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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을 위한 수용전념치료
- 신학과 심리학의 조화, 그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향하여
오늘 이렇게 저를 초대해 주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으셨다시피 현재 저는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 한국 침례회의 목사이기도 합니다. 또, 저의 심리상담 공부의 시작을 미국의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담사, 상담심리학 교수이기 이전에 교회 부교역자로서의 사역을 더 오래 해 왔기에 사실 신앙 안에서의 상담이 더욱 반갑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더욱 반갑고 신앙 안에서 심리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기쁘고 즐겁고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심리학을 중심으로 상담을 해야 할지 신학을 중심으로 상담을 해야 할지 하는 지점입니다. 이는 기독교 심리학을 공부한 많은 분들이 경험하는 바일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석사 초기의 훈련 덕분에 그런 혼란이 적었습니다. 제가 석사 공부했었던 학교의 교수님들은 일반심리학을 가르쳐 주시고는 그것을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 분석해 주셨습니다. 어떤 이론의 어떤 면이 기독교적 가치관에 받아들일만 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덕분에 저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거의 충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하나님의 샬롬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차원으로 설명되는 상담이 당시로서 제게는 참 도움이 되었던 설명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새로운 심리학 이론들을 배우더라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상담을 지속하면서 늘 문제가 되는 지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성경적 인간론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측면 모두가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비신앙인도 찾아오는 상담 장면에서 죄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독인 상담사들이 비기독인 내담자들과 상담할 때 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 성경의 인간론과 심리학의 경계선 : 죄
상담에서 죄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사실, 분명한 행위로서의 죄는 오히려 다루기 쉽습니다. 저는 학교에 오기 전에 사설상담센터에서도 참으로 많은 내담자들을 만났었는데요, 저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내담자들 역시 자신의 삶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외도를 하고 있는 내담자들은 자신에게 종교가 없더라도 배우자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음을 보통 고백합니다. 배우자 앞에서는 당당한 척 하더라도 상담실에 와서는 사실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지요.
어릴 적 부모에게 학대당한 내담자들도 부모에 대한 분노와 그래도 부모인데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제 경험에서는 생각보다 ‘잘못’으로서의 죄에서는 크게 부딪힘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문제라고 할 부분은 오히려 원죄, 즉 존재론적 죄인의 설명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잠시 성경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죄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입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인간이 사는데 실패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애써본들 하나님의 뜻을 달성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이라는 타자의 의도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라니, 믿지 않는 이들 입장에서는 그 신 참 엄격하고 무섭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의 ‘선함’에 대해서 C S 루이스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만 좋고 인간에게는 좋지 않은 방식을 가지지 않으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신적 수준의 선함’이 그래야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겠지요. 따라서 이 부분은 오늘의 논점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심리학에서 칼 로저스의 “온전히 기능하는 인간”이라던가 “누구나 달성 가능한 자기실현”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심리학과 기독교의 사이에는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만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것만 같은 심리학과 인간의 문제와 한계를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 간에 다리가 놓아질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강의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점쳐 보고자 합니다.
- 하마르티아에 대한 인간적 이해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주인공의 하마르티아
하마르티아에 대해서 성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설명해 주는 이는 없을까요?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의 하마르티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하마르티아를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가진 어떤 문제로 이해합니다. 어떤 문제인지는 오히려 모호하게 남겨 두어 지금까지도 연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위인은 못 되어도 큰 흠결이 없거나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통보다 나은 부분을 가진 이들이 하마르티아로 인하여 비극적 결말로 끌려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되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삼게 될 것이라는 저주스런 예언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예언으로 인해 왕궁 밖에서 살게 된 그는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 그는 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사람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의 문제들을 헤쳐나가는 태도로 살다 보니, 자신은 알지도 못했던 친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그 자리를 빼앗으며, 어머니를 왕비로 맞이하게 되어버립니다. 그 저주스런 예언대로 자신의 삶이 끌려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궁궐 밖에서 태어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며 거칠 것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삶의 태도가 인생 전반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런 힘에 이끌리어 결국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또한 그의 에언에 대한 무지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스로를 비극으로 이끌고 가는 인간의 어떤 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비극이라는 최종적 결말로 이끌고 가는 도움되지 않는 방법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상을 그리게 해줍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는 오늘날의 인간상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비극에 이끌립니다. 건물을 상속받은 어떤 부자는 인생의 공허함 때문에 밤마다 눈물 흘립니다. 어떤 부자집 자녀는 남들보다 많은 돈을 가졌지만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몸서리칩니다. 또 자수성가한 사람은 젊었을 적 친구들과도 새로 주변에 있게 된 사람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해 외로움 속에서 허무감을 경험합니다. 이를 극복해 보고자 재력과 권력을 과시해 보고 성과도 내지만 그것이 자신을 더욱 절망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이러한 예시들은 밤 새도록도 들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삶을 열심해 개적하려 하였고 심지어 한 나라의 왕이 되기까지 하였지만 비극적 결말을 피할 수 없었듯, 우리네 인생들도 나름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비극을 향해 이끌리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요? 그것을 가리켜 하마르티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마르티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해가 성경적 죄론의 모든 측면을 반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라는 영역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이미 경험하는 죄인의 자기경험, 하마르티아의 내적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꽤나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나름대로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형상이기는 하기에 무엇인가를 해내게 되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서 달려나가게 되는 인간의 측면 말입니다.
- 수용전념치료 :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심리학
만일 어떤 심리학이 있어, 스스로를 위해서 노력은 하지만 인간이라는 한계로 인해 자꾸만 비극적 결말로 자신을 끌고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측면을 잘 설명해 준다면, 우리는 이 심리학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수준의 하마르티아, 즉 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심리학들은 많이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심리학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들 수 있는 것이 수용전념치료라는 이론입니다.
- 수용전념치료의 유한한 인간
수용전념치료는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내려 들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로 이끌려 간다고 말합니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이 문제를 이겨내려고만 들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수용전념치료가 이야기하는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 두 가지는 이것입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생각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뇌가 마치 전기회로의 스위치처럼 작동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고 있던 생각을 멈출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럴 때 함께 해 보는 것은 핑크코끼리 활동입니다. 핑크색 코끼리를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잠시 핑크색 코끼리를 실제로 보셨다고 상상해 보시겠어요? 어떤 기분이 드시는가요? 다양한 느낌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자 이제는 지금부터 제가 30초를 드릴 테니, 핑크코끼리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아보시겠어요? 핑크 코끼리도 안되고 핑크색도 안되고 코끼리도 안되고 코끼리 색깔도 안되며 글자도 안되고 저 뒤통수 멀리서 살짝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안됩니다. 시작해 볼까요?
어떠셨나요? 보통 100분을 대상으로 하면 한두분 정도만 성공합니다. 성공하신 전략은 생각하지 않기 위한 전략을 사용합니다. 다른 생각에 몰입하는 것이지요. 맞아요,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성공했구나” 무엇을요? “핑크 코끼리 생각 안하기를” 네, 그러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감정조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어느 풀장에 상어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널빤지 하나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한 연구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실험에 참가하게 되셨습니다. 저 의자에 가서 앉으세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민감한 센서를 부착해 드릴 것입니다. 이 센서는 아주 정확하고 민감해서 당신이 조금만 불안해 하면 널빤지가 빠지고 상어가 있는 물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상어들은 매우 굶주려 있고요. 하지만 안전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도 될 것은 불안하지만 않으면 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의자에 앉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의지와 선택만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같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용전념치료는 인간의 인지적, 정서적 한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용전념치료는 행동적 한계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인지적 정서적 한계가 인간에게 너무 중요한 나머지 자꾸만 이 감정을 해결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단기적인 행복감에 빠져들다보니, 사소한 중독들에 자꾸 빠지게 되고 정작 자신의 장기적인 행복감을 위한 삶(가정, 관계, 사회기여, 영성, 건강)등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어서 더욱 더 절망적인 상태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수용전념치료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괴로움의 모습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인간상을 상징하듯, 생각도, 감정도, 행동도 자신이 꽤나 지혜 있는 듯 행동하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에 이끌리는 모습을 수용전념치료는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창조적 절망감
수용전념치료는 이러한 절망감을 더욱 더 깊이 받아들이도록 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담 받는 내담자들이 기존의 자신이 사용해 왔던 방법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절망감을 깊이 경험하고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변화를 향할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듣노라면, 마치 죄인인 인간이 자기 스스로서는 자신을 도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 수용-전념과 순종-헌신
그러면 수용전념치료는 어떻게 인간의 이러한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고 있을까요? 크게는 그 이름처럼 수용과 전념이라고 하는 두 과정을 통해서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수용이란 말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고통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가기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였던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로서 더 잘 설명되지 싶습니다.
이를 잘 해내기 위해서는 한가지 장애물을 제거하고 두 가지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한가지 장애물이란 융합입니다. 수용전념치료에서 융합이란 너무 복잡하게 꼬여서 뭐가 뭔지 모르게 길을 잃게 된 생각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생각을 정리하라기 보다는 길 잃은 미로를 탈출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두 가지 능력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융합에서 탈출하는 기술을 탈융합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능력은 현재에 존재하기와 맥락적 자기입니다. 현재에 존재하기란, 과거의 고통이나 미래의 염려에 딸려가지 말고, 그저 지금 현재의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맥락적 자기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기를 의미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처럼 말이지요.
이 두 가지 능력은 마치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자신”을 인식하는 훈련을 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수용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 앞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순종의 태도를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들은 부족한 능력으로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없애보려는 헛된 투쟁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수용과정입니다.
이 다음의 과정은 전념과정입나다. 수용전념치료의 영어명칭은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pay:ACT입니다. 전념에 해당하는 commitment는 종종 헌신으로 번역합니다. 수용전념치료는 무엇에 헌신하라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물론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심리학이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가치에 헌신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가치는 지금 당장 나를 만족하게 해 줄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실천했을 때, 그 실천 자체가 기쁨을 가져다 줄 어떤 것들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상에 기여하며, 건전한 삶을 사는 것들이 포함됩니다. 슬프고 우울한 어떤 사건 자체보다도 이러한 경험이 삶 속에 없어서 진정한 기뿜을 잃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라고 수용전념치료는 이야기합니다.
저로서는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는 것과 연관 짓지 않기가 오히려 힘이 듧니다. 최신 심리학이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수용전념치료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순종과 헌신을 통해서 마음을 치료하는 과정으로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와 수용전념치료를 중심으로 신앙과 심리학의 연결지점을 설명해 보았습니다. 수용전념치료가 인간의 하마르티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하마르티아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신앙을 가지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리고 신앙을 가졌지만, 여전히 괴로움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도구 역시 되어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 모두는 순종과 헌신으로 날마다 치료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