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9월 14일 금요일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여 불 뱀에 물려 죽자,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여 구리 뱀을 달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광야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렸어도 하느님의 지시로 높이 매단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 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따금 우리는 답답하고 힘들 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찾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악 때문에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도 없이 피해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나 가정 곳곳에 불안과 불신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모두 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 뱀입니다. 반면 구리 뱀은 우리가 지닌 상처를 치유해 주고 우리 사회 안에 널리 스며든 독소를 해독해 주는 역할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구리 뱀은 장차 십자가에 매달리실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결국,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다른 이의 죄를 뒤집어쓰심으로써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대속(代贖)의 역할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대속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다른 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습니까?(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이제는 많이 연로해지신 선교사 신부님, 스페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통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마치 투사 돈키호테 같으셨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하철역 에스켈레이터 끝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벼락같이 화를 내시면서 뛰어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피켓을 뺏들고는,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 천주교회로 나오십시오! 우리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신부님은 당시 피켓맨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ㅋㅋ 젊은 형제들의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위해 승용차로 모시고 갈때면, 창밖을 바라보며 늘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여기도 십자가, 저기도 십자가,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많은 교회 십자가 아래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볼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구원을 꿈꾸지만, 사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천국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건너가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부정할 때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나 사회의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나 고통, 희생이나 헌신이 없는 달콤한 인생, 편안한 신앙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한 걸음 한 걸음씩의 성장과 인내와,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노력, 결국 십자가와 고통은 외면합니다.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 초창기 시절의 일입니다. 돈보스코와 동고동락하기 위해 찾아드는 아이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나고, 숙소며, 먹거리며, 입을거리 마련이며, 할일은 태산같았습니다. 할수없이 그는 연로한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도움의 손길를 건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평생에 걸친 고생을 끝내고 이제는 손자손녀들 품에 안고 편한 여생을 계획했었는데, 갑작스런 아들 신부의 초대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로 여기고 하루 온종일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삼시새끼 식사며, 청소, 이불빨래, 옷빨래로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지친 맘마 마르가리타가 아들 돈보스코를 떠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돈보스코는 아무 말없이 손을 들어 벽에 붙어있던 십가가를 가리켰습니다. 십자가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이 펼치는 위대한 사목의 가장 큰 협조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며 구원의 열쇠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꺼이 지고가려는 사람은 드믑니다. 때로 피하고 싶어도, 때로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또 다시 십자가를 선택하고, 십자가 안에 담긴 구원의 신비를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우리 삶의 이정표요 지침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나는 내가 지고가는 이 십자가가 너무 작은 것 같아 늘 부끄럽습니다.”(복자 샤를르 드 푸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성 콘라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천국에도 고통이 있다>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습니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습니다. 왕은 문제를 냈습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 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은 키가 커야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 페로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나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 십자가다!”
그 후 존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은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이 ‘십자가’의 희생을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하늘의 뜻에 반하여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건 누군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십자가는 존재할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칫 천국을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곳은 천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도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도 못 박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당신의 뜻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차피 상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뜻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천국에도 있습니다. 천국에도 아버지는 아드님께 성령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것이고 아드님은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천국에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끊임없이 못 박아야합니다. 자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꿈틀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 앞에서 언제나 우리 뜻을 죽이는 고통을 감내해야합니다. 천국에는 자신의 뜻을 십자가에 매달 수 있는 수준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 십자가의 고통이 지옥의 고통과 다른 것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아를 죽여 그 피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지옥은 그 자아를 죽이지 못해 영원히 자아의 종살이하는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여 결국 그분으로부터 오는 부활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과 지옥의 두 고통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야합니다. 고통의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다만 육체의 성향을 잘 알기에 운동하는 고통을 달게 받아 건강이라는 영광을 받던가, 아니면 육체에 져서 편안함만 추구하다가 병이라는 고통을 받던 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십자가의 고통을 피해가지 못하셨습니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들이야 어떻게 이 고통을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떠한 고통이든 겪어야한다면 부활이 있는 고통을 선택하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병의 고통을 겪는 것보다 운동의 고통을 겪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을 통해 이승에서부터 천국의 고통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
오늘의 축일
성 십자가 현양축일(9월14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의미 있는 상징(Symbol)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단연 성 십자가(Holy Cross)와 십자고상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높히고 우러러(현양) 경축하는 날입니다. 교회사에서 볼때,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습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 복음(요한 3, 13-17)은 요한 복음사가 특유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한 3, 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을 항상 추구하던 열심한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점을 확신하며, 어떻게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묻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길(the Way)을 ‘성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모습을 민수기 21장 1-9절에서 언급되는 ‘구리뱀’에 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온갖 불만을 늘어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하고 모세가 하느님께 간청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 21, 8)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더불어 뱀은 허물을 벗는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쇄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4-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리뱀처럼 십자가 위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시고, 삽자가 기둥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1코린 15, 3).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써,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셨고(콜로 1, 20), 죄로 생긴 다툼과 분열을 없애시고, 평화와 일치를 회복하여, 당신과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에페 2,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