의 요구”, “나의 행진곡”,“가두의 선언”,“민중의 행렬”등을 발표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였고, 카프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문예운동(文藝運動)2호(1926.5.)에“신흥문예의 예술적 가치”라는 평론을 실었다.
1920년대 중반이후 30년대 후반까지 개벽(開闢), 조선지광(朝鮮之光), 조광(朝光), 삼천리(三千里), 시대일보(時代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에 시(詩), 소설(小說), 평론(評論), 수필(隨筆)을 발표하였다. 선생(先生)은 영월인 참봉 엄규경(嚴桂炅)의 따님을 맞이하여 3남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