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65/망각의 독후감]수필가 목경희의 ‘그리움의 나라’
2006년에 쓴 졸문을 우연히 발견했다. 독후감 성격의 글인데, 전라고6회 졸업 30돌기념 문집 <쉰둥이들의 쉰 이야기>에 동문 이름으로 실려 있었다. 사연인즉슨, 문집 편집을 맡으면서 아무리 채근해도 글들이 모이지 않아 친구 이름으로 한 편을 대필代筆한 것이었다. 읽다보니 영락없이 내가 쓴 글임을 알겠다. 하여, 16년만에 필자의 이름을 밝히며, 토닥토닥 자판을 두들긴다. <그리움의 나라>를 펴낸 수필가는 친구의 어머니로서, 전북 문단에서는 내로라하는 문인이었다. 처음 친구 어머님의 수필을 접하고 내공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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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머리 팔순 소녀가 지은 ‘그리움의 나라’
“000 내자인데요. 제 시어머님이 책을 한 권 내셨는데, 보내드리고 싶어요”
“아, 예. 예. 고맙습니다”
봄기운에 나른한 사무실에서 졸음을 깨우는 고등학교 친구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퇴근하여 별 생각없이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다 자세를 곧추세웠다.
‘아니, 80줄에 든 할머니(아니 어머니)께서 풀어내는 고향, 친정부모, 학창시절, 손자손녀이야기 그리고 생활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진솔하게 써내려갈 수 있을까’깜짝 놀랐다. 목경희여사, 목경희어머니, 목경희할머니. 책 날개의 약력을 보니 천상 ‘수필가’이다. 그동안 <먹을 갈면서> <분홍꽃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 <길바보의 고백> <우산처럼 양산처럼> <새끼손가락> 등의 에세이집을 펴내셨다.
완주 동상면 출신. 전북고녀(전주여고 전신)을 다니셨다. ‘내 유년의 삼바실’이란 챕터의 몇 편은 한 폭의 수채화인 듯, 수묵화인 듯 싶었다. 마치 대하예술소설 <혼불>이나 <토지>의 첫머리 같기도 했다.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읽던 맛과 기분을 느꼈다. <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을까> 박완서의 글 ‘판박이’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동상면? 동상곶감? 세세년년, 감이 그들먹하게 나는 곳 아닌가. 마당에 죽 늘어놓은 감을 온 마을사람이 모여 곶감을 깎는다. 그 선연한 주홍빛의 추억, 나도 안다. 가난해도 마음들은 얼마나 풍성했던가. 한 동(100접)도 어려운데 한 해 100동을 장만해 삶을 일궈 집안을 세운 친정아버지, 아들 못난 ‘죄 아닌 죄’로 숨죽여 살다가신 친정어머니에 대한 회상, 고향 ‘1일 순례’를 하며 유년시절 기억을 더듬어간 주옥같은 수필을 읽으면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고향길로 내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시방까지 그 소녀적 순정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으셨을까. 영리하고 당돌하고 야무진 ‘훈장댁 계집아이’는 나이 열아홉에 ‘정신대’를 피하려 모교 선생님이 되었다. 해방 직후 운명처럼 짝지어진 혼인, 4남1녀를 낳은 어머니는 세월이 흘러 아주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삶의 노정에는 어릴 적 힘들게 넘던 밤팃재 만큼 견디기 힘든 고비도 많았다. 연애하듯이 사랑한 큰딸의 세상 등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의 사고사, 평생을 의지가지할 반려자와의 사별, 눈물 없이는 하루인들 살아내기 힘들었을 참척의 아픔을 겪으며 글로 마음을 정화시켰다. 그런 뼈아픈 상처를 안고 우리의 어머니이기도 한 목경희님은 글을 써내려갔다. 곰삭은 감정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정제된 문체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래서일까? 참 곱게 늙으셨다. 무엇보다 사물을, 사람을 보는 눈이 따뜻하시다. 꼭 글솜씨가 좋아야 좋은 글도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한 편만 읽어봐도 느낄 수 있는 것이 글의 내공이다. 도무지 예사롭지 않다. 말갛게 길어올린 샘물 한 바가지같다. 전라북도는 바로 예향이 아니던가. 주변에 ‘문학고수’들이 많이 있었다. 시인 신석정 선생님의 총애도 있었으리라.
우리에게 있어 대체 고향은 무엇인가. 고향은 어머니인가? 하나 하나 풀어내는 유년의 고향은 ‘할머니’ 마음 속에 고이고이 살아있었다. 몇 수십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옛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길가의 풀이면 풀, 나무면 나무, 사람이면 사람, 이 모든 게 합쳐져 ‘고향’이 된다. 첫 번째 글은 슬프게 살다 가신 이 땅의 어쩌면 모든 어머니에 대한 곡진한 사모곡이다. 이청준의 <눈길>이 되고 <서편제>가 되고 <혼불>이 된다. 삼바실, 황조리, 연동리, 신사봉... 아무 데나 나오는 탯말은 더욱 정겹다. 까그막, 더그매, 짱짱하다, 삐비, 또랑... 마치 우리 전라도 사람들만의 비밀코드같다.
‘삼바실의 전설’이나 신화는 접어두자. 살아가며 맺은 인연들의 소중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나누는 얘기도 좋다. <봉숭아 꽃물 축제>는 너무 여성스럽다. <신문은 왜 읽는가>를 보자. 어쩔 수 없이 은근한 아들 자랑이다. 엄마의 문재를 타고 났을까? 큰아들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바둑전문해설가로 이름을 날린다. 대학생이 된 손자와의 동거 이야기도 아름답다. 딸의 기일에 사위와 함께 사는 여인네에 대한 덕담도 듣기에 심히 좋다.
<창고 대매출>에는 재밌는 용어 정의도 있다. “10대는 샘플, 20대는 신상품, 30대는 정품, 40대는 명품, 50대는 20% 세일, 60대는 50% 세일, 70대는 이월상품, 80대는 창고 대매출, 80대는 폐기처분” 아하- 세속에 떠도는 말들은 가볍지만 일리가 있다. 하지만, 속단하지 말라. 세상이 어찌 ‘명품들의 잔치’만일 것인가. 이 풍진 세상에 이월되기까지의 삶은 정품이나 명품이 모르는 지혜가 있는 법이다. 그들은 ‘그리움의 나라’를 가슴에 품을 생각조차 못하고 뭔지도 모르게 빛보다 빠른 세상에 발맞춰 그냥 살아왔을 뿐이다. 마음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도 마음에 약간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눈 내리는 밤, 집 옆 동산의 소나무가지, 눈의 무게를 못이겨 쭉쭉 찢어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겨울 쌩쌩 바람에 서걱이는 대숲 잎사귀 소리를 기억한다. ‘도시 촌놈’들은 청솔가지가 불에 탄다고 생각이나 할까? 한번 불이 붙었다하면 치이칙 치이칙, 얼마나 잘 타는데 그 매콤한 냄새라니?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유년의 추억이 있게 마련이다. 그 그리움을 가득 안고,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답게 사는’ 지혜와 슬기를 배우며 살아가야 할 일이다.
이 어머니, 깨끗한 마음으로, 정갈한 몸가짐으로, 아들 손자에게 하나씩 하나씩 알게 해주려 에세이로 적어 내려가고 있으시구나, 순식간에 읽고 또 읽는다. 어른들은 곧잘 “내가 산 이야기만 소설로 쓰면 책이 서너 권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글이라고 다 글일 것이고, 말이라고 다 말일 것인가. 글은 깔끔하게 정제되고 발효되어야 감동을 준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갖고, 슬픔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우러난 글이라야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줄 것이다. 가족편 글을 읽으며 끝내 눈물이 났다. 이에 오랜만에 ‘참한’ 수필집 읽은 감동을 적는다. 따님과 함께 엮었다는 병상문학의 꽃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라는 책도 구해 읽어야겠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름다운 글을 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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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서울신문 문화면에 소생이 인터뷰 제안하여 실린 <그리움의 나라> 저자 인터뷰기사이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513007010.
또한 목경희 어머니는 나의 졸문의 독후감을 보신 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정갈하게 쓴 편지를 서너 차례 보내주셨고, 편지모음집 <숲의 향연>에 주고받은 편지의 전문을 실어놓으셨다. http://egloos.zum.com/yrock22/v/2188456
그 어머니, 수필가 목경희여사님,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오래 사시며 좋은 글들을 많이 남겼으련만 안타깝고 아쉽다.
최근 최명희문학관과 혼불기념사업회가 전북 작고문학인세미나에서 2022년 대상 작가로 선정된 수필가 목경희의 삶과 문학에 대해 전북도민일보에 8회(매주 2회)에 걸쳐 게재하고 있다. 친구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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