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소리 같지만, 흔히 하는 말에 <내가 아끼는 후배야. 잘 부탁하네.>, <애낄걸 애껴야지, 아끼다 x된다는 말 못 들어 보았나?>, <참 아까운 친구가 죽었어.> 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의 어원(語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었다. 너무나 당연한 걸 자꾸 캐 물으면 모자란 사람으로 여기는데, 혹자는 우리말인데 뭘 고민하나? 순우리말 아닌가? 그럼 오막집, 오두막, 오두막집, 오막살이, 움집의 어원은 무엇일까?
한글학자들은 우리말에서 찾을 것이다. <옴>이라 발음해 보면 입을 오무리고 콧구멍을 좁히니 좁고 모아진 상태를 말한다. 오무라 들다, 옴치다, 오목하다, 우묵하다에서 어원(語源)을 찾을 것이다.
나도 불과 몇년전에는 당연 그리 생각해 왔었는데 漢字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쇠는 설 명절 <설>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사람들은 낯설다에서 왔다는 둥, 쇠다에서 왔다는 둥 그 주장이 많은데, 한자로 몇 살 할때도 歲로 쓰고, 설관련 한자로 <세배(歲拜), 세찬(歲饌), 설빔(세장, 歲粧), 과세(過歲), 세모(歲暮)>가 있는데, 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이다. 나이를 말할때 살은 설에서 모음만 살짝 바꾸었을 뿐이다.
결론은 우리말 설은 歲의 한자음에서 온 것이다. 지금 북경 표준음은 <쒜에>에 가깝지만 광둥어(홍콩) 발음은 설에 가깝다. 우연의 일치 아니냐고 항변할 사람이 많을텐데, 그럼 우리말 씻다는 어디서 온 말일까? 洗, 洗手, 洗面, 洗衣服은 씨이, 씨쇼오, 씨리엔, 씨이푸 로 발음한다. 한자음 洗에서 씻다는 우리말이 온 것이 틀림없다. 씻다의 씨(洗)는 너무 닮았다. 경상도 사람들은 <씻어라> 를 <씨이, 씨이라> 고 말한다.
그럼 <움집> 할 때 움은? 움(庴), 이 글자가 움집 움字다. 우리말 움집은 한자에서 온 것이다. 순우리말인줄 알았는데. <오막집, 오두막, 오두막집, 오막살이> 도 모음을 살짝 바꾸었을뿐 한자 움(庴)에서 왔을 것이다. 막은 幕이고. <오두막>은 <옫의막, 옷의막, 옷이막, 우의막>으로 변형이 가능한데, 그 어원은 <움(庴)>일 것이다. <오막집>은 <움막집> ---> <옴막집> ---> <오막집, ㅁ생략>,
<오두막>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움막(庴幕) ---> 옴막 ---> 오막 ---> 오ㅅ막 ---> 옷의막---> 오드막 ---> 오두막.
<아깝다, 아끼다, 애끼다>도 한자 愛에서 온 말이다. 애는 사랑하다는 뜻도 있지만, 아끼다는 뜻도 있다. <애끼다>가 움라이트 현상에서 온 줄 알았는데 한자음 愛에서 온 것이다. 아래 <節愛堂記>를 읽어보면 백성을 사랑한다는 愛民이 나오는데, 愛日, 割愛, 愛用, 愛惜, 自愛에서 愛는 아낀다는 뜻이다.
애일당(愛日堂)은 해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고 <날을 아낀다>는 뜻이다. 애일(愛日)은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효지孝至」에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스스로 부족함을 알았던 이는 오직 순 임금이로다. 이 세상에서 오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이르니, 효자는 하루하루를 아낀다. [事父母自知不足者 其舜乎 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고 한 데서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이미 우리말이 되었는데 굳이 漢字를 들먹여서 갸우뚱한 사람이 태반이고 실망한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권대재(權大載)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기사가 나오나 충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충주 관련 읍지(邑誌)에서도 절애당(節愛堂)이란 기록을 찾을 수 없었는데,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권대재(權大載)가 충주목사였던 것이 확인된다.
절애당기(節愛堂記)를 보면
<현종(顯宗) 14년(1673)에 충주 권 사군(權使君)이 청사(廳舍)를 지었다.>
고 나온다.
계축년(癸丑年)은 1673년(현종 14)이다. <계축일기>의 주요 내용은 당시 조정을 흔들던 효종왕릉 이장(천장) 문제의 수습과 정국 안정을 위해 우암 선생이 상경했다가, 여주 현장을 살피고 관료들과 대책을 논의한 뒤 화양동 은거지로 귀향하는 여정이다.
《송자대전 선역본(宋子大全)》
송자대전 제134권/ 잡저(雜著)
<계축일기(癸丑日記)> 中
[9일에는 가흥(嘉興) 촌사(村舍)에서 묵고, 10일 저녁 누암(樓巖) 에 이르니 충주 목사(忠州牧使) 권대재(權大載)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수태(受台)와 작별하고 충주 목사를 보내고는 초려ㆍ운거 및 두 손자와 함께 달천(㺚川) 촌사에서 묵었다. 11일에는 괴산(槐山) 지방에 이르니, 군수(郡守) 황세구(黃世耉)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괴산 역촌(驛村)에서 묵고 12일, 화양(華陽)에 도착하였다. (九日宿嘉興村舍。十日夕至樓巖則忠牧權大載來待。遂與受台別。謝送忠牧。與草廬,雲擧及二孫。宿㺚川村舍。十一日至槐山境則郡守黃世耇來待。宿槐山驛村。十二日至華陽。)) ]
◇권대재(權大載)
조선 후기에, 전라감사, 홍문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호: 간은(艮隱), 소천(蘇川)
자: 중거(仲車)
출생 연도: 1620년(광해군 12)
사망 연도: 1689년(숙종 15)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호조판서
조선 후기에, 전라감사, 홍문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 간은(艮隱). 지중추부사 권상(權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아버지는 진사 권위중(權偉中), 어머니는 신종사(申宗泗)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1658년(효종 9)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해 전적에 승진되었고, 병조좌랑 · 창평현감 등을 역임했다.
1660년(현종 1) 전라도도사 역임시 과거 시관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파직되었고, 1666년 공산판관(公山判官) 때에는 소송자를 함부로 죽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으로 처신했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직 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친 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승지 · 영남순무사 · 대사간 · 대사헌 ·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적극 주장했다. 남인이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하는 청남(淸南)과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서 활동하였고, 1679년 청남이 정권에서 물러나면서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쫓겨났다.
그 해 10월에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잡자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자 홍문관제학으로 등용되었다. 같은 해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주전(鑄錢)을 반대하였고, 송시열과 김수항(金壽恒)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미수기언(眉叟記言)
기언 제30권 원집 잡편
치체(治體)
번역문
충주(忠州) 절애당기(節愛堂記)
현종(顯宗) 14년(1673)에 충주 권 사군(權使君)이 청사(廳舍)를 지었다. 대체로 옛것에 의하여 다시 중창한 것인데, 이름을 ‘절애당(節愛堂)’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자가 말한,
“절도 있게 쓰고 백성을 사랑하라.[節用而愛民]”
는 뜻을 취한 것이다. 충주는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에 국원성을 빼앗아 귀족(貴族)들과 육부(六部)의 호걸(豪傑)들을 이주시켜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그 지역이, 큰 준령(峻嶺)의 험조(險阻)를 끼고 있어 영해(嶺海 조령(鳥嶺) 이북과 해주(海州) 이남)의 도회지(都會地)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하며 상인이 많다. 선왕(先王)의 정치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백성과 식량이다. 식량은 백성에게 제일 절실한 것이고 재물은 백성의 자본이 되는 것으로, 재물보다 식량이 더 우선이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목민(牧民)은 사시(四時)에 힘쓰고 창고를 잘 지키는 데 있다.”
하고,
“백성의 간사함을 막는 것은 허세를 금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허세란 재물 낭비를 방지하는 데 있어서 우선으로 금해야 하는 것이다. 절도 없이 허세를 부리다 보면 재물이 바닥나고 재물이 바닥나면 힘이 위축되고 힘이 위축되면 위태하게 된다. 그래서 식량을 절약하고 때에 맞게 일을 하며 수입에 따라 지출을 하여 저축이 많아져서 모두가 잘 살게 되어야 예악의 가르침이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예절을 만들고 법도를 삼가는 것이 정치의 큰 임무이며 재물을 절용하는 것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기본이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옛날 관중(管仲)이 제(齊) 나라를 다스릴 때, 강 태공(姜太公)의 옛 법을 되살려서 경중(輕重)의 9부(府)를 설치하여 나라가 부강해지므로 온 천하가 제 나라에 조회를 하였다. 훌륭하다, 권 사군의 다스림은 근본 요강에 밝은 것이라 하겠다. 사군의 이름은 대재(大載)요, 자(字)는 중거(仲車)며 영가인(永嘉人 안동(安東))이다.
갑인년(1674, 현종15) 2월 6일에 공암(孔巖) 허목(許穆)은 쓴다.
[주-D001] 육부(六部) : 신라 때 씨족 중심으로 각기 맡아 다스리던 구역을 말한다. 즉 급량부(及梁部)ㆍ사량부(沙梁部)ㆍ본피부(本彼部)ㆍ점량부(漸梁部)ㆍ한지부(漢祗部)ㆍ습비부(習比部)의 여섯 부로서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裵)ㆍ설(薛)씨에게 나누어 주었다. 《三國史記 卷1》
[주-D002] 소경(小京) : 작은 서울이란 뜻이다. 신라 때 정치 및 군사상 중요한 지방에 특별히 설치하였던 것을 말한다. 《三國史記 卷4》
[주-D003] 경중(輕重)의 9부(府) : 경중은 돈이고 9부는 재물을 저장하는 아홉 개의 창고이다. 주(周) 나라 때 아홉 관부(官府)를 각처에 두어 재물과 화폐[財幣]를 관장하였는데, 이것은 강 태공(姜太公)이 제정한 것이다. 《漢書 食貨志》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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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 절애당기(節愛堂記)
원문
忠州節愛堂記
上之十四年。忠州權使君作聽治之堂。蓋仍舊作而修創之也。名之曰節愛之堂。孔子所謂節用而愛民者也。州古之國原。新羅時。徙貴戚六部豪傑。置小京。其地據大嶺之阻。爲嶺海之都會。土沃富饒多賈。先王之治。所重民食。食者。民之所急。貨者。民之所資。食先而貨次之。管子曰。牧民務在四時。守在倉廩。止民管莫如禁文巧。文巧糜財之大禁。用之無節則財匱。財匱則力屈。力屈則阽危。食節事時。量入以爲出。厚積儲。大小富樂。然後禮樂之敎可興。故制節謹度。政事之大務。節用又愛民之本。不特一州之治爲然。措之於天下國家皆然。昔者。管仲治齊。修太公之舊置輕重九府。天下朝齊。善乎。使君之治。可謂明於體要者也。使君諱大載。字仲車。永嘉人。閼逢攝提格仲春六日。孔巖許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