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삼의 복원, 미술의 시간을 되돌리다] (1) 다빈치 ‘최후의 만찬’ 복원 논란
복원 후 너무 환해지고 얼룩덜룩 빈칸 남은 ‘최후의 만찬’
브람빌라 복원 전(사진 위)과 후 ‘최후의 만찬’. 전체 이미지를 보면 복원 후에 확연히 밝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전문가는 현재 남아 있는 오리지널 물감층이 40%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처=Santa Maria delle Grazie 공식 홈페이지
내 기억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처음 본 곳은 어린 시절 시골 한 이발소에서다. 자줏빛 벨벳 위에 예수님과 12명의 사도를 조악하게 찍어 놓은 것인데, 그 후로도 미술 교과서는 물론이고 수학여행지에서 나무판에다 그린 인두화, 인사동 길바닥의 상업화, 교회의 전단지, 잡지의 화보 등 다양한 형태로 접하게 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 그라치에 수도원에 소장된 ‘최후의 만찬’은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다빈치는 이미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받았고, ‘최후의 만찬’ 역시 너도나도 흉내 내어 그리는 통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그러나 이 명화에는 보존상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제작 당시 다빈치는 젖은 회벽에 안료만을 이용해 그리는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 대신 안료에 계란과 오일을 섞은 템페라 물감을 마른 회벽에 그리는 실험적인 제작 기법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당대에도 이미 균열이 가거나 물감이 떨어져 나가는 등 손상이 발생했다. 기록에 의하면 1620년도에도 그림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더구나 외부 침략에 의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림이 그려진 벽의 중앙에 문을 냈고, 나폴레옹 군사들은 그림 속 인물들에게 돌을 던지는 놀이까지 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폭탄이 정확히 이 작품이 있는 수도원을 강타하기도 했다.
복원 후 예수님의 모습
사정이 이렇다 보니 떨어져 나간 물감을 아교로 붙이거나 없어진 부분을 덧그리는 등의 복원작업이 수세기 동안 반복됐고, 작품 대부분이 후대의 덧칠로 잠식돼 있었다. 그러니 1970년 말에 이 작품을 복원한다고 할 때 전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브람빌라라는 이탈리아 여성 복원가가 전담해서 하루에 몇 ㎜ 단위로 작업을 진행했고, 1999년 드디어 21년간의 복원이 종료됐다. 막상 전체를 공개하고 나자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세기의 복원’이라고 칭송하며 과거의 덧칠을 제거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원작을 찾아냈다고 브람빌라와 이탈리아 문화성은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과거에 복원된 부분을 너무 말끔하게 제거하는 통에 작품이 희미해져서 그 위용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맹비난했다. 심지어 맨 벽보다 좀 나은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이 복원 작업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예전 복원가들에 의한 덧칠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원작의 손상이 많았으리라 우려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가 너무 화려해진 색조로 복원해 비난을 받았던 것과 달리 ‘최후의 만찬’은 얼룩덜룩한 빈칸이 남아있는 좀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여 다른 차원의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복원 결과물을 놓고 이처럼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음에도 결국 일반에게 공개됐다. 이에 대한 판단도 일반인들의 몫으로 넘어간 셈이다. 이 세기의 복원 작업에 대해 세월이 흐른 뒤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너무 환해지고 얼룩덜룩하게 보이는 ‘최후의 만찬’을 접하면서 살짝 아쉬움을 갖는 것은 복원가인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7월 7일, 김주삼 루치아노(atr C&R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 소장)]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