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방영된 오지명 주연의 "칼"은
1982년 이외수 작가의 "칼"을 드라마로 제작하였습니다.
태생이 유약하여 어려서부터 무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박정달은
칼 수집에 몰두하면서 정신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부조리로 가득한 정의를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이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혼이 깃든 전설의 신검을 완성해 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 년 동안 명검을 만드는 칼을 제작하는 정신, 그 과정의 삶을 글의 미학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그날까지 ‘쓰는 자의 고통이 읽는 자의 행복이 될 때까지’라는 좌우명을 가진 이외수 작가는
그의 장편 소설 "칼"의 주인공 박정달의 검을 모으며
무력을 극복하고 전설의 신검을 만드는 과정을 삶의 옷으로 입고
탁월한 상상력으로 언어의 연금술사, 그 꿈을 이루는 현자의 돌을 찾아 감성마을로 성취하였습니다.
이외수 작가의 감성마을은
개집에서 잠을 자고 지붕위의 기와에 누워 소주잔을 기울이며 방랑하였던 삶의 결실로
전설의 신검을 감성마을로 얻었으며 언어의 연금술사로 현자의 돌을 찾아
문학의 소통과 공유의 황금탑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행과 파격과 괴벽으로 바보같은 천재, 광인같은 기인의 소설은
문예적 소통과 공유의 감성마을을 완성하였으나
폭언을 담은 술주정의 삶의 실상은 전설의 신검으로 이룩한 감성 마을의 폭탄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통과 공유의 상징으로 금자탑을 쌓았지만
괴벽과 광인의 삶은 감성마을, 그 삶의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하고 닫힌 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외수 작가는 무력을 극복하기 위해 칼을 수집하듯 소설로 언어의 연금술을 펼쳤고
전설의 신검을 제작하듯 현자의 돌을 찾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
문화 대통령이라는 명호를 얻었습니다.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말씀의 창은
감성마을의 눈높이를 재단하였습니다.
이외수 뿐만 아니라 문화권력의 상징이었던 하늘의 별을 달았던 그들은
자유분방의 예술적 삶의 흔적으로 남은 성추행 등의 파문으로 별똥별, 그 유성이 되었습니다.
외설과 예술을 넘너드는 도전과 모험은
작품의 세계가 증강 현실이 될 때 죄의 관행은 상습적인 일탈이 되었습니다.
문화 권력의 힘은 문화예술을 주도하였지만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 그 카르텔을 형성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성추행과 성폭행과 뇌물이 죄가 되지 않는 법을 만들어
질주의 본능으로 종말론적인 타락을 할 것입니다.
문화 권력의 폭력 뿐만 아니라 방송의 조작과 왜곡과 날조는
언론과 방송의 폭압과 폭거로 군림하는 대중의 채찍과 전갈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무색하게 하는 언론과 방송의 폭거는
법과 권력 위에 군림하는 적폐지대가 되었습니다.
최근 보수 성향의 유튜브 방송마저 폭압과 폭거에 물든 변똥과 소똥과 개똥은
애국적 소통과 공유의 광장을 저해하는 장애의 장벽이 되었습니다.
글향의 멋은 일필휘지의 필력이요, 화술은 입의 검이요,
장인의 단금질은 혼이 깃든 공력입니다.
소통과 공유의 삶, 그 눈높이는
필력과 공력의 내공수련, 그 실상의 열매입니다.
영양가 없는 전화질로 소통을 운운하고
소셜네트워크의 거창한 이름으로 하류인생을 공유한다면 민도의 수준이 떨어질 것입니다.
포르노 삶의 공유로 번창하였던 소셜네트워크는
가상현실을 즐기는 파괴된 영혼, 그 사망의 덫과 올가미와 함정의 늪이 되었습니다.
수준 높은 삶의 문화를 소통하고 공유하는 광장은
소셜네트워크이 샹그릴라가 될 것입니다.
해안의 절벽절리와 기암단애의 주상절리는
오랜 세월 동안 바닷물의 풍랑과 흘러간 물, 그 풍상의 상처로 남은 정중동의 궤적이요,
시선의 풍광으로 소통과공유의 광장이 된 천혜의 비경은 관광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창은
감나무 아래 홍시가 떨어지기를 바라고 누워서 입벌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올라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는 피안의 삶입니다.
산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친화적 삶의 소통과 공유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는 등정의 정신으로 굵은 땀을 흘려야 정상의 호연지기를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마니의 산행으로 길 없는 숲을 헤치고 산의 보물을 찾아야 산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고
계곡을 탐사하는 열정으로 만나는 그 긴 호흡으로 천혜의 비경을 산의 정기로 품을 수 있습니다.
시선의 풍광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천혜의 비경은
장인의 단금질과 같은 굶은 땀방울에 투영된 탐사의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산의 흙은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생명의 보고요,
깊은 산은 죽은 나무, 그 고목에서도 겨우살이와 상황버섯과 차가버섯 등 산약초의 보고입니다.
소나무의 싱그러운 향기는 산행인의 건강한 삶의 호흡으로 소통과 공유의 향취요,
그 뿌리의 백령봉과 송담과 송이와 송라와 불로괴는 산약초의 소통과 공유, 그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암절리의 계곡은 흘러간 물을 기억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물의 도전을 받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최상급 협곡의 절리를 형성하였습니다.
가진 것 없고 나눌 것 없는 소통과 공유는
무력을 극복할 수 있는 한 자루의 칼도 수집하지 않는 절망이요,
세상의 불의와 정의의 빛을 발하는 전설의 신검을 만든 장인의 단금질은
언어의 연금술을 펼치는 감성마을의 금자탑을 이룩할 것입니다.
천혜의 비경은 시선의 풍광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창조의 힘을 가졌고
깊은 산의 귀한 산약초는 끝없는 소통과 공유를 원하는 산약초 채취의 목마른 갈증, 그 자체입니다.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창은 흘러간 물을 담수하는 고인물이 아니요,
흘러간 물을 기억하지 않고 늘 새론 물의 도전으로 창조적 능력의 걸작을 만들어 내는 기암단애,
그 협곡의 절리입니다.
시선의 풍광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허접한 실상은
눈 높이를 가진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창의 진면목이 흘러간 물일 뿐입니다.
계곡은 흘러간 물을 기억하지않고
떨어진 꽃은 시선이 풍광으로 즐기는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새가 되어 날라가면 나무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그리운 사랑이라 말하는 것은
소통과 공유의 미학이 아니라 어줍잖은 작가의 푸념일 것입니다.
참으로 소통과 공유의 본질인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을 읽고 듣고 전하는 그 말씀의 창은
달려가며 역주하는 움직이는 교회의 소통과 공유, 그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창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소통과 공유의 삶은
말씀 묵상의 주마등 되어 달려가는 언약의 강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고 하였고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새기고 달려가면서도 볼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바톤을 받은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의 광장을 경주하는 운동장의 그림으로 수 놓아
허다한 무리들이 둘러싼 가운데 시온의 대로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소통과 공유의 광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혼자 가는 길.....
그러나 그 길에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시민과 늘 함께 하며
기도 산행으로 만나는 산행인의 자취는 언제나 풍요롭고
카메라의 앵글에는 축제를 즐기는 인산인해의 인파로 시선의 풍광은 다체롭기만 합니다.
도심의 자연인으로 살지만 늘 함께 하는 들꽃과 같은 민생은
더불어 함께 하는 실상의 삶, 그 풍요로운 삶의 정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타인과 사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오픈된 마인드로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창이 되었습니다.
끝없는 탐사와 관찰은 혼자 가는 길이지만
삶의 현상과 그 본질을 연구하는 소통과 공유의 삶이 되었습니다.
독서를 통한 작가와의 만남은
프로페셔널한 삶의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카메라 앵글에 담긴 야생화와 들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서정과 소통하며 공유하는 풍성한 정서를 함양하였습니다.
계곡의 탐사로 만나는 기암절리의 장관은
천혜의 비경을 시선의 풍광으로 소통하며 공유하는 행복을 선사하였습니다.
애국 유튜브 방송을 통한 태극기 물결과의 만남은
진실과 거짓에 대한 실상을 적확히 이해하는 소통과 공유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 독립 투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살아 있는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애국 열사들의 아스팔트과 광장은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지향의 소통과 공유를 통한 진실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너와 우리의 삶에 대한 소통과 공유는
관심의 창으로 쏟아지는 영롱한 햇살,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어발식 오지랖 넓은 소통과 공유는
소셜네트워크의 공해, 그 자체일 것입니다.
목사 셋이 모이면 시정잡배가 된다는 풍설은
타락한 소통과 공유의 현상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술과 혼숙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문화는
좌파적 문화권력의 실상이요, 타락한 문화의 메카니즘이 되었습니다.
소통과 공유의 유희가 된 쇼통은
거짓의 메카니즘이 된 메이저 언론과 방송과 검찰과 국회와 헌재와 법원의 정체성 되었습니다.
밥 한끼, 술 한잔, 차 한잔의 만남은
타락한 소통과 공유의 블렉홀, 그 첫 단추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수준 높은 소통과 공유의 삶과 그 창은
진실과 사랑과 정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의 소통은
밥 한끼 줍소하는 거지 근성보다 밥 한끼 합소라는 베푸는 삶의 미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