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정주영 회장님 20주기에
나는 배재고등학교에 재학중에 학교의 추천으로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금강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노점상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던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으며, 놀라운 인연도 가져다 주었다.
어느날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찾아가보라는 것이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에 있던 현대그룹 본사 회장실을 찾아갔더니 비서실장이 맞아주셨다.
비서실에서는 내게, '정주영 회장님 댁에 입주하여 막내아드님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했다.
"1살 아래인 막내아드님과 형제처럼 마음 편하게 지내라"고 덧붙이셨다.
말하자면 입주과외인 셈이었다.
• 청운동 자택에서의 생활
그렇게 시작된 1년간의 청운동 정주영 회장님 댁에서의 생활은 내게는 더없이 신비로운 세계였다.
집 안에 농구코트와 계곡을 막아 만든 수영장이 있었고 넓은 마당 전체가 잔디였다.
잔디마당의 지하는 보일러실과 주차장이 있었고 넓은 회의실과 식당까지 있었다.
방마다 TV가 있었던 것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집안에 일하는 분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매일 드나드는 손님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느 가정집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2층 복도에 들어서면 맞은편 안쪽이 안방이었고, 그 옆 오른쪽 방이 막내아들 방이었다. 그 방에 내 책상도 나란히 함께 있었다.
창문으로 산기슭과 나무들이 보이는 조용한 방이었다. 가끔 산새울음이 들려오는 고요함이 좋았다.
• 정주영 회장님과 새벽조찬회
어느날 새벽에,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님이 방으로 올라오셨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있다고 하니 정회장님께서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정회장님과의 '조찬회'는 제법 많은 날들로 이어졌다.
엄청나게 큰 원탁에 어른과 단둘이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그 어려운 분위기에 눌려, 진수성찬인들 어찌 제맛을 알았을까.
정회장님께서는 내가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을 좋아하셨고, 나를 두고는 굳이 '선생님'이라 호칭하며 막내아들의 하루 일과를 물으셨다.
어려워하는 나를 편하게 해주시려는 듯, 식사 중에 인생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만날 때마다 덥석 손을 잡아 악수하시던 그 크고 두터운 손에 비해, 참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님'이셨다.
정회장님께서는 쌀장사로 시작한 사업에서 대그룹을 이루게 되기까지의 속이야기를, 마치 회고록을 쓰듯 편안히 들려주셨다.
나는 열심히 경청하며 밥만 먹으면 되었다.
그러셨다.
쌀장사를 하면서 자동차, 건설, 조선...이렇게 크게 사업을 키워올 수 있었던 힘은 단 하나라고 강조하셨다.
신용이 재산이다.
고객들로부터 믿음을 얻는 것, 사람들 관계에서 신뢰를 얻는 것, 그것이 생명만큼 귀한 자산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빈대에 물리며 살아온 세월처럼 어렵고 힘든 날들의 자화상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셨다.
새벽마다 밥상머리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선생님'을 상대로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고 구수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수많은 경험담과 인생철학들이 감동과 함께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꽃혀갔다.
정회장님께서는 '대학교수가 꿈'이라는 나의 말을 존중하셨고, "나중에 우리 대학에 오고싶으면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던 너그러움도 기억난다.
그래서 그랬을까. 언젠가 그 막내아들이 내게, 나중에 울산공대 교수가 되면 어떠냐고 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을 아신 정회장님께서 서가에 꽂힌 '박정희 대통령 선집'을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 혜존"이라는 친필사인이 되어있는 책이었는데, 44년째 서재에 가지고 있다.
• 정몽일 회장과의 추억 하나
막내아들은, 굳이 우리집에 가보고 싶어했다. 종암동 개천가 뚝방 옆 무허가집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졸라댔었다.
나는, 여름 장마철이면 우리집이 개천물에 모두 잠겨, 가족들은 골목에서 비닐을 치고 지낸다고 설명해주었다. 물이 빠지고 방에 들어가보면 천장에 똥덩어리가 말라 붙어있곤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했다.
집에 가면서, 정이 깊은 그 막내아들은 가난한 집구석에서 뒹구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사들고 가고 싶어했다.
나는 비싼 것은 좀 꺼려졌다. 그를 데리고 빈민가 골목 입구에 있는 노점으로 가 풀빵을 여러 봉지 사들고 집으로 갔다.
무허가집 단칸방에서 8남매가 지지고 볶고 있는 모습에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곰팡이 썩는 냄새에 코를 막았고, 뻥뚫린 양말구멍으로 튀어나온 아이들의 발가락에 안쓰러워 하기도 했다.
이런 집안의 장남인 내가 굳이 고아원 야학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동생들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질책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와 소신이야 달랐지만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속이 깊던 그는 연세대학교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한참 뒤에 돌아와 현대종합금융의 회장을 맡았다. 지금의 현대기업금융이다.
나는 고려대학교로 진학해 80년대의 험난한 세파를 헤쳐가며 현장에서의 거친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둘이는 서로 다른 각자의 세계를 지내오면서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져 갔다.
• 정몽준 회장과의 기억
어느 여름날 테니스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탄탄한 몸을 지닌 형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인사를 드렸더니 "어~들어서 알고있어요"하며 따스하게 맞아 주셨다. 군대에서 전역한지 얼마지 않았는데, 부드럽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셨다.
나중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일하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 형님과 국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귀티나는 서글서글함은 여전했다.
미국 워싱턴DC의 CSIS세미나에 함께 참석하게되어 준비회의부터 미국출장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가까이서 접해보니 생각보다 실력있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나로서는 막내아들 정몽일 회장 보다도 자주 만나게 된 셈이다.
• 정주영 회장님의 20주기
'아버님'처럼 여기던 정주영 회장님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20년전 오늘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이 깃든 그 청운동 자택에 차려진 빈소에서였다.
오랜만에 보는 자택에서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평소 소탈하고 검소한 정회장님의 성품이 느껴졌다.
초상화 속의 정회장님께서는 여전히 담대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조문을 마치며 여러 상주들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막내아들 정몽일 회장과도 오랫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 오늘 남다른 추억을 남겨주신, 정주영 회장님의 20주기 기일을 맞아 고인을 추모하는 묵상을 하다보니, 문득 오래 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내 지독히도 궁핍했던 시절의 저켠에서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남아있는 삶의 편린들이다.
아프지만 소중했던 젊은 날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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