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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AC10CC2CB0947X0
시호 인헌(仁憲)
일명 강은천(姜殷川)
생년 948(정종 3)
졸년 1031(현종 22)
시대 고려 전기
본관 금천(衿川)
활동분야 관료 > 명신
부 강궁진(姜弓珍)
5대조 강여청(姜餘淸)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저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저서 《구선집(求善集)》
공신호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관련정보]
[고려문과]성종(成宗)2년(983)계미방(癸未榜)갑과(甲科)1[장원(壯元)]위(1/4)
[가족사항]
[부]
성명 : 강궁진(姜弓珍)
[주1]시험관:《고려사(高麗史)》선거지(選擧志)〉(亞細亞文化社)를 참고하여 시험관을 추가함.
[출전]《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고려열조방(高麗列朝榜)〉(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7.4a])
[상세내용]
강감찬(姜邯贊)에 대하여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고려의 명신.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본관은 금천(衿川). 경주로부터 금천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귀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義州 威遠面)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義興)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 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특진검교태사시중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뿐만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때에 수태사겸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高麗史, 高麗史節要, 姜邯贊(姜晉哲,韓國의人間像2,新丘文化社, 1980)
[집필자]강진철(姜晉哲)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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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명 경태(景泰) 1년) 1월 15일(신묘) 1번째기사
집현전부교리 양성지가 올린 비변에 대한 열가지 방책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 양성지(梁誠之)가 비변(備邊)에 대한 열가지 방책을 올렸는데, 첫째에 이르기를,
“국가의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계획은 먼저 결정하여야 하오니, 계획을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만사가 실패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북방(北方)의 일을 혹은 ‘방금 태평한데 무슨 외환(外患)이 있겠는가’하고, 혹은 이르기를, ‘달달(達達)이 수천리 밖에 있는데 어찌 우리에게 관계있는가’하옵는데,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원(元)태조(太祖)가 중원(中原) 에 들어올 때에 20나라를 멸(滅)하고 서하(西夏)까지 미쳤으며, 하(夏)나라 가 망하자 금(金)나라를 침범하였고, 금나라가 망하매 송(宋)나라를 침범하였사온데, 송나라와 금나라가 채 망하기 전에 친히 서역(西域)을 정벌하여 철문관(鐵門關)에까지 이르고, 또 서이(西夷)와 남이(南夷)를 해도(海道) 수만리 지방까지 정벌하였사오며, 세조(世祖) 때에 와서는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수십만의 군사를 죽이면서도 마지않았고,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는 군사를 움직이기 무려 70년에 군사의 힘을 다하고 무기를 있는대로 썼사오니, 대개 습속(習俗)이 그러한 것이옵니다. 하물며 이미 중국에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의 있는 곳을 알고 벌써 힘들여 빼앗아 가지고 있음에오리까. 80년 동안을 비록 사막(沙漠) 지방에서 살면서 어느 때고 하루라도 중국을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먼저 삼위(三衛)를 탈취하여 중국의 번리(藩蘺)를 제거하였고, 다음에는 해서(海西)의 여러 종족을 위협하여 그의 도당(徒黨)을 만들고서, 이에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관외(關外)가 크게 진동하매, 천자(天子)가 친히 정벌하다가 도리어 되놈에게 함몰되니, 되놈의 기병이 이긴 기세를 타서 곧바로 황성(皇城) 밑까지 쳐들어 왔으니 그 병력이 어떠하겠습니까. 중국 고황제(高皇帝)의 어지러움을 발거(拔去)한 공(功)과 오늘날 갑병(甲兵)의 성(盛)한 것으로도 한번 싸워서 패함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거든, 하물며 병력이 이만 못한 것이겠습니까. 저들이 어찌 동방(東方)에 우리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직까지 개의하지 않는 것은 한참 중원(中原)에다 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침에 요동(遼東) 땅을 얻게 되면 동정(東征)의 군사가 저녁에 나올 것이옵고, 비록 요동에서 뜻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다른 길을 거쳐 우리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나간 일로써 상고하오면, 적인(敵人)이 지경을 침범할 때에 처음에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한 것을 지키다가 중간에는 안주(安州) 나 평양(平壤)의 요충에서 막아내고, 마지막에서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워 막는데, 절령(岊嶺)으로 관문(關門)을 삼게되오면 어찌할 수 없게 되옵니다. 저들이 이미 장성(長城)의 험한 것을 넘어 황성(皇城)의 곁에까지 들어갔는데 어찌 압록강을 건너 서울 근처까지 오기가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범찰(凡察)과 만주(滿住)와도 틈이 생긴지가 여러 해 되었으므로 또한 반드시 그 위력을 빌어서 그의 뜻을 펴보려 할 것이오니, 변흔(邊釁)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생민(生民)의 화(禍)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변경(邊境)의 일이 비록 반드시 조석(朝夕) 간에 있는 것은 아니오나, 실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적이 만일 침범하여 짓밟는다면 겸손한 말과 후한 선물로써 한때의 환란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오나, 신이 전조(前朝)4402)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 차라대(車羅大), 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만약에 우리 병력이 부족하다면 달달(達達)이 어찌 우리를 사랑하는 자이겠습니까. 부득이하여 권도(權道)에 좇아 수호(修好)하는 것이오니 모름지기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려면 화친을 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모두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이 감히 장수와 군졸을 뽑고 군량을 저축하며 기계(器械)를 준비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는 것이 당금(當今)의 급무(急務)라고 하는 것이옵니다.”하고,
둘째에 이르기를,
“사졸(士卒)을 뽑는 것입니다. 대개 사졸은 나라의 조아(爪牙)로서 전조(前朝)에서는 42도부(都府)를 두고 정병(精兵) 12만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요(遼)와 금(金)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門庭)에 근거(根據)되어 범(犯)하지 못하였고, 또 당(唐)태종(太宗) 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이 정병(精兵) 15만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定宗) 때에 와서 거란(契丹)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光軍)이라 하였다가, 강조(康兆)가 거란 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패퇴(敗退)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辛丑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는 20만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군사(侍衛軍士)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만이온데, 선군(船軍)이 일부분이고 시위진군(侍衛鎭軍)과 수성군(守城軍)이 일부분이며 연호잡색군(烟戶雜色軍)이 일부분이므로 선군(船軍)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잡색군(雜色軍)은 관호(官戶)나 혹은 향리(鄕吏)나 혹은 천례(賤隷)로서 모두 연호(烟戶)의 집사인(執事人)이옵고, 다만 시위진군(侍衛鎭軍) 수만기(數萬騎)만이 조발(調發)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이것은 군액(軍額)은 비록 있사오나 정병(正兵)이 많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기에 한심(寒心)하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오라, 호구(戶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사람들이 많이 누적(漏籍)되고, 또 제색 잡역인(諸色雜役人)이 군목(軍目)4403)에 예속되지 않은 것이 많은 까닭이옵니다. 옛날 당나라 장수가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호수를 조사한 것이 70만을 내려가지 않았사온데, 신라(新羅)의 수효는 그 속에 들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또한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동서(東西)가 1천 4, 5백리이고 남북(南北)이 1천 2, 3백리가 되니, 그 사이에 70만호(戶)는 될 것이고 호(戶)마다 세 사람의 장정이 나오면 무릇 2백 10여만명이 될 것이다’하였는데, 이는 성인(聖人)이 만리(萬里) 밖을 밝게 본 말이옵니다. 우리나라가 삼한(三韓)을 통합한 왕업에 의거하여 휴양(休養)하기를 오래 하였으면서도 호수(戶數)가 수십만에 불과하다 하오니, 이 어찌 호구(戶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군사의 수효가 옛날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호구(戶口)가 밝지 못한 것은 입법(立法)한 것이 엄(嚴)하지 못하고 수령들이 마음을 다하지 못한데 있사오며, 또 정치의 편안한 데에만 빠져서 평소에 구처(區處)하지않은 때문이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하삼도(下三道)의 기선군(騎船軍), 진군(鎭軍), 시위패(侍衛牌)가 비록 이름은 3,4장정에서 군사 한명을 시킨다 하오나 남는 장정[餘丁]이 심히 많고, 또 서원(書員), 일수(日守)는 그 수효가 한이 없사오며, 연해주군(沿海州郡)에 이르러는 부강(富强)한 호(戶)의 공사천구(公私賤口)와 양인(良人)으로서 병역을 도피(逃避)한 자가 몇 천명이 되는지 알 수 없사오니, 이는 군적(軍籍)이 잘못되어 감(減)해지는 것이옵니다. 대저 변란(邊亂)이 있으면 중외(中外)가 소연(騷然)하다가 조금 성식(聲息)이 없으면 당초부터 염려하지 아니하니, 이는 무사(無事)하다고 하여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백성이 수고롭다하여 아니하는 것도 또한 불가합니다. 만일에 때에 임박하여 하려면 인심(人心)이 경동(驚動)하고 처치(處置)가 마땅함을 잃어 흩어져 도망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오니, 어느 때에 단련하여 군사를 만들겠습니까. 이른바 밭에서 농사짓는 백성이나 시정(市井)의 무리들로서 우리의 행진(行陣)이나 어지럽게 하여 우리의 대사(大事)를 실패하게 하면서 쓸데없이 군량만을 허비할 뿐으로, 만일에 옛날 수효[舊額]만을 내는데 그친다면 군사가 많지않을 것이옵고, 연호(烟戶)까지 모두 뽑아낸다면 군사가 정예(精銳)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연호(烟戶)가 모두 군사가 되어 병역에 종사하게 된다면 누가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누가 물건을 운반하며, 누가 기계(器械)를 준비하며, 누가 성보(城堡)를 수리하여 지키겠습니까. 이는 더욱 불가하오니 연호(烟戶)와 잡색(雜色)으로써 수성군(守城軍)을 삼고 양민(良民)을 모두 징발해서 군사를 삼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그 초출(抄出)하는 방법은 경중(京中)에서는 한성부(漢城府)와 사부(四部)에서 하고 외방(外方)에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대소(大小) 각 호(戶)에 기한을 엄하게 정하여 다시 십오(什伍)의 제도와 호구(戶口)의 법을 정하되, 5가(家)로 소통(小統)을 삼고 10가(家)로 1통(統)을 삼아서 매호(每戶)마다 호구(戶口)의 유무(有無)를 살피고 호구(戶口)에 장정의 탈루(脫漏)를 살피게 하여, 이같이 해서 한명의 장정을 누락시킨 자는 경외(京外)나 존비귀천(尊卑貴賤)을 물론하고 삼절린(三切隣)과 감고(監考), 권농(勸農), 관령(管領)을 모두 정한 곳에 입거(入居)시키고, 가(家)를 누락시킨 자는 오가(五家)와 상항(上項)의 사람들을 또한 모두 입거(入居)시키며, 공사 천구(公私賤口)를 숨긴 자나 양민으로 역을 도피한 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소서. 또 호패법(號牌法)을 행하여 중외(中外)의 대소인(大小人)으로 하여금 나이 15세 이상이면 모두 이를 차게 하고, 따라서 외방(外方)에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서울에서는 사헌부(司憲府)와 한성부(漢城府)에서 위조(僞造)한 것과 사사로이 서로 빌려쓰는 것을 고찰(考察)하여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한 율(律)’로써 과죄(科罪)하며, 모든 나라 사람들로서 호구(戶口)가 없고 호패(號牌)가 없는 자는 공사천구(公私賤口)는 양계(兩界)의 잔망(殘亡)한 고을의 관노비(官奴婢)로 정속(定屬)시키고, 백성과 양반(兩班)은 양계(兩界)의 극변(極邊)에다 충군(充軍)시키소서. 따라서 사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범인(犯人)의 밭과 가산(家産)으로써 상(賞)주는 것에 충당하되, 먼저 이 뜻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여 과단성 있게 시행하오면 누락된 장정이 거의 다 나오게 되어 숨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입거(入居)시키는 법은 너무 중하니 시행할 수 없다’할 것이오나, 신은 생각하옵기를, 법을 세우는데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망하여 숨은 인호(人戶)는 지금의 큰 폐단이옵고, 입거(入居)하는 일은 상정(常情)으로 모두 싫어하는 바이므로, 큰 폐단을 제거하려면 싫어하는 일로써 제지할 것입니다. 이미 입거(入居)하는 것이 싫은 줄 알면 또한 감히 국민을 숨겨주지 못할 것이옵고, 알고서도 이를 범한다면 이른바 도망시켜 준 장본인[逋逃主]이오니 죄를 준들 무엇을 동정할 것입니까. 금령(禁令)을 엄하게 세우는 것이 세상을 어거하는 떳떳한 법은 못되오나, 사람으로서 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그 이익이 세가지가 있사오니, 양민(良民)이 모두 나오게 되면 군사의 수효가 족할 것이옵고, 공천(公賤)이 모두 나오게 되면 관청[公室]이 족할 것이옵고, 사천(私賤)이 모두 나오게 되면 사대부(士大夫)가 족할 것이옵니다. 이에 외방에는 밭을 받은 유음인(有蔭人)및 전함 품관(前銜品官)으로서 동반(東班) 6품, 서반(西班) 4품 이상과 문,무과(文武科) 출시(出身)의 생원(生員),진사(進士),교도(敎導) 등의 호(戶)는 수성위(守城衛)라 칭(稱)하고, 향리(鄕吏),역자(驛子),진간(津干),목자(牧子)는 수성군(守城軍)이라 칭(稱)하며, 이 외에 위로는 품관(品官)의 자제(子弟)와 연장(年壯)한 생도(生徒)로부터 아래로는 백정(白丁),양민(良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출(抄出)하여 군사를 삼고, 강장(强壯)한 자를 택하여 호수(戶首)를 삼으며, 또 연호(烟戶),잡색(雜色)을 이미 수성호(守城戶)라 칭하였으니, 전일에 양인(良人)으로 수성군(守城軍)이 된 자는 수효가 많지 못하고 별로 일정한 구실[役]이 없사오니, 모두 혁파하여 기선군(騎船軍)이나 진군(鎭軍)에 분속(分屬)시키고, 서원(書員)과 일수(日守)도 또한 차등 있게 액수(額數)를 정하여, 이로써 다시 선택을 가하면 시위패(侍衛牌) 3만명과 진군(鎭軍) 3만명과 선군(船軍) 6만명을 얻을 수 있고, 그 나머지 잡색군(雜色軍)도 또한 5,6만 호(戶)는 얻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문무백관(文武百官)과 밭을 받은 유음(有蔭),성중애마(成衆愛馬),전함각품(前銜各品)과 생원(生員),진사(進士) 등의 호(戶)는 도성위(都城衛)라 칭(稱)하고, 각사(各司)의 이전(吏典)과 제색장인(諸色匠人),공사천구(公私賤口) 등 잡호(雜戶)는 도성군(都城軍)이라 칭(稱)하며, 이 외에 한량자제(閑良子弟)나 연장생도(年壯生徒)도 모두 초출(抄出)하여 군사를 삼고, 또 서울의 시위패(侍衛牌)와 무수전패(無受田牌)를 혁파하여 갑사(甲士)와 방패(防牌)에 분속(分屬)시키고, 충순위(忠順衛)와 무재(武才)가 있는 자는 내금위(內禁衛)와 별시위(別侍衛)에 이속(移屬)시키고 보충군(補充軍)으로써 조예(皂隷)를 삼되, 조예(皂隷)로 방패(防牌)와 별군(別軍)을 만들면 총통위(銃筒衛)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되오니 모두 혁파하여 방패(防牌)와 육십(六十)에 소속시키고, 또 차비군(差備軍)을 혁파하고, 또 양인(良人)으로서 장인(匠人)에 투속(投屬)된 자도 혁파하고, 또 도부외(都府外)를 혁파하여 방패(防牌)로서 순작(巡綽)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고, 사옹(司饔)과 충호위(忠扈衛)의 각사(各司) 이전(吏典)도 모두 구액(舊額)을 감(減)하여 이로써 다시 선택을 가하면 내금위(內禁衛) 3백명, 별시위(別侍衛) 6천명, 갑사(甲士) 9천 명, 방패(防牌) 9천명, 섭육십(攝六十) 3천명, 총통위(銃筒衛) 3천명을 얻을 것이오니, 이같이 하며 외방 군사[外兵]는 기병(騎兵),보병(步兵)이 각각 6만이 되고, 서울 군사[京軍]는 기병,보병이 각각 1만 5천명이 되어 기병과 보병이 상반(相半)하고 서울과 외방이 득중(得中)하여, 도합 정병(精兵) 15만 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서울과 외방의 양반(兩班) 각호(各戶) 외에 군사로서 노비(奴婢)가 없는 자는, 갑사(甲士)는 4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고, 시위군(侍衛軍),진군(鎭軍),선군(船軍)은 3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고, 방패(防牌),육십(六十),총통위(銃筒衛)는 2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고, 기타 연호(烟戶)는 3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으면, 1정(丁)도 군적(軍籍)에 붙여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한 군사도 단정(單丁)으로 입호(立戶)함이 없게 되어, 연호(烟戶)가 모두 성(城)을 지키게 되고 양민(良民)이 모두 종군(從軍)하게 될 것입니다. 인하여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쳐서 내금위(內禁衛)는 충용위(忠勇衛), 별시위(別侍衛)는 충무위(忠武衛), 갑사(甲士)는 무녕위(武寧衛), 시위패(侍衛牌)는 무평위(武平衛), 진군(鎭軍)은 진변위(鎭邊衛), 선군(船軍)은 진해군(鎭海軍), 방패(防牌)는 보승군(保勝軍), 섭육십(攝六十)은 보첩군(保捷軍), 총통위(銃筒衛)는 극적군(克敵軍), 근장(近仗)은 공학군(供鶴軍)이라 하여 이와 같이 하면 군호(軍號)가 정제(整齊)하여 사기(士氣)도 증가할 것입니다. 또 군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빠짐없이 하는데 있고, 또한 정예(精銳)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교련하는데 원인이 있는 것이오니, 외방(外方)의 진군(鎭軍)은 진병마사(鎭兵馬使)에게, 선군(船軍)은 만호(萬戶)에게, 시위패(侍衛牌)는 수령(守令)에게 붙여서 각기 사장(射場)을 두게하고, 다시 약속(約束)을 세워 습사(習射),습진(習陣)시키되, 월말(月末)에 절제사(節制使) ,처치사(處置使), 감사(監司)가 그 근태(勤怠)를 상고해서 올려주거나 내치게 하고, 서울의 군사는 본훈련관(本訓練觀)에서 주장하되 남부(南部)는 남대문(南大門) 밖에, 동부(東部)는 동대문(東大門) 밖에, 서부(西部)는 반송정(盤松亭)에, 중부(中部)는 수구문(水口門) 밖에다 각각 사장(射場)을 축조(築造)케 하고,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내금위(內禁衛),번상시위패(番上侍衛牌)로 하여금 번들어 순작(巡綽)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까운 곳에 가서 습사(習射)하거나 습진(習陣)하게 하여, 그 능부(能否)를 상고해서 상벌(賞罰)을 시행하게 하고, 보병(步兵)에 이르러서도 역시 습장(習杖),습진(習陣)하도록 하고, 입직군사(入直軍士)와 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는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법식에 따라 습사(習射)시키되, 만일 혹시라도 변경(邊境)에 변란이 있으면 선군(船軍) 6만 명을 제한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9만 명으로 평안도(平安道) 의 의주(義州), 삭주(朔州), 강계(江界), 희천(熙川), 영변(寧邊), 안주(安州), 평양(平壤)과 함길도(咸吉道)의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성(鏡城), 마천령(磨天嶺), 마운령(磨雲嶺), 갑산(甲山), 함흥(咸興)과 황해도(黃海道)의 절령(岊嶺), 극성(棘城) 등처에 적당히 나누어두고, 혹 싸우거나 혹은 지키면서 기회에 따라 방책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군사와 말이 정강(精强)하여 전수(戰守)의 준비가 완전할 것입니다. 신이 듣자오니, 병법에 이르기를, ‘선봉(先鋒)을 가리지 않는 군사는 패한다’하였으니, 대개 전봉(前鋒)은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양진(兩陣)이 서로 어울려 승부(勝否)를 결단하지 못할 때나 위급한 때에 이르러서는 선봉(先鋒)의 예졸(銳卒)이 철기(鐵騎)로써 짓밟지 않으면 불가하오니, 주(周)나라의 호분(虎賁)과 송(宋)나라의 배외군(背嵬軍)과 금(金)나라의 화모군(花帽軍)과 서하(西夏)의 철요자(鐵鷂子)가 이것이옵니다. 이제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가 곧 가려뽑은 것이오니, 비옵건대, 용감한 군사 3백인을 다시 가려뽑아서 내금위(內禁衛)를 충실하게 하고, 또 행병(行兵)할 때를 당하면 미리 돌기(突騎) 수백인을 가려뽑아서 선봉(先鋒)으로 대비케 할 것이오며, 또 금인(金人)은 철기(鐵騎)에 두꺼운 갑옷을 입혀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어 두었다가 싸움이 한창 치열할 때에 이를 사용하되, 해상(海上)에서 일어나서 향하는 바가 앞이 없으므로, 모두 이로써 이기게 되어 ‘괴마(拐馬)’라 부르고, 이름하기를 ‘장승군(長勝軍)’이라 하였사온데, 그 제도는 지금 자세하게 알 수는 없사오나, 생각건대, 장사(壯士)를 뽑아서 철기(鐵騎)를 태워 단병(短兵)을 가지고 적진을 함락시키는 것이오니, 비옵건대, 사복시(司僕寺)의 제원(諸員)을 9백명으로 정하여 평시에는 서울과 외방에서 마필(馬匹)을 조습(調習)시키고, 인하여 치고 찌르는 법을 가르쳐서 선봉으로 쓰거나, 혹은 유혁(遊奕)4404)으로 사용하면, 다른 군사를 허비할 필요없이 그 몰아쳐 달리는 것이 보통 사람과 같지않아서 가히 공을 세울 것입니다.”하고,
셋째에 이르기를,
“장수(將帥)를 택할 것입니다. 대개 장수는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이오니 그 용맹으로만 취하는 것은 불가하옵고, 또한 문인(文人)으로서 약간의 무예(武藝)를 안다는 것만으로 취하는 것도 불가하옵니다. 전조(前朝)4405)에서 유장(儒將)을 많이 썼사온데, 강감찬(姜邯贊), 김부식(金富軾), 조충(趙沖), 김득배(金得培)가 이것입니다. 만일 무신(武臣)으로써 장수를 삼는다면 또한 문신(文臣)을 써서 부장(副將)을 삼아 서로 더불어 문무가 겸제(兼制)되어 그 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쇠망할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 번 추밀(樞密)에 들어가면 곧 원수(元帥)에 배명(拜命)되어서 왜구(倭寇)의 침범을 받게 되었으니, 가히 한(恨)스럽습니다. 그러하오나, 장수를 가리는 방법은 반드시 소질이 있는 자를 모아 두었다가 가리기를 지극히 정밀하게 한 연후에야 가할 것이옵니다. 지금 무예(武藝)의 기록은 장수를 가리는데 필요한 것이오니, 비옵건대, 다시 의정부(議政府)와 병조(兵曹)에 명령하시어 동반(東班) 6품, 서반(西班) 4품 이상및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의 패두(牌頭)와 외방의 감사(監司), 수령(守令)과 수륙장수(水陸將帥),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으로 하여금 각기 장수가 될만한 자 서너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모두 성명을 기록하고, 다시 생각하고 헤아려서 1,2품의 대장(大將) 10인을 얻게 하고, 3, 4, 5, 6품으로 편비(偏裨) 1백인을 얻게 하고, 참외(參外)와 성중(成衆),위사(衛士),초택(草澤)4406) 가운데서 장래에 쓸만한 자 3백인을 얻게 하면, 간청한다고 하여 천거한 것이 아니옵고 피하려고 한다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기록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재주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오니, 특별히 장수록(將帥錄)을 작성하여 어소(御所)에 올리고 정부(政府)와 병조(兵曹)에 각각 한 벌씩 간수하여 급작스런 때에 쓸 수 있도록 함이 어떠하오리까. 또 장수는 모름지기 명망(名望)이 있어 인심(人心)을 습복(襲服)시킬 수 있는 자로 삼아야 할 것이온데, 만약 재간은 장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라도 부하[下僚]에게 눌리는 자는 조금 그 직질(職秩)을 후하게 하여 그 재능을 시험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작명(爵命)이 너무 극(極)하면 또한 부릴 수 없습니다. 지금 무과(武科)의 강경(講經)을 글[經]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점수[分晝]를 후하게 하므로, 무사(武事)에 모자라는 자도 많이 합격되오니, 비옵건대, 이 뒤로는 다만 사서(四書) 중에서 일서(一書)만 강(講)하게 하거나 오경(五經) 중에서 일경(一經)만 강(講)하게 하고, 혹은 다만 무경칠서(武經七書)만 강(講)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그 양성(養成)하는 방법도 조송(趙宋)의 무학고사(武學故事)와 또한 우리나라의 습독(習讀)하는 제도에 따라 나이 40세 이하의 내금위, 별시위, 갑사 중에서 기량(器量)과 지식이 있고 문자(文字)를 해득한 자를 자원(自願)에 따라 훈련관(訓鍊觀)에 입학시키되, 번들어 순작(巡綽)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무경(武經)을 습독(習讀)하게 하고, 그 모든 조건과 격식은 대략 성균관(成均館)의 예(例)를 모방하여, 학관(學官)은 무경(武經)에 정통(精通)한자를 가려 장관(長官)을 삼아서 가르치게 하소서”하고, 넷째에 이르기를,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록 10만의 군사가 있다하더라도 하루의 양식밖에 없으면 하룻 동안의 군사밖에 되지 못한다’하였사오니, 용병(用兵)의 도리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면 농사가 때를 잃어 의례 흉년드는 해가 많고, 조전(漕轉)하는 비용도 또한 적지 않아서 진실로 염려되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족식(足食)의 근본이 쓸데없는 벼슬을 도태시키는데에 있사오니, 급하지 않은 사무는 정지시켜서 백성의 힘을 빼앗지 말도록 하여 힘써 농사짓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수리(水利)를 일으키거나 혹은 둔전(屯田)을 시행하는 것이 다음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벼슬을 파[鬻爵]는 법령이온데, 대개 벼슬을 파는 데는 공상(工商), 천례(賤隷) 외에 양인(良人)을 가려 함흥(咸興)이나 평양(平壤) 이북에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 서반(西班) 군직(軍職)을 주되, 종9품은 1백석, 정9품은 2백석으로 예(例)를 삼아, 종5품은 9백석, 정5품은 1천석으로 하고, 원래 관직이 있는 자는 1백석마다 한 자급(資級)을 더해주되 모두 5품에 이르러 그치게 하고, 곡식을 내지(內地)에 바치는 자는 그 수량을 배(倍)로 하게 하여, 만일 2백석을 바치면 한 자급을 올려 주되 모두 녹봉(祿俸)은 주지 말고 뒤에 재주에 따라 쓰게 하며, 가문(家門)이 좋고 인망(人望)이 있는 자는 역시 현관(顯官)으로 등용할 것이되, 이는 곡식을 얻는 방법으로서 지극히 궁색하고 급할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였다.
다섯째에 이르기를,
“기계(器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신은 듣자옵건대, 조조(晁錯)가 말하기를, ‘기계가 예리하지 못하면 그 군사를 적에게 주는 것이라’하였사오니, 대저 중국이 전쟁[戎馬]을 버티어가는 것은 오직 기계의 정교함에 힘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사(唐史)》에 이광필(李光弼)의 능한 것을 기록하기를, ‘ 광필(光弼)이 명령을 내리면 정기(旌旗)의 정채(精彩)가 일변(一變)한다’하였고, 한세충(韓世忠)의 기계(器械)가 정교(精巧)함을 《송사(宋史)》에서도 또한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본국(本國)의 군용(軍容)은 심히 광채가 없고 기계도 또한 모두 좋지 않사오니, 진실로 염려되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왜인(倭人)이 돼지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견고하고 치밀하며 경편(輕便)하다하오니, 비옵건대, 중외(中外)에서 모두 모방하여 만들도록 할 것입니다. 하물며 돼지가죽은 얻기가 쉬운 물건이겠습니까. 철갑(鐵甲)은 중국의 예(例)에 따라 채백(彩帛)으로 장식하고, 지갑(紙甲)은 홍색(紅色),황색(黃色),청색(靑色)으로 물들이거나, 혹은 초(楚)나라 사람의 충갑(衷甲)4407)의 뜻을 써서 거죽에는 방색(方色)4408)에 무늬가 있는 옷을 입게 하고 투구에도 모두 처마[簷]를 달게 하며, 말다래[馬韂]의 꾸밈새도 청색(靑色)과 홍색(紅色)을 금(禁)하지 말게 하여 적인(敵人)의 눈에 현혹되도록 하고, 우리 삼군(三軍)의 기세를 장(壯)하게 할 것이며, 또 노시(弩矢)라는 것은 역대로 중국의 장기(長技)로서 이른바 만노구발(萬弩俱發)4409)이란 것입니다. 송(宋)나라에는 구우노(九牛弩),상자노(床子弩) 따위의 제도가 있었고, 신라(新羅)의 노(弩)도 또한 1천보(步)까지 이르렀는데, 당나라 임금이 이를 구하여 갔으나 끝내 기술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전조(前朝)의 말경부터 비로소 듣지 못하였사오니, 비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중국에 물어서 군진(軍陣)에서 쓰도록 할 것이옵고, 또 성(城)을 지키는 도구도 그곳에서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것이며, 성(城)을 공격하는 도구도 역시 폐하지 말 것이니, 비록 국토를 벗어나서 행병(行兵)하지 않을지라도, 만일에 적병이 갑자기 들어와서 변성(邊城)을 빼앗아 웅거하기를 고려 때 강동(江東)의 도적과 같이하면 장차 무엇으로 공격할 것입니까.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동인(東人)이 성을 지키기를 잘하는데 모든 방어하는 기계가 하나도 전하는 바가 없다’하였사오니, 운제(雲梯),아거(鵝車)같은 것도 비록 전사(前史)4410)에는 실려 있어도 눈으로는 볼 수 없사오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중국에 물어서 중외(中外)의 성(城)에다 만들어 분치(分置)하게 하소서.”하고,
여섯째에 이르기를,
“성보(城堡)를 수선하고 관방(關防)을 정할 것입니다. 대개 군진(郡鎭)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이므로, 임금이 험한 곳에 성보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송(宋)나라에서는 긴요한 군(郡)과 다음으로 긴요한 군(郡)의 분별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산천(山川)이 험조(險阻)하고 현진(縣鎭)이 서로 바라볼 수 있으므로, 진실로 무사(無事)할 때에 잘 강구해서 마땅하고 적합하게 처치(處置)한다면, 적이 비록 이를 버리고 깊이 들어오려 하여도 장차 그 뒤에 거리낄 것을 염려할 것이오나, 만일에 처치(處置)하기를 엉성하게 한다면 도리어 적인(敵人)의 도움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 연변주군(沿邊州郡)을 국가에서 이미 긴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곳으로 나누었으나, 변방 땅을 전부 긴급한 곳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이 이제 내지(內地)까지도 아울러 논하여 외람되이 억지의 의논을 드리옵니다. 함길도 회령(會寧)은 범찰(凡察)이 옛날에 살던 곳이옵고,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은 모두가 강변(江邊)이옵고, 경성(鏡城)은 용성(龍城)의 좁은 목[阨]이 있으며, 이성(利城)에는 마운령(磨雲嶺)이 있고, 단천(端川)에는 마천령(磨天嶺)이 있으며, 갑산(甲山)은 서북쪽 모퉁이가 날카롭고 들어갔고, 함흥(咸興)에는 함관령(咸關嶺)이 있고, 또 한 도(道)의 근본으로 요긴한 곳이며, 길주(吉州)는 동량북(東良北)과 연(連)하였고, 북청(北靑)도 역시 갑산(甲山)의 요충(要衝)이며, 홍원(洪原)에는 대문령(大門嶺)과 정평(定平)의 고관문(古關門)이 있고, 영흥(永興)에는 용흥강(龍興江)이 있으며, 덕원(德源)에는 철관(鐵關)이 있고, 안변(安邊)에는 철령(鐵嶺)이 있으며, 다음으로는 평안도인데,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에 의지하였고, 삭주(朔州)는 적로(賊路)로서 평탄하고 넓으며, 강계(江界)는 곧 강변(江邊)의 거진(巨鎭)이고, 희천(熙川)에는 적유령(狄踰嶺) 이 있으며, 또 강계(江界)는 적로(賊路)이고, 영변(寧邊)은 한 도(道)의 중진(重鎭)이며, 안주(安州)에는 청천강(淸川江)과 고안북진(古安北鎭)이 있고, 평양(平壤)에는 대동강(大同江)이 있으며, 또한 도(道)의 근본으로 긴요한 곳이고, 여연(閭延)은 곧 적(賊)의 요충이며, 박천(博川)에는 큰 강이 있고, 성천(成川)도 역시 요지(要地)이옵니다. 다음으로는 황해도(黃海道)인데, 황주(黃州)에는 극성(棘城)이 있고, 서흥(瑞興)에는 절령(岊嶺)이 있어 긴요한 곳이옵고, 곡산(谷山)은 함길도(咸吉道)와 연접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강원도(江原道)인데, 회양(淮陽)은 철령(鐵嶺)을 의지하였고, 강릉(江陵)은 영동(嶺東)의 대부(大府)입니다. 다음으로 요긴한 곳은 경상도(慶尙道)인데, 김해(金海)와 창원(昌原)은 모두 대마도(對馬島)의 요충으로서 요긴한 곳이고, 상주(尙州) 는 영남(嶺南)의 대목(大牧)이며, 안동(安東)도 또한 중요한 곳이고, 경주(慶州)는 곧 고려(高麗)의 동경(東京)이며, 진주(晉州)는 남도(南道)의 거읍(巨邑)이고, 성주(星州)에는 금오산성(金鰲山城)이 있습니다. 다음은 전라도(全羅道)인데, 전주(全州)는 남도(南道)의 요충(要衝)이고, 남원(南原)은 운봉(雲峯) 의 요충이며, 나주(羅州)는 남방(南方)의 대목(大牧)입니다. 다음에 긴요한 곳은 충청도(忠淸道)인데, 충주(忠州)는 조운(漕運)이 모이는 곳이고, 공주(公州)에는 금강(錦江)이 있으며, 다음에 긴요한 곳은 경기(京畿)인데, 경성(京城)이 긴요하고, 개성부(開城府)는 곧 전조(前朝)4411)의 고도(古都)이며, 양주(楊州)는 후보(後輔)가 되고, 광주(廣州)에는 산성(山城)이 있으며, 수원(水原)은 곧 남도(南道)의 요충이고, 원평(原平)은 바로 임진(臨津)의 요충이며, 강화(江華)는 수로(水路)가 험하고, 고려 때의 강도(江都)로서 다음입니다. 이상의 여러 주진(州鎭)과 관방(關防)은 긴급한 것이 있고 다음으로 긴급한 것이 있으니, 다음으로 긴급한 것은 아직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고, 그 긴급한 것으로서 이미 성을 쌓은 곳은 수리할 것이고, 쌓지 못한 곳은 각기 부근 고을의 연호군정(烟戶軍丁)으로 농사짓는 틈[農隙]을 가려서 진력(盡力)하여 쌓게 하면, 이는 백성을 위하는 것으로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남방(南方)의 요긴한 고을을 일시(一時)에 아울러 든 것은 대개 변경(邊境)에 일이 있으면 근본되는 땅을 더욱 견고하지 않을 수 없고, 하물며, 적(敵)을 막는 방책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이 모여 살 곳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강계(江界), 잔도(棧道), 절령(岊嶺), 극성(棘城), 용성(龍城), 마천령(磨天嶺), 마운령(磨雲嶺), 함관령(咸關嶺), 철령(鐵嶺) 등지에는 모두 석보(石堡)를 쌓아서 방어하는 곳으로 만들고, 또 산성(山城)은 고려(高麗)의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도적(圖籍)을 상고하여 형세(形勢)를 살펴서, 신료(臣僚)들을 나누어 보내되, 반드시 읍(邑)에 가까운 곳이 아니고, 혹 깊고 먼 곳이라도 너덧 고을에서 한 군데의 험애(險隘)한 곳을 얻게 하여, 부근의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적당히 쌓게 하면 거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고, 백성을 위급한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성문수비(城門守備)와 진관(津關)의 금방(禁防)도 또한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하고,
일곱째에 이르기를,
“근본(根本)을 장(壯)하게 할 것입니다. 대개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근본의 땅이 견고하지 못하면 사방의 민심이 또한 의지할 데가 없게 됩니다. 대저 성곽(城郭)이 견고한 연후에야 민심이 안정되어 사수(死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경성(京城)의 뒷산 암석 사이에 쌓은 것은 법(法)대로 되지 아니하여 옹성(壅城)이 없고 적대(敵臺)가 없으니, 혹시라도 적변(賊變)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수어(守禦)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 쌓는다면 민심이 반드시 동요될 것이오니, 모름지기 요새 쌓아야 거의 견문(見聞)에 놀랍지 않고 민심이 영원히 안정될 것입니다. 백성의 힘이 남아 돌아가게 되면 중흥(中興)하는 성(城)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경험이오니, 경기(京畿)와 경성(京城)에 인부를 징발하여 쌓게 하면 만세(萬世)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게 또 생각하기를, 국가의 대적(大敵)은 으레 서북쪽에서 오는데, 이제 강창(江倉)이 강변(江邊)에 있으니 이것이 염려되옵니다. 비옵건대 용산(龍山)에 창성(倉城)을 쌓고 서강창(西江倉)을 합병하여 하나로 만들어, 상류(上流)에서 조운(漕運)하여 오는 것은 두모포(豆毛浦)에다 창고를 지어 간수하게 하고, 성을 쌓아서 보호하게 하면 군국(君國)의 일로서 하늘같이 여기는 바는 공지(空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한 곳에만 오로지함에 있는 것이 아니오니, 또 벌아현(伐兒峴)에서 한강(漢江)에 이르기까지 성을 쌓게 하면, 비록 적변(敵變)이 있을지라도 성동(城東)까지 올 수 없을 것이고, 또 장의(藏義)의 서쪽 산골 요해지(要害地)에도 역시 행성(行城)을 쌓아 방어하게하면, 도적이 감히 갑자기 뒷산에 들어오지못할 것입니다”하고, 여덟째에 이르기를,
“먼저 스스로를 다스[自治]릴 것입니다. 대개 고금천하의 국가 일은 자치(自治)보다 큰 것이 없사오니, 자치(自治)가 이미 엄(嚴)하면 비록 외적의 침범이 있을지라도 근심될 것이 없습니다. 자치(自治)한 도(道)는 다름이 아니오라 민심(民心)을 잃지않는데 있을 뿐이옵고, 민심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옵니다. 근일에 성을 쌓는 일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면치 못하오니, 민심이 흔들리는 것은 국가의 복(福)이 아닙니다. 또 왜인(倭人)을 대우하는 방법도 평시에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아홉째에 이르기를,
“행성(行城)을 의논할 것입니다. 대개 행성(行城)을 쌓는 것은 국가의 중사(重事)이온데, 신이 듣자오니, 성을 쌓는 곳이 서쪽으로 인산(麟山)에서 부터 동쪽으로 경흥에 이르기까지 천여리(里)로서, 해마다 춘추(春秋)로 수만 명의 장정을 징발하여 수월(數月) 동안 역사시켜도 그 쌓는 바가 수십리에 불과하다 하옵니다. 그러하온 즉, 비록 수십년이 된다하더라도 진실로 그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을 역사하여 백성을 수고시키면서 폐단이 없는 것이 어찌 있겠사오며, 하물며 성보(城堡)를 비록 쌓았다하여도 한번 비가 내리면 그만 무너지게 되니, 만일 보수하여 고치지 않으면 쌓지않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길이가 수천리나 되는 곳에 무슨 군사를 가지고 지키겠습니까. 성은 있어도 지키지 않는다면 비어(備禦)에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하물며 서북 지방은 사신(使臣)의 영송(迎送)에 피폐되었고 방수(防戍)에 지쳤으며, 기근(飢饉)까지 겹쳤는데, 이 역사를 일으킬 때마다 백성이 많이 유리(流離)하여 여염(閭閻)이 거의 비었으니, 혹시라도 변경(邊境)에 변란이 있게 되면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졌으니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이미 피로한 백성이 아직 숨을 돌리기도 전에 이제 천하가 바야흐로 전쟁을 시작하려 하오니, 다시 변방 백성을 수고시킴이 가하겠습니까. 동북 지방은 백성의 힘이 약간 후(厚)하고 성터[城基]도 또한 덜하오니 가하다고 할 수 있사오나, 5진(鎭)은 지세(地勢)가 현격하게 먼데 회령(會寧)과 종성(鍾城)은 목축(牧畜)의 이익이 있고 온성(穩城)과 경원(慶源)은 땅이 기름지고 물산(物産)이 풍요한 곳이라 칭(稱)하며, 경흥(慶興)은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는 곳으로 다른 날에 변진(邊塵)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적인(狄人)들이 다투는 곳이 될 것입니다. 만일에 적병(賊兵)이 쳐들어 왔을 때 군사들이 피로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성곽(城郭)조차 없으면, 그 득실(得失)이 전일(前日)과 같을 것이옵고, 성곽(城郭)이 이미 견고하다 하여도 이런 변란을 만나면 어찌 적인(狄人)의 도움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더욱 염려되옵니다. 그러하오나, 5진(鎭)을 취하고 버리는 것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사옵고, 다만 도절제사(都節制使)로 하여금 경성(鏡城)에 관청을 설치하고 용성(龍城)의 요충을 지키게하여 만전(萬全)의 계책을 도모함이 가할 것입니다. 또 행성(行城)이란 것은 작은 적[小敵]을 방비하기 위한 것인데, 만일 대적(大敵)이 길을 나누어 돌입(突入)한다면 어디에 행성(行城)이 있으며, 또 어디에 구자(口子)가 있겠습니까. 대적(大敵)을 만나기 전에 작은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먼저 피로하게 함이 옳겠습니까. 지금 행성(行城)을 중하게 여기고 주진(州鎭)의 성(城)을 가벼이 여기는데, 가사(假使) 행성(行城)은 쌓기 쉬우니 행성(行城)에 의지할만 하다고 하다가, 만일에 적병(狄兵)이 행성(行城)을 넘어 들어오고, 내지(內地)에 견고한 성(城)이 없으면 우리나라의 백만(百萬)의 생명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신이 아뢴바 성을 쌓고 성을 수리할 곳이 행성보다 배(倍)나 되옵는데, 그러한 것은 신이 백성을 역사시켜 성을 쌓는 것만을 그르다하여 국가의 대계(大計)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읍성(邑城)이 급하고 행성은 급하지 아니하므로,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급하지 않을 것을 뒤에 하자는 것이온데, 힘이 행성에까지 미칠 겨를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행성(行城)을 쌓는 힘을 주진(州鎭)의 성(城)을 쌓는 데에 옮기시면 생민(生民)의 다행이고 국가의 다행이옵니다. 또 강변(江邊)에 군사가 적기 때문에 남도(南道)의 군사로서 방수(防戍)하게 하고 입거(入居)시키는 호(戶)로써 채우고 있사온데, 만약에 구자(口子)를 혁파하지 아니하면 남도(南道)의 방수(防戍)가 그치지 않을 것이옵고, 방수(防戍)가 그치지 아니하면 남도의 백성들이 편할 날이 없을 것이오니, 비옵건대, 강변(江邊)의 구자(口子)와 신설(新設)하는 소읍(小邑)을 혁파하시어, 그 군민(軍民)과 병장(兵仗)을 모두 강계(江界) 등 3,4 긴요한 고을에 모으시고, 인하여 희천(熙川)을 중진(重鎭)으로 삼아 척후(斥候)를 멀리 보내고 봉수(烽燧)를 삼가게 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병력(兵力)이 완전하고 처치(處置)가 마땅하여, 만세(萬世)토록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장책(長策)이 될 것입니다.”하고,
열째에 이르기를,
“왜인(倭人)을 비어(備禦)할 것입니다. 대개 지난 가을에 대마도(對馬島) 왜인이 양식을 구하기를 마지않았사온데, 신이 이를 듣고 생각하기를, 예로부터 모두 북방의 염려되는 것은 알면서 남쪽 도적이 무섭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에 격노(激怒)하여 모두 일어나면 바닷가 수천리에 농사꾼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졸(士卒)들은 분명(奔命)하여 그 비용이 막대하게 들 것이오니, 어찌 이보다 백배(百倍)만 되오리까. 국가에서 종씨(宗氏)를 대우함에 매우 잘하고 있었사오니, 비옵건대, 구례(舊例)대로 조금 우대(優待)하여 비록 요구하고 졸라대는 일이 있을지라도 또한 들어줌이 마땅하고, 만일에 명분(名分)이 없이 주는 것을 그르다 한다면, 종정성(宗貞盛) 등의 작명(爵命)을 더해 주고 인하여 녹봉(祿俸)이라 하여 주오면 명분도 바르고 말[言]도 순하며, 저들도 또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연해(沿海) 포구(浦口)에 머물러있는 왜인이 반드시 후일에 변방의 근심이 될 것이오나, 오늘날 북방에 일이 있으므로 경솔히 움직일 수 없고,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모두 뽑아서 군사를 삼아 만일에 공로가 있으면 국가의 이익이 될 것이옵고, 만일에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면 처치(處置)하기는 우리 손아귀에 달렸습니다. 신이 다시 반복(反覆)하여 생각하옵건대, 성을 쌓는 폐단을 제거하면 북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옵고, 왜인을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면 남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오니, 군졸을 가려 뽑고 기계를 준비하며, 군량을 저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며, 현장(賢將)을 택하여 이를 맡겨 상벌(賞罰)을 밝게 하여 통솔하게 하고, 안으로는 근본이 되는 곳을 튼튼하게 하고 밖으로는 대국(大國)을 섬기는 체도(體道)를 지키소서. 이렇게 하오면 내치(內治)가 지극히 잘되어 우리나라 수천리 산해(山海)의 험조(險阻)와 수십만 사졸(士卒)의 힘으로 만세(萬世)토록 대동(大東)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적인(狄人)의 침략을 두려워할 것이옵니까.”하였는데,
비답하지 아니하였다.
註4402]전조(前朝): 고려.註4403]군목(軍目): 군인명부.註4404]유혁(遊奕): 유병(遊兵).註4406]초택(草澤): 재야(在野)에 있는 사람.註4407]충갑(衷甲): 평복(平服) 속에 갑옷을 입는 것.註4408]방색(方色): 방위에 따른 청(靑),황(黃),적(赤),흑(黑),백(白)의 다섯 빛깔.註4409]만노구발(萬弩俱發): 만개나 되는 쇠뇌가 한꺼번에 나간다는 말.註4410]전사(前史): 예전 사기
○辛卯/集賢殿副校理梁誠之上備邊十策:一曰定廟謨。 蓋天下之事, 莫先於定計, 計不先定, 萬事之所由敗也。 今北方之事, 或云: “方今太平, 何有外患!” 或云: “達達遠在數千里之外, 何與於我!” 臣竊觀元太祖之入中原也, 滅國二十, 以及西夏, 夏亡侵金, 金亡侵宋。 方宋、金未亡之時, 親征西域, 至于鐵門關, 又征西南夷於海道數萬里之地。 及世祖東征日本, 喪數十萬之師而不已, 其征高麗則用兵幾七十年, 窮兵黷武, 蓋習俗然也。 況旣知中國子女玉帛之所在, 已嘗力取而有之乎! 八十年雖居沙漠之地, 曷嘗一日忘中國哉! 今先取三衛而撤中國之藩籬, 次脅海西諸種而益其徒黨。 於是, 分道南下, 而關外大振, 天子親征, 反陷虜庭, 胡騎乘勝, 直擣于皇城之下, 其兵力何如哉! 以中國高皇帝拔亂之功與今日甲兵之盛, 一戰而敗, 至於如此, 況兵力不及於此者乎! 彼豈不知東方有我國哉! 曾不以爲意者, 以方致力於中原耳。 萬一〔一〕朝而得遼東之地, 則征東之兵夕出, 雖未得志於遼東, 亦將由他路泄憤於我矣。 臣以往事考之, 敵人之侵疆也, 初則守鴨綠之險, 中則遏安州、平壤之衝, 終則立岊嶺之柵, 以岊嶺爲關, 則無及矣。 彼旣越長城之險, 入皇城之側, 何難於渡鴨綠而至畿甸哉! 況凡察、滿住, 構釁有年, 亦必欲假其威力, 以逞其志也。 邊釁一開, 則生民之禍, 不可勝言。 疆域之事, 雖不必在於朝夕, 實自今日始也。 議者必謂敵若侵陵, 卑辭厚幣, 可免一時之患。 臣觀前朝事元之後, 撤禮塔、車羅大、洪茶丘侵暴之兵, 無歲無之, 是不可以禮信相待者也。 若我兵力不足, 則達達豈愛我者哉! 不得已從權修好, 須一大勝, 而後可也。 彼知我兵力可以相抗, 然後未敢輕易興師, 而封疆可守, 前朝之於遼、金是也。 然則和與戰, 皆不可不用其兵也。 故臣敢以選將卒、儲糧餉、備器械、繕城堡, 爲當今之急務。
二曰選士卒。 蓋士卒, 國之爪牙也。 前朝置四十二都府, 養精兵十二萬, 故能雄視隣國, 雖遼、金迭入於中國, 根據於門庭, 而莫之犯。 且唐太宗之伐高句麗, 延壽、惠眞率精兵十五萬以赴之; 高麗太祖之平百濟, 亦用精兵十一萬。 至定宗時, 聞契丹之謀, 抄兵三十萬, 號曰光軍; 以至康兆之拒契丹以三十萬, 姜邯賛之敗契丹以二十萬, 尹瓘之平女眞以十七萬, 辛丑之定紅賊以二十萬。 今兵數除京中侍衛軍士外, 兵僅十餘萬, 而船軍一分也, 侍衛鎭軍守城一分也, 烟戶雜色一分也。 船軍則不可他使, 亦不可用雜色, 則或官戶或鄕吏或賤隷, 皆烟戶執事之人, 但侍衛鎭軍數萬騎, 可調發爲兵者也。 此則軍額雖存, 而正兵無多, 言之可謂寒心。 此無他, 戶口之法不明, 而人多漏籍, 又諸色雜役人不隷軍目者多也。 昔唐將之平百濟、高句麗, 得戶各不下七十萬, 而新羅之數不與焉。 我大明高皇帝亦曰: “汝國東西一千四五百里, 南北一千二三百里, 其間七十萬戶, 戶各三丁, 凡三百一十餘萬人。” 此聖人明見萬里之言也。 我本朝據統三之業, 得休養之久, 而戶數不過數十萬, 此豈非戶口之法不明, 而兵數不古若者乎! 然戶口之不明, 在於立法之不嚴、守令之不盡心, 且狃於治安而不素爲區處故也。 臣聞下三道騎船鎭軍侍衛牌, 雖名三四丁爲一兵, 餘丁甚多。 又書員日守, 其數無限, 至於沿海州郡富强之戶, 公私賤口及良人之逃役者, 不知幾千, 是軍籍之所由減也。 夫有邊耗, 則中外騷然, 稍無聲息, 則曾不爲慮, 是不可以謂無事而不爲, 以謂民勞而不爲, 亦不可也。 若臨時爲之, 則人心驚動, 處置失宜, 逃散者必多, 且何時鍊而爲兵乎! 所謂農畝之氓, 市井之徒, 亂我行陳, 敗我大事, 徒費糧餉而已。 若止發舊額, 則兵不多; 幷烟戶加抄, 則兵不精。 假如烟戶皆爲兵而從役, 則何人趨南畝, 何人爲轉輸, 何人備器械, 何人繕城堡而守之乎, 是尤不可也, 莫若以烟戶雜色爲守城而盡發良民爲兵也。 其抄之之術, 令京中漢城府四部、外方監司守令, 乃於大小各戶, 嚴立期限, 更定什伍之制、戶口之法, 五家爲小統, 十家爲一統, 每戶察戶口之有無, 戶口察丁口之脫漏。 如是而漏一丁者, 勿論京外、尊卑貴賤、三切隣及監考、勸農、管領, 竝定入居; 漏一家者, 五家及上項人等, 亦竝入居; 其匿公私賤口逃役良民者, 亦如之。 又行號牌之法, 令中外大小人年十五以上, 皆帶之, 仍令外方監司守令、京中司憲府ㆍ漢城府考察僞造及私相假借者, 以僞造印信律科罪。 凡國人無戶口號牌者, 公私賤口, 於兩界殘亡官奴婢定屬; 百姓及兩班, 於兩界極邊充軍, 仍許陳告, 以犯人田産充賞。 先以此意曉諭中外, 果斷行之, 則漏丁庶幾盡出而無隱矣。 或云: “入居之法太重, 不可行也。” 然臣以謂立法不可不嚴, 逃匿人戶, 當今之大弊也。 入居之事, 常情之所共惡者也, 欲去大弊, 莫如以所惡之事制之。 旣知入居爲可惡, 則亦不敢以匿國民矣。 知而犯之, 則所謂逋逃主也, 罪之何恕哉! 嚴立禁令, 非馭世常經, 所以欲人之不犯也。 此法之行, 其利有三。 良民盡出, 則軍額足; 公賤盡出, 則公室足; 私賤盡出, 則士大夫足矣。 於是, 外方則受田有蔭人及前銜品官、東班六品、西班四品以上與文武科出身、生員、進士、敎道等戶, 稱守城衛; 鄕吏、驛子、津干、牧子, 稱守城軍。 此外上自品官子弟年壯生徒, 下至白丁良民, 皆抄爲軍, 擇强壯者, 爲之戶首。 又烟戶雜色, 旣稱守城戶矣, 前日良人之爲守城軍者, 額數不多, 別無定役, 竝罷之, 分屬騎船鎭軍。 書員、日守, 亦皆差等定額, 以此更加選擇, 得侍衛牌三萬、鎭軍三萬、船軍六萬, 其餘雜色軍, 亦可得五六萬戶矣。 京中則文武百官、受田有蔭ㆍ成衆愛馬、前銜各品生員進士等戶, 稱都城衛; 各司吏典諸色匠人公私賤口等雜戶, 稱都城軍, 此外閑良子弟年壯生徒, 皆抄爲兵。 又革京侍衛牌, 無受田牌。 分屬甲士防牌。 忠順衛之有武才者, 移屬內禁別侍衛, 以補充軍爲皂隷。 皂隷爲防牌別軍, 則銃筒衛代其事矣。 皆罷屬防牌六十, 又罷差備軍, 又罷良人之投屬匠人者, 又罷都府外以防牌代巡綽之事。 司饔ㆍ忠扈衛、各司吏典, 竝減舊額。 以此更加選擇, 得內禁衛三百、別侍衛六千、甲士九千、防牌九千、攝六十三千, 銃筒衛三千。 如是則外兵騎步各六萬, 京軍騎步各一萬五千, 騎步相半, 京外得中, 而合得精兵十五萬矣。 京外兩班各戶外, 軍士之無奴婢者, 甲士則以四丁爲一戶, 侍衛鎭軍船軍以三丁爲一戶, 防牌六十銃筒衛以二丁爲一戶, 其他烟戶以三丁爲一戶。 然則無一丁不付於軍籍, 無一兵單丁而立戶, 烟戶皆守城, 而良民皆從軍矣。 因改之以美號, 內禁衛曰忠勇衛, 別侍衛曰忠武衛, 甲士曰武寧衛, 侍衛牌曰武平衛, 鎭軍曰鎭邊衛, 船軍曰鎭海軍, 防牌曰保勝軍, 攝六十曰保捷軍, 銃筒衛曰克敵軍, 近仗曰供鶴軍。 如是則軍號整齊, 士氣亦增矣。 且兵非不足, 在擇之無遺; 亦非不可精也, 在敎之有素。 外方鎭軍, 付鎭兵馬使, 船軍則萬戶, 侍衛牌則守令, 各置射場, 更立約束, 習射習陣, 月季, 節制、處置、監司考其勤怠而黜陟之。 京中軍士則本訓鍊觀主之。 乞南部, 南大門外; 東部, 東大門外; 西部, 盤松亭; 中部, 水口門外, 各築射場, 令甲士、別侍衛、內禁衛、番上侍衛牌, 除入番巡綽日外, 皆令付近習射或習陣, 考其能否, 以行賞罰。 至於步兵, 亦令習杖習陣, 而入直軍士及忠順、忠義衛, 令鎭撫所依式習射。 儻或邊境有變, 除船軍六萬, 以步騎九萬, 於平安道義州ㆍ朔州ㆍ江界ㆍ熙川ㆍ寧邊ㆍ安州ㆍ平壤、咸吉道會寧ㆍ鍾城ㆍ穩城ㆍ慶源ㆍ鏡城ㆍ磨天ㆍ磨雲嶺ㆍ甲山ㆍ咸興、黃海道岊嶺ㆍ棘城等處, 隨宜分置, 或戰或守, 臨機決策。 如此則士馬精强, 戰守有備矣。 臣聞兵法曰: “兵不選鋒者北。” 蓋前鋒不可不擇也。 且如兩陣相交, 勝否未決, 及至危急之時, 非先鋒銳卒, 以鐵騎蹂之, 則不可也。 周之虎賁, 宋之背嵬軍, 金之花帽軍, 西夏之鐵鷂子是也。 今內禁別侍衛甲士, 卽其選也。 乞更擇勇敢之士三百人, 以充內禁衛, 又當行兵之時, 預選突騎數百人, 以備先鋒。 且金人以鐵騎被重鎧, 分左右翼, 戰酣則用之, 自起於海上, 所向無前, 皆以此取勝, 號曰拐馬, 名曰長勝軍。 其制度, 今不可悉考, 意謂選壯士, 乘鐵騎, 持短兵以陷陣也。 乞司僕寺諸員, 定九百人, 平時京外調習馬匹, 仍以擊刺之法敎之, 或用爲先鋒, 或用爲遊奕, 則不必費他兵, 其馳驅, 與常人不同, 可以有功矣。
三曰擇將帥。 蓋將帥, 三軍之司命也, 不可以徒取其勇, 亦不可徒取其以文人而稍知武藝者也。 前朝多用儒將, 如姜邯賛、金富軾、趙冲、金得培是也。 若以武臣爲將, 則亦用文臣爲副, 相與文武兼制, 以成其功焉。 至于衰季, 一入樞密, 卽拜元帥, 以致倭寇之侵陵, 誠可恨已。 然擇將之術, 必儲之有素, 擇之至精, 然後爲可。 今武藝之錄, 擇將之具也, 乞更命議政府兵曹, 使東班六品、西班四品以上及內禁ㆍ別侍衛、甲士牌頭、外方監司ㆍ守令ㆍ水陸將帥ㆍ萬戶ㆍ千戶等, 各擧可爲將帥者三數人, 悉書姓名, 更加商度, 一二品得大將十人, 三四五六品得偏裨一百人, 參外及成衆衛士草澤之中, 得將來可用者三百人, 不以干請而薦之, 不以規避而棄之, 有才者無一人不錄, 無才者無一人見容, 特成《將帥錄》, 獻于御所, 政府兵曹, 各藏一本, 以備倉卒之用何如, 且將帥, 須用有名望可以襲服人心者爲之。 若才堪爲將, 而屈於下僚者, 稍優其職秩, 以試其能, 然爵命已極, 則亦不可爲使矣。 今武科講經, 不限經數, 優給分畫, 故短於武事者多中焉。 乞今後只許四書中講一書, 五經中講一經, 或只講《武經七書》何如, 其養之之術, 依趙宋武學故事, 亦仍本朝習讀之制, 年四十以下內禁ㆍ別侍衛、甲士中有器識解文字者取, 自願入學訓鍊觀, 除入番巡綽日外, 武經習讀。 其一應條格, 略倣成均館例, 學官則擇精於武經者, 爲長官以訓誨之。
四曰儲糧餉。 古人云: “雖有十萬之師, 有一日之糧, 方爲一日之師。” 用兵之道, 足食爲先。 兵興之際, 農事失時, 例多凶荒, 而漕轉之費, 亦且不貲, 誠爲可慮。 臣愚以爲足食之本, 在於汰冗雜之官, 停不急之務, 不奪民力, 使得力農而已。 或興水利, 或行屯田, 次也。 又其次, 行鬻爵之令而已。 蓋鬻爵, 擇工商賤隷外良人。 咸興、平壤以北入粟者, 拜西班軍職, 從九品一百石, 正九品二百石, 以此爲例, 從五品九百石, 正五品一千石。 原有職者, 每一百石加一資, 皆至五品而止。 其入粟內地者, 倍其數, 如二百石陞一資, 皆不許給祿, 隨後隨材用之。 有門望者, 亦用爲顯官。 此卽得穀之術, 而非至於窘急, 則不可爲也。五曰備器械。 臣聞晁錯曰: “器械不利, 以其卒與敵也。” 夫中國之枝梧戎馬, 惟器械之精是賴, 故《唐史》記李光弼之能曰: “光弼施令, 旌旗精彩一變。” 韓世忠之器械精巧, 《宋史》亦美之。 我本國軍容甚爲無光, 器械亦未盡善, 誠可慮也。 臣聞倭人以猪皮爲甲, 堅緻輕便, 乞中外皆令倣而爲之, 況猪皮爲易得之物乎! 鐵甲則依中原例, 以彩帛爲飾, 紙甲則令染紅黃靑色, 或用楚人衷甲之意, 外着方色有文之衣, 以至兜牟, 皆令有簷, 而馬韂之飾, 亦勿禁靑紅之色, 于以眩耀敵人之目, 于以壯我三軍之氣。 又弩矢者, 歷代中國之長技也。 所謂萬弩俱發者此也, 而宋有九牛弩床子弩等制。 新羅之弩, 亦至於一千步, 唐帝徵之, 終不盡枝, 自前朝之末, 始無聞焉。 乞詳考古制, 問諸中國, 以爲軍陳之用。 且守城之具, 在所當備, 而攻城之具, 亦所不廢。 雖不出彊以行兵, 萬一賊兵突入, 盜據邊城, 如前朝江東之賊, 則將何以攻之乎, 古史云: “東人善守城。”, 而凡守禦器械一無所傳。 如雲梯鵝車, 徒載於前史, 而目未嘗覩, 非細故也。 願詳考古制, 問之中原, 令中外城子製造分置。
六曰繕城堡、定關防。 蓋郡鎭者, 國家之藩籬也。 故王公設險, 以守其國。 宋有要郡次要郡之分。 我東方山川險阻, 縣鎭相望, 誠能講之於無事之時而處置合宜, 則敵雖欲舍之而深入, 且慮其擬其後也, 若處置疎虞, 則恐或爲敵人之資耳。 今沿邊州郡, 國家已分其緊慢, 然全以邊地爲緊, 故臣今幷論內地而濫進臆議焉。 咸吉道會寧, 是凡察舊居。 鍾城、穩城、慶源幷江邊, 鏡城有龍城之阨, 利城有磨雲嶺, 端川有磨天嶺, 甲山斗入西北隅, 咸興有咸關嶺, 又一道根本爲緊。 吉州連東良北, 北靑亦甲山之衝, 洪原有大門嶺, 定平古關門, 永興有龍興江, 德源有鐵關, 安邊有鐵嶺, 次之。 平安道義州據(鴨緣江)〔鴨綠江〕, 朔州賊路平闊, 江界是江邊巨鎭, 熙川有狄踰嶺, 又江界賊路, 寧邊一道重鎭, 安州有淸川江, 古安北鎭, 平壤有大同江, 又一道根本爲緊。 閭延是賊衝, 博川有大江, 成川亦要地, 次之。 黃海道黃州有棘城, 瑞興有岊嶺爲緊, 谷山連咸吉道, 次之。 江原道淮陽據鐵嶺, 江陵, 嶺東大府次緊。 慶尙道金海、昌原, 竝對馬之衝爲緊。 尙州, 嶺南大牧, 安東亦重地。 慶州卽高麗東京, 晋州南道巨邑, 星州有金鰲山城, 次之。 全羅道全州, 南道要衝, 南原、雲峯之衝。 羅州, 南方大牧次緊。 忠淸道忠州, 漕運之會, 公州有錦江次緊。 京畿, 京城爲緊。 開城府, 是前朝故都。 楊州爲後輔。 廣州有山城。 水原是南道之衝, 原平乃臨津之衝。 江華水路險, 卽前朝江都, 次之。 右州, 鎭關防有緊者, 有次緊者。 次緊者, 姑待豐年; 其要者, 已築城子處, 就加修葺, 其未築處, 各其傍近州郡烟戶軍丁, 擇農隙盡力築之。 是爲民也, 不可緩也。 至於南方要郡一時幷擧者, 蓋邊境有事, 則根本之地, 尤不可不固, 況非徒禦敵之術, 亦聚民之所不可不致慮也。 又江界棧道、岊嶺、棘城、龍城、磨天、磨雲、咸關、鐵嶺等地, 皆築石堡, 以爲防禦之所。 又山城依前朝古事, 按圖籍察形勢, 分遣臣僚, 不必近邑之處, 或於深遠之地四五郡, 得一險隘, 令附近州郡隨宜築之, 則庶(畿)〔幾〕緩急之可待, 而救民於危急之中矣。 以至京外城門之守、津關之禁, 亦當謹愼, 不可忽也。
七曰壯根本。 蓋京師, 根本之地也。 根本之地, 有所未固, 則四方之心, 亦無所依繫。 夫城郭堅固, 然後民志有所定, 而可以死守。 今京城後山巖石之間所築, 未能如法, 無雍城無敵臺, 倘有賊變, 將何以守禦乎, 若待有事而爲之, 則民心必動, 須及今爲之, 庶幾不駭於見聞, 而襟抱永固矣。 至於民力有餘, 則中興之城, 天作之驗也, 徵京畿京城丁夫築之, 則萬世之利也。 臣愚又意國家大敵, 例從西北而來, 今江倉在於江邊, 是可慮也, 乞築龍山、倉城倂西江倉爲一。 其上流漕運, 乃於豆毛浦, 作倉收貯, 仍築城子以護之, 則軍國之所天者, 不在空地, 而亦不專在於一處矣。 又從伐兒峴至于漢江, 經築城子, 則縱有敵變, 不得至城東。 且於藏義之西山谷要害之地, 亦築行城, 以爲之防, 則盜賊不敢遽入於後山矣。八曰先自治。 蓋古今天下國家之事, 莫大於自治。 自治已嚴, 則雖有外侮, 不能爲之患矣。 自治之道, 無他, 在不失民心而已。 民心者, 邦國之本也, 近日築城之擧, 未免勞民, 民心之搖, 非國家之福。 又待倭之術, 亦平時之所當講究者也。九曰議行城。 蓋行城之築, 國家之重事也。 臣聞築城之地, 西自麟山, 東至慶興, 千有餘里, 每年春秋, 發數萬之丁, 勞數月之役, 其所築, 一擧不過數十里。 然則雖至數十年, 固不能畢其功也。 自古及今, 安有數十年役勞苦之民而無弊者乎! 況城堡雖築, 一雨輒圮, 若不修葺, 與不築無以異也。 今延袤數千里之地, 將何兵而戍之乎, 有城而不守, 則何與於備禦乎! 況西北面疲於迎送, 困於防戍, 因之以飢饉而每興是役, 民多流離, 閭閻殆空。 儻邊境有虞, 則土兵盡耗, 將何以處之, 已勞之民, 尙未蘇息, 今天下方始戰爭, 更勞邊鄙之民可乎! 東北面民力稍厚, 城基亦減, 猶云可也, 然五鎭地勢縣遠, 而會寧、鍾城有畜牧之利, 穩城、慶源稱沃饒之鄕, 慶興有魚鹽之利, 他日邊塵一起, 則爲狄人必爭之地。 若賊兵突入, 或師老莫支, 無城郭, 則其得與失猶前日也。 城郭已固, 而遇此變, 則豈不爲狄人之資乎! 是尤可慮也。 然五鎭取舍, 不可輕議, 但令都節制使置司鏡城, 而以扼龍城之衝, 以圖萬全之計可也。 且行城, 所以備小敵之具也。 若大敵分道突入, 則何有於行城, 亦何有於口子哉! 不見大敵而先疲於小敵之備, 可乎, 今以行城爲重, 而州鎭之城爲輕。 假使行城易築也, 行城可倚也, 萬一狄兵越行城而入, 而內地無堅城, 則三韓百萬之命, 將如之何, 臣所陳築城修城之地, 倍於行城。 然則臣非徒以役民築城爲非而不知國家大計也, 但以邑城爲急, 行城爲緩, 先其急後其緩, 恐力不暇及於行城耳。 伏望以築行城之力, 移築州鎭之城, 生民幸甚, 國家幸甚。 且以江邊兵少, 而戍之以南道之兵, 實之以入居之戶。 若口子不罷, 則南道之戍不已, 戍之不已, 則南道之民, 無寧日矣。 乞罷江邊口子及新設小邑, 其軍民兵仗, 竝聚江界等三四要郡, 而仍以熙川爲重鎭, 爲之遠斥候謹烽燧。 如此則兵全力完, 處置得宜, 而爲萬世保國之長策矣。
十曰待倭人。 蓋去秋對馬倭人索糧不已。 臣聞之, 以爲自古皆知北方之可慮, 而不知南賊之爲可畏, 萬一激怒而竝興, 則濱海數千里, 農夫輟耕, 士卒奔命, 其爲糜費, 豈特百倍於此而已哉! 國家之待宗氏, 崖其宜。 乞仍舊例, 稍優待之, 雖有求索之事, 亦當曲從。 若以無名歲賜爲非, 則第加其宗貞盛等爵命, 仍以祿俸與之, 則名正言順, 而彼亦無不從矣。 但沿海留浦之倭, 必爲異時邊境之憂, 然今日北方有事, 不可輕動。 至於兵興, 則盡抄爲軍, 若効力, 則國家之利, 若不用命, 則處置在吾掌握中矣。 臣更反覆思之, 築城之弊除, 則北方之民安矣; 待倭之道盡, 則南方之民安矣。 於此選士卒、備器械、儲糧餉、繕城堡, 擇賢將而付之, 明賞罰以馭之。 內以壯根本之地, 外以存事大之體。 如是則內治之修, 至矣盡矣。 以我朝數千里山海之險、數十萬士卒之力, 可萬世奄有大東矣, 何畏乎狄人之侵哉!
不報。
지리지 / 구도 개성유후사
◎ 구도 개성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 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2년 기묘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5년 정월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개주(開州) 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개성부(開城府)로 고쳤고,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거란(契丹) 성종황제(聖宗皇帝)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開京)에 들어와서 궁궐과 시민의 집을 불태워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현종 〉9년 무오에 개성부를 파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3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현종 〉20년 기사에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7년.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서울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임금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 등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8천9백38인과 공장(工匠) 8천 4백50인을 모아 나성(羅城)4881)을 쌓으니, 둘레가 1만6천60보(步), 높이가 27척이며, 대문(大門)이 4이니, 동문(東門)을 숭인(崇仁), 남문(南門)을 회빈(會賓), 서문(西門)을 선의(宣義), 동남문(東南門)을 보정(保定)이라 한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7년.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승격하고, 김지(金沚)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임인4882)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 덕수(德水), 강음현(江陰縣), 정주(貞州), 장단(長湍), 임강(臨江), 토산(兎山), 임진(臨津), 송림(松林), 마전(麻田), 적성(積城), 파평현(坡平縣)을 관할하였다”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이하를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따로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6년.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 42보이다.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漢陽)에 옮기고, 4년 을해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하고 유후(留後), 부유후(副留後), 단사관(斷事官), 경력(經歷), 도사(都事)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현령(開城縣令)을 파하였다.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이라 한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진산(鎭山)은 송악(松岳)이다. 일명(一名) 숭악(崧岳)이다. 송나라 서긍(徐兢) 의 《봉사도경(奉使圖經)》 에 이르되, “경성(京城)의 진산은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꼭대기에 사당 셋이 있으니, 봄, 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첫째는 성황당(城隍堂)이요, 둘째는 대왕당(大王堂)이요, 세째는 국사당(國師堂)이다”하였다.
개성(開城) 한우물[大井]이 선의문(宣義門) 밖 11리에 있다. 물이 솟아나오는데, 그 깊이가 2척 남짓하다. 봄, 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가뭄을 만나면 박연(朴淵), 덕진(德津)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며,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한다. 속설에 “우물물이 붉게 흐리면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다”고 한다. 경덕궁(敬德宮)은 중부(中部) 남계방(南溪坊)에 있다. 속칭 추동(楸洞)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매 더 넓혀서 지었다. 목청전(穆淸殿)은 숭인문(崇仁門) 안쪽 안정방(安定坊)에 있다. 속칭 어배동(於背洞)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憲大王)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태종(太宗) 18년 무술에 구도[ 개성]에 거둥하여 전우(殿宇)를 짓도록 하고, 태조의 화상을 모시고 전직(殿直) 2인을 두며, 전우 옆에 숭효사(崇孝寺)를 세우고 명복을 빌게 하며,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결과 노비 35명을 주었다.
연경궁 옛터[延慶宮舊基]는 송악 남쪽에 있는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본대궐(本大闕)이라 일컫는다. 수창궁 옛터[壽昌宮舊基]는 도성(都城) 북판에 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현릉(顯陵)은 선의문(宣義門) 밖 서쪽의 보통사(普通寺) 서쪽 오동방(梧桐坊)에 있는데, 수릉(守陵) 8호를 두었다. 문묘(文廟)는 송악 동쪽의 마암(馬巖) 북쪽에 있다. 제전(祭田) 6결 및 섬학전(贍學田) 1백 50결을 두고, 또 교수관(敎授官) 1인을 두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데, 액수를 50명으로 정하였다.
사방경계[四方界域]동쪽으로 송림(松林) 판적천(板積川)에 이르기를 15리,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에 이르기를 30리, 남쪽으로 해풍(海豐) 후근석(朽斤石)에 이르기를 25리, 북쪽으로 왕흥산동(王興山洞)에 이르기를 31리이다.
도성(都城) 호수는 4천8백19호, 인구는 8천3백72명이요, 순작패군정(巡綽牌軍丁)이 1천명이며, 속현(屬縣) 개성(開城)의 호수는 8백44호, 인구는 2천 21명이요, 마군(馬軍)이 68명, 보군(步軍)이 5명, 선군(船軍)이 좌,우령(左右領) 아울러 20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고(高), 김(金), 왕(王), 강(康), 전(田)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이(李)이다.
간전(墾田)이 5천3백57결이다. 논[水田]이 10분의 3이 된다.
서적전(西籍田)은 보정문(保定門) 밖 시루못[甑池] 동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청교(靑郊)와 산예(狻猊)이다. 봉화(烽火)가 3곳이니, 송악(松岳)[남쪽으로 해풍(海豊) 덕적산(德積山)의 봉화에 응한다], 수갑산(首岬山) [북쪽으로 송악의 봉화에 응하고, 남쪽으로 해풍(海豊) 둔민달(芚民達) 에 봉화에 응한다], 개성신당(開城神堂)이다. 서쪽으로 수갑산의 봉화에 응한다.
용수산(龍岫山)은 도성 정남쪽에 있다. 진봉산(進鳳山)은 도성 동남쪽에 있다. 자하동(紫霞洞)은 곧 송악남쪽의 골짜기이니, 세상 사람들이 연하동(烟霞洞)으로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악부(樂府)에 자하동곡(紫霞洞曲)이 있다. 동강(東江)은 보정문(保定門) 남쪽 30리에 있다. 해풍군(海,郡) 경계에 남도(藍島)4883)가 있다. 서강(西江) 곧 예성강(禮成江)이니, 선의문(宣義門) 서남쪽 17리에 있다. 모두 예전에 배로 실어 온 곡식을 내리던 곳이다. 벽란도(碧瀾渡)는 선의문 서쪽 30리에 있다. 도승(渡丞)이 있으니,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한다.
광명사(廣明寺)는 연경궁(延慶宮)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 의 옛집인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결을 주었다. 연복사(演福寺)는 도성 복판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65결을 주었다. 신암사(神岩寺)는 도성 정동쪽에 있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50결을 주었다. 감로사(甘露寺)는 벽란도(碧瀾渡) 동쪽에 있는데, 강물이 내려다보여 매우 절경이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결을 주었다. 관음굴(觀音屈)은 성밖 동북쪽에 있다. 선종에 붙이고, 밭 2백50결을 주었다. 운암사(雲岩寺)는 비(碑)가 있고, 옛 이름을 광암(光岩)이라 하는데, 선의문 밖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비(妃)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절 동쪽에 장사지내고,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극히 장엄하고 화려하게 해서, 이른바 운암(雲岩)의 금벽(金碧)4884)이 산골짜기를 환하게 비친다고 할 수 있다.
송도팔경(松都八景)은 자하동의 중찾기[紫洞尋僧], 청교의 손님 보내기[靑郊送客], 북산의 연기와 비[北山烟雨], 서강의 바람과 눈[西江風雪], 백악의 갠구름[白岳晴雲],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 장단의 돌벽[長湍石壁], 박연폭포(朴淵瀑布)다.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로
고려의 선대 아간(阿干) 강충(康忠)이 집을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 정하고 살았다. 그 증손 작제건(作帝建)이 서해(西海) 용왕(龍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龍女)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하여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하였다.
그 후에 작제건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매, 추존(追尊)하여 작제건을 의조(懿祖)로, 용녀를 경헌 왕후(景獻王后)로 하고, 그 집을 희사하여 광명사(廣明寺)를 만들었다.
註4881]나성(羅城): 외성(外城).註4882]임인: 문종 16년.註4883] 남도(藍島) : 쪽섬.註4884]금벽(金碧): 삼청과 석록으로 채색을 놓고 금으로 단장한 것.
◎ 舊都開城留後司: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旣幷高句麗, 改爲松嶽郡。 高麗太祖二年己卯 【梁末帝貞明五年。】 正月, 定都于松嶽之陽, 陞爲開州。 成宗十四年乙未, 【宋太宗至道元年。】 改爲開城府。 顯宗元年庚戌, 【宋眞宗大中祥符三年。】契丹聖宗皇帝自將入開京, 焚宮闕民屋幾盡。 九年戊午, 罷開城府, 置縣令, 管貞州、德水、江陰三縣, 直隷尙書都省。 二十年己巳, 【宋仁宗天望七年。】 侍中姜邯賛請城京都, 王乃命參知政事李可道等, 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羅城, 周回一萬六千六十步, 高二十七尺。 大門四, 東曰崇仁, 南曰會賓, 西曰宣義, 東南曰保定。 文宗十六年壬寅, 【宋仁宗嘉祐七年。】 復陞爲知開城府事。 【金沚所撰《周官六翼》云: “壬寅三月, 改號, 所管牛峯郡德水江陰燕貞州長湍臨江兔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縣。”】忠烈王三十四年戊申, 陞爲開城府, 置府尹以下官, 掌都城之內, 別置開城縣令, 掌都城之外。 我太祖二年癸酉, 【大明太祖高皇帝洪武二十六年】 築內城, 周回二十里四十二步。 三年甲戌, 遷都漢湯。 四年乙亥, 改舊京爲開城留後司, 置留後副留後斷事官經歷都事各一員, 罷開城縣令。 【俗號松都, 亦曰開京。】 厥後備置醫學敎諭檢律各一人。 鎭山曰松嶽。 【一名崧嶽。 宋徐兢奉使圖經云: “京城之鎭曰崧山, 巓有祠宇三, 春秋行國祭, 載中祀, 一曰城隍堂, 二曰大王堂, 三曰國師堂。”】開城大井、【在宣義門外十一里, 有泉湧出, 滿深二尺許, 春秋行固祭, 遇旱則禱。 與朴淵、德津號三所龍王。 諺云: “井水赤面, 則後必有兵變。”】敬德宮、【在中部南溪坊, 俗號楸洞, 卽我太宗恭定大王潛邸舊宅也。 及卽位, 增廣修營。】穆淸殿、【在崇仁門內安定坊, 俗號於背洞, 卽我太祖康獻大王潛邸舊宅也。 太宗十八年戊戌, 駕至舊都, 命營殿宇, 奉安太祖神御, 置殿直二人。 殿旁建崇孝寺, 以薦冥福, 屬敎宗, 給田二百結、奴婢三十五口。】延慶宮舊基、【在松嶽南, 至今都人稱爲本大闕。】壽昌宮舊基、【箏城中央。】高麗太祖顯陵、【在宣義門外西普通寺西梧桐坊, 置守陵八戶。】文廟。 【在松嶽東馬巖北, 置祭田六結及贍學田一百五十結。 又置敎授官一人, 敎養生徒, 以五十爲額。】 四方界域 【東至松林板積川十五里, 西至碧瀾渡三十里, 南至海豐朽斤石二十五里, 北至王興山洞三十一里。】 都城戶四千八百十九, 口八千三百七十二, 巡綽牌軍丁摠一千名。 屬縣開城, 戶八百四十四, 口二千二十一, 馬軍六十八, 步軍五, 舡軍左右領, 幷二十。 土姓五, 高、金、王、康、田; 來接姓一, 李。 墾田五千三百五十七結, 【水田居十分之三。】 西籍田。 【在保定門外甑池之東。】 驛二, 靑郊、狻猊。 烽火三處, 松嶽、【南準海豐、德積山。】首岬山、【北準松嶽, 南準海豐芚民達。】開城神堂。 【西準首岬山。】龍岫山、【箏城正南。】進鳳山、【箏城東南。】紫霞洞、【卽松嶽南洞, 世以謂烟霞洞仙眞所居, 今樂部, 有紫霞洞曲。】東江、【在保定門南三十里海豐郡界藍島。】西江、【卽禮成江, 在宣義門西南十七里, 皆古漕運下泊之處。】碧瀾渡、【在宣義門西三十里, 有渡丞, 右道水站轉運判官兼之。】廣明寺、【在延慶宮西, 世傳高麗太祖舊宅, 捨家爲寺。 今屬敎宗, 給田二百結。】演福寺、【箏城中央, 屬禪宗, 給田一百六十五結。】神岩寺、【箏城正東, 屬敎宗, 給田一百五十結。】甘露寺、【在碧瀾東, 俯臨江水, 最爲奇絶。 屬敎宗, 給田二百結。】觀音屈、【在城外東北, 屬禪宗, 給田二百五十結。】雲岩寺、【有碑, 舊名光岩, 在宣義門外。 高麗恭愍王葬妃魯國公主于寺東, 爲之重創, 極其壯麗, 所謂雲岩之金碧輝映山谷者。】松都八景。 【紫洞尋僧, 靑郊送客, 北山烟雨, 西江風雪, 白嶽晴雲, 黃橋晩照, 長湍石壁, 朴淵瀑布。】 靈異: 高麗之先阿干康忠卜宅於松嶽南麓以居, 其曾孫作帝建娶西海龍王女, 又居於此, 生四男一女。 龍女於宅中堀井, 常由井中往來西海, 戒夫曰: “我將入井, 愼勿見之。” 作帝建後從窓隙窺之, 龍女率女子至井邊, 俱化爲黃龍, 興雲入井。 及還, 責夫曰: “何負約爲? 吾不得在此矣。” 遂與女變爲龍, 入井不還。 太祖卽位, 追尊作帝建爲懿祖, 龍女爲景獻王后, 捨其宅爲廣明寺。
◎ 금천현(衿川縣)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 인데, 신라가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4924)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금천(衿川)으로 금천(黔川)이라고 고치니,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곧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이다.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니, 목종(穆宗) 8년 을사 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이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곧 송나라 진종 천희(天禧) 2년에 혁파하였다. 수주(樹州)4925) 임내(任內)에 붙였으니, 명종(明宗) 2년 임진에 곧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8년이다.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 14년 갑오에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파하였고, 또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가 1년만에 파하였으며,〈 태종 〉병신4926) 에 다시 금천현감(衿川縣監)이라 하였다. 별호(別號)는 시흥(始興)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과천(果川)에 이르기를 14리, 서쪽으로 부평(富平)에 이르기를 11리, 남쪽으로 안산(安山)에 이르기를 15리, 북쪽으로 노도(露渡)4927)에 이르기를 18리이다.
호수가 3백27호, 인구가 9백37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명, 선군(船軍)이 73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 조(趙), 강(姜), 장(莊), 피(皮), 계(桂)이고, 망성(亡姓)이 2이니, 윤(尹), 추(秋)이다. 인물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 사람이다.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에 이르기를, “한 사신(使臣)이 밤에 시흥군(始興郡) 에 들어갔다가, 큰 별이 사람의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마침, 그 집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데리고 돌아가서 기르니, 이가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절하며 이르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아니한지 오래 되더니, 이제 여기에 계십니다’하였다. 이 말이 황당한 것 같으나, 그러나, 부열(傅說)이 기미성(箕尾星)의 정기가 되고, 신백(申伯), 보후(甫侯)가 숭악(崧岳)에 강림하였다 하니, 강감찬(姜邯贊)에게만 어찌 의심하리오”하였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백성의 풍속이 대개 어리석다. 간전(墾田)이 2천7백62결(結)이다. 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 팥, 녹두, 메밀, 수수[唐黍], 참깨, 뽕나무, 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요, 약재(藥材)는 백변두(白扁豆)이다.
역(驛)이 1이니, 반유(盤乳)이고,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달촌(達村)이요, 현(縣) 북쪽에 있으니, 둘레가 12리이며, 국마(國馬)를 놓아기른다. 둘째는 사외포(沙外浦)이다. 현(縣) 서북쪽에 있다. 양천(陽川) 절고지포[寺串浦]와 서로 연해서 둘레가 15리이니, 우군(右軍)의 목장(牧場)이다. 양화도(楊花渡)현(縣) 북쪽에 있고, 도승(渡丞)이 있다.
註4924]율진군(栗津郡): 과천.註4925]수주(樹州): 부평.註4926]병신: 16년. 註4927]노도(露渡): 노들.
◎ 衿川縣: 本高麗仍伐奴縣, 新羅改名穀壤, 爲栗津郡領縣。 高麗改爲衿川。【一作黔。】成宗十四年乙未,【卽宋太宗至道元年】 置團練使, 穆宗八年乙巳,【卽宋眞宗景德二年。】 罷之。 顯宗九年戊午,【卽宋眞宗天禧二年。】 屬樹州任內。 明宗二年壬辰,【卽宋孝宗乾道八年。】 始置監務。 本朝太宗十四年甲午, 革果川, 倂爲衿果縣, 數月而罷。 又革陽川縣, 倂爲衿陽縣, 一歲而罷。 丙申, 復爲衿川縣監, 別號始興。 四境, 東距果川十四里, 西距富平十一里, 南距安山十五里, 北距露渡十八里。 戶三百二十七, 口九百三十七。 軍丁, 侍衛軍五, 船軍七十三。 土姓六, 李、趙、姜、莊、皮、桂; 亡姓二, 尹、秋。 人物, 門下侍中仁憲公姜邯賛, 【高麗顯宗時人。 金台鉉《東國文鑑》云: “有一使臣, 夜入始興郡, 見大星隕于人家, 遣吏往視之, 適其家婦生男, 使臣心異之, 取歸以養, 是爲姜邯贊。 後宋使見之, 不覺下拜曰: ‘文曲星, 不見久矣, 今在此。' 是說似涉荒唐, 然傅說爲箕、尾之精; 申甫維, 崧嶽之降, 獨於邯贊何疑乎!”】 厥土, 肥塉相半。 民俗凡愚。 墾田二千七百六十二結。 【水田居五分之二。】 土宜五穀, 粟、小豆、菉豆、喬麥、唐黍、芝麻、桑、麻。 土貢, 芝草。 藥材, 白扁豆。 驛一, 盤乳。 牧場二, 一曰達村, 【在縣北, 周回十二里, 牧國馬。】 二曰沙外浦。 【在縣西北, 與湯川寺串浦相連, 周回十五里, 右軍牧場。】楊花渡。 【在縣北, 有渡丞。】
지리지 / 황해도 / 연안 도호부 / 우봉현
◎ 우봉현(牛峯縣)
본래 고구려의 우잠군(牛岑郡)인데, 우령(牛嶺)이라 하기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현종(顯宗) 9년에 평주(平州) 임내에 붙였고,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개성부(開城府)에 직속시켰다가, 예종(睿宗) 병술5164)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을해(乙亥)5165)에 현령관(縣令官)으로 고쳤다. 별호는 삼주(三州)이다.
구룡산(九龍山)은 현의 남쪽에 있는데, 고려국조(高麗國祖) 성골장군호경 대왕(聖骨將軍虎景大王)의 사당이 있으므로 성거산(聖居山)이라 하기도하며, 혹은, “ 신라 때 도(道)를 깨달은 중 의상(義相)이 살고 있었으므로 산 이름을 ‘성거’라 하였다”하고, 또 호경(虎景)이 사냥꾼 9사람으로 더불어 이 산에 들어가 짐승을 잡다가, 마침 해가 저물어 바윗굴에 들어가 자는데, 별안간 호랑이가 굴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지르니, 9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니,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제 운에 맞는 자가 있으리니, 각기 갓을 호랑이 앞에 던져, 호랑이가 무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다.” 하고, 모두 〈갓을〉호랑이 앞에 던졌는데, 호랑이가 마침내 호경의 갓을 물었다. 호경이 곧 나가 호랑이와 싸우려 하는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서, 9사람이 모두 치어죽고, 호경만 혼자 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구룡’이라 하였다.”한다.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 가을에 제사지내게 한다. 원중포(源中浦)는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토산(兎山), 비라천(非羅川)에 이르기를 25리, 서쪽으로 평산(平山)에 이르기를 25리, 남쪽으로 송림(松林)에 이르기를 65리, 북쪽으로 신은(新恩) 원적천(原積川)에 이르기를 55리다.
호수가 778호요, 인구가 2,18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17명이요, 영진군이 45명이요, 선군이 113명이다.
토성(土姓)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3이니, 최(崔), 황(黃), 태(太) 요, 속성(續城)이 2이니, 김(金), 박(朴)이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땅이 메마르고 산이 높으며, 풍속이 산전(山田)을 일구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힘쓴다. 간전(墾田)이 6,820결이요, 논이 겨우 55결이다. 토의는 기장, 피, 콩, 보리, 조, 수수, 팥, 메밀, 잇, 참깨, 삼이다. 토공은 노루가죽,사슴가죽, 삵괭이가죽, 꿀, 밀[黃蠟], 종이, 칠(漆), 지초, 느타리, 애끼찌[弓幹木]이요, 약재는 승검초뿌리, 삿갓나물, 북나무진[安息香], 삽주덩이뿌리[白朮](가장 좋다), 검산풀뿌리, 대추, 가위톱[白莢]이다. 석철(石鐵)이 현의 서쪽 10리 구시산(仇時山)및 13리 관음점(觀音岾)에서 난다. 시우쇠로 불려서 바친다. 청색여석(靑色蠣石)은 현의 북쪽 25리 별아압현(別兒鴨峴)에서 난다. 참(站)이 1이니, 흥의(興義)이다.옛 이름은 연파(延波)인데,〈고려〉 현종(顯宗) 10년에 원수(元帥) 강감찬(姜邯贊) 등이 거란군사를 몰아내고 돌아올 때, 왕이 이 역에 거둥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영접하고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기이한 일[靈異]. 박연(朴淵)
이규보(李奎報)가 이르기를, “예전에 박진사(朴進士)라는 자가 있어, 피리를 못 위에서 부니,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그 남편을 죽이고 〈박진사〉를 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하였다”한다. 위, 아래 못이 있는데, 모두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개성(開城)의 한우물[大井]과 임진(臨津)의 덕진(德津)과 함께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하여,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험이 있으므로,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위 못 가운데 반석(盤石)이 있는데, 일을 좋아하는 이들이 간혹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구경한다. 고려 문종(文宗)이 일찍이 그 〈반석〉위에 올랐는데, 별안간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며, 반석이 진동하여, 문종이〈몹시〉놀랐다. 담양(潭陽)사람 이영간(李靈幹)이 모시고 있다가, 칙서(勅書)를 지어 못에 던지고, 용의 죄를 들어 꾸짖으니, 용이 감동하여 그 등[脊]을 드러내매, 〈영간〉이 장(杖)으로 치니, 못물이 모두 붉어졌다한다. 폭포가 있어서 아래 못으로 날아 흐르는데, 사람들이 여산(廬山)보다 〈훨씬〉낫다 한다. 이제현(李齊賢)의 박연사(朴淵詞)에 이르기를, “흰 폭의 깁이 천척에 나니, 파란물이 만길에 맑았다. 옛 임금이 이곳에 올랐다하니, 반석이 못 가운데 있음이라.” 한 것은 곧 이를 가리킨 것이다.
인달암(因達巖)은 현의 남쪽 성거산(聖居山) 북쪽 탑동(塔洞)에 있다. 둘레가 1천여 척이며, 높이가 4백여 척인데, 중[僧]이 이르기를, ‘사신암(捨身岩)’이라 한다.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혁파하였다.
註5164]병술: 원년.註5165]을해(乙亥): 4년.
◎ 牛峯縣: 本高句麗 牛岑郡,【一云牛嶺, 一云首知衣。】 新羅改今名。 顯宗戊午, 屬平州任內, 文宗十六年壬寅, 直隷開城府,【宋 仁宗 嘉祐七年。】 睿宗丙戌, 始置監務。 本朝太祖乙亥, 改爲縣令官, 別號三州。 九龍山、【在縣南, 高麗國祖聖骨將軍虎景大王之祠在焉, 故號聖居山。 或曰新羅時, 有得道僧義相者居之, 山之名以此。 虎景與獵者九人入山中擊獸, 會日黑, 就岩竇宿, 有虎至當竇口大吼, 九人相謂: “虎必欲啗我, 我輩中一人, 必有當之者, 請各投笠虎前, 虎所噬, 卽其人也。” 於是皆投之, 虎乃噬虎景笠, 虎景卽出, 欲與虎鬪, 虎不見而竇崩, 九人皆壓死而虎景獨生, 故名九龍。 今令所在官春秋行祭。】 源中浦。【在縣西二十五里。】四境, 東距兔山 非羅川二十五里, 西距平山二十五里, 南距松林六十五里, 北距新恩、原積川五十五里。 戶七百七十八, 口二千一百八十。 軍丁, 侍衛軍一百十七, 營鎭軍四十五, 船軍一百十三。 土姓一, 李; 亡姓三, 崔、黃、太; 續姓二, 金、朴。【今爲鄕吏。】厥土塉山高, 俗墾山田, 務蠶桑, 墾田六千八百二十結。【水田止五十五結。】土宜, 黍、稷、菽、麥、粟、唐黍、小豆、蕎麥、紅花、胡麻、麻。 土貢, 獐鹿狸皮、蜂蜜、黃蠟、紙、漆、芝草、眞茸、弓榦木。 藥材, 當歸、皀休、安息香、白朮、【最良。】續斷、棗、白莢。 石鐵産縣西十里仇時山及十三里觀音岾。【鍊正鐵以貢。】靑色礪石。【産縣北二十五里別兒鴨峴。】站一, 興義。【古名延波, 顯宗十年己未, 元帥姜邯賛等敗走丹兵, 凱還, 王幸是驛, 設綵棚陳百戲, 以迎之, 改賜今名。】靈異, 朴淵、【李奎報云: “昔有朴進士者吹笛於淵上, 龍女感之, 殺其夫, 引之爲壻, 故號朴淵。” 有上下淵, 深皆不測, 與開城之大井、臨津之德津, 號三所龍王。 旱則禱雨有應。 今令所在官春秋行祭, 上淵中有盤石, 好事者或梯而登覽。 高麗 文宗嘗登其上, 忽風雨暴作, 石震動, 文宗驚怖。 潭陽人李靈幹扈從, 作勑書投之淵, 數龍之罪, 龍卽感悟出其脊, 乃杖之, 淵水爲之盡赤云。 有瀑布飛流下淵, 人謂勝於廬山。 李齊賢 《朴淵詞》云: “削白練飛千尺, 靑銅澈萬尋。 人言玉輦昔登臨, 盤石在潭心。” 卽指此也。】 因達巖。【在縣南聖居山北塔洞, 周回一千餘尺, 高四百餘尺。 僧謂之捨身岩, 高麗時, 行國祭, 今革。】
단종 4권, 즉위년(1452 임신/명경태(景泰) 3년) 12월 13일(신축) 2번째기사
고려의 공신, 충신, 명장 등을 왕씨의 제사와 함께 제사하도록 하다
의정부가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고려왕조(高麗王朝)의 태사개국무열공(太師開國武烈公) 배현경(裴玄慶), 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장절공(莊節公) 신숭겸(申崇謙) 등 4인은 모두〈 고려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1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습니다. 태사개국충절공(太師開國忠節公) 유금필(庾黔弼)은 북계(北界)에 북적(北狄)819)이 침입하였을 때 태조가 유금필을 보내어 진압하니 〈오랑캐의〉여러 부족이 서로 좇아서 내부(來附)하여 북쪽이 안정되었고, 태조가 견휜(甄萱)과 여러번 싸워 이기고 마침내 백제 를 멸망시킨 것은 모두 유금필의 공이어서 시종〈태조의〉총애(寵愛)를 여러 장수들보다 깊이 받았고, 태조와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태사내사령장위공(太師內史令章威公) 서희(徐熙)는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고구려 의 옛 땅을 수복한다고 성언(聲言)하며 침입하였을 때 성종(成宗)820)이 서경(西京)821) 이북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고, 또 서경의 창고(倉庫)에 있는 곡식을 풀어 대동강(大同江)에 던져 버리고자 하였으나, 서희 가 불가함을 여러 차례 말하고는 자청하여 소손녕의 진영(陣營)에 가서 거듭 논설하여 힐난(詰難)하니, 그 말하는 기품(氣品)이 강개(慷慨)하였으므로 소손녕이 강제로 하지못할 것을 알고 파병(罷兵)하여 돌아갔으며, 또 〈서희는〉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진(女眞)을 쫓아내고 장흥(長興), 귀화(歸化) 등지에 성을 쌓았으므로 성종과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태사문하시중인헌공(太師門下侍中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은 거란주(契丹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을 공격하여 아군(我軍)의 패배 소식이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그는 현종(顯宗)822)에게 남쪽으로 피난(避亂)할 것을 권하였고, 뒤에 거란 군사 10만 명이 침입해 와서 장차 서울을 핍박(逼迫)하려 할 때, 강감찬은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서울에 원병(援兵)을 보내었고, 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크게 싸워 〈거란군을〉 격파하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므로 현종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수태보문하시중문숙공(守太保門下侍中文肅公) 윤관(尹瓘)은 여진(女眞)이 치열하게 동계(東界)에 난입(闌入)823)하였을 때 예종(睿宗)824)이 윤관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 구성(九城)825)을 쌓았으며 공험진(公嶮鎭)에 비석(碑石)을 세워 경계로 삼았으므로 예종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문하시중문열공(門下侍中文烈公) 김부식(金富軾)은 묘청(妙淸) 등이 서경 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인종(仁宗)826)이 김부식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 평정하였습니다. 김부식은 문장(文章)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떨쳤으며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김부식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김부식 의 가세(家世)와 도형(圖形)을 가지고 돌아가서 황제(皇帝)에게 아뢰어 판목(板木)에 새기고 그 전기(傳記)를 널리 퍼뜨리니,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서 인종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문하평장사문정공(門下平章事文正公) 조충(趙沖)과 문하시중위열공(門下侍中威烈公) 김취려(金就礪)는 거란의 유종(遺種)인 김시(金始), 김산(金山) 두 왕자(王子)가 군사를 이끌고 북쪽 지방에 난입하고, 강동(江東)에 들어와 있었을 때 고종(高宗)827)이 조충 과 김취려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몽고원수(蒙古元帥) 합진(哈眞)과 동진원수(東眞元帥)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군사를 합하여 거란군을 토벌하여 우리를 구원한다고 성언하며 화성(和城), 맹성(孟城), 순성(順城), 덕성(德城) 등 4성을 공파(攻破)하고 곧 바로 강동(江東)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중외(中外)가 놀라서 떨었습니다. 조충 등이 조정(朝廷)에 청하여 합진, 완안자연과 더불어 화약(和約)하고 강동을 공파하여 항복시키고 드디어 합진 등과 더불어 동맹(同盟)하여 형제국(兄弟國)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두 사람이 모두 고종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첨의령충렬공 (僉議令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은 임연(林衍)이 원종(元宗)828)을 폐위시켰을 때, 세자(世子)가 몽고 에 있으면서 군사를 보내어 임연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김방경으로 하여금 같이 가게 하였는데, 김방경은 몽고군이 만약 대동강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전국이 놀래어 변란(變亂)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성지(聖旨)를 받들어 서경에 주둔(駐屯)하면서 성원(聲援)만 하고 대동강을 건너지 말 것을 말하였습니다만, 북계(北界)의 반민(叛民)인 최탄(崔坦) 등이 혼란한 기회를 타서 나라를 병탄(倂呑)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蒙哥篤)에게 고발하여 말하기를, ‘본국이 장차 관군(官軍)829)을 죽이려고 제주(濟州)로 들어가고자 하니, 사냥나간다고 성언하고 대동강을 건너 왕경(王京)830)을 엄습하여 왕족을 사로잡고 옥백(玉帛)831)을 모두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니, 몽가독이 장차 그대로 따르려 했으나, 김방경이 조서(詔書)를 어기고 대동강을 건너는 것이 불가함을 힘써 말하여 이를 중지시켰습니다. 임연의 무리인 삼별초(三別抄)가 승화후(承化侯)832)를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종(元宗)이 김방경에게 명하여 이를 토평(討平)하게 하였는데, 삼별초의 무리가 탐라(耽羅)833)로 도망해 들어가니 김방경이 또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습니다. 또 원나라의 세종(世宗)이 군사를 보내어 일본(日本)을 다시 정벌하면서 고려로 하여금 이를 주관케 하자 충렬왕(忠烈王)834)이 김방경 에게 모두 명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가서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모반하였다고 무고(誣告)하고, 홍다구(洪茶丘)가 본국(本國)835)에 불만이 있어서 김방경으로 하여금〈원나라에 대하여 모반하였음을〉무복(誣服)하게 하여 화(禍)를 국가에 전가시키고자 철색(鐵索)836)으로 그 목을 감고, 곧 이마에도 감으려 하자 왕이 차마 볼 수 없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어질고 성스러워 장차 그 사정이 거짓임이 밝혀질 터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계속되게 하는가’하니, 김방경은 ‘왕께서는 어찌 이러하십니까, 신이 어찌 감히 몸을 아껴 무복함으로서 사직(社稷)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니, 이에 황제도 석방하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안우(安祐) ,정당 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방실(李芳實) 등은 홍건적(紅巾賊) 4만명이 서경을 함락했을 때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분연히 이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키니, 적의 전사자(戰死者)가 서로 머리를 이었고 겨우 3백명만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도주(逃走)하였으며, 뒷날 홍건적 20만명이 개성을 함락하였을 때는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군사 20만명을 거느리고 개성을 포위하여 크게 격파시켰는데, 10여만 명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는 강을 건너 도주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편안한 침식(寢食)을 하게 된 것은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하였습니다. 수문하시중문충공(守門下侍中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공양왕(恭讓王)837)을 도와서 반정(反正)하고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되어 드디어 시중(侍中)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끝내는 절의(節義) 때문에 죽었습니다. 처음에 명나라가 비로소 일어났을 때 정몽주는 공민왕(恭愍王)838)에게 힘써 청하여 가장 먼저 귀부(歸附)했으나, 공민왕이 죽고 난 후 이인임(李仁任) 등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함에 정몽주가 또 그 불가함을 극진히 진계(陳啓)하였습니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를 금할 것을 청하고, 정몽주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진히 펼치니, 이에 그 주장(柱將)이 공경하고 복종하여 포로된 사람 수백 명을 돌려주고, 〈 왜구가〉세 섬[三島]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고황제(高皇帝)839)가 세공(歲貢)840)을 증가시켜 말(馬) 5천필(匹), 금(金) 5백근(斤), 은(銀) 5만냥(兩), 포(布) 5만필로 정하자, 정몽주는 명나라 서울로 가서 증가된 세공을 제감(除減)할 것을 주청(奏請)하였고, 또 호복(胡服)841)을 혁파하고 화제(華制)842)를 계승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며 오부학당(五部學堂)과 지방의 향교(鄕校)를 건립하고,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각 왕대(王代)에 배향된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청컨대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 때 함께 제사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819]북적(北狄): 북쪽 오랑캐 註820]성종(成宗): 고려 6대 임금 註821]서경(西京): 평양 註822]현종(顯宗): 고려 8대 임금 註823]난입(闌入): 함부로 침입함.註824]예종(睿宗): 고려 16대 임금 註825]구성(九城): 고려 16대 예종 2년(1107)에 윤관(尹瓘)이 17만 대군으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쌓은 아홉 개의 성, 곧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진(崇寧鎭), 진양진(晉陽鎭), 통태진(通泰鎭)을 말함 註826]인종(仁宗): 고려 17대 임금 註827]고종(高宗): 고려 23대 임금. 註828]원종(元宗): 고려 24대 임금.註829]관군(官軍): 몽고군 註830]왕경(王京): 개성.註831]옥백(玉帛): 옥과 비단.註832]승화후(承化侯): 고려 원종 때의 왕족. 이름은 온(溫).註833]탐라(耽羅): 제주도 註834]충렬왕(忠烈王): 고려 25대 임금 註835]본국(本國): 고려 註836]철색(鐵索): 철사로 꼬아 만든 줄.註837]공양왕(恭讓王): 고려 34대 임금.註838]공민왕(恭愍王): 고려 31대 임금 註839]고황제(高皇帝): 명나라 태조(太祖).註840]세공(歲貢): 해마다 바치는 공물 註841]호복(胡服): 오랑캐의 복제(服制).註842]화제(華制): 중국의 제도
○議政府據禮曹呈啓: “前朝太師開國武烈公裵玄慶、忠烈公洪儒、武恭公卜智謙、壯節公申崇謙四人, 皆推戴太祖, 統一三韓爲一等功臣。 太(史)〔師〕開國忠節公庾黔弼, 北界爲北狄所侵, 太祖遣黔弼鎭之, 諸部相率來附, 北方晏然。 太祖與甄萱屢戰勝, 卒滅百濟, 皆黔弼功也。 終始寵遇, 諸將莫及, 俱配享太祖; 太師內史令章威公徐熙, 契丹蕭遜寧聲言復高麗故地來侵, 成宗欲割西京以北與之, 又欲開西京倉米, 投大同江, 熙歷言不可, 自請往遜寧營, 反復論詰, 辭氣慷慨, 遜寧知不可强, 罷兵還。 又率兵逐女眞城、長興、歸化等地, 配享成宗; 太師門下侍中仁憲公姜邯賛, 契丹主自將攻西京, 我軍敗報至, 群臣皆議降, 邯賛勸顯宗南幸避之, 後契丹兵十萬來侵, 將逼京城, 邯賛爲西北面都統使, 遣兵入援, 又自將大戰破之, 契丹兵生還者, 僅數千人, 配享顯宗; 守太保門下侍中文肅公尹瓘, 女眞方熾, 闌入東界, 睿宗命瓘擊逐之, 築九城, 立碑于(公險鎭)〔公嶮鎭〕以爲界, 配享睿宗; 門下侍中文烈公金富軾, 妙淸等據西京叛, 仁宗命富軾討平之, 富軾以文章名世, 宋(史)〔使〕徐兢見富軾, 樂其爲人, 載富軾家世, 又圖形以歸, 奏帝鏤板, 以廣其傳。 由是名聞天下, 配享仁宗; 門下平章事文正公趙冲、門下侍中威烈公金就礪, 契丹遺種金始、金山二王子, 領兵闌入北鄙, 入保江東, 高宗命冲及就礪擊之, 時, 蒙古元帥哈眞、東眞元帥完顔子淵, 合兵聲言討丹救我, 攻和、孟、順、德四城破之, 直指江東, 中外震駭。 冲等請于朝, 與哈眞、子淵約和, 破江東降之, 遂與哈眞等同盟, 結爲兄弟之國, 二人皆配享高宗; 僉議令忠烈公金方慶、林衍廢元宗, 時, 世子在蒙古, 請兵討衍, 帝遣蒙哥篤討之, 世子令方慶伴行, 方慶意謂蒙古若渡大同江, 王國必震恐生變, 奉聖旨, 令屯西京爲聲援, 毋得過江。 北界叛民崔坦等, 有乘亂呑國之志, 告蒙哥篤曰: ‘本國將殺官軍, 欲入濟州, 不如聲言出獵, 過大同江, 掩襲王京, 子女、玉帛可盡得也。’ 蒙哥篤將從之, 方慶以違詔渡江不可, 力言乃止。 及衍之黨三別抄, 擁承化侯爲王, 叛據珍島。 元宗命方慶討平之, 其黨遁入耽羅, 方慶又討平之。 又元世宗遣將再征日本, 令高麗主之, 忠烈王皆命方慶爲元帥, 往征之, 韋得儒、盧進義等誣告方慶謀叛, 洪茶丘與本國有憾, 欲使方慶誣服, 嫁禍於國, 以鐵索圈其首, 若將加頂。 王不忍視, 語方慶曰: ‘天子仁聖, 將明其情僞, 何自苦乃爾?’ 方慶曰: ‘王何如是耶? 臣豈敢愛身誣服, 以負社稷?’ 竟不屈, 帝釋不問; 中書平章政事安祐、政堂文學金得培、樞密院副使李芳實, 紅賊四萬陷西京, 祐、得培、芳實奮擊大破之, 賊死者相枕, 僅三百餘, 渡鴨綠江而走, 後紅賊二十萬陷京城, 祐、得培、芳實等率兵二十萬, 圍京城大破之, 斬十餘萬, 餘黨渡江而走。 時人謂曰: ‘我輩獲安寢食, 三元帥之功也。’; 守門下侍中文忠公鄭夢周扶恭讓王反正, 爲中興功臣, 遂拜侍中, 終伏節而死。 初大明肇興, 夢周力請恭愍王首先歸附, 恭愍王薨, 李仁任等欲復事元, 夢周又上言極陳不可。 又奉使日本請禁賊, 夢周極陳交隣利害, 主將敬服, 還被虜數百人, 禁三島侵掠。 高皇帝增定歲貢馬五千匹、金五百斤、銀五萬兩、布五萬匹。 夢周如京師, 奏除增定歲貢, 又建議革胡服、襲華制、立家廟、建五部學堂、外方鄕校、立義倉、設水站。 此等人於各代配享之中, 特有功於生民, 請王氏奉祀時從祀。” 從之。
세조 3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3월 28일(정유) 3번째기사
집현전직제학 양성지의 춘추대사, 오경, 문묘종사, 과거, 기인등에 관한 상소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대위(大位)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와 민속(民俗)의 간난(艱難)한 일을 통찰(洞察)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宵旰)831)으로 부지런히 도치(圖治)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년 태평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三韓)에서 한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병(利病)을, 대신(大臣)은 꾀하고 대간(臺諫)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侍從)하는 직사(職事)들도 논사(論思)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經幄)832)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成効)도 없어 성덕(聖德)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微衷)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萬)의 일(一)이라도 비익(裨益)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便宜) 24사(事)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춘추(春秋)의 대사(大射)입니다. 대개 금인(金人)833)은 요(遼)나라의 풍속을 이어 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中原)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藩國)의 성사(盛事)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해동(海東)에 웅거(雄據)하여 삼국(三國)으로부터 전조(前朝)834)에 이르기까지 교천(郊天)835)과 향제(饗帝)836)를 하지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 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요(遼), 금(金)의 고사(故事)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郊外)에 거둥하시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武威)를 크게 떨치고 사기(士氣)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일대(一國一代)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오경(五京)을 증치(增置)하는 것입니다. 대개 요(遼), 금(金), 발해(渤海) 도 아울러 오경(五京)을 세웠고, 전조(前朝)도 사경(四京)을 세웠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단지 한성(漢城), 개성(開城)의 양경(兩京)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산해(大東山海)의 험함과 주,부(州府)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欠缺)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世祖) 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本俗)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高皇帝)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東郊)의 땅은 진실로 복리(腹裏)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개성부(開城府)를 중경(中京)으로 삼고,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삼아, 각각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군병(軍兵)을 가정(加定)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勝)함을 얻어 위급(危急)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대개 일대(一代)의 흥(興)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本朝)의 악진해독(嶽鎭海瀆),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龍興江)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흥운(興運)하신 땅이고,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長白山)은 선춘령(先春嶺 의 남쪽 갑산(甲山)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北岳)이 됩니다. 임진(臨津)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龍津)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洛東江)은 경상도의 대천(大川)이고, 섬진(蟾津)은 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博川江)은 곧 옛 대령강(大寧江)이며, 보리진(菩提津),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祀典)에 있지아니 합니다. 또 동해, 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考定)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 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을 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天)에, 북해(北海)837)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용진(龍津)을 동독(東瀆)으로 삼고, 대동강(大同江)을 서독(仙)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漢江)을 남독(南瀆)으로 삼고 두만강(豆滿江)을 북독(北瀆)으로 삼고, 또 목멱산(木覓山), 감악산(紺岳山), 오관산(五冠山), 계룡산(鷄龍山), 치악산(雉岳山), 오대산(五臺山), 의관령(義館嶺), 죽령산(竹嶺山)을 명산(名山)으로 삼고, 웅진(熊津), 임진(臨津), 보리진(菩提津), 용흥강(龍興江), 청천강(淸川江), 박천강(博川江), 낙동강(洛東江), 섬진(蟾津)으로 대천(大川)을 삼아 예(例)에 따라 치제(致祭)하여【양진(楊津) 두 곳, 덕진(德津) 두 곳, 가야진(伽耶津), 주흘산(主屹山), 우불산(亐佛山), 우이산(牛耳山), 비백산(鼻白山), 장산곶이[長山串], 아사진(阿斯津), 송곶이[松串], 비류산(沸流山), 구진(九津), 익수(溺水)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祀典)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1. 번부악(蕃部樂)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樂)은 아악(雅樂), 속악(俗樂), 여악(女樂), 이부(夷部)838) 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本曹)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軒架), 고취(鼓吹), 동남(童男), 기녀(妓女), 가면잡희(假面雜戲) 등의 제도(制度)가 있으니, 대저 악(樂)이란 형상[象]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 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 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 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歌舞)로써 동부악(東部樂)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北部樂)을 삼아서 일본악(日本樂)은 삼포(三浦)의 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女眞樂)은 5진(五鎭)의 야인에게 익히게 하되, 그 의관제도(衣冠制度)가 괴이(怪異)하고 기초(譏誚)의 형상이라 하지 말고, 동사(東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 않고, 북사(北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 않으며, 중국사신[中國使]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 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宗廟)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賁飾)하고 우리 조종(祖宗)의 업(業)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관례(冠禮)를 의행(議行)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冠)을 한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말년에 진사(進士) 윤곡(尹穀)은 성중(城中)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冠禮)를 행하여 향인(鄕人)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관대(冠帶)하게 함은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하였으니, 그 관례(冠禮)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東方)은 고려 [前朝] 명종(明宗) 때에 원자(元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禮官)에 명하여 고례(古禮)를 전채(傳採)하고 겸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여 입자(笠子), 두건(頭巾), 사모(紗帽)로써 삼가(三加)839)를 하고, 혹은 사모(紗帽), 복두(幞頭), 양관(梁冠)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未冠者)는 입학(入學)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婚嫁), 종사(從仕)에 능히 선왕(先王)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陋)를 변하게 하소서.
1. 복색(服色)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上下)를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白]을 숭상하고, 명(明)나라 사람은 검은 것[黑]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靑]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朝冠)과 공복(公服)을 실상은 중국(中國) 을 의방하였으되, 상시(常時)에는 백의(白衣)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雜色)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鄙俚)합니다.
빌건대 공복(公服)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堂上官)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流品員), 성중관(成衆官), 의관자제(衣冠子弟)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군사(諸衛軍士)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京外]의 양인(良人), 이서(吏胥)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천구(公私賤口),공장(工匠)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品秩)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純用)하게 해서 국속(國俗)을 정제(整齊)하시고 여복(女服)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1.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국[中原]의 여자가 많이 좌임(左衽)840)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後世)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古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東西)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1. 전대(前代)의 임금과 재상(宰相)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諸司)의 직장(職掌)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歷代)의 군상(君相)을 제사하는데 대뢰(大牢)841)로써 쓰니 심히 성거(盛擧)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散祭)하는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 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配享)한 대신(大臣)이 없어 흠전(欠典)된 것 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 가을로 동교(東郊)에서 전 조선왕(朝鮮王) 단군(檀君), 후 조선왕(朝鮮王) 기자(箕子),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태종왕(太宗王), 문무왕(文武王), 【두 왕은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영양왕(嬰陽王),【수병(隋兵)을 대패(大敗)시킴】 백제(百濟)의 시조,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성종(成宗), 현종(顯宗), 충렬왕(忠烈王) 이상 12위(位)를 합제(合祭)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근일에 정한 전조(前朝)의 배향16신(配享十六臣)과 한희유(韓希愈), 나유(羅裕) 【합단(哈丹)을 막는 데 공이 있었음】, 최영(崔瑩), 정지(鄭地)【왜구(倭寇) 를 막는데 공이 있었음】등을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1. 전대(前代)의 능묘(陵墓)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臣)이《속육전(續六典 )》을 보니, 고려(高麗)의 태조,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4능(陵)은 각각 수호(守護)하는 자 2호(戶)를 정하여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陵)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盛德)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歷代君主)가 비록 모두 공덕(功德)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一國)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데를 살피지 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如古)하되 호리(狐狸)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 하고 초채(樵採)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조선(前朝鮮), 후조선(後朝鮮), 삼국, 전조(前朝)가 도읍했던 개성(開城), 강화(江華), 경주(慶州), 평양(平壤), 공주(公州), 부여(扶餘)와 김해(金海), 익산(益山) 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尋訪)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守陵)에 3호(戶)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正妃)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그 초소(樵蘇)842)함을 금하게 하고, 이어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살펴보고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후로부터 홍범(洪範)843)의 유교(遺敎)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서는 ‘군자(君子)의 나라’라 하고, 송(宋)나라에서는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은 중국[中華]을 모의(侔擬)하였으되, 문묘(文廟)에 배식(配食)한 자는 오직 신라의 설총(薛聰) ,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안향(安珦)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學士) 쌍기(雙冀)는 전조(前朝)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진작(振作)하였고, 문헌공(文獻公) 최충(崔沖)은 또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재생(諸生)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 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 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程), 주(朱)844)가 있었고, 또 어진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 맹자, 정(程), 주(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1.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文武)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845)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享祀)하기를 문선왕(文宣王)846)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 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 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847)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848) 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강감찬(姜邯贊), 양규(楊規), 윤관(尹瓘),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경손(金慶孫), 박서(朴犀), 김방경(金方慶) ,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方實), 최영(崔瑩), 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 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1.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五功臣)은 모두 충의위(忠義衛)에 속(屬)하고, 삼조(三朝)에 원종(原從)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宥罪)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元)나라의 사겁설(四怯薛)과 송(宋)의 녹수룡(錄隨龍)과 더불어 은총(恩寵)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前朝)의 배향대신(配享大臣)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恩禮)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습니다. 본조(本朝)의 오묘(五廟)에도 모두 배위(配位)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王室)에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例)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原從) 제인(諸人)의 사호(賜號)에 따라 배향공신(配享功臣)은 모두 유후(宥後)849)하고 세록(世祿)850)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將相)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搜訪)하여, 특별히 은명(恩命)을 더하면, 전인(前人)은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後人)도 또한 능히 만세(萬世)에 권장할 것입니다.
1. 문익점(文益漸), 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남녀(男女)할 것 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新羅) 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 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1. 시신(侍臣)의 음자(蔭子)851)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承蔭)852)하는 법(法)은 곧 당(唐)나라의 자음(資陰)과 송나라의 임자(任子)의 뜻이니, 그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 이상의 관원 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臺諫)과 정조(政曹)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承蔭)하여 신참(新參)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監察)에 제배(除拜)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년을 시종(侍從)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可惜)합니다. 더구나 《송사(宋史)》에서는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 이하, 6품 이상의 관각(館閣) 양제(兩制)에 시종한 제신(諸臣)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承蔭)을 허락하소서.
1. 문무(文武)의 과법(科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할 때, 《사서(四書)》, 《오경(五經)》외에 《한문(韓文)》, 《유문(柳文)》 등의 글같은 것을 임의(任意)로 시강(試講)하니 참으로 정규(定規)가 없고, 중장(中場)은 아울러 고부(古賦)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또 진사(進士)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終場)은 제사(諸史)와 시무(時務)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出題)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漢)나라, 당(唐)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意]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史學)이 불명(不明)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武科) 시험에 《사서(四書)》, 《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 《무경칠서(武經七書)》853) 외에는《장감(將鑑)》, 《병감(兵鑑)》, 《병요(兵要)》, 《진설(陣說)》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 《사서》, 《오경》외에 《좌전(左傳)》, 《사기(史記)》, 《통감(通鑑)》 , 《송원절요(宋元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1. 아들을 보내어 입학(入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子弟)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의난(疑難)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親炙)854)하여 그 기질(氣質)을 훈도(薰陶)함이 둘이며, 인심(人心),풍속(風俗)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명물(名物)을 보고 점점 습속(習俗)의 누(陋)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墳典)855)을 구구(購求)하여 궐유(闕遺)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상역(象譯)856)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奏請)하더라도 윤허(允許)를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入朝)하는 행리(行吏) 때마다 집현전(集賢殿),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 가운데서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문장이 민섬(敏贍)857)하며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한 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就差)하여 들여보내 유학(遊學)하게 한다면 거의 소견(所見)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1. 기인(其人)의 법(法)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대개 고려[前朝]의 태조(太祖) 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고 토호(土豪)를 호장(戶長)으로 삼아 향직(鄕職)을 설치하고는 인하여 모든 군리(郡吏)의 자손으로 하여금 ‘기인(其人)85 8)’이란 칭호로 분번시위(分番侍衛)하게 하니, 곧 옛날에 아들을 볼모[質子]로 하는 뜻입니다. 뒤에 이르러서는 보기를 천례(賤隷)같이 하여 고역(苦役)을 하게 하였으니 심히 무리(無理)한 데에 미쳤습니다. 또 기인(其人)이 번상(番上)할 때 혹은 백성에게 포화(布貨)를 거두고 혹은 전산(田産)을 팔아서 바리에 싣고 오니, 이에 부상(富商),대고(大賈)는 그 값을 받고 그 구실[役]을 대신하되 그 값은 6삭(朔)에 45필(匹)이니, 이것은 백성(百姓)의 고혈(膏血)을 긁어서 경사(京師)의 유수(遊手)859)하는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대저 향리(鄕吏)로 간활(姦猾)한 자가 비록 많으나, 그러나 일읍(一邑)의 서무(庶務)와 함께 상공(上供)하는 모든 일과 조운(漕運),영송(迎送)하는 긴고(緊苦)의 업무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차마 고역(苦役)까지 또 시키겠습니까, 더구나 3정1자(三丁一子)860)를 가려서 이서(吏胥)를 삼았고, 정과(正科)에 등제(登第)한데 이르러서는 어엿한 벼슬에 올라서 나라의 장상(將相)이 된 자가 진실로 일족(一族)에 그치지 않사오니, 또한 선비는 농가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어찌 반드시 천례(賤隷)로 더불어 함께 고역(苦役)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구실[役]이 중함으로 기인이 아니면 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의 뜻은 기인의 여력(膂力)이 아니더라도 당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 부인(富人)으로 그 일을 대신하게 하고, 부인(富人)도 또한 그 값으로써 신목(薪木)861)을 바꾸어 이바지하고 그 나머지로 이(利)를 삼으니, 그 백성으로 긁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제사(諸司)의 외방 노자(外方奴子)는 3정(丁)을 1호(戶)로 삼아, 1호(戶)는 5년에 한번 번상(番上)하되, 비자(婢子)는 1년에 1필(匹)의 포목[布]만을 수납하였으니,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기인(其人)의 법을 파하고, 선상노자(選上奴子)862)를 가정(加定)하게 하여, 3노자(三奴子)로써 기인의 구실[役]을 대신하게 하소서. 이같이 하면 관가의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이 불가하다면 우선 수년 동안 시험하소서.
1. 의논하여 분대(分臺)를 파(罷)하는 것입니다. 대개 대신(臺臣)을 분견(分遣)하는 것은 본래 수령(守令)의 탐포(貪暴)함을 규찰(糾察)하고 민생의 휴척(休戚)을 살피는 것이니, 그 명분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그 위령(威令)이 어찌 한때에 미연(靡然)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국의 8도(道)에는 3백 34주(州)를 설치하여 도(道)에는 각각 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를 두고, 주(州)에는 각각 수령(守令),교관(敎官)이 있으며, 혹은 소윤(少尹),판관(判官)이 있고,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가 있으며, 진(鎭)에는 병마사(兵馬使),만호(萬戶),천호(千戶)가 있고, 또 수륙(水陸)에 찰방(察訪),검률(檢律),교유관(敎諭官)이 있어 그 수가 적지 않은데, 또 대원(臺員)을 보내니 어찌 백성은 적은데 관(官)은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의 관찰사는 곧 이른바, ‘외방의 헌사(憲司)’로서 수령을 출척(黜陟)하는 자인데, 어찌 반드시 다시 대관(臺官)을 보내어 관찰사의 권한을 가볍게 하겠습니까, 관찰사의 권한만 가볍게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수령으로 더불어 동심(同心)하여 내용을 덮어두고 분대(分臺)의 거핵(擧劾)을 회피하여, 분대로 하여금 단지 대강(大綱)만을 거핵하게 할 뿐이니, 더욱 보내지 않음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에 적당하지 못한 일이나 숨겨 있는 일을 적발하게 한다면, 그 흐르는 폐단은 취모멱자(吹毛覓疵)863)하여 관리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여 그 수족(手足)을 편히 둘 수 없게 할 것이며, 더욱 소민(小民)에게 능상(陵上)864)하고 고알(告訐)하는 풍습을 기르게 할 것입니다. 근일 입법(立法)한 초기인데도 오히려 과중(過中)한 폐단이 있거늘, 어찌 다른 때에 영영 한가지 폐단도 없음을 알겠습니까,
대저 국가의 정령(政令)은 진실로 부드럽게 나약할 수도 없고 또한 급박하게 몰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와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모두 강명(剛明) 총찰(聰察)로써 정치를 하였으되, 한(漢), 당(唐)의 왕업은 드디어 쇠잔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명하고 총찰함이 마치 원기(元氣)를 작상(斲喪)865)하는 부근(斧斤)866)이 되는 것같지 않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유(寬裕)로써 정사를 하시고 가급(苛急)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마시며, 근일의 분대(分臺)의 법을 파하시고, 전일의 행대(行臺)의 법[規]을 따르시어, 그 수령의 불법은 오로지 관찰사에 위임하여 고핵(考劾)하고 전최(殿最)867)하게 하면, 자연히 관리는 탐잔(貪殘)하는 습속을 감히 자행하지 못하며 백성은 그 생업에 편안할 것입니다.
1. 주군(州郡)의 노비(奴婢)입니다. 대개 외방(外方)의 관노(官奴)는 그 수효가 고르지 않습니다. 가령 경주향교(慶州鄕校)같은데는 수백호(數百戶)에 이르고, 평양(平壤)의 관노(官奴)도 또한 수천호인데, 잔군(殘郡)868)은 수효가 10호도 차지 못합니다. 공부(貢賦)와 빈려(賓旅)의 번거로움은 타군(他郡)과 더불어 심히 비슷하지 않아서, 혹은 인리(人吏)869)의 아내가 도로(道路)에 부대(負戴)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고르지 못합니다. 빌건대 제사(諸司)의 노비로 잔군(殘郡)과 또 그 인근(隣近)에 있는자를 잔군(殘郡)에 헤아려 주고, 이어서 타군(他郡)의 수효가 넘치는 관노로서 그 사(司)에 충급(充給)하면, 거의 노일(勞逸)이 고르고 주군(州郡)도 충실할 것입니다.
1. 백정(白丁)을 구처(區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달(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년이며, 가까운자는 수백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처음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에까지 만연(蔓延)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평(討平)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는 따로 1호(戶)도 짓지 못하게 하고, 모두 갑사(甲士),시위(侍衛), 진군(鎭軍)의 봉족(奉足)을 삼아 일일이 끼어살게 하고, 이어서 그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870) 하지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871)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1. 제주(諸州)의 판관(判官)입니다. 대개 관(官)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큰 주(州)는 부서(簿書)872)가 구름처럼 쌓이고 사객(使客)이 떼를 지어 모이니 수령 한 몸으로는 어느 겨를에 농사를 권장하며, 어느 틈에 송사를 청리(聽理)하겠습니까, 의창(義倉)이 염산(斂散)을 호활(豪猾)한 이에게 위임하여 백성의 해(害)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빌건대 경기(京畿)는 수원(水原), 양주(楊州)에, 경상도는 선산(善山), 성주(星州), 김해(金海), 밀양(密陽)에, 전라도는 광주(光州), 남원(南原) 등의 고을에 특별히 판관(判官)을 두게 하소서.
1. 제진(諸鎭)에 위(尉)를 두는 것입니다. 대개 진(秦)나라 법(法)에 매양 군수(郡守)는 치민(治民)을 하고 위(尉)는 치병(治兵)을 하였으며, 전조(前朝)에서는 서북면(西北面)에 분도장군(分道將軍)을 설치하여 병사(兵事)를 주관하고, 또 진장(鎭將)을 두고 또 현위(縣尉)를 두었습니다. 이제 8도(八道) 61처(處)에 모주(某州), 모도(某道)라 일컫고, 또 모진(某鎭)이라 일컬으며, 혹은 좌,우익(左右翼)을 영도(領導)하고 혹은 스스로 한 진(鎭)이 되어, 모두 군병(軍兵)을 두고 단련(團鍊)하게 하여 불우(不虞)를 경계하니, 진실로 양법(良法)입니다. 그러나 수령은 부서(簿書)를 회계(會計)하고 사객(使客)을 지대(支待)하며, 전곡(錢穀)을 출납(出納)하고 사송(詞訟)을 청리(聽理)하며,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모든 민사(民事)를 오히려 판리(辦理)할 수 없는데, 또한 어찌 전심(專心)으로 치병(治兵)하여 위급(危急)한 때에 대비하겠습니까, 빌건대 각진(各鎭)의 예(例)에 따라 위(尉)를 두되, 만약 모두 둘 수가 없다면, 그 판관(判官)이 있는 곳은 또 무장(武將)으로 교차(交差)하고, 판관이 없는 곳은 특별히 위(尉)를 설치하게 하소서.
1. 경도(京都)의 사보(四輔)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산성(北漢山城)’입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交戰)하던 땅이며, 고려 [前朝]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本朝)가 도읍을 정 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四方)을 공제(控制)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中央)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三山)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大江]은 남을 에워싸고 서(西)에는 임진(臨津)을 두고 동(東)에는 용진(龍津)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石城)이 호거(虎踞)873)하고 조시(朝市)가 기포(碁布)874)하며, 궁궐(宮闕)은 엄숙(嚴肅)하고, 여엄(閭閻)은 은부(殷富)875)하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단지 이제 중외(中外)에 익진(翼鎭)을 열치(列置)하였으되, 경도(京都)의 기내(畿內)에는 단지 3진(鎭)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未便)합니다.
또 부평부(富平府)는 비록 옛 안남(安南) 땅이라 하더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실제 관계되는 것이 없는데, 원평부(原平府)는 임진(臨津)의 험한 곳에 웅거하고, 또 교하(交河)를 제휴하고 풍덕(豊德)을 끌음으로써 왜구(倭寇)를 해구(海口)에서 액수(扼守)876)할 만합니다. 수원부(水原府)는 본시 관찰사(觀察使)의 관사를 둔 땅이며, 전조(前朝)에 홍적(紅賊)877)이 남하(南下)할 때에는 여기를 경유하여 사통오달(四通五達)할 땅이니, 빌건대 전조의 좌보(左輔),우보(右輔)의 예(例)에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後輔)로 삼고, 수원(水原) 을 전보(前輔)로 삼고, 광주(廣州)를 좌보(左輔)로 삼고, 원평(原平)을 우보(右輔)로 삼으면, 전후 좌우에 모두 거진(巨鎭)이 있으되 동남의 2진(二鎭)은 강외(江外)에 있고, 서북의 2진은 강내(江內)에 있어, 남북의 형세가 고르고 경사(京師)가 더욱 장대(壯大)할 것입니다.
또 경성(京城)의 10문(十門)은 동대문(東大門) 외에는 모두 옹성(擁城)이 없으니, 모름지기 풍년을 기다렸다가 아울러 축조(築造)하게 하소서. 혹자는 이르기를, ‘저 도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에 이르게 하면, 나라는 나라가 아닐텐데 어찌 축성에 힘쓰겠는가, 더구나 승평백년(昇平百年)에 어찌 도적이 있겠는가,’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성곽(城郭)의 나라입니다. 수초(水草)를 따라 행국(行國)878)할 수는 없으니, 그 성곽을 갖추는 일은 완만(緩慢)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거란(契丹)에게, 고종(高宗), 원종(元宗)은 몽고(蒙古)에게, 공민왕(恭愍王)은 홍적(紅賊)에게 모두 성(城)의 나쁨으로 인하여 무궁한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공민왕(恭愍王)과 고종, 원종의 시대는 그만두더라도 현종(顯宗) 때에는 어찌 당당하지 못해서 이런 환난(患難)이 있었으며, 더구나 전일에 중국(中國)에서도 또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이르기를, 만일 ‘주,진(州鎭)에 성(城)이 있어도 족히 적(賊)을 무휼(撫恤)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몽인(蒙人)에게 중국 이〈침입당한 것이〉어찌 장성(長成)이 없어서이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강역(疆域)이 서로 이웃하지 않으면 세력이 서로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달달(達達)879)에게 연경(燕京)이 어찌 수천리만 되겠습니까, 다만 적인(敵人)의 침공이 없을 뿐이니, 다만 우리의 방비가 있음을 믿을 뿐입니다. 어찌 수천리의 대국으로서 그 만의 하나라도 무사함을 요행으로 여기겠으며, 또 어찌 백년토록 무사할 것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깊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염려하여 권권(拳拳)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1. 제도(諸道)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방금 진(鎭)을 설치하였으나, 또 마땅히 설치할 곳이 여덟이고, 마땅히 감할 곳이 하나이며, 합병하여 1진(鎭)으로 할 곳이 둘이고, 스스로 1진이 될 곳이 하나입니다. 평안도 자성(慈城)같은 곳은 여연(閭延),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 되니, 마땅히 스스로 1진이 될 만한 곳입니다. 대저 제도(諸道)의 주군(州郡)에 모두 익,진(翼鎭)을 설치하였는데, 이미 요긴한 군(郡)이 아니면 각각 자체가 하나의 진으로 될 필요가 없으며, 황해도 장연(長淵), 풍천(豊川), 강령(康翎)과 옹진(甕津)은 마땅히 각각 합병하여 1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 부평부(富平府)는 반드시 진(鎭)을 설치할 곳이 아니며, 평안도 희천(熙川)에 이르러서는 적유령(狄踰嶺)이 웅거(雄據)하고, 박천(博川)은 대강(大江)이 있으며, 삼등(三登)은 평양(平壤)의 동북로(東北路)의 요해(要害)이며, 함길도(咸吉道) 회령(會寧), 동창(童倉)의 구거(舊居)와 황해도 서흥(瑞興)은 절령(岊嶺)에 웅거하고, 경기 수원(水原)은 남로(南路)의 요충(要衝)이며, 원평(原平)은 임진(臨津)에 의지하고, 경상도 울산(蔚山)은 왜선(倭船)이 이르러 정박하는 곳이며, 또 왜인(倭人)이 거류(居留)하고 있으니, 모두 마땅히 진(鎭)을 설치할 곳입니다.
소신(小臣)은 계유년880) 겨울부터 상지(上旨)를 외람되게 받고 경기지도(京畿地圖)와 팔도지도(八道地圖)를 고정(考定)하였으니, 이로써 모든 경내(境內)의 산천의 액색(阨塞)과 도로(道路)의 원근(遠近)과 일체 주,진(州鎭)의 일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감히 관견(管見)을 진달(陳達)하여 두세 번에 이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수찰(垂察)하소서.”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註831]소간(宵旰): 소의간식(宵衣旰食).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 註832]경악(經幄): 경연 註833]금인(金人): 금나라 사람.註834]전조(前朝): 고려조.註8 35]교천(郊天): 왕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일. 동지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하지에 북교의 땅에 제사하였음 註836]향제(饗帝): 선왕(先王)께 합제(合祭)하는 것.註837]북해(北海):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註 83 8]이부(夷部): 오랑캐 음악.註839]삼가(三加): 관례 때 세번 관(冠)을 갈아 씌우던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단령(團領),조아(條兒), 재가에는 사모(紗帽),단령,각대(角帶), 삼가에는 복두(幞頭), 공복(公服)을 썼음.註840]좌임(左衽): 왼쪽으로 여미는 것 註841]대뢰(大牢): 나라 제사에 소,양,돼지를 아울러 제물로 바치는 일 註842]초소(樵蘇): 나무를 찍고 풀을 벰.註843]홍범(洪範): 중국《서경(書經)》의 한편. 기자(箕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베풀어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준 것.註844]정(程), 주(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註845]천경지위(天經地緯): 만세에 변하지않는 상리(常理).註 846]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존칭.註847]둑신(纛神): 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던 무(武)의 신(神).註848]둑소(纛所): 둑기(纛旗:대장기)를 세워 놓던 곳.註849]유후(宥後): 후대를 사유.註850]세록(世祿): 대대로 녹봉을 내림 註 851]음자(蔭子): 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임명되던 문무관(文武官)의 후손. 註852]승음(承蔭): 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任用)함.註853]《무경칠서(武經七書)》: 중국의 7가지 병법에 관한 책.《육도(六鞱)》,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偉公問對)》를 말함.註854]친자(親炙): 친히 배우는 것.註855]분전(墳典): 3황(皇),5제(帝)의 서(書). 곧 고전(古典)이란 뜻.註 856]상역(象譯): 번역 註857]민섬(敏贍): 빠르고 풍부한 것.註858]기인(其人) : 신라 때부터 지방자치 세력의 유력한 사람으로, 중앙에 뽑혀와서 볼모로 있으면서 그 고을 행정의 고문(顧問)을 맡아 보던 사람. 지방의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신라의 상수리(上守吏)에서 유래한 것임.註859]유수(遊手): 농사를 짓지않고 놀고 먹는 사람. 대개 농업 이외의 상업,수공업,재예(才藝) 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통칭하는 말임 註860]3정1자(三丁一子): 조선조 때 향리(鄕吏) 1호(戶)에 세 아들이 한꺼번에 역(役)을 서게 되면, 그 중 한 아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던 일 註861]신목(薪木): 땔나무 註862]선상노자(選上奴子): 각 지방에서 골라 뽑아서 서울의 중앙 관아(官衙)로 올려 보내던 노비 註863]취모멱자(吹毛覓疵): 일부러 남의 잘못을 찾는 것 註864]능상(陵上): 상관을 넘보는 것.註865]작상(斲喪): 깍아 없애는 것.註866]부근(斧斤): 도끼.註867]전최(殿最): 관원들의 근무 성적을 심사하여 우열을 매기는 일. 성적을 고사(考査)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하였음 註868]잔군(殘郡): 쇠잔한 고을 註869]인리(人吏): 아전.註870]범금(犯禁): 금법을 범함 註871]편호(編戶): 호적에 올려있지 않던 사람이나 외국인을 호적에 올려 일반민으로 만들던 것.註872]부서(簿書): 관청의 장부와 문서 註873]호거(虎踞): 범처럼 도사리고 앉음 註874]기포(碁布): 바둑돌을 늘어놓은 것같이 정제한 모양.註875]은부(殷富): 풍성하고 넉넉함.註876]액수(扼守): 중요한 곳을 굳게 지킴 註877]홍적(紅賊): 홍건적. 註878]행국(行國): 나라를 옮김.註879]달달(達達): 달달족(達達族).註880]계유년: 1453 단종 원년.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 光登大位, 古今治亂之跡、民俗艱難之事, 靡不洞照, 宵旰圖治, 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 誠三韓一盛際也。 方令朝廷得失、民間利病, 大臣謀之, 臺諫論之, 其他侍從之職, 在於論思, 臣以庸劣, 獲侍經幄, 愧無寸効上報聖德。 凡國家大小之事, 罔不商確於微衷, 而思有以裨益乎萬一, 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 惟聖鑑財幸。 一, 春秋大射。 蓋金人承遼俗, 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 此雖非中原之制, 亦藩國之盛事也。 我東方雄據海東, 自三國至于前朝, 郊天饗帝, 無不爲之。 今固不能悉遵其舊, 稍倣遼、金故事, 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 行大射禮, 歲以爲常。 如是則庶幾張皇我武, 士氣亦增, 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 增置五京。 蓋遼、金、渤海竝建五京, 前朝又建四京, 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 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 而只置兩京, 豈不欠哉? 況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 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 是東郊之地, 固非腹裏比也。 乞以京都漢城府爲上京, 開城府爲中京, 慶州爲東京, 全州爲南京, 平壤爲西京, 咸興爲北京, 各設土官, 加定軍兵。 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 而緩急亦足以賴矣。 一, 岳、鎭、海、瀆。 蓋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本朝岳鎭海瀆名山大川之祀, 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 多有可議者焉。 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 至於妙香山檀君所起, 九月山有檀君祠, 太白山神祠所在, 金剛山名聞天下, 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 實爲國之北岳。 臨津國之西關, 龍津國之東關, 洛東江慶尙大川, 蟾津全羅大川, 博川江卽古大寧江, 以至菩提津、五臺山, 皆不在祀典。 且東、南、西海神祠, 皆自開城而定之, 亦乖方位, 乞命禮官詳加考定, 以三角山爲中岳, 金剛山爲東岳, 九月山爲西岳, 智異山爲南岳, 長白山爲北岳, 白岳山爲中鎭, 太白山爲東鎭, 松岳山爲西鎭, 錦城山爲南鎭, 妙香山爲北鎭。 又移祭東海神於江陵, 西海於仁川, 南海於順天, 北海【鴨綠江上流。】於甲山, 以龍津爲東瀆, 大同江爲仙, 漢江爲南瀆, 豆滿江爲北瀆。 又以木覔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雉岳山、五臺山、義舘嶺、竹嶺山爲名山, 熊津、臨津、菩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 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耶津、主屹山、亏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 是則山川之載祀典者, 古今皆三十四, 而仍舊者十七, 移祭者四, 新陞者十三, 可永革者亦十三矣。 一, 設蕃部樂。 蓋中國之樂, 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 本朝所用, 有軒架、鼓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 大抵樂者, 象成者也。 自太祖乘運而興, 太宗、世宗相繼而作, 東隣獻琛, 北國款塞, 制禮作樂, 雅俗皆正, 而獨蕃樂未之議焉。 方今聖上龍飛, 新登大位, 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 常數百人, 稽顙闕庭, 海東文物, 未有盛於此時者也。 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 女眞歌舞爲北部樂, 日本樂習於三浦倭人, 女眞樂習於五鎭野人, 其衣冠制度, 不爲怪異譏誚之狀, 燕東使則兼用北樂, 而不用東樂, 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 燕中國使, 則竝用東、北樂, 于以用之朝廷, 奏之宗廟, 賁飾太平之治, 以光我(且)〔祖〕宗之業, 不勝幸甚。 一, 議行冠禮。 蓋古者男子二十而冠, 所以將責成人之道也。 宋末進士尹穀, 在圍城中行冠禮, 鄕人譏之, 答云, ‘欲令兒曹冠帶, 見先人于地下。’ 其重冠禮如此。 東方則前朝明宗時, 元子行冠禮, 其後無聞焉。 乞命禮官博採古禮, 兼考時王之制, 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 年十三行冠禮, 以笠子、頭巾、紗帽三加, 或用紗帽、幞頭、梁冠, 其未冠者不許入學, 婚嫁從仕, 于以克復先王之制, 丕變外國之陋。 一, 定服色。 蓋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 而常時好著白衣, 任用雜色, 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純用一色, 以齊國俗, 至於女服, 亦皆詳定。 一, 禁服妖。 蓋衣裳之制, 所以別男女貴賤也, 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 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 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 成爲三層, 轉相慕效, 擧國皆然, 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 前日中原女子多服左衽之衣, 見聞者皆以爲非吉兆, 今女着男服, 亦豈嘉祥也哉? 況後世唯女服上衣下裳, 最爲近古, 若如此從心爲之, 則男女衣服, 可以自相制度, 無所不至矣, 何至今不變乎? 乞命攸司定限禁止, 其如前穿着者, 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 以爲貧病者之服。 一, 祭前代君相。 臣竊觀大明諸司職掌, 遣官祭歷代君相, 用以大牢, 甚盛擧也。 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 而或有當祭不祭者, 又或無配享大臣, 似爲欠典。 乞每年春秋於東郊, 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二王統合麗、濟。】高句麗始祖、嬰陽王、【大敗隋兵。】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 以新羅金庾信ㆍ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 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禦哈丹有功。】崔瑩、鄭地。【禦倭寇有功。】 等配享。 一, 護前代陵墓。 臣觀《續六典》, 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 各定守護二戶, 使禁樵採, 太祖陵加一戶, 甚盛德也。 然臣竊惟歷代君主, 雖未能皆有功德於斯民, 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 其不省所在者則已矣, 其陵墓如古, 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 豈不可悶也哉? 乞令有司於前ㆍ後朝鮮, 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 字細尋訪, 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 別無功德者置二戶, 正妃陵墓亦置一戶, 略蠲征徭, 禁其樵蘇, 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 文廟從祀。 蓋東方自箕子受封以後, 《洪範》遺敎久而不墜, 唐爲君子之國, 宋稱禮義之邦, 文獻之美侔擬中華, 而配食文廟者, 獨新羅之薛聰ㆍ崔致遠, 高麗之安珦三人而已。 臣聞學士雙冀, 在前朝始設科擧, 以振文風, 文獻公崔冲又設九齋, 以敎諸生, 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 本朝文忠公權近, 其文章道德, 人皆可以垂範萬世, 乞皆配享先聖, 以勸後人。 若曰, ‘東方賢者, 焉能如古之人?” 則孔、孟之後, 亦有程、朱, 且賢者如是其難也, 則後人何學爲聖賢乎? 中國之配享者, 果皆如孔、孟、程、朱乎, 東方之士, 皆不可如中國人乎? 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 以示勸懲之義, 然後可人人觀聽, 而風移俗易矣。 一, 武成立廟。 蓋文武之道, 如天經地緯, 不可偏廢。 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 立廟享祀, 與文宣王比, 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 吾東方先聖之祀, 上自國學下至州郡, 而武成王無祠宇, 只祭纛神四位, 豈非闕典歟? 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 乞幷纛所于訓鍊觀, 而立武成廟, 祭禮配食, 略依文廟制度, 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ㆍ姜邯賛ㆍ楊規ㆍ尹瓘ㆍ趙冲ㆍ金就礪ㆍ金慶孫ㆍ朴犀ㆍ金方慶ㆍ安祐ㆍ金得培ㆍ李方實ㆍ崔瑩ㆍ鄭地, 本朝之河敬復ㆍ崔閏德配享。 一, 配享功臣。 蓋本朝前後五功臣, 皆屬忠義衛, 三朝原從之人, 亦皆宥罪錄後, 與元之四怯薛、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 然臣聞前朝配享大臣, 稱爲功臣, 每大恩禮, 必錄子孫。 本朝五廟, 俱有配位, 皆功存王室, 澤及生民者也。 乞依五功臣例, 或依原從諸人賜號, 配享功臣竝令宥後世祿。 且前朝及本朝將相, 有功德於民者之子孫, 亦使搜訪特加恩命, 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 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 文、崔立祠。 蓋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則祀之, 能禦大患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奉使留元,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末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元,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鎭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宥罪錄用。 一, 侍臣蔭子。 蓋本朝承蔭之法, 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 其待士大夫之恩至矣。 然其法三品以上官外, 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 新參數日纔拜監察, 而蔭及子孫, 而或有侍從數十年, 蔭不及後者, 誠爲可惜。 況《宋史》以宰執、侍從、臺諫竝言之, 乞四品以下六品以上, 館閣兩制, 侍從諸臣之子, 特許承蔭。 一, 文武科法。 蓋今文科初場講經之時, 四書、五經外, 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 實無定規, 中場則竝試古賦, 本非急務。 又進士以此取之, 終場則諸史時務, 雖參酌出題, 至論歷代之事, 權辭以對曰, ‘漢、唐之治, 何足論於今日?’ 取之者亦不以爲意, 以此史學不明, 甚爲不可。 且武科試竝講四書、五經, 亦爲未便, 乞武經七書外, 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 文科則四書、五經外, 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 中場試表、箋, 以習臣子事上之文, 試敎詔以習君上令下之文, 終場歷代時務迭出爲題, 如今年試歷代, 明年試時務, 以此定制, 以新科擧之法。 一, 遣子入學。 蓋子弟入學, 其利有六, 得賢師友, 而質問疑難, 一也, 親炙賢士大夫, 而薰陶其氣質, 二也, 人心風俗, 彼此形勢, 無不知之, 三也, 親見文獻之美, 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 四也, 或購求墳典, 以補闕遺, 五也, 因以學中國之語音, 以正象譯之訛, 六也。 今雖奏請, 似難蒙允, 乞於入朝每行李, 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 學問精熟, 文章敏贍, 器局宏遠者各一人, 就差入送, 以之游學, 則庶幾所見旣廣, 所得亦多, 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 革其人法。 蓋前朝太祖統一三韓, 以土豪爲戶長, 設鄕職, 仍使諸郡吏之子孫, 稱爲其人, 分番侍衛, 卽古之質子之意也。 逮至于後, 視爲賤隷, 使之苦役, 甚無理也。 且其人番上之時, 或斂民布貨, 或賣其田産, 駄載而來, 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 其直六朔四十五匹, 此則刻民之膏血, 而供京師遊手之人也。 大抵鄕吏姦猾者雖多, 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 無不爲之, 其忍又使爲苦役乎? 況三丁一子, 選爲吏胥, 至于登正科、躋顯仕, 爲國將相者, 固非一族, 亦士出於農之意也。 何必與賤隷, 同爲苦務哉? 若以役重, 非其人不可當, 則臣之意, 以謂非其人膂力, 有以當之也。 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 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 以其餘爲利, 其剝民何如也? 今諸司外方奴子, 三丁爲一戶, 一戶五年一番上, 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 乞自今罷其人之法, 只令加定選上奴子, 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 如是則官家之事, 固無不成矣。 若以臣之言爲不可, 姑試數年。 一, 議罷分臺。 蓋分遣臺臣, 本以察守令之貪暴也, 察民生之休戚也, 其爲名豈不美哉, 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 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 道各有觀察使、都事, 州各有守令、敎官, 或有少尹、判官, 有節制、處置使, 有鎭兵馬使、萬戶、千戶, 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 非不多而又遣臺員, 豈不民少而官多乎? 況今之觀察使, 卽所謂外憲, 而黜陟守令者也, 何必更遣臺官, 以輕觀察使之權乎? 非徒觀察使之權輕也, 反與守令同心掩覆, 而避分臺之擧劾矣, 使分臺但擧大綱而已, 則不如不遣之爲愈也。 若至於發姦擿伏, 則其流之弊, 吹毛覓疵, 使官吏畏首畏尾, 不得措其手足, 益長小民陵上告訐之風矣。 近日立法之始, 尙有過中之弊, 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 大抵國家政令, 固不可柔懦以爲之, 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 漢宣帝、唐宣宗, 皆以剛明聰察爲治, 而漢、唐之業遂衰, 然則剛明聰察, 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 伏望殿下以寬裕爲政, 而勿以苛急爲貴, 罷近日分臺之法, 遵前日行臺之規, 其守令不法, 專委觀察使, 考劾而殿最之, 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 而民安其業矣。 一, 州郡奴婢。 蓋外方官奴, 其數不等。 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 平壤官奴亦數千戶, 殘郡則數未盈十。 而貢賦賓旅之煩, 與他郡不甚相遠, 或有人吏之妻, 負戴於道路者, 誠爲不均。 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 量給殘郡, 仍以他郡剩數官奴, 充給其司, 則庶幾勞逸均, 而州郡實矣。 一, 區處白丁。 蓋白丁或稱禾尺, 或稱才人, 或稱韃靼, 其種類非一, 國家憫其不齒於齊民也。 稱白丁以變舊號, 屬軍伍以開仕路, 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 本非我類, 遺俗不變, 自相屯聚, 自相婚嫁, 或殺牛, 或訴乞, 或行盜賊。 且前朝之時, 契丹來侵, 最先(鄕)〔嚮〕導, 又詐爲倭形, 始起於江原道, 蔓延于慶尙道, 至遣將以討平之。 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 太半皆此類也。 親戚姻黨連綿八道, 小則饑饉, 大則兵興, 皆可慮也。 乞自今不令別作一戶, 皆定爲甲士、侍衛、鎭軍奉足, 使之一一俠居, 仍禁其往來他郡, 其獨處山谷, 或自相婚娶, 或行宰殺, 或行寇賊, 或作樂丐乞者, 京外痛禁, 其犯者幷罪戶首, 又三世不犯禁者, 不復稱白丁, 而使同爲編戶, 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 而盜賊稍息矣。 一, 諸州判官。 蓋張官置吏, 本以爲民也。 今大州簿書雲委, 使客坌集, 守令以一身何暇勸農事, 何暇聽詞訟? 義倉斂散, 委之豪猾, 斯民之害不可勝言。 乞於京圻水原ㆍ楊州、慶尙道善山ㆍ星州ㆍ金海ㆍ密陽、全羅道光州ㆍ南原等州, 特設判官。 一, 諸鎭置尉。 蓋秦法每郡守以治民, 尉以治兵。 前朝於西北面, 設分道將軍, 以主兵事, 又有鎭將、有縣尉。 今八道六十一處, 稱某州道, 又稱某鎭, 或領左右翼, 或自爲一鎭, 皆置軍兵, 使之團鍊, 以戒不虞, 誠良法也。 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穀、聽理詞訟、勸農興學, 一應民事, 尙未能辦, 亦安能專心治兵, 以備緩急乎? 乞於各鎭, 依例置尉, 若未能皆置, 則其有判官處, 又武交差, 無判官處, 特令置尉。 一, 京都四輔。 蓋京都, 卽所謂北漢山城也。
在三國之時, 則三國交戰之地, 及前朝統三、本朝定都之後, 則以之控制四方, 昔自四方而爭中央, 今在中央而制四方, 其形勢可知也。 三山鎭北, 大江繞南, 西有臨津, 東有龍津, 土地沃繞, 道里適均, 漕運所會, 畜牧所使, 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 則可知其天作之地矣。 且石城虎踞, 朝市碁布, 宮闕嚴肅, 閭閻殷富, 誠萬世之業也。 但今中外列置翼鎭, 而京都畿內, 只設三鎭, 實爲未便。 且富平府, 雖古安南之地, 在今日實無所係, 原平府據臨津之險, 又可以提交河挈豐德, 而扼倭寇於海口也。 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 前朝紅賊之南下, 必由乎此, 而四通五達之地也。 乞依前朝左右輔例, 以楊州爲後輔, 水原爲前輔, 廣州爲左輔, 原平爲右輔, 則前後左右皆有巨鎭, 而東南二鎭在江外, 西北二鎭在江內, 南北之勢均, 而京師益壯矣。 且京城十門, 東大門外, 皆無擁城, 須待豐年幷築之。 或者以爲, “使彼賊至於內地, 則國不國矣, 何用城爲? 況昇平百年, 有何盜賊?” 然臣以爲吾東方, 城郭之國也。 旣不能逐水草爲行國, 則其城郭之備, 不可緩也。 前朝顯宗之於契丹, 高、元之於蒙古, 恭愍之於紅賊, 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 恭愍、高、元之時則已矣, 顯宗之時, 豈不堂堂而有此患乎, 況前日中國亦有變乎? 儻曰, “州鎭有城, 賊不足恤”, 則蒙人之於中國, 豈無長城乎? 儻曰, “疆域不與之隣, 勢不相及”, 則達達之於燕京, 豈但數千里乎? 但無敵人之侵耳, 但恃吾之有備耳。 豈有以數千里之大國, 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 又安知百年無事乎? 此臣所以深思過慮, 拳拳不已者也。 一, 諸道置鎭。 蓋臣竊料, 方今置鎭, 又當置者八、當減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 一如平安道慈城, 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 當自爲一鎭者也。 大抵諸道州郡, 皆設翼鎭, 旣非要郡, 則不必各自爲一鎭, 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 當各倂爲一鎭者也。 且京畿富平府, 不必置鎭處也, 至於平安道熙川據狄踰嶺, 博川有大江, 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 咸吉道會寧童倉舊居, 黃海道瑞興據岊嶺, 京畿水原南路要衝, 原平據臨津, 慶尙道蔚山, 倭船到泊之處, 且有留居倭人, 皆當置鎭者也。 小臣自癸酉冬, 叨受上旨, 考定京畿及八道地圖, 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 一切州鎭之事, 靡不講究, 故敢陳管見, 至于再三, 伏惟睿鑑垂察。
上嘉納。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일(임오) 2번째기사
양성지가 군법, 군정, 군액, 군제, 사역에 관한 일로 상서하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서(上書)하였다.
“신(臣)이 그윽이 우리나라의 역대(歷代)의 일을 보건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고구려(高句麗)에 크게 패(敗)하였고, 사구(沙寇)도 또한 고려(高麗) 에 패(敗)하였습니다. 강감찬(姜邯贊)이 거란(契丹)의 30만병(兵)을 막을 때 한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몰아낼 때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구성(九城)6694)을 쌓았으니, 그러한 사실이 역사에 실려 있어서 훤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성주(聖主)께서 즉위(卽位)하시고 상신(相臣)들이 국책(國策)을 수립하니, 진법(陣法)을 연습하고 활쏘기를 관람하고 강무(講武)하고 장수(將帥)에게 유시(諭示)하는 등 하루라도 무비(武備)를 닦지않은 날이 없으며, 《병요(兵要)》, 《병서(兵書)》, 《진법(陣法)》, 《병정(兵政)》으로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리의 큰 나라에서 조그마한 좀도둑도 어거하는데, 변장(邊將)이 군사를 쓰는 것이 매우 여의(如意)하지 못하므로, 신(臣)이 항상 분격(憤激)하여 고금(古今)에 용병(用兵)하던 방도를 두루 참고하여, 감히 군법(軍法)을 엄하게 하고, 군호(軍戶)를 구휼(救恤)하고, 군정(軍情)을 보살피고, 군액(軍額)을 실(實)하게 하고, 군령(軍令)을 간략하게 하는 5가지 일을 가지고 먼저 우선으로 삼아, 이로써 군제(軍制)를 정(定)하고, 군기(軍器)를 정비하고, 군문(軍門)을 갖추고, 군정(軍丁)을 보호하고, 군사를 사열(査閱)하는 등 그 차례를 만들어 우러러 예람(睿覽)을 바라니, 성상께서 보아 주시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
“1. 군법(軍法)을 엄하게 하는 일. 대개 살아있는 것은 다같이 바라는 것이나 죽는 것은 다같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아가면 죽고 물러가면 산다면 누가 즐겨 물러가서 살지 않겠습니까, 다만 물러가면 반드시 죽고 욕되며, 나아가면 혹시 살 수도 있고 비록 죽을지라도 또한 영광인 다음이라야 사람들의 죽을 힘을 얻어내어 사람을 죽지 않을 땅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소(楊素)가 먼저 수백 명을 목베어서 위엄을 세웠고, 곽자의(郭子儀)도 또한 조카[甥]로써 그 위엄을 세우려고 하였으니, 양소가 수백 명을 아끼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만약 죽이지 않았다면 10만의 대중이 죽었을 것이요, 곽자의가 조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으나, 만약 조카 한사람을 사랑하였더라면 가국(家國)의 일이 패(敗)하였을 것입니다. 유유(劉裕)가 위(魏)나라 군사를 막을 때 긴 창[矟]을 두어자 끊어서 쇠망치로써 후려쳐 문득 3,4인을 통관(洞貫)시켰고, 한세충(韓世忠)이 금(金)나라 사람을 막을 때 갑사로 하여금 긴 도끼[長斧]로써 위로 사람의 가슴을 치고 아래로 말의 발을 찢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걸음을 나가게 하면 한 걸음을 나가고 한 걸음 물러가게 하면 한 걸음을 물러가는 등 한결같이 장수의 명을 듣고 죽음에 이르기로 마음을 먹은 자들이었습니다.
근일에 부령(富寧)의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은 것과 의주(義州)의 원병(援兵)이 나아가지 않은 것과 임득정(林得楨)의 군사가 밤에 놀란 것과 영호송군(迎護送軍)이 스스로 궤멸(潰滅)한 것이 어찌 나아가면 죽고 물러가면 산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아가면 혹은 살지만, 물러가면 죽은 경우가 도리어 많았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모름지기 이와 같은 풍습을 크게 고친 다음이라야 우리 사졸(士卒)의 기운을 길러서 적인(敵人)의 기운을 점점 빼앗을 수가 있으므로 싸움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금후로는 싸우다가 물러가는 자와, 주장(主將)을 구(救)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법(軍法)에 의하여 시행하면 위엄이 이웃의 적(敵)들에까지 미쳐 변방(邊防)이 다사(多事)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 군호(軍戶)를 구휼(救恤)하는 일. 대개 내지(內地)에 사는 백성들은 변방(邊方)의 경호(警護)를 알지 못하니 문반(文班)의 자제(子弟)를 어찌 군무(軍務)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변민(邊民)과 무사(武士)는 평상시에는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잡고서 부지런히 숙위(宿衛)를 하고, 위급한 일이 있으면 봉인(鋒刃)을 친히 무릅쓰고 몸을 나라에 바치는데, 만일 위태한 것을 보고 생명을 바치는 자가 있다면 그의 애긍(哀矜)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수(隋)나라 때에 푸른 옷을 입고 전상(殿上)에 섰던 자들은 전쟁에서 죽은 자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또 신라(新羅)의 풍속에 전쟁(戰爭)이 한창이면 한사람이 적진(敵陣)으로 돌연히 뛰어 들어가서 참살(斬殺)당하여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이로써 승리(勝利)를 얻었다고 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싸우다 죽은 집을 우대하는데, 높은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그 부모와 처자를 종신토록 국가에서 늠양(澟養)하였던 것입니다. 근일에 국사(國事)에 죽은 사람은 오직 진선(盡善)한 사람이 아니면 별로 특별한 은전(恩典)이 없으며, 그 으레 주는 부의(賻儀)의 쌀도 또한 사람에 청촉(請囑)하여 근근히 어렵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아서야 어찌 사졸(士卒)들의 백인(白刃)을 무릅쓰는 마음을 기르겠습니까, 빌건대 특히 성려(聖慮)를 두시어 후(厚)하게 그 집을 구휼(救恤)하시어, 벼슬을 내려주고 자손을 음서(蔭敍)하여 그 애영(哀榮)을 극진하게 하소서.
1. 군정(軍情)을 보살피는 일. 신(臣)이 평일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漢人]과 싸우면 열번 싸울 때 일곱번 이기고, 왜인(倭人)과 싸우면 열번 싸울 때 세번 이기고, 야인과 더불어 싸우면, 열번 싸울때 다섯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야인(野人)들이 호시(弧矢)의 이기(利器)가 있지만 또한 우리나라의 장기(長技)인 것입니다. 근일에 양계(兩界)의 변장(邊將)들이 싸움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저들이 강하여서 그러한 것도 아니며, 또한 저들의 힘이 커서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삼군(三軍)의 일은 용기(勇氣)를 주로하는데, 처음에 회령(會寧)에서 싸우던 때에 전사(戰士)들이 힘을 쓰지 아니하여 능히 큰 승리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기(士氣)가 날마다 떨어지고 저들의 기운은 날마다 장대하여져 갑산(甲山)과 의주(義州)의 싸움서 순치(馴致)6695)하였으니, 이것이 한탄할 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구(救)하려 한다면 군법(軍法)을 엄중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싸울 때에 군법을 엄중하게 하여 사졸들의 사력(死力)을 얻고, 이미 싸운 뒤에 국사(國事)에 죽은 신하(臣下)들을 구휼(救恤)하여, 후일의 사졸들의 마음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1. 군액(軍額)을 실(實)하게 하는 일. 대개 군사(軍士)는 정(精)한 것을 귀하게 여기므로, 그 숫자가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국가에서 추쇄(推刷)한 군호(軍戶)는, 충청도(忠淸道)에서는 본래 2만호(戶)인데 지금 11만호(戶)가 되었고, 경상도(慶尙道)에서는 본래 4만호(戶)인데 지금 30만호(戶)가 되었으니, 두 도(道)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다른 도(道)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액(軍額)을 나누어 정(定)할 때에 간리(姦吏)가 장실(壯實)한 자로써 봉족(奉足)을 삼고, 약(弱)한 자로써 호수(戶首)6696)를 삼으며, 장실한 자를 병자(病者)로 삼고 병자를 장실한 자로 삼으며, 말[馬]이 없는 자를 기병(騎兵)으로 삼고, 말[馬]이 있는 자를 보병(步兵)으로 삼으니, 가령 1호(戶)인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가지고 봉족(奉足)으로 삼거나, 자기 자손들을 다른 사람의 봉족으로 삼으며, 혹은 서촌(西村) 사람을 가지고 동촌(東村) 사람의 봉족(奉足)으로 삼거나, 동촌(東村) 사람을 가지고 서촌(西村) 사람의 봉족(奉足)을 삼습니다. 이와 같이 법을 희롱하는 것이 모든 도(道)가 다 그러합니다. 호구(戶口)의 수(數)는 비록 옛날에 비하여 배(培)가 되나, 정(精)하고 강(强)함은 옛날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며, 평안도(平安道)의 병(兵)은 더욱 미약합니다. 대저 인정(人情)이 부실(富實)하면 기운도 따라 성(盛)하여져서, 용감한 것을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생사(生死)를 바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 빈약한 사졸(士卒)은 위협(威脅)당하게 되면 더욱 약하여지고, 상(賞)을 주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을 구(救)하여 약한 것을 고쳐서 강하게 하고자 하려면, 그 계책은 윤탁(尹鐸)6697)이 그의 호수(戶數)를 덜고 주(周)나라의 세종(世宗)이 모든 군사를 크게 간략하게 한 것과 같은데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약(弱)한자 10만명을 합하여 5만명으로 만들면 쓸 수 있을 것이나, 옛날과 같이 10만명으로 하면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금후로는 노비(奴婢)가 있는 인사(人士)를 제외하고는, 15세 이상부터 60세 이하까지 3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으며, 기병(騎兵)에서는 군사(軍士), 갑사, 별시위(別侍衛)같은 것은 3호(戶)를 1병(兵)으로 삼고, 평로위(平虜衛), 정병(正兵), 진군(鎭軍)같은 것은 2호(戶)를 1병(兵)으로 삼고, 보병(步兵)에서는 선군(船軍)같은 것도 또한 2호(戶)를 1병(兵)으로 삼으며, 기타 나머지의 연호(煙戶), 잡색(雜色)은 1호(戶)를 1병(兵)으로 삼되, 약(弱)한 사람으로써 정(丁)을 삼지말며, 그 자손들은 분속(分屬)시키지 말며, 인보(隣保)는 나누지 말며, 질병(疾病)은 계산하지 말면, 비록 군사의 숫자는 감하여진 것 같으나 모두 정병(精兵)이 될 것입니다.
호적(戶籍)에는 이미 누락한 정(丁)이 없으니, 유사시(有事時)에는 모두 뽑아서 병정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며, 번갈아 휴식할 수도 있을 것이며, 사고가 나면 그 곳을 보충할 것이며, 또 그의 치중(輜重)을 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산성(山城)을 지키며, 이로써 곡식을 전수(轉輸)를 한다면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것이니, 그 군사를 후(厚)하게 하는 이익이 어떠하겠습니까,
신(臣)이 일찍이 1정(丁)도 국민으로써 누적(漏籍)됨이 없게 하고, 1정(丁)도 단정(單丁)으로써 입역(立役)하는 일이 없게 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군사를 쓸 때는 기병(騎兵)을 중하게 여기나, 지금의 기병은 노둔(駑鈍)한 말[馬]이 많아 만일에 강역(疆域)의 사변이 있으면 비록 2, 3일 사이라 할지라도 말들이 잇달아 넘어져서 능히 전군(全軍)이 적진(敵陣)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피곤한 기마(騎馬)를 거느리다가 적인(敵人)들에게 사로잡혀 타는 것보다는 어찌 장사를 뽑아 보졸(步卒)을 만들어 원습(原隰)6698)한 곳에 출입하면서 걸핏하면 문득 공(功)을 세우는 것이 더욱 낫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제 만약 중외(中外)의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을 모두 그 재주를 시험하고 인하여 그 군액(軍額)을 정한 다음, 반복하여 고열(考閱)하되, 그 재주와 힘이 있는 자는 호수(戶首)로 삼고, 자산(資産)이 있는 자는 봉족(奉足)을 삼아서, 덜도 또 덜어서 그의 장실(壯實)한 자와 허약(虛弱)한 자가 서로 구제하게 하며, 빈자(貧者)와 부자(富者)가 서로 이바지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가히 정병으로써 건장한 말[馬]을 타고 한 사람이 1백명을 당하고, 그 향하는 곳에 앞에 설 사람이 없게 되면, 평상시에는 정병(精兵) 10만으로써 적(敵)을 위협(威脅)할 것이요, 나라에 사변이 있으면, 백만의 대중(大衆)이 모두 때에 따라 준비될 것입니다.
1. 군령(軍令)을 간략(簡略)하게 하는 일. 대개 5위(五衛)에서 결진(結陣)하면 눈으로 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휘(麾)를 설치하여서 지휘하는 것이고, 1만명이 줄[列]을 이루면 귀로 능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징[錚]과 북[鼓]을 설치하여서 진퇴(進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風俗)에 보고 듣는 것이 온전치 못하고 명령을 듣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습진(習陣)하는 날에 대장(大將)이 위장(衛將)을 구(求)하고, 위장이 부장(部將)을 구하고 부장이 두루 통장(統將)과 여대(旅隊)의 사이에 이르러 직접 명(命)하여 왼쪽에 두었다가 다시 오른 쪽으로 옮기고, 앞에 두었다가 다시 뒤로 나오는 등, 두세 차례 설명하여도 오히려 능히 통일을 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빌건대 금후로는 대장(大將)이 기고(旗鼓)를 어소(御所)에 간각하였다가 습진(習陣)하는 날이 되거든 장패(將牌)6699)와 아울러 주시면, 이때에 대장(大將)이 받아서 순청(巡廳)의 남쪽에 이르러 곧 기고(旗鼓)를 세우고, 위장(衛將)이 기(旗)를 진무소(鎭撫所)에서 받아 대장(大將)을 구하고, 부장(部將)이 기(旗)를 병조(兵曹)에서 받아 위장(衛將)을 구하면 이때에 대장(大將)이 기고(旗鼓)를 눕히고 먼저 가고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이 또한 차례차례로 가는데 문(門) 밖에 이르러 기고(旗鼓)를 다시 세우고, 결진(結陣)하면 이때에 5위(五衛)의 군사들의 귀와 눈이 모두 기고(旗鼓)에 주목하여 비록 초계(哨戒)하는 집비둘기를 매달더라도 보지 않을 것이요, 비록 바람 소리와 학(鶴)의 울음이라도 듣지 않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엷은 얼음을 밟고서 호타하(滹沱河)6700)를 건너가게 하여도 또한 건너갈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눈오는 밤에 채주(蔡州)에 들어가게 하여도 또한 들어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10년 동안 생취(生聚)6701)하고 10년 동안 교열(敎閱)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교열(敎閱)한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만약 군령(軍令)을 범(犯)하는 경우에는 대장(大將)이 위장(衛將)을 죄(罪)주고, 위장이 부장(部將)을 죄주고, 부장(部將)이 통장(統長)을 죄주되, 한결같이 병정(兵政)에 의하여 시행하고, 혹시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일이 없게 한 다음에라야 옛 습관을 변화시켜 군병(軍兵)을 행(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군(行軍)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갈 때, 모름지기 장수(將帥)와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마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니, 사졸(士卒)의 용맹(勇猛)과 겁약(怯弱)을 장수가 알지 못함이 없고, 장수의 호령(號令)을 사졸이 알지 못함이 없은 다음이라야, 이에 정예(精銳)를 가려 이에 심복(心腹)을 펼 수 있고, 이에 은혜와 위엄(威嚴)을 보여 이에 상벌(賞罰)을 행할 수 있으며, 이에 더불어 물, 불의 사지(死地)에 다니면서 생사(生死)를 함께 할 것입니다. 지금 장수(將帥)가 된 자는 혹 임시(臨時)하여 가고, 경계 상(上)에 이르러 아무 고을 군사를 아무 장군에게 붙이고, 아무 장군으로써 아무 군사를 통솔(統率)하게 하니, 참으로 이른바 ‘본래 사대부(士大夫)를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찌 바야흐로 당금(當今)의 마땅히 강구(講究)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1. 군제(軍制)를 정(定)하는 일. 병위(兵衛)의 일을 임명할 때 모름지기 피차(彼此)가 서로 이바지하여 혹은 서로 견제한 다음이라야 옳은 것인데, 지금 내금위(內禁衛)와 겸사복(兼司僕)이 대개 서로 같아서 서로 유지(維持)할 수가 있으니, 엎드려 빌건대 겸사복(兼司僕)은 50명으로 정하고, 또 내금위(內禁衛) 3백명 가운데 50명을 가려서 군기(軍器)를 겸(兼)하게 하여 그대로 군기(軍器)의 책임을 행하게 하여, 그들로써 본감(本監)의 구사(丘史)를 적당히 거느리게 하소서. 내금위(內禁衛)는 전소(前所)에 입직(入直)하고 겸사복(兼司僕)은 경회루(慶會樓)의 근처에 입직(入直)하여, 이와 같이 내금위(內禁衛)는 대내(大內)의 동남쪽 모서리에서 숙직하고, 겸사복(兼司僕)은 대내(大內)의 서북쪽 모서리에서 숙직(宿直)하니, 동쪽과 서쪽이 서로 연관(聯關)되어 안팎에 겸하여 정비되고 완급(緩急)할 때 의지(依支)할 수 있는 것이니, 실로 만세(萬世)를 위한 염려인 것입니다. 또 본조(本朝)의 군사 가운데 친병(親兵)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이라 하고, 위병(衛兵)은 갑사, 별시위(別侍衛)라 하고 훈위(勳位)는 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라고 하고, 숙위(宿衛)는 봉충위(奉忠衛), 공신위(拱辰衛)라고 하고 번상군(番上軍)은 정병(正兵), 평로위(平虜衛)라 하고, 보병(步兵)은 파적위(破敵衛)라 하고, 역군(役軍)은 방패(防牌)라 하고, 사령군(使令軍)은 섭육십(攝六十)이라 하고, 공학군(控鶴軍)은 근장(近仗)이라고 하고, 노군(奴軍)은 장용대(壯勇隊)라 하고, 군기감(軍器監)은 별군(別軍)이라 하고, 의금부(義禁府)는 도부외(都府外)6702)라 하고, 진수군(鎭守軍)은 진군(鎭軍),선군(船軍),수성군(守城軍)이라 하는데, 이것이 안팎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액수(額數)입니다. 대저 입법(立法)은 비록 능히 만세(萬世)에까지 전(傳)할 수 없으나, 모름지기 10년 동안 유지하고 지키기를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군사(軍士)의 정액(定額)과 분번(分番),번상(番上)의 달 수가 1년에 여러차례 바꾸어져, 따를 바를 알지 못하니 옳지 못한 듯합니다. 또 변진(邊鎭)의 방수(防戍)에는 토병(土兵)이 중대한데 지금 양계(兩界)의 갑사가 4천 2백 46명이 11번(番)을 나누었으나, 엎드려 빌건대 7백 54명을 더 정(定)하여 5천 명을 만들어 10번으로 나누고, 그의 녹과(祿科)는 보병의 월봉(月俸)을 옮겨 미루어 주며, 또 정병(正兵)은 오로지 기사(騎士)를 쓰고, 보졸(步卒)은 선군(船軍)에 옮겨 붙이되, 그 서울[京]의 정병(正兵)은 기타 나머지 군사로서 서울 밖[京外]이라는 명칭이 별로 없으니, 이른바 서울의 정병(正兵)이란 것도 또한 혁파(革罷)하여 갑사,방패(防牌)에 나누어 붙이며, 또 봉충위(奉忠衛) 29통(統)도 또한 공신위(拱辰衛)의 수(數)에 의하여 1통(統)을 더하여 30통(統)으로 만들며, 또 별군(別軍)은 7번으로 나누면 1번이 1백 명의 수에 차지 못하니, 엎드려 빌건대 매번(每番)을 1백 명으로 정하여 8번으로 나누며 기선군(騎船軍)과 진군(鎭軍),수성군(守城軍)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액수를 정하여 군려(軍旅)를 정비하소서.
신이 듣건대, 천보(天寶) 6703) 말년에 시정배(市井輩)의 자제(子弟)가 이름을 병사(兵士)의 대오(隊伍)에 올려 두고 남을 고용하여 대신 세웠는데, 위태할 때 임하여 병사(兵士)를 주니, 병사가 모두 백도(白徒)6704)였으므로 송(宋)나라 때 얼굴에 묵자(墨刺)6705)를 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방패(防牌) 60명이 대개 대신 세운 사람이 많으니, 봉록(俸祿)을 주는 것이 심히 마땅치 않습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같이 사는 아들, 사위의 봉족(奉足)이외에 그 역(役)을 대신하는 자와, 남의 역(役)을 대신하는 자는 실정을 아는 관리와 함께 모두 군법(軍法)으로써 시행(施行)하소서.
1. 군기(軍器)를 정비(整備)하는 일. 신(臣)이 연경(燕京)에 이르니, 한 사람이 이르기를, ‘귀국(貴國)에서 야인(野人)들을 많이 죽인 것은 진실로 통쾌한 일인데, 귀국(貴國)에서는 편전(片箭)의 예리(銳利)함이 있으니, 야인(野人) 들이 어찌 감히 귀국(貴國)과 대적(對敵)하겠는가,’고 하였고, 한 사람은 이르기를 ‘소전(小箭)은 중국에서도 또한 비로소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말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편전(片箭)은 진실로 우리나라의 장기(長技)이니, 뜻을 두어 강습(講習)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빌건대 남도(南道)의 삼포(三浦)와 북방 연변(沿邊)의 주진(州鎭) 이외에는 편전(片箭)을 쏘는 것을 더욱더 연습하여 군진(軍鎭)을 이롭게 하소서. 화포(火砲)의 제도는 신라 때부터 시작하여 고려 때에 이르러 갖추어졌고 본조(本朝)에 이르러 그 진가(眞價)를 다하게 되었으니, 가위(可謂) 군국(軍國)의 이기(利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인년6706)에 진포(鎭浦)의 싸움과 계축년6707)에 북벌(北伐)을 할 때에 크게 그 활용(活用)을 보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근년에는 화포(火砲)를 가지고 적병(敵兵)을 제압한 일이 없었으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것입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특히 감련관(監鍊官)을 보내어 항상 교습(敎習)을 더하여서 적인(敵人)들을 위협하게 하소서. 또 공격(攻擊)하고 수비(守備)하는 도구는 임시에 만드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수성(守城)을 잘한다고 이름났는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천하의 힘을 모아서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현종(顯宗)이 24반(般)의 병기(兵器)를 변성(邊城)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내침(來侵)할 때에 이르러서 방어(防禦)하여 조금 늦출 수가 있었습니다. 수성(守城)의 도구는 세상에 전(傳)하는 바가 없고 공성(攻城)의 일은 또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신(臣)이 전일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성제공수도(聖制攻守圖)》를 보고 얻어서 바치었는데, 이것은 진실로 군국의 중한 보배입니다. 빌건대 한두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오로지 강구(講究)하도록 맡기시고 그 알 수 없는 것은 중국에 들어가서 찾아 묻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마소서. 신(臣)이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갔을 때 또 다시 노시(弩矢)의 제도를 사람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노시는 이제 많이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연대(煙臺) 위에 두었다가 혹 호랑이를 잡는 데 쓴다’하고 이어서 장설(張說)하는 법을 대략 말하였습니다. 금후에 공격,수비하는 기계(機械)는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유의(留意)하여 듣고 보게 하여서 만세(萬世)에 대비(對備)하게 하소서. 또 야인(野人)은 매양 기병(騎兵)을 매복(埋伏)하였다가 바야흐로 싸울 때 크게 부르짖으면서 충돌(衝突)하는데, 이때에 진(陣)이 이 때문에 요동(搖動)합니다. 신(臣)이 오인(吳璘)의 첩진법(疊陣法)을 보니, 매양 싸울 때 장창(長槍)을 앞에 두었으며 우리 태조(太祖)께서 왜구(倭寇)를 칠 때에도 또한 장창(長槍)으로 결진(結陣)하였으니, 빌건대 지금 진(陣)을 설치할 때 팽배(彭湃)를 앞에 두게 하고 다음에 장창(長槍)을 두고 다음에 총통(銃筩)을 두어서 적(賊)으로 하여금 말을 달려 충돌(衝突)할 수 없게 하소서.
1. 군문(軍門)을 방비(防備)하는 일. 적유령(狄踰嶺) 이북 3백리 사이에는 높은 산과 큰 내가 있고 토지가 비옥(肥沃)한데, 의논하는 자들이 혹은 말하기를, ‘가볍게 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키고자 한다면 그 형세가 심히 고단(孤單)하니 적병(賊兵)이 한편으로는 바로 만포(滿浦)에 충돌하여 이 곳에 미칩(糜縶)6708)하고, 한편으로는 죽전현(竹田峴)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허공교(虛空橋)로부터 들어와서 빨리 강계(江界)를 포위하면, 큰 고개[大嶺] 이북은 봉화(烽火)가 연속(連續)되지않고 성원(聲援)이 또 끊어져 매우 위태한 길이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입석(立石) 등지에 하나의 진(鎭)을 특별히 설치하고 성자(城子)를 견고하게 쌓아서 토병(土兵)으로써 숙위(宿衛)를 시킨 다음이라야 큰 고개[大嶺]의 길을 통(通)할 수 있어서 강계(江界) 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이 보건대, 의주(義州)는 우리나라의 서문(西門)이고, 중국 사람을 접대(接待)할 때 처음 대하는 곳입니다. 성이 산의 등성마루에 걸쳐 있고, 띠집[茅屋]이 많지않아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하여 지극히 미편(未便)합니다. 빌건대 압록강(鴨綠江)의 동쪽 언덕에다가 긴 제방(堤防)을 높이 쌓고 버드나무를 두루 심어서 성터를 가려 그 형세(形勢)를 장엄하게 하소서.
1. 군정(軍丁)을 보호하는 일. 신(臣)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평안도(平安道) 가 지경(地境)이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맞닿았으니, 무수(撫綬)하는 방법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고려 때에 해마다 한 차례씩 순수(巡狩)하고, 인하여 조세(租稅)를 내려 주고 작(爵)을 내려 주고 시설을 내려 주어 은혜와 위엄을 베풀었고, 매양 회시(會試)를 과(科)할 때마다 으레 본도(本道)의 향시(鄕試)의 한 사람을 취(取)하였으니, 진실로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가에서 방수(防戍)하는 노고는 다시 논(論)할 필요가 없으나,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앞뒤에 서로 잇달으므로 으레 마른 양식[乾糧]을 내려 주는 외에도 노상(路上)에서 사사로이 주는 것이 혹은 수십 석(石)에 이르고, 음식물(飮食物)도 갑절이나 되는데, 이것은 귀신이 운수(運輸)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모두 영호송군(迎護送軍)과 기재지(騎載持)6709) 의 말[馬]이 이와 같이 받으니, 한 사람이 한해에 혹은 두서너 차례를 가는데, 여름철 비와 겨울철 눈에 두축(頭畜)이 죽고 재상(宰相)의 말뼈가 길에 잇달아 버려지고, 혹은 중[僧]이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여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파산(破産)하며, 이 때문에 요동(遼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데 대개 그 숫자가 몇 천만명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 의 연간(年間)에 3만여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지방 해주(海州), 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정조사(正朝使)와 성절사(聖節使) 등의 사신(使臣) 이외에 사은사(謝恩使)와 주문사(奏聞使) 등 여러 사신(使臣)은 정지(停止)할만한 것은 정지하고, 부득이한 것은 관대(官帶)에 따라서 가서 진응(進鷹)하는 따위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지 말고 또한 정조사(正朝使)와 사은사(謝恩使) 등의 사신에게 부치며, 그 건량(乾糧)은 예(例)대로 하사(下賜)하는 이외에 노상(路上)에서 사사로이 주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소서. 또 삼포(蔘布),입모(笠帽),선자(扇子),건육(乾肉),건어(乾魚) 이외에 다른 물건은 일체 금지시켜서 한 지방의 민력(民力)을 소생하게 하소서. 또 해마다 영호송(迎護送)과 기재지(騎載持)는 천추절(千秋節),성절(聖節)일 때는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의 평로위(平盧衛),정병(正兵)이 스스로 응모(應募)한 사람을 취하여 하고, 정조사(正朝使)가 갈 때는 경상도(慶尙道)에서 하고 정한 때가 없는 사은사(謝恩使),하례사(賀禮使),주문사(奏聞使) 등의 사신(使臣)일 때는 영호송(迎護送)에는 본도(本道)에서 하고 기재지(騎載持)는 황해도(黃海道)에서 하고, 이때에 하삼도(下三道)의 사람은 한 번 가면 산관직(散官職) 1자급(資級)을 주고,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 의 사람은 두번 가면 또한 1자급(資級)을 주며, 또 평안도(平安道)의 군사 가운데 재력(才力)은 있으나, 기마(騎馬)가 없는 자는 본도(本道)의 목장(牧場) 말을 뽑아서 주며, 또 수수(戍守)6710)에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추운 때 옷이 없는 자는 고려 때 정포도감(征袍都監)의 예(例)에 의하여 하삼도(下三道)의 감사(監司) 행영(行營)에 쌓아 둔 포백(布帛)으로써 적당히 지급하고 또 본도(本道)에서 없앨 만한 공물(貢物)을 온전히 없애어서 오로지 정벌(征伐)과 수자리 일만을 책임 지우며, 세차례 수어(戍禦)에 과실이 없는자는 예(例)대로 산관(散官)의 직(職)을 주어서 한 지방의 민심(民心)을 위로하게 하고, 한 지방의 힘을 쉬게 하소서. 또 신(臣)이 을해년6711)에 평안도(平安道)에 출사(出使)하여 강계부(江界府)에 저장된 군량(軍糧)이 매우 적은 것을 보고 주관(州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고을 사람이 매양 미곡(米穀)을 싣고 재[嶺]를 넘어 안주(安州) 삼현(三縣) 등지에 이르러 소금[鹽]을 바꾸어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안주(安州) 등 고을의 국고(國庫)에 있는 소금을 배로 실어 수상(水上) 영변(寧邊) 지방에 두고, 강계(江界)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고, 미곡을 고을에 바치게 하면 자연히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피폐(疲弊)하는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고 저장되는 양식도 풍족할 것입니다. 신(臣)이 그때에 계책(計策)을 올렸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이 또 경진년6712)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입조(入朝)할 때에 안주(安州)로 지나는 길에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관염(官鹽)이 수백석(石)이 곳곳에 묵어 쌓였다’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다른 군(郡)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신(臣)이 또 생각건대, 방금 서쪽의 사변(事變)이 그치지 않으니, 비단 강계의 축적(蓄積)을 마땅히 저축(貯蓄) 대비(對備)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변(江邊)의 군사들이 양식을 운반하는 폐단도 더욱 조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동로(東路)에서는 진(陣)을 친 영변(寧邊) 수상(水上)에 염창(鹽倉)을 설치하고, 강계(江界), 위원(渭原), 이산(理山)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다 곡식을 바치게 하고서,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며, 서로(西路)에서는 청산산성(靑山山城)에 창고(倉庫)를 설치하고 창성(昌城), 벽동(碧潼), 삭주(朔州)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곡식을 바치게 하고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여, 얻은 미곡(米穀)을 고을의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남도(南道) 수졸(戍卒)에게 예(例)대로 양식을 지급하여 유망(流亡)하는 폐단을 막고 방어(防禦)하는 일을 튼튼히 하소서.
1. 군사(軍士)를 사열(査閱)하는 일. 대개 서울에서 습진(習陣)하는데, 한 달에 두 차례씩 행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라 하겠으나, 다만 외방(外方)의 작은 현(縣)의 군사는 혹 십수명에 차지 아니하여 능히 군대를 이루지 못하나 습진(習陣)한다고 이름하면서 매달에 두차례씩 부르니, 한갓 서리(胥吏)들의 침어(侵漁)할 구실만이 될 뿐이다. 빌건대 금후로는 매년 봄, 가을의 두 중월(仲月)이 되거든 각각 거진(巨鎭)에 모아서 3일 동안 머물면서 습진(習陣)하고, 10월이 되거든 유신(儒臣)들을 나누어 보내서 주진(主鎭)에 나아가 사열(査閱)하고 상벌(賞罰)을 행하며, 또 먼 도(道)의 군사를 매년 크게 사열(査閱)하는 것이 왕래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며, 또 여러 도(道)의 군사를 일시에 도성(都城) 아래에 함께 모우는 것도 또한 경외(京外)의 만세(萬世)를 위한 장구한 염려가 못됩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양계(兩界)는 전위(前衛)라고 칭(稱)하고, 경기(京畿),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는 중위(中衛)라고 칭하고, 경상도(慶尙道)는 좌위(左衛)라고 칭하고, 충청도(忠淸道)는 우위(右衛)라고 칭하고 전라도(全羅道)는 후위(後衛)라고 칭하되, 양계(兩界)와 경상하도(慶尙下道) 이외에 가까운 도(道)인 경기(京畿),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는 번상(番上)을 제(除)하며, 매년 봄철에 와서 사열(査閱)하게 하고, 먼 도(道)인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상도(慶尙上道)는 각각 1년 가을철에 와서 사열하게 하며, 순행(巡幸)할 때에는 그 곳에서 친열(親閱)하게 하며, 또 외방(外方)의 습진(習陣)할 때 수만의 군사들이 옷과 갑옷을 갖추고서 가는 것은 실로 원대한 도모(圖謀)가 못되는 것이니, 갑주(甲胄)는 감사(監司)의 행부(行部)할 때에 친히 점열(點閱)하여 감봉(監封)하고, 다음 차례 순행(巡幸)할 때에 창고를 열어서 주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점열(點閱)을 빌리는 폐단이 없고, 다만 궁검(弓劍)과 마필(馬匹)을 매양 습진(習陣)할 때를 당하여 법식(法式)에 의하여 점고(點考)할 뿐이며, 수령(守令)과 장수(將帥)도 또한 모두 논벌(論罰)하기가 편(便)할 것입니다. 신(臣)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교열(敎閱)하는 것을 보니,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어 그 소리가 원야(原野)를 진동(振動)시켰습니다. 근래 습진(習陣)할 때에 북소리가 둥둥 울려서 매우 시끄러운데, 빌건대 이를 고쳐서 군성(軍聲)을 엄하게 하소서. 또 육전(陸戰)은 그만이지만 수전(水戰)의 일을 강구(講究)하지 않은 듯하니 심히 불가(不可)합니다. 빌건대 지금 수전(水戰)의 진법(陣法)을 만들어 제때에 반포(頒布)하고 매월에 두 차례씩 만호(萬戶)가 싸움을 연습시키되, 봄, 가을철 두 중월(仲月)에 처치사(處置使)가 싸움을 연습시키고 10개월이 되거든 또한 사자(使者)를 보내어 싸움을 연습하게 하고 와서 사열(査閱)하는 법이 없으니, 순행(巡幸)을 할 때에 바다에 임하여 둘러보고 사열을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註6694]구성(九城): 고려 16대 예종 2년(1107)에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아홉 개의 성. 곧 함주(咸州:함흥(咸興)),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통태진(通泰鎭).註6695]순치(馴致): 순치의 형세. 즉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형세.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함. 《주역(周易)》곤괘(坤卦)에, “그 도에 익고 극진하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馴致其道至堅氷也]”하였음.註6696]호수(戶首): 각 호(戶)의 우두머리. 1호는 정호(正戶)와 봉족(奉足)으로 되어 있는데, 호수(戶首)는 정군(正軍)의 입역(立役)과 여정(餘丁)의 공부(貢賦)를 책임지고 독려하였음.註 6697]윤탁(尹鐸):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사람.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으로, 진양(晉陽)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부세(賦稅)를 경(輕)하게 하여 민심을 얻었음.註6698]원습(原隰): 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 註 6699]장패(將牌): 군관(軍官),비장(裨將)들이 허리에 차던 나무로 만든 패. 註6700]호타하(滹沱河):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왕낭(王郞)에게 쫓기어 호타하를 건너려 했을 때 왕패(王霸)가 강을 살피고 돌아와 무리의 사기를 꺾지 않고자 거짓 강이 얼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작 강에 이르러 보니 정말 강물이 얼어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註6701]생취(生聚): 백성들을 길러 군대를 부강하게 하는 것.註6702]도부외(都府外): 고려말 조선초에 금란(禁亂),포도(捕盜),순작(巡綽)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앙 관청. 순군부(巡軍府)에 속한 군대의 하나로, 경기(京畿)의 민호(民戶)로 충당하였음. 좌(左),우(右) 2령(領)이었으나, 뒤에 의금부(義禁府)로 개편되었음. 註6703]천보(天寶): 당(唐)나라 현종(玄宗) 742∼755.註6704]백도(白徒): 훈련이 못된 병졸(兵卒).註6705]묵자(墨刺): 주대(周代) 이래에 사용한 죄인을 벌하던 형벌의 하나로서, 얼굴에 먹물을 넣던 것을 말함 註6706]경인년: 1410 태종 10년 註6707]계축년: 1433 세종 15년.註6708]미칩(糜縶): 말고삐를 매고 머무는 것 註6709]기재지(騎載持):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기 위하여 예비로 데리고 다니는 말.註6710]수수(戍守): 변방에 수자리살며 지키는 것. 註6711]을해년: 1455 세조 원년 註6712]경진년: 1460 세조 6년.
○同知中樞院事梁誠之上書曰:臣竊觀東國歷代之事, 隋、唐大敗於高句麗, 沙寇亦敗於前朝。 姜邯賛之禦契丹三十萬兵, 匹馬無還, 尹瓘之逐女眞, 拓地千里, 創築九城, 載之於史, 昭然可考。 方今聖主御極, 相臣運籌, 習陣觀射, 講武諭將, 無一日不修武備, 兵要、兵書、陣法、兵政無一人不知兵事。 以萬里之大國, 制蕞爾之小寇, 邊將行師, 不甚如意, 臣常憤激, 遍考古今用兵之道, 敢以嚴軍法、恤軍戶、審軍情、實軍額、簡軍令五事爲先, 而以定軍制、整軍器、備軍門、護軍丁、閱軍士爲次, 仰塵睿覽, 伏惟垂察。 一, 嚴軍法。 蓋生者, 所同欲也, 死者, 所同惡也。 若進則死, 退則生, 則孰肯進而死? 孰不肯退而生哉? 但退則必死而辱, 進則或生而雖死亦榮, 然後可鎰人之死力, 而致人於不死之地矣。 昔楊素先斬數百人以立威, 郭子儀亦欲以甥立威, 素非不愛數百人也, 若不殺則十萬之衆死矣, 子儀非不愛甥也, 若愛一甥, 則家國之事敗矣。 劉裕之拒魏師, 斷矟數尺, 以鎚鎚之, 輒洞貫三四人, 韓世忠之禦金人, 令甲士以長斧, 上揕人胸, 下斫馬足。 此卽使之進一步則進一步, 退一步則退一步, 一聽於將, 至死爲心者也。 近日富寧之不救主將, 義州之援兵不進, 林得楨之軍夜驚, 迎護送之軍自潰, 豈不以進則死, 退則生爲心哉? 然進則或生, 退則死者反多矣。 爲今之計, 須大變此風, 然後可以長吾士卒之氣, 而敵人之氣漸以奪, 而可以言戰矣。 今後戰而退者, 不救主將者, 竝依軍法施行, 則威及於隣敵, 而邊防不至於多事矣。 一, 恤軍戶。 蓋內地之民, 不識邊警, 文班子弟, 焉知軍務? 所謂邊民與武士, 平時則被堅執銳, 勤勞宿衛, 有急則親冒鋒刃, 以身徇國, 萬一有見危授命者, 其爲哀(閔)〔憫〕, 可勝言哉! 臣聞隋時有衣靑衣, 立殿上者乃死戰者之子也。 又新羅之俗, 戰酣則一人突入敵陣斬殺之, 以增士氣, 以此取勝, 此無他, 羅人之待戰亡之家, 追贈極品, 父母妻子, 廩養終身。 近日死事之人, 雖非盡善, 別無特恤之典, 其例賜賻米, 亦且請囑於人, 間關以受。 如此何以長士卒冒白刃之心哉? 乞特留聖慮, 厚恤其家, 賜爵蔭子, 極其哀榮。 一, 審軍情。 臣平日觀《三國史記》, “東人與漢人戰, 則十戰而七勝, 與倭人戰則十戰而三勝, 與野人戰則十戰而五勝”, 野人有弧矢之利, 而亦我國之長技也。 近日兩界邊將戰多失利, 此非彼强而然也, 亦非彼大而然也。 三軍之事, 以氣爲主, 始戰會寧之日, 戰士不力, 以致未能大捷。 自是士氣日弛, 彼氣日張, 馴致甲山、義州之戰, 是可恨已。 欲救此弊, 莫若嚴軍法也。 然方戰之時, 嚴軍法鎰士卒之死力, 旣戰之後, 恤死事之臣, 以收後日士卒之心可也。 一, 實軍額。 蓋兵貴乎精, 不在乎多。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本二萬戶, 今爲十一萬戶, 慶尙道本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然分定軍額之時, 姦吏以壯者爲奉足, 弱者爲戶首, 以實者爲病, 病者爲實, 無馬者爲騎, 有馬者爲步, 假如一戶以他人爲奉足, 而子枝爲他人奉足, 或以西村人爲東村人奉足。 東村人爲西村人奉足, 如此弄法, 諸道皆然。 戶數雖倍於古, 而精强似未及焉, 而平安道兵尤爲疲弱。 大抵人情富實, 則氣爲之盛, 可以敎之勇敢, 可以使之生死, 其貧弱之(率)〔卒〕, 威之益弱, 賞之無益矣。 然欲救此弊, 變弱爲强, 其策不過如尹鐸損其戶數, 周世宗大簡諸軍而已。 故弱者十萬合爲五萬, 則可以用。 而仍舊十萬, 則不可用也。 今後有奴婢人士外十五以上六十以下, 以三丁爲一戶, 騎兵, 如軍士、甲士、別侍衛三戶爲一兵, 平虜衛、正兵ㆍ鎭軍二戶爲一兵, 步兵, 如船軍亦以二戶爲一兵, 他餘烟戶ㆍ雜色以一戶爲一兵, 勿以弱者爲丁, 勿以子枝分屬, 隣保勿分, 疾病勿計, 雖軍數似減而皆精兵也。 戶籍旣無漏丁, 有事之時, 則皆可抄爲兵也, 迭爲休息也, 有故補其處也, 又掌其輜重也。 以之守山城, 以之爲轉輸, 無所不可, 其厚兵之利爲如何哉? 臣嘗欲無一丁以國民而漏籍, 無一丁以單丁而立役, 以此意也。 大抵軍行以騎兵爲重, 而今騎兵馬多駑弱, 萬一有疆域之事, 則雖三數日之間, 頭畜連仆, 似不能全軍赴敵矣。 與其率疲困之騎, 而爲敵人所乘, 孰若選壯士爲步卒, 出入原隰, 動輒有功之爲愈也? 今若中外騎步, 皆試其才, 仍定其額, 反覆考閱, 有才力者爲戶首, 有貲産者爲奉足, 損之又損, 使其壯弱相濟, 貧富相資。 如是則可使以精兵騎健馬, 以一當百, 所向無前, 平時則精兵十萬, 以之威敵, 國有事則百萬之衆, 皆可隨時而辦矣。 一, 簡軍令。 蓋五衛結陣, 目不能盡視, 故設其麾以指麾之, 萬人成列, 耳不能盡聽, 故設錚皷以進退之。 然東方之俗, 視聽不全, 聽令不一, 習陣之日, 大將求衛將, 衛將求部將, 部將遍到統將旅隊之間而面命之, 置之左, 復移於右, 置之前, 復出於後, 再三說之, 猶未能一。
乞今後以大將旗皷藏之御所, 及習陣之日, 幷將牌授之, 於是大將受之, 以至巡廳之南, 乃建旗鼓, 衛將受旗於鎭撫所而求大將, 部將受旗於兵曹而求衛將, 於是大將偃旗鼓先行, 衛、部將亦次次而行, 至門外復建旗皷, 結陣以行, 於是五衛之士, 耳目皆屬於旗鼓, 雖懸哨家鴿, 勿視也, 雖風聲鶴唳, 勿聽也, 使之履薄氷渡滹沱河, 亦渡也, 使之雪夜入蔡州, 亦入也。 古人云 “十年生聚, 十年敎閱。” 今敎閱已十年矣。 若犯軍令者, 大將罪衛將, 衛將罪部將, 部將罪統將, 一依兵政施行, 無或寬貸, 然後可以變舊習而行軍兵矣。 然行軍赴敵, 須使將卒知心, 士之勇㤼, 將無不知, 將之號令, 士無不知, 然後于以簡精銳, 于以布腹心, 于以視恩威, 于以行賞罰也, 于以與之蹈水火而一死生也。 今爲將者, 或臨時而行, 至于境上, 以某州軍付某將, 以某將統某軍, 眞所謂非素拊循士大夫也, 豈非方今之所當講究者乎? 一, 定軍制。 差兵衛之事, 須彼此相資, 或以相制, 然後爲可。 今內禁衛與兼司僕大槪相同, 可以相維, 乞今兼司僕定爲五十人, 又內禁衛三百人內擇五十人, 使兼軍器, 仍行軍器之任, 以之量率本監丘史。 內禁衛則於前所入直, 兼司僕則於慶會樓近處入直, 如是內禁衛則直大內東南隅之外, 兼司僕則直大內西北隅之內, 東西相關, 內外兼備, 緩急可倚, 實萬世之慮也。 且本朝軍士, 親兵曰內禁衛、兼司僕, 衛兵曰甲士、別侍衛, 勳位曰忠義、忠贊衛, 宿衛曰奉忠、拱辰衛, 番上軍曰正兵、平虜衛, 步軍曰破敵衛, 役軍曰防牌, 使令軍曰攝六十, 控鶴軍曰近仗, 奴軍曰壯勇隊, 軍器監曰別軍, 義禁府曰都府外, 鎭守軍曰鎭軍、船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大抵立法, 雖不能傳之萬世, 須期持守於十年。 今軍士定額與分番番上朔數一年屢更, 莫適所從, 似爲不可。 且邊鎭防戍, 土兵爲大, 今兩界甲士四千二百四十六, 分十一番, 乞加定七百五十四, 爲五千, 分十番, 其祿科以步兵月俸推移給之, 且正兵專用騎士, 而步卒移屬船軍, 其京正兵則他餘軍士別無京外之稱, 所謂京正兵者, 亦罷之, 分屬于甲士、防牌, 且奉忠衛二十九統, 亦依拱辰衛數, 加一統爲三十統, 且別軍分七番, 一番未滿百數, 乞每番定一百, 分爲八番, 至於騎船、鎭軍、守城軍, 亦皆定額, 以整軍旅。 臣聞天寶之末, 市井子弟竄名兵伍, 雇人代立, 臨危授兵, 兵皆白徒, 宋之刺面, 良以此也。 今防牌六十率多代立, 以俸祿授之, 甚爲未便。 乞今後同居子壻奉足人外, 代其役者、代人役者, 與知情官吏, 俱以軍法施行。 一, 整軍器。 臣到燕京, 一人云 “貴國多殺野人, 誠爲(怏)〔快〕事, 貴國有片箭之利, 野人何敢與貴國敵乎?” 一人云 “小箭中國亦始用之。” 如此言者非一。 片箭, 固本國之長技, 不可不用意講習也。 乞南道三浦、北方沿邊州鎭外, 片箭之射, 益加肄習, 以利軍鎭。 火砲之制。 自新羅而始, 至高麗而備, 及本朝而盡善, 可謂軍國之利器也。 庚寅鎭浦之戰、癸丑北伐之時, 大得其用, 奈何近年未有以火砲制敵兵者, 誠可恨也。 乞今後特遣監鍊官, 常加敎習, 以威敵人。 且攻守之具, 不可臨時爲之。 東方號善守城, 隋、唐擧天下之力而攻之, 而不能克也。 前朝顯宗以二十四般兵器置之邊城, 至於蒙古兵之來, 備禦稍有可稽。 而守城之具, 世無所傳, 攻城之事, 又全無聞。 臣於前日春秋館, 閱得《聖制攻守圖》以進, 此誠軍國重寶也。 乞命一二臣僚, 全委講究, 其不可曉者, 入中原, 不煩訪問。 臣於奉使之時, 又問弩矢之制於人, 答云 “弩矢今不興用, 但置烟臺之上, 或用捉虎。” 仍略言張設之法。 今後攻守機械, 使入朝之人留心聞見, 以備萬世。 且野人每伏騎兵, 方戰大呼衝突, 於是陣爲之動。 臣觀吳璘疊陣法, 每戰以長槍居前, 我太祖征倭之時, 亦以長槍結陣, 乞今置陣, 以彭排居前, 次長槍, 次銃筩, 使賊騎不得馳突。 一, 備軍門。 蓋狄踰嶺以北三百里間高山、大川, 土地沃饒, 議者雖或以爲言未可輕棄者也。 然欲守之, 則勢甚孤單, 賊兵一邊直衝滿浦, 縻縶於此, 一邊自竹田峴而入, 或自虛空橋而入, 徑圍江界, 則大嶺迤北烽火不屬, 聲援且絶, 甚危道也。 須於立石等處, 特設一鎭, 堅築城子, 以宿土兵, 然後可以通大嶺之路, 而江界不至於岌岌矣。 臣觀義州, 國之西門, 接待華人初面之地也。 城跨山脊, 不多茅屋, 如指諸掌, 至爲未便。 乞於鴨江東岸, 高築長堤, 遍植柳樹, 以遮城基, 以壯形勢。 一, 護軍丁。 臣竊惟平安道境連遼瀋, 撫綏之方, 不可不慮。 前朝之時, 歲一巡狩, 仍賜租稅, 賜爵賜設, 以施恩威, 每科會試, 例取本道鄕試一人, 固有意也。 今江邊防戍之勞, 不必更論, 赴京使臣前後相望, 例賜乾糧外, 路上私贈, 或至數十石, 食物倍之, 此非神運鬼輸。 皆迎護送軍騎載持馬, 受之如此, 一人一年或再三行, 夏雨冬雪頭畜斃死, 宰馬之骨連棄於路, 或有僧人代父兄而行者。
以之破産, 以之逃入遼, 蓋者不知幾千萬人。 臣見《遼東志》, 東寧衛所屬高麗人, 洪武年間三萬餘人, 及永樂時漫散軍亦四萬餘人。 今遼東戶口高麗人居十之三, 西自遼陽, 東至開州, 南至海盖, 諸州聚落相屬, 此誠國家汲汲軫慮者也。 乞今後正朝、聖節等使外謝恩、奏聞諸使可停者停之, 不得已者順帶而行, 至於進鷹, 不別差人, 亦就付正朝、謝恩等, 使其乾糧例賜外, 痛禁路上私贈。 又蔘、布、笠帽、扇子、乾肉魚外他物一禁, 以蘇一方民力。 且每年迎護送騎載持千秋、聖節全羅、忠淸道平虜衛正兵取自募爲之, 正朝之行, 慶尙道爲之, 無時謝賀、奏般使迎護送則本道爲之, 騎載持則黃海道爲之, 於是下三道之人一行, 授散官職一資, 平安、黃海道再行亦授一資, 且平安道軍士有才力而無騎馬者, 以本道牧場馬抄給, 且勤謹戍守而寒無衣者, 依前朝征袍都監例, 以下三道監司營所儲布帛量給之, 且全除本道可除貢物, 專以征戍之事責之, 而其三度戍禦無愆違者, 例授散官之職, 以慰一方之心, 以休一方之力。 且臣於乙亥年出使平安道, 見江界府糧儲甚少, 問之州官, 答云 “州人每載米穀, 踰嶺至安州三縣等處, 換鹽以食。” 若以安州等邑國庫鹽, 船載置水上寧邊地面, 使江界人受鹽於此, 納穀於官, 則自然農牛戰馬不至於疲弊而糧儲足矣。 臣其時獻策, 事竟不行。 臣又於庚辰年奉使入朝之時, 道經安州, 問鹽之有無, 答云 “官鹽數百石, 處處陳積。” 以此推之, 他郡皆然。 臣又念方今西事未已, 非徒江界蓄積所當儲備, 江邊軍士贏糧之弊, 尤宜措置。 東路則於所陣寧邊水上置鹽倉, 使江界、渭原、理山之人, 納穀本邑, 而受鹽於此, 西路則於靑山山城置倉, 使昌城、碧潼、朔州之人, 納穀本邑, 而受鹽於此, 以所得米穀儲之州倉, 南道戍卒例給半糧, 藺流亡之弊, 以固防禦之事。 一, 閱軍士。 蓋京中習陳, 一月兩行, 誠爲良法, 但外方小縣之兵, 或不滿十數, 不能成軍而名爲習陣, 每月再徵, 徒爲胥吏侵漁之資。 乞今後每歲春秋兩仲, 各聚巨鎭, 留三日習陣, 及至十月, 分遣儒臣, 就閱于主鎭, 以行賞罰, 且遠道軍士每年大閱, 不無往來之弊, 又諸道軍士一時俱集都下, 亦非京外萬世之長慮也。 乞今後兩界稱前衛, 京畿、江原、黃海道稱中衛, 慶尙道稱左衛, 忠淸道稱右衛, 全羅道稱後衛, 而兩界及慶尙下道外, 近道京畿、江原、黃海道除番上, 每年春等來閱, 遠道忠淸、全羅、慶尙道上道各一年秋節來閱, 巡幸時則親閱其處, 且外方習陣, 數萬軍具衣甲而行, 實非遠圖, 甲冑則監司行部時親點監封, 次度巡幸時開庫以給。 如是則無借點之弊, 而但弓劍馬匹每當習陣, 依式點考, 守令將帥亦皆論罰爲便。 臣到遼東觀敎閱, 鼓噪大呼, 聲振原野。 近日習陣鼓噪甚爲啾喞, 乞令改之, 以嚴軍聲。 且陸戰則已矣, 水戰之事, 似不講究, 亦甚不可。 乞今作水戰陣法, 及時頒之, 每月兩度萬戶習戰, 春秋二仲處置使習戰, 至十月亦遣使習戰, 而無來閱之法, 巡幸時則臨海觀閱。
上嘉納之。
성종 84권, 8년(1477 정유/명성화(成化) 13년) 9월 16일(경진) 1번째기사
남원군 양성지가 의주, 안주, 황주 등지의 성 축조에 관하여 상소하다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신이 생각하건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친히 훈요(訓要)를 지어 사왕(嗣王)에게 주기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조순(調順)하여 만대의 근본이니, 마땅히 사중월(四仲月)을 당하면 순행(巡行)하여 머물러서 1백일을 지내라.’ 하였다 합니다. 이 때문에 태조 이후로 의종(毅宗)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이 모두 서경에 순주(巡駐)하여 혹은 어의(御衣)를 머물러서, 물건을 하사하기도 하고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고,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시험하여 으레 서경의 한 사람을 뽑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패강(浿江)7851)이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 안주(安州)의 살수(薩水)7852)같은 것이 아니고, 서경은 산이 중첩되고 물이 막히어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으므로, 수덕(水德)이 순하다고 크게 드러내어 말하고 여러번 그 곳에 거둥하며, 따라서 혜택을 베풀고, 또한 따라서 진압하고 복종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방위(防衛)하였어도 오히려 편안치 못한 것이 네번이나 있었습니다. 본조(本朝)의 태조(太祖)께서 개국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잇달아 일어나시어 똑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하여 안과 밖을 구별하지 않아서 왕씨(王氏)가 강역(疆域)을 구별하여 너무 형적을 드러낸 예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서쪽 사람들이 근년에 극성(棘城)의 역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도(道)를 버리는 것이다’한답니다. 이것이 비록 어리석은 백성들이 묘모(廟貌)를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기는 하나, 또한 어찌 한 도의 인심을 저버리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사람에게는 각각 마음이 있는데 마음은 실로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암학(巖壑)보다 험하고 누란(累卵)보다 위태로우며, 썩은 새끼로 말을 어거하는 것 같고 급한 물에 배를 띠우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참으로 집집마다 알고 호구마다 깨우칠 수 없습니다. 예전 사람이 변방에 느릅나무를 심었는데 마침 적국의 의심을 열어 놓았고, 회수(淮水)를 그어 경계를 삼았는데 또한 중원(中原)이 바라는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관방(關防)의 건치(建置)를 어찌 익히 생각하고 살펴 계획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물며 원만경(元萬頃) 7853)이 우리에게 압록(鴨綠)의 험함으로 격문(檄文)하였고, 우문술(宇文述) 이 살수(薩水)에서 패군(敗軍)하였고, 귀주(龜州) 동교(東郊)의 싸움에서는 거란(契丹)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는데, 이것은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姜邯贊)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며, 파령(岊嶺)을 지킬 때에는 홍적(紅賊)이 1만여명 군사로 쳐서 깨치어 적병이 깊숙이 들어오매 세 원수(元帥)가 그 용맹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고금에 나라를 지키는 규모가 실로 오직 국세의 강하고 약한 것과 장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데에 달려있는 것이고, 한갓 성책(城柵)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이달 초 9일에 조계(朝啓)에 참여하여 이 의논을 들었는데 다만 말한 자가 어느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또 일이 기밀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여러 사람 앞에서 상주(上奏)하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염려를 더하고 보신(輔臣)들에게 익히 의논하시어, 아직은 극성의 역사를 정지하고 먼저 의주성(義州城) 을 쌓고 다음에 안주(安州)에 성을 쌓고 다음에 황주(黃州)에 성을 쌓아 만세의 계책을 삼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註7851]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註7852]살수(薩水): 청천강(淸川江).註 7853]원만경(元萬頃):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 이적(李勣)을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이적이 원만경을 시켜 격문(檄文)을 지어 고구려에 보냈는데, 격문 가운데에는, 고구려가 압록강의 요새를 지킬 줄을 알지 못한다고 기롱한 말이 있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가 회보하기를, ‘가르쳐 준 말씀 잘 들었다’하고,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을 굳게 지키니 당의 관군이 들어올 수가 없었으므로, 원만경이 이것 때문에 좌죄(坐罪)되어 영외(嶺外)로 유배(流配)되었음.
○庚辰/南原君梁誠之上疏曰:臣竊惟高麗太祖親製《訓要》以授嗣王曰: “西京水德調順, 萬代根本。 宜當四仲巡駐, 留過百日。” 以此太祖以後至于毅宗歷代君主, 皆巡駐西京, 或留御衣, 于以設賜, 于以蠲租, 至於設科試士, 例取西京一人。 臣意以謂浿江非如義州之於鴨綠, 安州之於薩水也。 以西京山重水隔, 所係匪輕, 聲言水順, 屢幸其處, 欲因以施澤, 亦因以壓服之也。 以此防之, 猶且不靖者四。 本朝太祖開國, 列聖繼作, 一視同仁, 罔有內外, 非如王氏區別疆域大露刑迹之比也。 然臣聞西人近年聞有棘城之役, 以謂: “若然則是棄我道也。” 此雖愚民不知廟貌而言, 然亦豈不孤一道人心哉? 臣以爲人各有心, 心實難測, 險於巖壑, 危於累卵, 若朽索之馭馬也, 若急流之載舟也。 心一搖焉, 固不能以家喩而戶曉之也。 古人種楡於塞, 適以啓敵國之疑, 畫淮爲界, 亦以失中原之望。 然則關防建置, 豈可不熟慮而審慮之哉? 而況元萬頃檄我以鴨綠之險, 宇文述敗師於薩水之上, 至於龜州東郊之戰, 契丹三十萬兵, 匹馬無還, 此國勢方强, 姜邯賛得展其材智也。 岊嶺之守, 紅賊以萬餘兵攻破, 敵兵深入, 三元帥不得効其勇, 然則古今守國規模, 實惟在於國勢之强弱將帥之賢否, 不徒在於城柵之何如也。 臣於本月初九日獲參朝啓, 與聞是議, 但不記言者何人。 又事關機密, 不敢對衆上奏。 伏望殿下特紆宸慮, 熟議輔臣, 姑停棘城之事, 先築義州城子, 次築安州, 次築黃州, 以爲萬世之計幸甚。
不報。
성종 164권, 15년(1484 갑진/명성화(成化) 20년) 3월 27일(갑인) 1번째기사
대신의 죽음에 백관이 회장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춘추전(春秋傳)》을 살펴보니, ‘대부(大夫)는〈죽은 지〉3개월 만에 장사지내되 같은 지위에 있는 대부가 회장(會葬)14896)한다.’하였고, 후한(後漢) 의 제준(祭遵)이 졸(卒)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백관(百官)을 보내어 먼저 장사시내는 곳에 모이도록 하고, 소복(素服)차림으로 거가(車駕)가 임(臨)하였으며, 당(唐)나라의 위징(魏徵)이 졸(卒)하니, 조칙하여 내외 백관(內外百官)을 조정에 모이게 하고 모두 부상(赴喪)하게 하였고,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이주좌(李周佐), 최사추(崔思諏)가 졸(卒)하니, 백관(百官)에게 회장(會葬)하도록 명(命)하였습니다.”하니,
명하여 의정부(議政府),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六曹), 홍문관(弘文館)에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대부(大夫)가 회장(會葬)함은 옛적에도 그 법(法)이 있었으나, 모두 한때의 특은(特恩)이고, 만세(萬世)에 상행(常行)하는 법전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옛 법을 행하고자 하면, 훈로중신(勳勞重臣)의 죽음에만 회장(會葬)하도록 명하여 이수(異數)14897)를 보이게 하소서.”하고,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춘추(春秋)14898), 한(漢), 당(唐), 고려(高麗) 때에 대신(大臣)의 죽음에 백관(百官)이 회장(會葬)한 글이 있으니, 그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예(禮)가 중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의 장소(葬所)가 혹 멀리 하룻밤을 지내야 할 곳에 있으면 백관이 일을 폐(廢)하고 회장(會葬)할 수 없으니, 다만 출장(出葬)하는 날에 각사(各司)의 1원(員)이 문밖에서 조송(祖送)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이극배(李克培),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의 죽음에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함은 그 뜻이 매우 만족할만 합니다. 그러나 한(漢)나라의 제준(祭遵)과 당(唐)나라의 위징(魏徵) 과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등은 모두 큰 공덕(功德)이 있는 까닭으로 일시(一時)의 특명(特命)으로 회장(會葬)하게 하여 총이(寵異)를 보였을 뿐입니다. 아조(我朝)에서는 대신(大臣)의 죽음에 혹 치부(致賻)하고 혹 예장(禮葬)하게 하여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예(禮)가 이르지 않음이 없으되, 다만 회장(會葬)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행하지 않았으니, 신 등의 뜻으로는 장소(葬所)가 멀면 백관이 회장(會葬)하기 어렵다고 여기나, 만약 장소(葬所)가 가까우면 특명(特命)으로 회장(會葬)하게 한들 어찌 예(禮)에 해롭겠습니까,”하고,
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예전의 인군(人君)은 대신(大臣)을 우례(優禮)하여, 혹 친림(親臨)하여 문병(問病)하고 혹 친행(親幸)하여 곡림(哭臨)14899)하였으니,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함이 예(禮)에 어찌 해롭겠습니까, 다만 대신의 죽음에 회장(會葬)한다고 범칭(泛稱)하게 되면 그 예(禮)가 번거로울 듯하니, 이제 만약 짐작(斟酌)하여 입법(立法)한다면 대신(大臣)으로 이미 삼공(三公)을 역임한 자와 큰 훈로(勳勞)가 사직(社稷)에 있는 자와 종친(宗親)으로 존귀한 데 속하고 명망이 높은 자가 있으면, 임시에 특명(特命)하여 백관(百官)에게 회장(會葬)하게 함으로써 이수(異數)를 보임도 또한 정례(情禮)에 합하겠습니다.”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예전에는 대부(大夫)의 장사에 같은 지위에 있는 자가 회장(會葬)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다운 뜻이 되지만, 그러나 때가 다르고 일이 다릅니다. 한(漢)나라 이래로부터 의방(依倣)하여 이를 행할 수 없었고, 비록 그 사이에 회장(會葬)한 자가 있더라도 특히 한때의 은수(恩數)에서 나온 것이니, 이제 이에 의거하여 상법(常法)을 정하게 함은 불가합니다. 만약 공(功)이 국가에 있는 자라면, 특별히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하여 우례(優禮)를 보이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하겠습니다.”하고,
김겸광(金謙光)은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의 죽음에 온조정이 회장(會葬)함은 진실로 양법(良法)이 되지만, 그러나 옛날을 상고하면, 회장(會葬)한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특히 한때의 은수(恩數)에서 나온 것뿐이니, 정하여 상법(常法)을 삼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에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고 이미 삼공(三公)을 역임한 자라면 임시에 특명(特命)함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하겠습니다”하고, 조익정(趙益貞), 박안성(朴安性)은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이 졸(卒)하면 이미 조제(弔祭)하도록 하고, 또 관(官)에서 상사(喪事)를 갖추게 하였으니, 은례(恩禮)가 지극합니다. 회장(會葬)하는 거사에 이르러서는 예악(禮樂)이 주(周)나라보다 성(盛)함이 없으되 이런 의식이 나타나 있지않고, 그 《좌씨전(左氏傳)》에 기록된 바, ‘같은 지위에 있는 자가 이르고 인척되는 자가 이르렀다’고 한 것은 친척(親戚)과 동료가 스스로 정의(情誼)가 두텁다고 하여 와서 양사(襄事)14900)를 돕는 것뿐입니다. 훈신(勳臣)을 대우함은 한(漢)나라, 당(唐)나라가 가장 잘하였는데, 광무(光武), 태종(太宗)이 제준(祭遵), 위징(魏徵)에게는 조제(弔祭)한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습니다. 고려(高麗)에서 강감찬(姜邯贊), 이주좌(李周佐), 최사추(崔思諏) 의 죽음에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하였으되 3인 이외에는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한 때의 은수(恩數)입니다. 또 지금은 고향에 귀장(歸葬)하니 도성(都城)과의 거리가 매우 먼 자는 어찌 온 조정이 가서 순월(旬月)14901)을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회장(會葬)하는 거사는 형세가 불편(不便)함이 있습니다.”하고,
어세공(魚世恭), 이공(李拱), 이칙(李則)은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의 죽음에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함은 역대(歷代)의 제왕(帝王)이 간혹 이를 행하였으나, 이것은 상전(常典)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조종(祖宗)의 우례(優禮)가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되, 《오례의(五禮儀)》주(註)에는 다만 거애(擧哀)하는 것만 기재하고 백관이 회장하는 글은 없는데, 이는 선왕(先王)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한 법전이 아니니,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 주(註)에 의하소서.”하고,
이파(李坡), 이세좌(李世佐), 이숙감(李叔瑊)은 의논하기를,
“국가에서 대신(大臣)의 죽음에 철조(輟朝)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갖추게 하며, 삼공(三公)이면 거애(擧哀)하고 그 발인(發引)에는 도문(都門) 밖에서 치전(致奠)하니, 대신(大臣)을 후하게 예우(禮遇)하여 시종(始終)의 은혜를 온전히 한 것입니다. 만약에 백관(百官)이 회장(會葬)하면 그 예(禮)가 지극히 융성하고 그 일이 지극히 중하니, 혹 특별한 공훈과 큰 덕이 있어 족히 생민(生民)을 윤택(潤澤)하게 하고 국가(國家)의 안위(安危)에 관계된 자이면 역대(歷代) 및 전조(前朝)에서도 때때로 있었지만, 그러나 모두 인주(人主)의 한때의 특별한 은혜에서 나왔으니, 만약에 이를 예(例)로 삼아 상사(常事)를 삼는다면 매우 융성한 예(禮)와 매우 거대한 일을 사람에게 베풀게 되어 사람이 불편(不便)할까 두렵습니다.”하고,
이극증(李克增), 김자정(金自貞), 권정(權侹), 이육(李陸)은 의논하기를,
“회장(會葬)하는 예(禮)는 예로부터 있었으니, 진실로 두터운 풍속입니다. 그러나 장소(葬所)가 만약 도성(都城)에서 가까우면 고례(古例)를 따라 행하는 것도 무방하지만, 만약 먼 곳에 있는데 회장(會葬)한다면 왕래(往來)하는 즈음에 직사(職事)를 광폐(曠廢)14902)할 뿐만 아니라, 공돈(供頓)하는 비용도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선왕(先王), 선후(先后)의 상(喪)에 있어서도 제도감사(諸道監司)가 친히 오지 아니하고 도사(都事),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진위(陳慰)하게 하고 회장(會葬)하였는데, 대신의 죽음에 백관이 회장하는 거사는 실로 행하기 어렵습니다.”하고,
어세겸(魚世謙), 이경동(李瓊仝), 변수(邊修)는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의 죽음에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함은 정법(情法)에 진실로 후(厚)하며, 예(禮)는 인정(人情)을 연유하였으므로 옳지않은 것이 없지만, 그러나 고문(古文)에는 ‘대부(大夫)는 3개월 만에 장사지내는데, 같은 지위에 있는 대부가 참석한다’는 글만 있으니, 회장(會葬)하는 절목(節目)도 또한 상세할 수 없습니다.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이르러서 비록 회장(會葬)하는 말은 있으나 또한 회장하는 의식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이며,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명경(名卿)과 중신(重臣)이 많지 않음이 아니지만 회장(會葬)한 예(禮)는 겨우 하나 둘만이 상고할 만하니, 아마도 특별히 당시 인군의 명(命)에서 나온 것이므로 끌어서 상례(常例)를 삼음은 불가한 줄로 압니다. 또 이제 대신(大臣)이 출장(出葬)하는 곳이 아주 옛날과 같이 조역(兆域)14903)이 일정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가서 택지(擇地)하므로 원근(遠近)이 가지런하지 않으며, 심한 자는 혹 향읍(鄕邑)에서 10여일의 노정에 장사지내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장사지내는자도 백사(百司)의 직(職)을 폐(廢)하고서 여러 날을 지내며 회장(會葬)할 수 없는데, 더구나 10여 일이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것은 비록 입법하여 상례(常例)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군상(君上)께서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시종(始終)의 후례(厚禮)는 진실로 갑자기 폐할 수 없으니, 그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있어, 군상(君上)께서 공경하는 중위융작(重位隆爵)14904)으로 지극히 여러 사람의 물망에 윤협(允協)한 자이면, 한때에 예관(禮官)의 계품(啓稟)으로 군상(君上)이 특별히 명하는데 달려있을 뿐입니다.”하고,
권찬(權攅), 홍이로(洪利老), 유윤겸(柳允謙)은 의논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백관(百官)이 대신(大臣)을 회장(會葬)하는 예(禮)는 한때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고 일정한 제도는 아닙니다. 지금의 회장(會葬)은 혹 1일 노정(路程), 2,3일 노정(路程)이나, 백관(百官)이 나라를 비우고서 회장(會葬)하러 갈 수는 없으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원훈대신(元勳大臣)으로 그 은수(恩數)를 중히 하지않을 수가 없는 자만 발인(發引)하는 날을 당하여 다만 그 집에 모이어 전송했으면 합니다.”하고,
이명숭(李命崇), 안침(安琛), 김흔(金訢), 조위(曺偉), 박문간(朴文幹), 김응기(金應箕), 성희증(成希曾), 민보익(閔輔翼), 박증영(朴增榮)은 의논하기를,
“한(漢)나라 제준(祭遵)의 상(喪)에는 조서(詔書)로 백관(百官)을 보내어 상소(喪所)에 모이게 하였고, 당(唐)나라 위징(魏徵)의 상(喪)에는 조서로 내외의 백관(內外百官)을 조정에 모아서 부상(赴喪)하게 하였으며, 곽자의(郭子儀) 상(喪)에는 조서로 군신(群臣)에게 가서 조상하게 하였는데, 이 수인(數人)은 모두 한때에 공덕(功德)이 걸연(傑然)한 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상(赴喪)하는데에 그치고 백관(百官)이 회장(會葬)한 예(禮)는 없었습니다. 오직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이주좌(李周佐), 최사추(崔思諏)의 상(喪)에는 백관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지만, 그러나 고제(古制)에는 모두 이 예(禮)가 없으니, 무엇을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은 대신(大臣)으로 공덕(功德)이 있는 자는 백관(百官)에게 특명(特命)하여 부조(赴弔)하게 해야지, 드러내어 상전(常典)을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하니,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한(漢)나라, 당(唐)나라, 고려(高麗) 때에 회장(會葬)한 자는 수인(數人)에 그칠 뿐이다. 그 큰 공덕이 있는 자는 회장(會葬)하도록 특명(特命)하였는데 〈이것은〉바로 한때의 은수(恩數)이니, 드러내어 상전(常典)을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의논하기는 혹 회장함이 옳다하고, 혹은 문밖에서 조송(祖送)함이 옳다고 하는데, 회장(會葬)하는 것은 거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조송(祖送)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정하고, 임시(臨時)하여 특별히 행함이 어떠하겠느냐,”하니,
승지(承旨)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하였다.
註14896]회장(會葬): 장사 지내는데 참여함.註14897]이수(異數): 특별한 예우(禮遇).註14898]춘추(春秋): 춘추시대.註14899]곡림(哭臨): 임금이 죽은 신하를 몸소 조문함.註14900]양사(襄事): 장사지내는 일 註14901]순월(旬月): 열흘이나 달포 가량 註14902]광폐(曠廢): 오랫동안 폐함.註14903]조역(兆域) : 묘(墓)가 있는 곳. 영역(瑩域).註14904]중위융작(重位隆爵): 고관대작(高官大爵).
○甲寅/弘文館啓: “按《春秋傳》, 大夫三月而葬, 同位至。 後漢祭遵卒, 詔遣百官, 先會喪所, 車駕素服臨之。 唐魏徵卒, 詔內外百官朝集, 使皆赴喪。 高麗姜邯賛、李周佐、崔思諏卒, 命百官會葬。” 命議政府、領敦寧以上、六曹、弘文館議之。 鄭昌孫、尹弼商議: “大夫會葬, 古有其法, 皆一時特恩, 非萬世常行之典。 如欲行古法, 特於勳勞重臣之卒, 命會葬, 以示異數。” 韓明澮、 沈澮議: “春秋、漢、唐、高麗時, 大臣之卒, 有百官會葬之文, 其敬大臣之禮重矣。 然大臣葬所, 或遠在經宿之地, 則百官不可廢事會葬, 但出葬之日, 各司一員, 於門外祖送何如?” 李克培、尹壕議: “大臣之卒, 令百官會葬, 其意甚盛。 然漢之祭遵、唐之魏徵、高麗姜邯贊等, 皆有大功德, 故一時特命會葬, 示寵異耳。 我朝於大臣之卒, 或致賻, 或禮葬, 尊禮大臣, 無所不至, 但會葬之制, 自祖宗朝, 而不行。 臣等意以爲 ‘葬所遠, 則百官會葬爲難。’ 若葬所近, 則特命會葬, 何害於禮?” 徐居正議: “古之人君, 優禮大臣, 或親臨問疾, 或親幸哭臨, 使百官會葬, 於禮何妨? 但大臣之卒, 泛稱會葬, 則其禮似繁, 今若斟酌立法, 大臣已行三公者, 有大勳勞於社稷者, 宗親之有屬尊望重者, 臨時特命百官會葬, 以示異數, 亦合情禮。” 許琮議: “古者大夫之葬, 同位會葬, 誠爲美意, 然時異事殊。 自漢以來, 不能倣而行之, 雖間有會葬者, 特出於一時恩數, 今不可據此定爲常法。 若有功於國家者, 特令百官會葬, 以示優禮, 誠合事宜。” 金謙光議: “大臣之卒, 擧朝會葬, 誠爲良法, 然稽之於古, 會葬者不多。 竊謂: ‘特出於一時恩數, 不可定爲常法。’ 若功在社稷, 已行三公者, 臨時特命, 實合事宜。” 趙益貞、朴安性議: “大臣之卒, 旣令弔祭, 又許官庇喪事, 恩禮至矣。 至於會葬之擧, 則禮樂莫盛於周, 而不著此儀。 其左氏所記 ‘同位至, 外姻至’ 者, 親戚、僚友, 自以情好, 而來助襄事耳。 待遇勳臣, 漢、唐爲最, 而光武、太宗之於祭遵、魏徵, 不過弔祭而已。 高麗於姜邯贊、李周佐、崔思諏之卒, 令百官會葬, 而三人之外無聞焉。 是亦一時恩數。 且今歸葬於鄕, 距都城甚遠者, 安可擧朝而往, 經歷旬月乎? 會葬之擧, 勢有所不便。” 魚世恭、李拱、李則議: “大臣之卒, 令百官會葬, 歷代帝王, 間或行之, 此非常典也。 是以祖宗優禮, 無所不至, 而《五禮儀註》, 但載擧哀, 無百官會葬之文。 此非先王未遑之典, 一依《五禮儀註》。” 李坡、李世佐、李叔瑊議: “國家於大臣卒, 輟朝官庇葬事, 三公則擧哀, 其發引也, 致奠於都門外, 所以優禮大臣, 以全始終之恩。 若百官會葬, 則其禮極隆, 其事至重, 或有奇勳、碩德, 足以澤潤生民, 繫國家安危者, 則歷代及前朝, 往往有之, 然皆出於人主一時之殊恩。 若例以爲常事, 則以極隆之禮、至大之事, 施之於人, 人恐不便。” 李克增、金自貞、權侹、李陸議: “會葬之禮, 自古有之, 誠爲厚風。 然葬所若近都城, 則依古例, 行之無妨。 若在遠處而會葬, 則往來之際, 非徒曠廢職事, 供頓之費, 又有甚焉。 況在先王。 先后之喪, 諸道監司不親來, 而令都事、守令, 陳慰會葬, 則大臣之卒, 百官會葬之擧, 實難行之。” 魚世謙、李瓊仝、邊脩議: “大臣之卒, 令百官會葬, 於情法實厚。 禮緣人情, 無所不可, 然古文, 徒有 ‘大夫三月而葬, 同位至’ 之文, 會葬節目, 亦不可詳。 至漢、唐, 雖有會葬之語, 亦無會葬之儀, 此固前代所無之事。 至於前朝, 名卿、重臣不爲不多, 而會葬之禮, 纔有一二之可考。 恐特出於時君之命, 不可援以爲常例。 且今大臣出葬之所, 非如古昔兆域有常, 臨時擇地, 遠近不齊, 甚者或葬於鄕邑十餘日之程者。 近者且不可廢百司之職, 而經日會葬, 況十餘日乎? 竊意, 此雖不可立爲常例, 然亦君上待大臣, 始終之厚禮, 誠不可頓廢, 其有功勳、德業, 君上所敬重位、隆爵, 極允協僉望者, 此在一時禮官之啓稟, 君上所特命耳。” 權攅、洪利老、柳允謙議: “謹按, 百官會葬大臣之禮, 特出一時之命, 非爲常制。 今之會葬, 或一日之程, 二三日之程, 百官不可空國, 而往會。 臣等以爲, ‘元勳大臣, 其恩數不可不重者, 當發引之日, 但令會其家送之。” 李命崇、安琛、金訢、曺偉、朴文幹、金應箕、成希曾、閔輔翼、朴增榮議: “漢祭遵之喪, 詔遣百官會喪所; 唐魏徵之喪, 詔內外百官, 朝集使赴喪; 郭子儀之喪, 詔群臣往弔。 玆數人者, 皆一時功德傑然者也, 而止於赴喪, 無百官會葬之禮。 唯高麗姜邯贊、李周佐、崔思諏之喪, 命百官會葬, 然於古制, 皆無此禮。 未知何所據也。 臣等以爲 ‘大臣之有功德者, 特命百官赴弔,’ 不可著爲常典。” 傳于承政院曰: “漢、唐、高麗時, 會葬者數人而止耳。 其有大功德者, 則特命會葬, 乃一時恩數, 不可著爲常典也。 今議或云可會葬, 或云宜於門外祖送, 會葬則似難擧行。 祖送節目議定, 臨時特行, 若何?” 承旨等啓曰: “上敎允當。”
중종 52권, 19년(1524 갑신/명가정(嘉靖) 3년) 10월 1일(임진) 1번째기사
천변이 일어나자 형옥을 살피게 하다. 삼공이 사직을 청하다
곤방(坤方)12470), 손방(巽方)에서 번개가 치고 동북방에서 천둥하였다. 정원(政院)12471)에 전교(傳敎)하기를,
“겨울철이 아니기는 하나, 천둥의 재변은 정상이 아니다. 지난달의 천둥도 미안한테 이제 다시 이러하니, 잠을 자도 자리에 안정하지 못하겠다. 대저 재변은 헛되이 일어나지 않으니, 반드시 부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어그러지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어울리는데, 이제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상하가 수성(修省)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억울한 일은 형옥(刑獄)보다 큰 것이 없는데, 지체하여 결단하지않은 것이 있을 듯하니, 형관(刑官)을 시켜서 초록(抄錄)하여 아뢰게하라.”
하매, 정원이 아뢰기를,
“이제 천둥으로 말미암아 형옥의 오래 지체된 것을 아뢰라고 명하셨으니, 아랫사람이 절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재변이니, 궐실(闕失)된 일이 있지 않은지, 대신에게 하문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일에도 시종(侍從),대신에게 구언(求言)하셨고, 또 상께서 측신(側身)하여 수행(修行)하시기는 하나, 상하의 궐실과 백성의 폐막(弊瘼)을, 구언이 아니면 어찌 죄다 아실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 우의정(右議政) 권균(權鈞) 등이 아뢰기를,
“신(臣)들이 새벽에 천둥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듣고 매우 놀라고 두려워서 막 사피(辭避)하려 하는데, 명패(命牌)가 왔으므로 와서 모였습니다. 대저 겨울의 천둥은 재변 중에서 큰 것입니다. 오늘은 10일이고 또 10월의 절(節)12472)로 들어가는데, 천둥이 불시에 나왔으니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 신들이 직분을 제대로 못한 소치이니, 신들을 갈아서 천변에 보답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천둥소리를 듣고 매우 놀라고 두려워서 간신히 날이 밝기를 기다려 경(卿)들을 명소(命召)하였는데, 경들도 미안할 것이므로 연방(延訪)12473) 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삼공(三公)의 잘못이겠는가, 참으로 내 덕(德)이 선(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들은 사피하지 말라.”하였다.
상이 곧 삼공을 인견(引見)하여 이르기를,
“지난달에 작은 천둥이 있었어도 미안하게 여겼는데, 이제 또 겨울철에 천둥하였다. 재변을 가져온 까닭을 모르겠으나 재변은 헛되어 일어나지 않으니,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하늘의 꾸중에 보답해야 할 것이므로, 이미 분부를 내려 구언(求言)하게 하고 또 지체된 옥사(獄事)를 써서 아뢰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천변에 응답한다고 할 수 없다. 근자에 왕자(王子)를 귀양보냈는데, 이것도 온편치 않으므로 가까운 곳으로 양이(量移)12474)하려 하였으나, 조정이 옳지않다고 하므로 우선 멈추었다. 이제 양이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또 경성(京城)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문을 닫고 빈객(賓客)을 만나지 말게 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조신(朝臣)이 모르는 외방의 민원(民怨)과 조정의 득실을 초야의 선비가 아는 것도 있으니, 실봉(實封)12475)하는 자가 많고 보면 하정(下情)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광망(狂忘)한 말이 있더라도, 쓸만한 것을 가려서 취하고 쓸만하지않은 것을 버려 상께서 짐작하신다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권균이 아뢰기를,
“형옥의 폐단이 근래 더욱 심하여 20차 형신(刑訊)을 받은 자로 말하면 많이 있거니와, 전라도에서는 93차 형신을 받은 자도 있는데, 이것은 근래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외방 수령(守令)의 일이므로 그 하는 짓을 모르겠으나, 그 지체된 옥사가 혹 9년까지 된 것이 있으니, 재변을 부를 것은 틀림없습니다.”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분수에 어그러진다는 말을 듣게 된 왕자(王子)는 편안하게 보전한 사람이 적습니다. 이제 이 왕자는 서너 번이나 허언(虛言)을 들었으므로 그 일에는 관련되지 않았으나, 이렇게 되면 스스로 문을 닫고 허물을 살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무뢰한 무리와 사귀는 일을 꺼림없이 자행하였으니, 일찍이 조처하지 않고 마침내 분수를 범하게 되어서야 죄를 준다면,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신이 정덕(正德)12476) 연간에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천하의 인심이 죄다 흥헌제(興獻帝)12477)에게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루는 유식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정덕이 순유(巡游)하여 섬서(陝西)에 있다’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황제에게 아들이 없는데 너희들은 누구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가’하니, 오명(吳明)12478)이 말하기를 ‘사고가 있으면 흥왕(興王)에게 돌아갈 것이다’하였습니다. 그 뒤에 흥왕이 그 추대하는 말을 듣고 드디어 스스로 제재하였는데, 명분에 관한 일은 이렇게 처리해야 마땅하거니와, 조정(朝廷)12479)이 지금 황제를 세운 까닭은 흥왕을 사모하여 함께 세운 것입니다. 이 일은 두목(頭目)이 와서 말한 것입니다. 대저 명분에 관한 일에 크게 방해되는 것이 있고 종사(宗社)를 위한 큰 계책이라면 우애(友愛)의 정 때문에 망설일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할 즈음의 정사(正邪)가 소장(消長)하는 기틀이라면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므로 위에서 깊이살펴야 하겠으나, 왕자의 일은 재변을 가져온 까닭이 아닌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자, 소인이 진퇴하는 기틀은 매우 어려우므로 당(唐),우(虞)12480) 때에도 소인이 있었거니와, 이제만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다만 모르는 것을 걱정할 따름이다. 사정(邪正)이 진퇴할 즈음을 상하가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접때의 인심이 이제까지 안정되지 않으므로, 군자, 소인을 밝게 가려야 하니, 상하가 더욱 살펴야 한다. 또 친정(親政)은 아름다운 일이니, 조종조(祖宗朝)에서 하던 전례를 상고하여 하는 것이 어떠한가,”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사람을 등용하는 일은 그 책무를 맡은 자를 시켜서 하는 것이 옳으니, 이조(吏曹)를 시켜 늘 모여서 인물의 고하(高下)를 의논하여 이에 의하여 빈자리를 비망(備望)12481)하여 여쭈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상께서 어질어서 쓸만한 자라고 생각하시는데 조정의 동료가 의논하는 것과 같지 않다면 오로지 전조(銓曹)에 책임지워서 인물을 잃지않게 하셔야 하며, 상께서 쓸만한 자라는 것을 확실히 아신다면 혹 어필(御筆)로 친히 제수(除授)하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필로 친히 제수하는 것은 신하의 지극한 영화이다’하였으니, 더욱 인재를 얻으면 또한 넉넉히 임금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유청이 아뢰기를,
“고려 현종(顯宗) 때에 강감찬(姜邯贊)을 친히 제수하였는데 그 제수한 글을 지금도 유림(儒林)이 칭송(稱誦)하여 마지않습니다.”하였다.
註12470]곤방(坤方): 스물 넷으로 나눈 방위의 하나. 24방위는 다음과 같다. 자(子:정북),계(癸),축(丑),간(艮:동북),인(寅),갑(甲),묘(卯:정동),을(乙),진(辰),손(巽:동남),사(巳),병(丙),오(午:정남),정(丁),미(未),곤(坤:서남),신(申),경(庚),유(酉:정서),신(辛),술(戌),건(乾:서북),해(亥),임(壬).註12471]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약칭.註12472]10월의 절(節): 곧 입동(立冬). 15일을 1기(氣), 1월을 2기, 1년을 24기로 잡고 월의 2기 중에서 앞에 있는 것을 절기(節氣) 또는 삭기(朔氣)라 하고 뒤에 있는 것을 중기(中氣)라 한다. 정월의 절기는 입춘(立春)이고 중기는 우수(雨水)이다. 이와 같이 24기를 배정하여 12월의 중기인 대한(大寒)으로 한 해의 24기가 끝난다.註12473]연방(延訪): 임금이 신하, 특히 대신을 불러서 묻는 것.註12474]양이(量移): 귀양살이하는 죄인의 배소(配所)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는 것.註12475]실봉(實封): 누설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보게 하기 위하여 봉투를 풀로 봉하여 상소하는 것 註 12476]정덕(正德): 명무종(明武宗)의 연호.註12477]흥헌제(興獻帝): 이름은 주우원(朱祐杬). 명헌종(明憲宗)의 네째 아들. 무종(武宗)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중종 16년(1521) 4월에 흥헌왕 우원(興獻王祐杬)의 맏아들 후식(厚飾)이 무종의 뒤를 이어 황제(묘호(廟號)는 세종(世宗))가 된 뒤에 생부(生父)인 흥원왕을 추존하여 흥원제로 하였다 註12478]오명(吳明): 중국 사람임.註 12479]조정(朝廷): 중국 조정을 가리킴 註12480]당(唐),우(虞): 당은 요(堯)의 나라, 우는 순(舜)의 나라.註12481]비망(備望): 망(望:상당한 자)을 갖춤.
○壬辰朔/曉, 坤方、巽方有電光, 東北方雷動。 傳于政院曰: “雖非冬節, 雷變非常。 前月雷動, 尙且未安, 今復如此, 寢不安席。 大抵, 災不虛生, 必有所召。 人事失於下, 則天變應於上。 今不可的知以某事, 而致此, 然上下所當修省也。 人之冤抑, 莫大於刑獄, 恐有遲滯不決, 其令刑官抄啓。” 政院啓曰: “今因雷動, 命啓刑獄之久滯者, 下人自知戒懼之意也, 然此實大變, 無乃有闕失之事乎? 請下問大臣何如? 前日亦有求言於侍從, 大臣。 雖自上側身修行然上下闕失, 民之弊瘼, 若非求言, 何能盡知?” 領議政南袞、左議政李惟淸、右議政權鈞等啓曰: “臣等曉聞雷聲大作, 至爲驚懼。 方欲辭避, 命牌適至, 故來會。 大抵冬雷, 災變之大者。 今日乃十月, 而又入十月之節, 雷出不時, 非偶然之故也。 此皆臣等失職所致, 請遞臣等, 以答天變。” 傳曰: “予, 曉聞雷聲, 深爲驚懼。 待日明, 命召卿等, 卿等亦應未安, 故欲延訪, 是豈三公之過? 實由予德之不類也, 卿等其毌辭。” 上卽引見三公曰: “去月有微雷, 尙以爲未安。今又冬月雷動, 不知其致災之由, 然變不虛生, 當恐懼修省, 以答天譴, 故已令下旨求言, 又令書啓滯獄矣。 然不可以此, 爲應天變也。 近者, 竄逐王子, 此亦不便。 欲量移近地, 而朝廷以爲不可, 故姑停耳, 今欲量移何如? 且雖令入京城, 使杜門不接賓客, 則何害?” 南袞曰: “外方民怨、朝廷得失, 朝臣所不知者, 草莽之士, 亦有知者。 若爲實封 者, 旣多則益知下情也。 其間設有狂妄之言, 擇可用者取之; 不可用者棄之, 自上斟酌, 則不爲無益。” 權鈞曰: “刑獄之弊, 近來尤甚。 如二十次受刑者多有之。 於全羅道亦有九十三次受刑者, 此近所未聞也。 外方守令之事, 不知其所爲也, 但其滯獄, 或有至於九年者, 其召災必矣。” 袞曰: “自古王子, 身罹非分之語者, 鮮有安保之人。 今此王子, 三四度被虛言, 其事則不干涉矣, 然若如此, 則當自杜門省愆可也, 反交無賴之徒, 恣行無忌, 若不早爲之所, 而終至犯分然後, 加之以罪, 則悔將何及, 臣於正德間, 奉使中原, 聞天下人心, 盡屬興獻帝。 一日, 有識人來言曰: ‘正德巡遊在陜西。’ 云。 臣謂之曰: “皇帝無子, 爾等當屬諸何人?’ 吳明【中原人。】曰: ‘若有事則當歸興王。’ 云, 其後興王聞其推戴之言, 遂自裁。 名分間事, 當如是處之。 朝廷之所以立今皇帝者, 以思慕興王, 而共立之也。 此事則頭目來言耳。 大凡, 名分間事, 有所大妨, 而宗社大計, 則不可以友愛之情, 而貳之也。 如朝廷用人之際, 正邪消長之機, 則所關甚重, 自上所當深察也。 王子之事, 恐非致災之由也。” 上曰: “君子、小人, 進退之機, 至難。 雖唐、虞之際, 亦有小人焉, 今獨不可謂無有也, 第患不知耳。 邪正進退之際, 上下之所當深察也。 頃者人心, 至今不定。 君子、小人, 所當明辨, 上下益宜加察。 且親政美事, 祖宗朝所爲之例, 相考而爲之何如?” 袞曰: “用人之事, 使任其責者, 爲之可也。 令吏曹, 常會議人物高下, 以此備望, 窠闕取稟而爲之, 允宜也。 自上以爲, 賢而可用者, 若與朝行間儕輩所議不同, 則宜專責銓曹, 使不失人也, 若自上灼知其可用者, 則或以御筆親除, 亦無妨也。 古人云: ‘御筆親除’ 此人臣之至榮。 若又得人, 則亦足以彰人(之)〔主〕之明德也,” 惟淸曰: “高麗顯宗時, 親除姜邯賛, 而其所除之書, 至今尙爲儒林稱誦不衰。”
선수 21권, 20년(1587 정해/명만력(萬曆) 15년) 12월 1일(을묘) 2번째기사
전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다
전 교수(敎授) 조헌(趙憲)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고 아울러 전의 소장도 올렸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조헌이 향리로 돌아오고 나서 일본 사신이 와서 통빙(通聘)을 요구한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드디어 소장을 초하여 그것이 실책임을 극력말하는 내용으로 감사에게 올렸다. 감사는 ‘수길(秀吉)의 찬시(簒弑)에 관한 일은 자세히 모른다’하고, 소장에 또 당시 재상을 논하였으므로 기휘(忌諱)에 저촉된다하여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조헌이 이에 도보로 서울에 들어와서 전에 시사(時事)에 대해 말한 다섯 건의 소장과 함께 올렸더니 궁내에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았다. 정원이 소장을 궁내에 오래 보류해 둔다하여 사관에게 내리기를 청하니, 상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지금 조헌의 소장을 보건대 이는 곧 인요(人妖)이다. 하늘의 견고(譴告)가 지극히 깊어 두렵고 조심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 어쩌면 과인이 현상(賢相)과 명경(名卿)에게 평일 지성으로 대우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위임하지 못한 탓으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더욱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이 소장을 내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으나 내가 차마 내리지 못하겠다. 일단 내려보내면 손상되는 바가 매우 많을 것이어서 내가 차라리 허물을 받는 것이 낫겠기에 이미 태워버렸다. 사관은 내 허물을 크게 기록하여 후세를 경계하면 좋겠다.”【무릇 신민의 소장이 올라오면 3일을 넘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정원에 내려보내야 한다. 만일 비사(批辭)가 없고 계(啓)자만 찍어 내릴 경우에는 승지가 소장에서 말한 내용을 혹 해사(該司)에 내려 복의(覆議)하게도 하고 혹 소청을 윤허하면 성지(聖旨)를 받들기도 하는 것이 곧 규례이다. 만일 계(啓)자를 찍지 않고 내리면 정원이 원각(院閣)에 간직하는데 사관(史官)이 취하여 일기(日記)에 채록(採錄)하고 채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그대로 두는데 유중불보(留中不報)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소장이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면 정원에서, 일기에 찬입(纂入)하기를 계청(啓請)하는 것이 또한 규례이다. 조헌의 소장을 불태웠으나 위에서 그 사유를 비시(批示)하였으면 폐기하지 못하는 것이 규례이다. 폐조(廢朝)로부터 오늘날까지 소장이 대내에 들어가서 내려오지 않아도 정원이 감히 청하지 못하고 번번이 궁인(宮人)이 설용(屑用)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이른바 유중(留中)한다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조헌이 왜의 일에 대해 논한 소장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동쪽의 변을 듣고도 예궐(詣闕)할 힘이 없어 소장을 지어 빨리 달려 감사(監司)가 가있는 곳에 가서 삼가 지난달 25일 망궐(望闕)하고 청주 객사(淸州客舍)에서 소장을 올렸더니, 감사가 ‘왜가 임금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듣지 못하였는데 소장을 진달하는 것은 미안하고 또 몇몇 대신(大臣)에게는 논급(論及)된 곳이 있으니 번신(藩臣)의 사체에 가벼이 올릴 수 없다.’ 하므로 신이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러와서 생각건대 서백(西伯)이 여(黎)나라를 토벌하여 이기자 조이(祖伊)가 두려워하여 상왕(商王)에게 뛰어가 고하였고525), 고창(高昌)526)이 나라를 멸망시키자 위징(魏徵)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진계(陳戒)하였습니다. 무릇 밝고 지혜로운 이라야 바야흐로 싹트는 악을 보아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미리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로서도 이적(夷狄)을 경계하여 오히려 나라를 홍성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은감(殷鑑)을 소홀히 하면 군대가 숲처럼 많을지라도 창날을 돌려대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맹문(孟門)과 태행(太行)을 홀연히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527)
아, 서백(西伯)처럼 성스러웠으나 여(黎)를 쳐서 이긴 것은 상왕(商王)에게 이롭지 못하였고 고창(高昌)이 무도하였으나 이웃 나라를 경계한 것이 도리어 당(唐)나라에는 도움이 되었는데, 하물며 일본은 본디 반복하여 신의가 없는 나라로 일컬어졌는 데이겠습니까. 황조(皇朝)에서 애초에 끊어버린 것이 제일의 상책(上策)이었고, 중종(中宗)이 중간에 끊었다가 마침내 관부(款附)하게 한 것528)이 곧 중책이었고 고려가 자강(自强)을 힘쓰지않고 신사(信使)를 여러번 교통하고 혹 구몰(拘沒)하여 요맹(要盟)한 것이 하책(下策)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종족529)이 먼 섬의 고원(高原)과 광야(廣野)를 처음으로 점유하여 생활 밑천의 계획으로 삼았으니 중국의 난을 피한 것을 또한 다행으로 여겼다합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이전은 중국의 변환(邊患)이 된 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호원(胡元)이 무력의 정벌을 남행(濫行)하여 망령되이 온 천하의 인민을 복종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중국의 백성만 지쳐 죽게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동한(東韓)의 군사까지 아울러 몰아다가 산같은 파도가 이는 험한 바다에 던져넣어서 해골조차 수습할 수 없고 혼도 돌아갈 데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멀리 있는 저 오랑캐들이 비로소 중국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남쪽 변경으로부터 침범하여 경기·황해 사이까지 깊이 들어왔고 곧 등비아(登比兒)가 강도(江都)를 엿보기에 이르렀으니 고려의 백성이 거의 다 어육이 될 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강감찬(姜邯賛)을 얻고 나서는 오랑캐들의 기미가 영원히 종식되었고 마지막으로 우리 성조(聖祖)530)를 얻게 되어서는 열진(列鎭)이 숲처럼 벌여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능히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자 저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청주(淸州)·양주(楊州)를 엿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좋은 계책이 못되었습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서북(西北)의 융적(戎狄)을 진복(鎭服)하는 것 때문에 중국 지방이 노고에 시달려 퇴폐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만일 또 이 교활한 오랑캐와 교통한다면 사신이 왕래하는 비용이 도리어 중국 생령(生靈)의 해독이 되겠기에 사자를 지레 막고 아울러 조공(朝貢)까지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곧 고려 태조가 거란[契丹]과 교통을 끊어버리고 아울러 탁타(槖駝)를 죽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간혹 노략질하는 근심이 있기는 하였으나 감히 내지에 깊이 들어올 계획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먼 지방의 기이한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한 효과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동시에 따라서 가까이 있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저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 차례 엿보게 된 까닭은 고려 말기에 바라던 일이 성취되어 만일의 요행을 기대하였던 탓입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게 된 뒤에야 소굴에 형적을 감추고 어느 섬에서 왔는지를 속이고서는 도리어 조공을 바치고 다시 우리 의관을 계승하고 거짓으로 부산에 와서 관복(款服)하며 조공의 기일에 미쳤습니다. 그러나 조종조에서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받아들인 것은 변민(邊民)이 병화의 근심을 입지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1개 도의 전세(田稅)의 반을 해마다 배로 수송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저들 중에 교활한 자는 반드시 ‘화친(和親)하면 이익이 도주(島主)에게 돌아가고 노략질하면 요행히 얻은 이익이 아랫사람들에게 나뉘어지나 도주는 관여되는 바가 없다.’ 합니다. 그리하여 잠시의 분노로 인하여 엿보는 바가 있기는 하였으나 혹 잘 방어함으로 인하여 죄괴(罪魁)를 잡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경오년531) 삼포(三浦)의 왜란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만 붕중(弸中)이 적의 괴수를 바쳐와서 기필코 관납(款納)하기를 구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이로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면 이같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종이 그들의 간상(姦狀)을 통촉하고 남쪽 지방을 진정시킨 것이 곧 중책(中策)입니다.
이웃 나라와 교제함에 있어 도가 있으면 대국(大國)이 소국에게 부림당하고 자치(自治)함에 방술이 없으면 소국이 대국에게 부림당하고 약국이 강국에게 부림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여러 차례 침릉(侵凌)을 가하여 왔습니다만 우리는 저들에게 삼한(三韓)을 통하여 일찍이 한번도 대대적으로 거병(擧兵)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초국(楚國)의 보배는 오직 어진이를 보배로 삼는 것뿐이고532) 금과 구슬을 썩은 흙처럼 여긴다는 것을 안다면 저들이 우리에게 요구함에 있어 간사함을 행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가 저들을 제어함에 있어서도 저절로 반자(盼子)·검부(黔夫)같은 사람이 동남지방을 나누어 지켜533) 감히 한척의 배도 서쪽을 향해 노를 저어 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혹시 노략질하는 경우가 있으면 군사를 엄히 경계하여 움직이지 않고서 먼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고서 ‘우리의 군사가 일찍이 한 번도 남쪽으로 출동한 적이 없는데 네가 방자하게 엿보니 그 대중을 이루 다 죽일 수 없다’ 하고,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그들 스스로 주벌(誅罰)하게 한다면 군대의 체모가 정직하고 장대(壯大)하게 될 것이고 저들은 저절로 기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해이해진 때를 이용하여 우리가 떨치고 나아가 그들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친다면 진(晉)·초(楚)처럼 강한 나라라도 우리에게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안개가 서리고 바람이 일어서 기후가 고르지 않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물러가서 편의를 기다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양식을 이어대지 못하고 군사의 후원이 없게되면 저 적들의 근심이 반드시 우리나라보다 더 깊은 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전조(前朝)의 강신(强臣)이 나라의 권한을 잡고서 간성이요 심복인 장수를 일체 사인(私人)으로 임용함으로써 자기 집을 부유하게 하기를 힘쓰게 하는 반면 군사는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어하는 계책은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고 오직 금옥(金玉)만을 보배로 여겨 저들의 미끼를 탐낼 뿐이었습니다. 멀리 사신을 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탐색케 했다가 곽예(郭預)는 객사(客死)하였고 정몽주(鄭夢周)는 철환(撤環)하게 하였으나 하나도 삼도(三道)의 노략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더없는 하책(下策)인 것입니다.
아, 지금 이후로 무엇을 거울삼아야 하겠습니까. 옛 사람의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낭묘(廊廟)의 의논은 멀어서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반드시 ‘접대하고 기미(覊縻)하여 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할 것이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의리로 말하면 반드시 ‘거절하고 접대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관대(館待)가 극히 후한데 연회에 청하는 날에도 진실로 사신을 내왕할 것인지 물어본 다음에야 대궐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저들에게 견제당하였으므로 신은 대신 중에 대신다운 사람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덕유(李德裕)가 실달모(實,謀)의 항복을 받아들이기를 청한 것은 곧 당(唐)나라에 충성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우승유(牛僧孺)가 사사로이 이덕유를 미워하여 의리를 끌어대어 포박하여 송치하자 선유(先儒)가 이를 비평하였습니다.
지금 저들을 접대하는 요점을 구함에 있어 모름지기 선처(善處)할 술책을 가려내야 할 것이요 동서(東西)의 의논이 다르다하여 아주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을 당하여 온 사자를 인접(引接)하고 이렇게 타일러야 합니다
‘사신을 청하고 친목을 맺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데 있어 하나의 큰일이다. 거란[契丹]이 전쟁을 좋아하자 고려에서는 교제를 끊었고, 서온(徐溫)534) 이 임금을 내쫓자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는 그를 주벌(誅罰)하였다. 일본의 새 임금의 공적이 성대하게 드러났다하더라도 전왕(前王)의 폐위(廢位)가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새 교제의 달콤함을 위하여 갑자기 옛날 친호(親好)하던 약정을 잊음으로써, 10개 도서(島嶼) 중에 혹 한 사람이라도 과인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면 과인은 실로 부끄러워 천지의 끝에도 설 수 없을 것이고, 옥·비단·구슬의 혜물(惠物)이 마침내 허지(虛地)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예물을 돌려주니 너희는 모름지기 가지고 가라.
사신을 가벼이 교통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세 가지 일이 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왕이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명천자(大明天子)는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 선조(先祖)가 삼가 섬기던 바이고 동서남북에 복종하지않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너희 섬 중에 오래도록 남월(南越)의 황옥(黃屋)535)을 빌어서 서계(書契)를 보내는 사이에 혹 천정(天正)536) 몇년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도가 크고 덕이 넓어서 절역(絶域)에 대해 가혹한 견책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개기(改紀)한 초기에 이미 예의(禮義)를 숭상한다고 부르짖는다면 먼저 이 연호를 제거하여 국서(國書)를 개정하라. 그런 뒤에 신사(信使)를 교통하면 과인의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대해 비로소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서도 유감되는 바가 없겠으나, 너희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렵다. 이것이 한 가지 일이다.
조그마한 삼한(三韓)의 땅이 군사도 강하지 않고 양식도 넉넉하지 못한데 장수는 뛰어나지 않고 성은 튼튼하지 않으니 감히 지켜내고 막아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조종(祖宗)으로부터 내 몸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지켜오면서 나라를 보전한 법규는 오직 이웃나라를 침탈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한 번도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타고 남쪽으로 출정한 적이 없었다. 오직 이여일(李汝一)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의 반적(叛賊)을 토벌하게 하였을 뿐인데 이는 너희 나라의 늙은이들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런데 너희 나라의 적선(賊船)이 넘보지 않는 해가 없어 우리나라의 고기잡이하는 사람을 사로잡아 간 것이 이루 셀 수 없으며 심지어는 사람을 구워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린 아이를 쪼개어 살을 바르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천하의 제국(諸國)에서 듣지 못한 일이다.
을묘년537)의 변란을 일으킨데 이르러서도 분명히 너희 온 나라가 내침(來侵)한 형적이 있으므로 제도(諸道)의 사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도(道)마다 다른 일종의 적왜(賊倭)가 있었다고 했다. 저번에 한 사자가 와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바쳤는데 이는 도로에서 주울 수 없는 것이니, 그 거짓이 당장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과인이 일의 경험이 없어 오랜 뒤에야 그 간사함을 깨달았다.
올 봄에 또 큰 도적이 흥양(興陽) 제도(諸島)에 와서 정박하고서 우리의 방비가 없는 틈을 타고 살상하고 사로잡아간 것이 매우 많으므로 과부와 고아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다. 다행하게도 귀순한 사람을 인하여 향도(嚮導)가 된 자를 물어보았더니 우리나라의 도망자 사화동(沙火同)이라 하였다. 사화동은 너희 나라의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영총(榮寵)을 성대히 누리고 있다 하니, 한 섬의 도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조종조로부터 우리 적자(赤子)들의 목숨이 중함을 위하여 해마다 1도의 양곡과 물품을 떼어내어 이웃나라와 친호(親好)를 수교하였던 것인데, 도리어 속아서 조금도 도움되는 바가 없었다. 차라리 그 양곡과 물품으로 주림과 추위에 고생하는 우리 전사(戰士)에게 나누어주어 구휼하였다면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로 하여금 과인을 위해 성을 지키게 하였더라도 반드시 힘을 다하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명분없는 군사는 상제(上帝)가 도와주지 않고 귀신도 몰래 주벌(誅罰)하는 법이다. 너희들이 주사(舟師)가 1백만명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뜻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관문(關門)을 닫고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손해가 없다. 화친을 하면 이익이 임금에게 돌아가고 군사를 출동하면 이익이 아랫사람에게 돌아가지만 위에는 관여되는 바가 없는 것도 또한 너희 나라의 임금이 모두 환하게 아는 바이다. 예전 임금의 정치가 스스로 국적(國賊)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그 지위를 잃는 것이 마땅하다. 새 임금이 정치를 만일 전과는 반대로 한다면, 사화동(沙火同)이 주인의 발을 물어뜯은 것과 너희 나라 사람들이 사람을 구워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린 아이를 쪼개어 살을 바르는 일은 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함께 증오하는 것이니, 봄에 흥양(興陽) 경내에 침구한 적의 괴수와 향도자(嚮導者)를 잡아 보내어 국법을 밝게 보임으로써 우리 장수와 군사의 수치를 씻게 하는 한편 너희 일국의 크고 작은 섬에 엄히 금하여 다시는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각자 잠을 편히 잘 것이고 두 나라 임금의 교호(交好)도 각기 영원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 나라가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렵다. 이것이 또 한 가지 일이다.
보내주는 것은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은 박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구경(九經)538)의 도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말세에 와서는 이것이 과람해져서 백성이 곤궁하고 나라가 패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나라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다 같이 근심해야 할 일이다. 당초 너희나라가 우리나라에 통호(通好)한 것은 우리나라의 힘이 이웃 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구주(九疇)·팔조(八條)의 가르침539)이 기자(箕子)를 통하여 먼저 밝아졌고 주공(周公)·공자(孔子)·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문이 세상에 대강 행해짐에 따라 그 학설을 듣게 된 사람은 작을 경우에는 종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적의하게 할 수 있으며, 클 경우에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先祖) 때 통호(通好)한 사신으로 말하면 빙문(聘問)하는 이외에 간혹 경적(經籍)을 탐하기도 하여, 물품은 박하였으나 인정은 두터웠고 일은 간략하여 폐해가 없었으므로 가고 오는 데에 있어 수작(酬酢)이 수고롭지 아니하였다. 그 뒤 사신이 점차 흥판(興販)을 숭상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아니하면 얼굴에 노기를 띠고 우리 저자의 사람을 죽여 우리 변경의 근심을 격동시키는가 하면 염치와 겸양의 풍교(風敎)를 무너뜨려 두 나라의 화친을 손상시킨 것은 또한 너희 나라의 식견있는 사람도 탄식한 바이다.
옛말에 「선도(善道)를 따르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악도(惡道)를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쉽다」하였다. 우리의 변변치 못한 신하가 흥판하는 왜국 사신의 소위를 익히 본 탓으로 사신으로 가서 가벼운 행장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면 구구한 예의의 나라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주게 될 것이고 또한 너희 나라도 이 때문에 노고와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겸하여 이 수 년 사이에 기근과 여역으로 나라 백성이 편치 못하고, 종사의 자성(粢盛)540)도 제향을 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렵다. 그런데 빈객을 접대하는데 있어 염소와 돼지의 고기를 그릇에 채울 수 없게 되었고 도로의 지공(支供)도 주현(州縣)의 재용이 고갈되었다는 말이 여러 차례 들려오고 있다. 따라서 주연이 풍요롭지 못하여 행려(行旅)에 손상을 끼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사신을 차출하여 멀리 보냄에 있어서이겠는가. 여름·겨울 의복의 마련을 우리의 재력으로 장만하고, 아침·저녁의 자량(資糧)을 수륙(水陸)으로 수송한다면 우리나라의 재력이 장차 피폐할까 두렵고 황조(皇朝)에도 전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남에게 무진한 즐거움을 요구하지 아니하며 남에게 무진한 성의를 요구하지 아니하여 교분을 영구히 유지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대역(大易)》 수괘(隨卦)의「때에 따라 줄이고 보탠다」는 의리에 따라 세폐(歲幣)의 물량을 조종조의 구규(舊規)에만 의거하여 계속할 수 있는 도리로 삼게 하고, 우리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도 병을 치료하는 약재(藥材)와 종묘 제기(祭器)의 장식에 그칠 뿐이면, 한 해에 한 차례 보빙(報聘)하더라도 우리 성의를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주공(周公)·공자(孔子)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도타이하고 명(明)나라 예악(禮樂)의 교화를 화성(化成)하여 이로써 국가를 장구하게 하고 노인을 기른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익을 품고 서로 사귀는 너희 나라 여러 섬의 무리가 싫어하여 따르지 않을까 두려우니, 이 또한 한 가지 일이다.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만일 제후(諸侯)의 법도를 준수하여 먼저 명의(名義)를 바르게 한 다음 전왕(前王)의 자손을 모두 죽이지 않도록 하며, 횡행하는 적선(賊船)을 일체 금단하고 우리의 반역자와 포로를 돌려주며, 다시는 도륙을 일삼지 말고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이익을 가벼이 하여 염치와 예양(禮讓)으로 풍속을 이룬다면 혁신되어 도(道)에 이를 것이고, 우리도 오히려 바라는 바가 있어 풍교(風敎)와 의리를 사모하는 사신을 한번 보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하라.’
이와 같이 먼저 저들의 계책을 제어하여 거짓된 모의를 공파한다면 지성에는 감동되는 것이어서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사신과의 연회 석상에서의 한마디 말은 기관(機關)이 매우 중대하므로 옛 사람으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자는 발을 밟고 귓전에 대고 묘계(妙計)를 진달541)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이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선처할 대책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았을 적에 불러서 독대(獨對)할 때에는 옆에서 보는 자가 그를 꺼리어 공모하여 공박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충성과 공로가 갖춰 드러났으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그르친 것으로 지목하여 충신(忠藎)한 무리까지 아울러 쫓아냈습니다. 그리하여 몇 해가 지나도록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는데 대한 계책은 진달하지 않고 한갓 나라의 녹만 축낼 줄 알 뿐입니다. 신의를 잃은 자가 뻔뻔스레 정승의 자리에 있고 간인과 붕당을 지어 나라를 저버린 자가 권요(權要)의 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에게는 욕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인륜의 실추를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벽에 붙은 마른 달팽이가 타액이 다 메말랐으나 물러갈 줄을 모르고, 지키고 있는 구옥(龜玉)이 궤가 이미 깨졌는데도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탐욕하고 간사하여 기탄없는 것이 김안로(金安老)·윤원형(尹元衡)과 같고 당여를 널리 부식시키는 것은 이량(李樑)·김개(金鎧)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책(言責)과 논사(論思)의 인망은 책임이 있는자는 모두 시론에 부회하고 권문을 가까이하는 자들이니 백성의 고통과 나라의 적을 어떻게 위에 고할 수 있겠습니까.
동월(董越)이 성종조의 신하에게 ‘그대 나라에는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 하였는데, 지금의 시장 마을이나 외진 여염의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모두 당대의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국의 첩자가 이 말을 들으면 해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런데 이산해(李山海)가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면 이는 귀와 눈이 없는 것이고, 알고서 고치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군부(君父)를 저버린 것입니다. 귀와 눈이 없는 죄는 가볍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크니, 신이 이색(李穡)의 후손542)에 대해 탄식하고 통한하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박순(朴淳)이 정승이 되어 한가지 일도 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조정에서 안색을 바로 하고 엄정한 자세를 지니어 사람들이 대부분 두려워하고 삼갔고, 향읍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남방(南方)의 침구(侵寇)와 북변(北邊)의 경보를 모두 방도가 있게 구처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정승이 되어서는 오직 재화와 여색을 구하는 것만으로 백관에게 본을 보여 백성은 시름하고 군사는 원망하며 기근이 거듭 이르렀습니다. 신의 한 아우가 기황(飢荒)으로 먼저 죽은 것에 이르러서는 강을(江乙) 어미의 말로 논하면 삼공(三公)이 신의 아우를 죽였다해도 옳을 것입니다.
송(宋)나라에 납구(臘寇)가 바야흐로 즐림(櫛林)을 향할 적에 어느 소관(小官)이 ‘지금 다른 대책은 없고 다만 유원성(劉元城)543) ·진요옹(陳了翁)544) 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으면 도적은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평정될 것이다.’ 하였는데, 송제(宋帝)가 듣지않고 오직 장돈(章惇)·채경(蔡京)의 무리만을 존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납구가 크게 성해지고 금로(金虜)가 곧바로 침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큰 도적이 경외(京外)를 횡행하면서 군포(軍鋪)의 경졸(警卒)을 죽이고 사인(士人)의 처녀를 도적질하기에 이르렀으니, 갈영(葛榮)·방납(方臘) 같은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북의 흔단이 장차 문정(文庭)의 도적이 될 근심이 송(宋)의 금로(金虜)보다 더 큰데도 묘당(廟堂)의 원대한 계책에는 진요옹·유원성같은 술책이 하나도 없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말을 신은 명주(明主)의 앞에서 한번 외기를 원합니다.
아우의 상을 치르려고 달려오던 날 도문(都門)을 바라보고 차마 그대로 지나갈 수 없었고 또 도로가 막혀 신도 굶어죽게 되면 장래에 충심을 바칠 날이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간혈(肝血)을 다 기울여 소소(小䟽)의 끝에 붙이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곧바로 올리는 바입니다.
야인의 부락을 분탕(焚蕩)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신은 속히 포마(鋪馬)를 내어 중지시키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하면 계원(繼援)하는 장수를 신각(申恪)·이종인(李宗仁) 등으로 차견(差遣)하여 돌아가는 길의 요로에 나누어 매복시켜 만분의 일이라도 살리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왜인을 제어하는 계책은 속히 남금(南金)을 왜관(倭館)에 뿌리고 한편으로는 홍성민(洪聖民)·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이증(李增)·이산보(李山甫)·이해수(李海壽) 등 유아(儒雅)에 종사하는 자를 불러서 장신(將臣)의 계책에 의하여 토론하고 윤색해서 조유(調柔)의 술책을 잘 할 것이며, 일면으로는 중사(中使)를 속히 보내어 박순(朴淳)·정철(鄭澈)·민순(閔純)·성혼(成渾) 등을 불러 오늘날 진요옹·유원성의 아류(亞流)인 자를 조속히 큰 임무에 진용(進用)시켜 백관의 모범이 되게 하고 근본과 줄기를 강하고 튼튼하게 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오랑캐들의 침릉(侵凌)과 도적의 종횡(縱橫)을 그치게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위란(危亂)에서 부지할 수 있는 모의가 있게 되어 오늘날의 답답한 상황과는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註525]서백(西伯)이 여(黎)나라를 토벌하여 이기자 조이(祖伊)가 두려워하여 상왕(商王)에게 뛰어가 고하였고: 서백은 제후로 있을 때의 주문왕(周文王). 여(黎)가 부도(不道)하므로 서백이 천자의 명을 받아 거병(擧兵)하여 쳐서 승리하자, 조이(祖伊)가 주(周)나라의 덕이 날로 성대하여 이미 여(黎)를 쳤는데도 은(殷)의 주왕(紂王)은 악을 고치지 않고 있으니 형세상 은(殷)에게 정벌이 미칠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여 주왕(紂王)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서경(書經)》상서(商書)서백감여(西伯勘黎).註526]고창(高昌): 옛 나라의 이름. 한(漢)나라 군사전왕(軍師前王)의 고지(故地)로 수(隋)나라 때에 중국에 입공(入貢)하였는데, 뒤에 당(唐)나라 이정(李靖)에 의해 멸망되었다.註527]은감(殷鑑)을 소홀히 하면 군대가 숲처럼 많을지라도 창날을 돌려대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맹문(孟門)과 태행(太行)을 홀연히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은감은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은나라의 자손은 하의 복망(覆亡)을 경계로 삼아야 함을 말한다. 즉 선례를 경계로 삼는 것의 비유. 주무왕(周武王)이 천명(天命)을 받아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러가자, 주왕은 숲처럼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목야(牧野)에 모였다. 그러나 은(殷)의 군사는 주(周)나라 군사를 대적하지 못하고 전도(前徒)가 창머리를 거꾸로 돌리자 뒤에 있는 은의 군사가 달아났다. 그래서 은나라는 맹문(孟門)과 태행(太行)같은 천연 요새를 두고도 지키지 못하고 망하였다. 《서경(書經)》주서(周書)무성(武成).註528]중종(中宗)이 중간에 끊었다가 마침내 관부(款附)하게 한 것: 우리나라에서 삼포(三浦)를 개항한 이래 일본인의 무역과 거류가 허가되고 또 왜관을 두어 그들의 교역·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당초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2천 명으로 늘어났으며 차츰 소요가 있게 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중종 5년(1510)에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일본 선박의 감시를 엄중히 하였다. 이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정시킨 뒤 중종 7년(1512)에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고 제포(薺浦) 1항(港)만을 개항하게 하였다.註529]동남동녀(童男童女)의 종족: 진시황(秦始皇)이 동해(東海)를 유력(遊歷)할 때 방사(方士) 서불(徐市) 등의 청에 의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해중(海中)에 들여보내어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 여기서는 일본 사람을 동남동녀의 자손으로 여긴 것이다.註530]성조(聖祖): 이성계(李成桂).註 531]경오년: 1510 중종 5년 註532]초국(楚國)의 보배는 오직 어진이를 보배로 삼는 것뿐이고: 《초서(楚書)》에 “초나라는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한 사람만을 보배로 삼는다”하였다.《대학(大學)》전(傳)10장.註 533]반자(盼子)·검부(黔夫)같은 사람이 동남지방을 나누어 지켜: 반자와 검부는 전국시대 제위왕(齊威王)의 명신. 반자가 고당(高唐)을 수비하면 조(趙)나라 사람이 감히 동쪽으로 황하(黃河)에 와서 고기를 잡지 못하였고, 검부가 서주(徐州)를 수비하면 북쪽의 연(燕)나라 사람이 북문(北門)에서 제사지내고 서쪽의 조(趙)나라 사람이 서문에서 제사지내며 복을 빌었다한다.註 534]서온(徐溫): 오대(五代) 오(吳)나라 해주(海州) 사람. 양행밀(楊行密)이 오나라를 건립하자 우위지휘사(右衛指揮使)가 되었다. 뒤에 왕위에 오른 양악(楊渥)을 시해하고 양융연(楊隆演)을 세워 전정(專政)하였다.註535]남월(南越)의 황옥(黃屋): 일본이 참람하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함을 비유한 말. 황옥은 천자가 사용하는 수레의 덮개로 천자를 상징함.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가 자립하여 참람하게 남월무왕(南越戊王)이 되었으나 한고조(漢高祖)는 천하를 평정한 뒤에도 중국의 노고를 걱정하여 주벌하지 않았다. 《한서(漢書)》권93 즉 일본이 남쪽에 떨어진 남월처럼 참람되게 황제 행세를 한 것에 비유한 말.註536]천정(天正): 정친정(正親町)의 연호로 1573∼1575년, 즉 우리 선조 6∼8년 사이의 연호이다.註537]을묘년: 1555 명종 10년.註 538]구경(九經):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상도(常道). 자기의 행실을 닦는 것[修身],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尊賢], 어버이를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를 몸처럼 보살피는 것[體群臣], 서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庶民], 온갖 기술자를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나라 사람을 부드럽게 대접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감싸주는 것[懷諸侯].《중용(中庸)》제20장.註539]구주(九疇)·팔조(八條)의 가르침: 홍범구주(洪範九疇)와 기자팔교(箕子八敎). 구주는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이 우에게 준 대법(大法) 아홉 가지, 즉 1. 오행(五行), 2. 오사(五事), 3. 팔정(八政), 4. 오기(五紀), 5. 황극(皇極), 6. 삼덕(三德), 7. 계의(稽疑), 8. 서징(庶徵), 9. 오복(五福)·육극(六極)임. 이를 홍범구주라고도 하는데, 기자(箕子)가 연역(演繹)하여 주무왕(周武王)에 전수하였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 팔조는 범금 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는데, 그 중 3개 조만이 전하고 나머지는 전하지 않는다.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2.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보상하고 3.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면 그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 원칙이나 속죄(贖罪)하고자 하면 50만전을 내놓아야 한다. 기자가 조선에 피봉(被封)되었을 때에 제정한 법령으로 전한다.註540]자성(粢盛): 제사에 쓰는 피와 기장.註541]발을 밟고 귓전에 대고 묘계(妙計)를 진달: 한(楚漢) 때 한신(韓信)이 제(齊)를 정략(定略)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한왕(漢王)에게 가왕(假王)이 되기를 청하자, 한왕이 크게 노하였다. 이때 장량(張良)·진평(陳平)이 한왕의 발을 밟아 깨우치고 이어서 귀에 대고 “한(漢)나라가 바야흐로 이롭지 못하니 어찌 한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왕으로 세워 스스로 지키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이 생깁니다”하니, 한왕도 깨닫고 한신을 제왕으로 봉하였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註542]이색(李穡)의 후손: 이산해(李山海)를 가리킴.註 543]유원성(劉元城): 원성(元城)은 유안세(劉安世)의 호.註544]진요옹(陳了翁 ): 요옹은 진관(陳瓘)의 호.
○前敎授趙憲上疏, 請勿通使倭國, 竝進前疏, 不報。 憲旣歸鄕里, 傳聞日本使來責通聘, 遂草疏, 極言其失策, 呈監司。 監司以爲: “秀吉簒弑事未詳。” 而疏中又論時宰爲觸忌, 却不受。 憲乃徒步入京, 竝前言時事五疏上之, 留內不下。 政院以疏久留內, 請下史官。 上始下敎曰: “今見趙憲之疏, 乃人妖也。 天之譴告至深, 不勝兢惕。 豈非寡昧於賢相、名卿, 平日不能待以至誠, 委任不專, 有以致此耶? 尤不勝慙恧。 此疏不可不下, 而予不忍下。 一下則所損甚多, 予寧受過, 已焚之矣。 願史官大書予過, 以戒後世足矣。”【凡臣民章疏之上, 不出三日, 必下政院。 若無批辭, 而只踏啓字而下, 則承旨觀疏所言, 或下該司, 使之覆議, 或允其請, 則奉聖旨, 乃例也。 若不踏啓而下, 則政院藏之院閣, 史官取而採錄于《日記》, 無可錄則置之。 謂之留中不報者, 此也。 疏久不下, 則政院以《日記》纂入啓請, 亦例也。 憲疏雖焚, 自上猶批示其由則猶未廢, 例也。 自廢朝至今, 疏入不下, 政院不敢請, 便爲宮人所屑用, 非古所謂留中者也。】其論倭事疏曰:
臣竊樸變, 無力詣闕, 裁疏駿奔, 追及于監司所去處, 謹以前月二十五日, 望闕拜疏于淸州客舍, 監司謂: “未聞易君之詳, 而陳疏未安。 且有論及數三大臣處, 藩臣之體, 未可輕進。” 臣無可奈何。 退而思之, 西伯戡黎, 祖伊奔告于商王; 高昌滅國, 魏徵陳戒于唐宗。 夫惟明智者, 能覩方萠之惡, 而豫圖所以消之。 故以天子而戒於夷狄, 猶致其邦之興。 反是而忽於殷鑑, 則如林之衆, 倒戈而稽首, 孟門、太行, 忽焉失守。 嗚呼! 聖如西伯而戡黎, 不利於商王; 高昌無道而戒隣, 反益於唐家, 矧玆日本, 素稱反覆而無信義之國也。 皇朝之初絶, 最爲上策; 中廟之中絶, 而終致款附, 乃是中策也; 高麗之不務自强, 而累通信使, 或致拘沒要盟, 最是下策也。 蓋此童男女之種, 肇占遐島中高原、曠野, 以爲資生之計, 其避中國之難, 亦云幸矣。 故自宋以上, 不聞有爲中國邊患者。 胡元黷武, 妄擬普天之下無思不服, 不惟勞斃中國之民, 而幷驅東韓之士, 投之山濤鯨海之間, 以致骨不可拾, 而魂無所歸。 憬彼之徒, 始有輕中國之心, 侵自我國南疆, 冞入于畿、海之間, 乃至登比兒, 以窺江都, 高麗之民, 幾盡爲魚肉矣。 然而中得姜邯賛, 則狼烟爲之永息; 終得我聖祖, 則列鎭爲之森羅。 我能自守, 則彼不敢犯而越海, 以窺靑、楊, 非其得計也。 皇朝則方以鎭服西北戎狄, 勞弊中土。 若又交此狡虜, 則垂橐稛載之費, 反爲中國生靈之害, 故逆拒其使, 竝絶獻琛。 是乃麗祖絶交契丹, 而竝致橐駝之死者也。 雖間有竊發之患, 而不敢爲深入之計。 不貴遠物之效, 於玆可見, 而因致邇民之安, 是其上策也。 彼之所以稱兵累窺者, 蓋以麗季之得志, 萬一僥倖。 而及其不勝然後, 潛形巢窟, 諱其所由來之島, 乃反貢琛, 還襲我衣冠, 佯款于釜山, 以及朝貢之期。 祖宗之朝, 不絶而受之者, 蓋爲邊民庶不被鋒鏑之患也。 故捐一道田稅之半, 歲許船輸。 彼中桀黠者必謂: “和親則利歸於島主, 作賊則幸得之利, 分於群下, 而島主無所與。” 雖緣乍怒, 而有所窺覘, 或因善禦, 而捉納罪魁。 庚午三浦之變, 蓋亦酷矣, 而弸中之所以來致賊魁, 必求款納者, 非其誠失所利, 能如是乎? 中廟之所因照姦狀, 坐鎭南訛者, 是其中策也。 交隣有道, 則大國役小國; 自治無術, 小役大、弱役强而已。 彼之於我, 累肆侵凌, 而我之於彼, 通三韓未嘗有一大擧。 如知楚國之寶, 惟善而已, 而視金珠如糞土, 則彼之要我者, 無所售其奸, 而我之制彼者, 自有盼子、黔夫分守東南, 不敢使片帆胥。 幸有竊發者, 則嚴兵不動, 先問其所自來, 謂我之兵, 未嘗一南, 而爾肆覬覦, 不勝其衆。 若將貽書國王, 聽彼自誅, 則師直爲壯, 彼自奪氣。 然後, 乘其懈、奮我挺, 扼其亢, 而撻其背, 則雖强如晋、楚, 無若我何。 而況烟蒸風作, 不一其候, 潮進汐退, 難保俟便, 糧不繼, 而兵無援, 彼賊之憂, 必有深於我國者乎! 前朝强臣, 執國之命, 干城腹心, 一付私人, 務富其家, 而饑其師。 捍禦之策, 一無可觀, 而惟寶金玉, 貪彼之餌。 遠遣使臣, 仰彼鼻息, 使郭預客死, 鄭夢周轍環, 而一不止三道之憑陵, 是其下策之甚者也。 嗚呼! 今往何監? 非古人之得策者乎? 廊廟之議, 疎遠難聞。 自常情言之, 其必云: “接待羈縻不絶。” 而自其正名之義言之, 其必云: “拒而勿接矣。” 今其館待極厚, 請宴之日, 又問固要通价而後, 乃始赴闕。 不惟不能責其無禮, 而方將爲彼所制, 臣竊愧大臣之無人也。 李德裕之請納悉怛謀, 乃是忠唐之計, 而牛僧裕私有所惡於德裕, 則引義縛送, 而先儒是譏。 今求待彼之要, 須擇善處之術, 不可印西異議, 而有所逕廷矣。 當於辭朝之日, 引諭來使曰: “請价修睦, 爲邦之一大務也。 契丹好戰, 而高麗絶交; 徐溫逐君, 而《綱目》誅之。 新君之績, 雖曰懋著, 而前王之廢, 未知何故。 若爲新交之甘, 遽忘舊好之定, 而十島之中, 或有一夫非寡人之心, 則寡人實無顔面, 可立於天地之裔, 玉帛璧之惠, 終歸虛地。 玆用返璧, 爾須領去。 使价之不可易通者, 又有三事。 天無二日, 民無二王。 大明天子, 一統天下, 我先祖之所敬事也, 東西南北, 無不賓服。 而爾島之中, 久假南越黃屋, 書契之間, 或稱天定幾年。 雖吾祖宗道大德宏, 不加苛責于絶域。 而今焉改紀之初, 旣號爲禮義是尙, 則先去此號, 改正國書然後, 乃通信使, 則寡人之事大交隣, 始無所憾於屋漏, 而竊懼汝國之不從, 一事也。 蕞爾三韓之地, 兵則不强, 食則不敷, 將則不良, 城則不固, 非敢謂能守能禦也。 粤自祖宗, 以及乎眇躬, 世守保邦之規者, 惟不欲侮奪于隣邦。 故未嘗一番興師駕海以南。 惟使李汝一, 討對馬叛賊, 是乃爾國耆舊之所共知也。 而爾國賊船, 無歲不窺, 虜我漁採之人, 不可勝數。 甚有炰人祭天, 刳剔嬰孩者, 所未聞於天下諸國也。 以至乙卯作賊, 明有擧國來寇之迹, 故問之諸道之使, 每道別有一種賊倭。 而頃有一使, 來納元績旗纛, 是不可以拾於道路者, 則其詐立現。 而爲寡人不曾經事, 久乃覺之。 今春又有劇賊來泊興陽諸島, 乘我不備, 而殺虜甚衆, 寡孤之怨, 格于窮蒼。 幸因歸正人, 訊其嚮導, 則我國逋亡者, 沙火同也。 而沙火同至於襲爾國冠帶, 富有榮寵云則非止爲一島之賊也明矣。 自我祖宗, 爲吾赤子軀命之重, 歲捐一道糧物, 以修隣好, 而旋被所欺, 略無所益。 寧以其糧物, 分恤我戰士之飢寒者, 則雖其瘖聾跛躄者, 爲寡人城守, 必盡其力矣。 自古無名之師, 上帝不佑, 而鬼亦陰誅。 爾雖有舟師百萬, 宜不可以必其得志也。 閉關絶之, 無損於我。 而和親則利歸於君上; 用兵則利歸於群下, 而上無所與者, 亦皆爾國君上之所共灼知也。 舊君之政, 自不能禁其國賊, 則宜其失位矣。 新君之政, 若反前規, 則如沙火同之反噬主足者、爾國人之炰人祭天、刳剔嬰孩者, 實是君民者所同惡也。 若能捉送春賊之魁與嚮導者, 明示邦刑, 以洗我將士之恥, 切禁一國大小島, 更不敢窺覦, 則弊邦之人, 俱各安枕矣。 兩君之好, 宜各永遠, 而竊懼汝國之不從, 又一事也。 厚往薄來, 雖是九經之道, 而濫觴于末流, 以至民困, 而國僨。 是乃有國之所同憂也。 當初爾國之通好於弊邦者, 非謂小邦之力, 可以威脅隣邦也。 必以九疇、八條之敎, 由箕子先明, 而周、孔、程、朱之學, 粗行於世, 得聞其說者, 小可以保族宜家; 大可以尊主庇民故也。 乃若先朝通好之使, 則聘問之外, 或耽經籍, 物薄而情厚; 事簡而弊絶, 其往興來, 不勞酬酢。 而厥後使臣漸尙興販, 少不稱意, 怒形於色, 以至殺我市人; 激我邊患, 以虧廉讓之風; 以傷兩國之和者, 亦爾國有識人之所歎也。 古語云: “從善如登, 從惡如崩。” 若我不腆之臣, 習見東使所爲, 不欲輕裝而返國, 則區區禮義之貽羞者無窮, 而抑恐爾邦之用是勞弊。 兼此數年之間, 饑饉癘疫, 邦民少安, 宗社粢盛, 抑懼殄享。 賓客羔豚, 將不掩豆, 道路供億, 屢聞州縣之竭。 罍爵不豐, 恐貽行旅之傷, 況若差發臣隣, 遠于將之? 葛裘之辦, 費我經營; 朝夕之資, 輸將水陸, 則小邦之力, 又懼疲頓, 而不能專力於皇朝。 《禮》不云乎? “不盡人之懽; 不竭人之忠, 以全交也。” 若遵《大易》《隨》時損益之義, 歲幣物數, 只用祖宗朝舊規, 俾爲可繼之道, 吾之所仰于彼者, 亦止療病藥材、宗器之飾而已則歲一報聘, 亦可以達吾誠意。 而篤周、孔《詩書》之敎, 分大明禮樂之化, 于以壽國養老, 不亦樂乎? 而竊懼汝國諸島, 懷利相交之徒, 厭而不從, 亦一事也。 歸告爾主: “若能遵守侯度, 先正名義, 前王子孫, 皆待以不死, 賊船橫行者, 一切禁斷, 還我叛俘, 更勿事屠戮, 重義輕利, 廉讓成俗, 則一變至道, 吾猶有望, 向風慕義之使, 不得不一遣矣。” 先爲制彼之策, 以攻其諼詐之謀, 則至誠所感, 未有不動之理矣。 嗚呼! 樽俎一話, 機關甚大, 故古人之愛君者, 至於躡足附耳, 而陳其妙計。 李珥若在, 則其必進善處之策, 而其生之日, 召與獨對, 則旁觀忌之, 共謀駁之; 其死之後, 忠勞備著, 而餘人指以誤國, 幷逐忠藎之徒。 越歲踰年, 自不陳經國之猷, 而徒知蠧國之粟。 喪信虧義者, 靦居相位; 朋奸負國者, 冒居權要。 故主憂臣辱, 不知爲何事, 彝倫攸斁, 不以經意。 粘壁枯蝸, 涎已竭而不知退; 典守龜玉, 櫝已毁而不知過。 貪邪無忌, 一如安老、元衡樹黨之廣, 浮於李樑、金鎧。 而今之言責、論思之望, 悉是附會時論, 昵迹權門者則民咨國賊, 孰從而告上哉? 董越謂成廟朝臣曰: “爾國有君而無臣。” 今之市里窮閻, 白叟黃童, 皆謂當代之有君無臣。 若使敵國觀兵者聞之, 其害豈淺淺哉? 而山海一不聞之, 則是無耳目者也, 知而不改, 則是負君父者也。 無耳目之罪輕; 負君父之罪大, 臣所以嘆息痛恨於李穡之後者也。 人謂: “朴淳爲相, 一無所事”, 而正色朝端, 人多畏愼; 鄕邑之中, 未聞有餒死者; 南塵北警, 皆欲區處有方。 而他人爲相, 惟以殉貨色, 訓于百僚, 民愁兵怨, 饑饉荐臻。 至于臣之一弟, 首死於饑荒, 若以江乙母言論之, 則雖謂, 三公殺臣之弟可也。 宋有臘寇, 方向櫛林時, 有小官言: “今無策, 只有起劉元城、陳了翁作相, 則寇不戰而自平。” 宋帝不聞, 而惟崇章、蔡之徒。 故臘寇大熾, 金虜旋至。 今之大盜, 橫行京外, 至於殺軍鋪之警卒, 而盜士人之處子, 葛榮、方臘, 不可謂不作也。 而南北之釁, 又將爲門庭之寇, 虞有大於金虜者, 而廟謨遠算, 一無陳、劉之術, 古人所謂 “國亂思良相” 之言, 臣願一誦於明主前。 來奔弟喪之日, 瞻望都門, 不忍虛過, 又懼道路之 梗, 而臣亦餒死, 則將來貢忠, 更無其日。 故更瀝肝血, 貼于小疏之末, 大其聲而直上之。 焚蕩之計, 則臣願亟發鋪馬而止之。 如其不可, 則繼援之將, 就差申恪、李宗仁等, 分伏于歸路要害處, 以爲萬一延活之計。 制倭之策, 則亟擲南金於倭館, 而旁名洪聖民、李俊民、安自裕、李增、李山甫、李海壽之從事儒雅者, 就將臣策, 討論修潤, 而善爲調柔之術, 一面亟發中使, 以召淳、澈、純、渾等, 今日陳、劉之亞者, 使其亟進大務, 表正百寮, 强幹固本則虜之憑陵、盜之縱橫, 雖不可及止, 而猶有扶持於危亂之謀, 不比今日之泄泄沓沓矣。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명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상이《주역》복괘를 강하고, 오억령·황신·이진빈·김명원 등과 시국을 논하다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참찬관 오억령(吳億齡)이 복괘 육사효(六四爻)의 ‘중행(中行)’에서 시작하여 상육효(上六爻)의 ‘개반도이흉야(皆反道而凶也)’까지 진강하였다. 상이 오억령이 진강한 대목을 다 읽고나자, 오억령이 아뢰기를,
“복괘의 뜻을 동정(動靜)으로 말하기도 하고 혹은 선악으로 말하기도 하였는데, 동정은 천도(天道)를 말한 것이고, 선악은 인도(人道)를 말한 것입니다. 천도는 1음1양이 서로 승강하며 순환 왕래하는 것이지만 인사(人事)는 선(善)에 독실히 하여 간단(間斷)이 없으면 음양이 왕래하는 것과 달라서 마침내는 반드시 순수하게 선하여 악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인사의 공부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소장(消長) 빈주(賓主)의 형세가 있습니다. 구괘(姤卦)는 1음이 아래에 있고, 5양이 위에 있어 그 형세가 1음이 성하게 될 것이므로 막을 수가 없지만, 복괘는 5음이 위에 있고 1양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역시 양도가 점점 성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이를 살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이제 나랏일로 말하면 위망(危亡)의 낭떠러지에 있다가 중흥(中興)하는 것이 마치 1양이 처음 회복하는 것과 같고, 조정으로 말하면 분분하게 서로 공격하던 끝에 근래에 조금 안정된 것이 마치 1양이 처음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음양이 소장하고, 현사(賢邪)가 진퇴하는 기미를 알아서 붕당을 없애고 선인을 등용하여, 양을 부지하고 음을 억제해서 선한 무리들이 가득차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
강을 마치자 대사간 황신(黃愼)이 나와 아뢰기를,
“관왕묘를 조성한 관원은 비단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탕갈한 때를 당하여 재력을 아끼지 않고 3년 동안 역사를 일으켜 세월만 끌었으며, 심한 자는 군인을 조발하고 재료(財料)를 처리하는 즈음에 잘못함이 많아 밖의 의논이 많습니다. 전번에 연한(年限)을 정해 벌을 준 것을 지금까지도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제 다시 상을 주니 여론이 모두 울분해 하고 있습니다.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하고,
장령 이진빈(李軫賓)은 아뢰기를,
“관왕묘 조성 관원들은 범람한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논계할 때에, 신축년 이후에는 경자년 이전과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지 않은 것이지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벌은 가하지 않고 도리어 상을 주니. 성명을 환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통쾌하게 따르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상하는 것은 안될 것이 없으니, 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하였다.
황신이 아뢰기를,
“난리 후에 학교의 정사를 닦지 않아 가르치는 방도가 밝지 못합니다. 이는 서책이 모두 없어지고 사표(師表)될 사람이 없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고, 또 나라에 일이 많아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안정되었는데 이처럼 버려두고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반드시 사유(師儒)를 가려서 그로 하여금 권과(勸課)하게 하여야 합니다. 《소학》 등의 책은 몽사(蒙士)들이 알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옛사람은 쇄소응대(灑掃應對)를 첫째 과정(科程)으로 삼았는 바, 나가서는 공경(公卿)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책은 권수가 많지않으니 경중에서 간행하거나 혹 외방에서 간행하여 넉넉하게 인출해 중외에 널리 배포하게 하고 관학(館學)같은 곳에서는 반드시 이 책 이상을 능통한 자에게만 시험에 응시하도록 허락하게 하되, 각별히 신명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고,
영사 김명원(金命元)은 아뢰기를,
“이는 가장 급한 일로 밖의 의논 역시 이 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외방에 간행한 곳이 있다고 하기에 많은 숫자를 인출하도록 명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내관이 영남에서 시재(試才)하고 왔는데, 그곳의 사정을 듣건대, 서책이 전혀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선비들이 서로 전송(傳誦)하면서 읽거나 혹 책을 베껴서 읽는다고 하니, 매우 염려된다. 책이 있은 다음에야 부지런히 읽을 수 있지 책이 없고서야 어떻게 하겠는가.”하였다.
이진빈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수령에서 체면되어 향촌에 있을 적에 감사가 하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수령의 현부를 감사가 모두 알면서도 수령이 부형의 세력을 끼고 있거나 혹 감사와 전부터 아는 사이면 몹시 잘못 다스리는 자가 있어도 전최(殿最)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별도로 암행어사를 보내 적발해 중하게 다스리되, 감사가 계문하지 않았다가 어사에게 적발된 경우 그 도의 감사를 먼저 파직해야 이런 폐단을 혁파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근래에는 어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여 비록 암행이라고 칭하면서도 관가에 출입하여 술과 고기를 대접받고, 하인들을 풀어 마구 뇌물을 받으니 이렇게 되면 보내더라도 아무 도움이 없습니다.”하고,
오억령은 아뢰기를,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있고, 수령의 현명 여부는 반드시 명실(名實)을 따져본 다음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근래 수령으로 잘 다스린다는 이름이 있는 자도 관가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않아 상사(上司)의 차역(差役)은 반드시 모면하려고 하고, 백성의 있고 없는 것, 창고의 허실, 군기(軍器)의 조치 등은 하나같이 급한 일인데도 버려두고 돌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헛된 명예를 얻기에 힘쓸 뿐입니다. 어사나 감사도 민간에 떠도는 말을 견문한 것으로 장계하는데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허위의 일이 더욱 많습니다. 지금 만약 어사를 보낸다면 반드시 먼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듣고 그 다음 공론을 들으며, 반드시 관가에서 할 일을 모두 수치(修治)하였는지를 조사한 연후에 장계하도록 하면 이런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하고,
황신은 아뢰기를,
“근일 수령의 제배(除拜)에 있어서 천거한 자의 성명을 현록(懸錄)하도록 상께서 특명하신 것은 대개 신중히 가리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전조(銓曹)의 수령천(守令薦)은 단지 경자년과 신축년 두 해의 치부(置簿)만 있고 기해년 이전은 보존된 것이 없어서 근일에는 수령에 궐원이 있을 경우 으레 이 두 해의 피천자(被薦者) 가운데서 의망하고, 그 외에는 일찍이 수령을 지내 명성과 공적이 있는자라도 의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망할 자가 적다고 합니다. 당초 신중하게 가리는 뜻이 도리어 구차하게 충당하는 폐단이 되었으니, 속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전일 수령의 천망(薦望)은 모두 예에 따라 범연하게 천거하였는데, 이제 모름지기 천거의 법을 신명하여 거주(擧主)도 함께 죄주는 뜻을 알게 하고, 다시 각자 알고 있는 자를 천거하되 착실히 거행하게 하면 반드시 마음을 써서 천거하고 감히 망령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그 말이 매우 옳습니다. 이른바 수령으로 천거된 자는 으레 신출자(新出者)입니다. 일찍이 수령을 지내어 치적이 있는 자를 전에는 천거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서 도리어 참여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매우 염려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시에는 금군(禁軍)의 내삼청(內三廳)이 있었는데, 병조에서는 왜 평시처럼 다시 설치하여 정제(整齊)하지 않는가, 취재(取才)하는 데는 각기 규식이 있으니, 이 법을 다시 밝혀야 한다.”하니,
지사 한응인(韓應寅)이 아뢰기를,
“평시에 내삼청은 모두 취재가 있어, 14시(矢)를 맞추어 합격된 자는 즉시 구전(口傳)하였고, 12시면 제주에 입방(入防)시킨 연후에 하였습니다. 난이 일어난 후에 다시 내금위(內禁衛)를 설치하였는데, 출신(出身)이 실로 많아서 실차(實差)·예차(預差)를 모두 출신으로 채웠습니다. 우림위(羽林衛)는 아직까지 취재에 자원하는 자가 없습니다.”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우림위는 서얼(庶孽)로 하는데, 난리 후에는 모두 허통(許通)하였기 때문에 취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한응인은 아뢰기를,
“허욱(許頊)이 지난번 경연에서 강변(江邊) 출신들의 괴로움을 말했는데, 정원에서 이미 취품하여 요역을 양감(量減)하는 일을 해조에 말하였으므로 이미 본도에 이문하였을 것입니다. 난리 후에 출신자들이 군사(軍士) 중에서 많이 나와 활을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자는 모두 출신이 되었는데 그들의 집이 어찌 부유하겠습니까. 양남 지방은 본처(本處)에서 입방(入防)하고 충청도와 강원도는 주사(舟師)로 부방하고, 경기와 황해도는 멀리 북도로 가 종군하면서 수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본 고을에서는 침학이 여전하여, 수자리하는 것을 파하고 돌아가면 처자는 굶주리고 있고 마을은 황폐화되어 목을 매어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 관아의 문에다 홍패(紅牌)를 걸어두고 도망가는 자도 있다하니, 그 원통하고 괴로운 정상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지금부터는 각도에 하유하여 호내(戶內)의 잡역을 헤아려 견감하여 우휼(優恤)해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김명원에게 이르기를,
“어제 비변사의 계사를 보니, 경기병사(京畿兵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은 반드시 나중을 생각해야 하니, 혹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후에 반드시 난처하게 될 것이다. 우선 방어사로 수원 부사를 겸하게 하여 병사의 모양으로 시험해 본 다음 이를 보아 병사를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어제 신 역시 그 의논에 참여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병사를 차출하더라도 줄 군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시방편적인 방법으로 말하면 상교가 윤당하십니다.”하고,
한응인은 아뢰기를,
“비변사에서 경기병사를 차출하여 소속 군사를 처리하고자 하는 일을 의논하려고 신에게 회의하자고 하였는데, 신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모든 일은 처음에 잘 처리한 다음에야 오래도록 폐단이 없게 된다. 이제 한 사람이 말하였다고 해서 어찌 갑자기 설립할 수 있겠는가. 연혁(沿革)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화량(花梁)·월곶(月串)의 수군(水軍) 중 육지에 있는 자와 본부의 상번 군사를 전적으로 병사에게 소속시키고자 하는데, 이는 매우 난처한 일이다. 각도의 상번 군사는 많이 이르는 달에도 겨우 9백여명인데, 서울에 군사 쓸 곳이 많아서 궐내 및 좌우의 복병(伏兵)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는 즈음에 매양 부족한 것이 걱정이다. 수원의 정군을 모조리 병사에게 소속시킬 경우에는 상번 군사를 별도로 조처한 다음에야 서로 구애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난리가 일어난 후에 새로 양인(良人)이 된 사람이 아주 많은데, 병조에서는 왜 처리하지 않는가,”하니,
한응인이 아뢰기를,
“그들은 이미 처치하여 정군 가운데 궐원이 있는 곳에 충당하거나 혹은 선상(選上)을 삼아 가포(價布)를 징납(徵納)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이덕형의 장계를 보니, 역시 ‘포수(砲手)·살수(殺手)·솔정(率丁)을 이 사람들로 충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조종조 때 김종직(金宗直)이 생원으로서 군보(軍保)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모면하려고 하니, 이런 폐단은 막지 않을 수 없다. 전조(前朝)에 정세운(鄭世雲)이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할 때 20만 군을 거느렸었다. 우리나라는 평시라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많은 숫자를 판출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인구가 전조보다 줄어든 것이 아니니, 생각건대 군보에 편입시키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또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집한 지 10년이나 지나서 늙은 자는 이미 죽고 장정은 이미 늙었으니, 지금 만약 보충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군사들이 다 없어질 것이다. 모름지기 다시 사열하여 늙고 잔약한 자를 도태해 버리고 장정을 뽑아 넣어야 한다. 사람들 모두가 기피해서 반드시 응모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사람들의 말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꺼린다고 해서 뽑아넣지 않으면 끝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꺼리어 피하는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기꺼이 따르도록 해서 흥기하는 마음이 있게 해야 한다.”하니,
응인이 아뢰기를,
“이 군사를 설치한 것이 갑오년이었습니다. 그때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었는데, 이 군사들에게는 급료(給料)를 후히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는 별로 후하게 한 일도 없었고, 남북(南北)의 방수에 이들을 우선적으로 조달해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처자를 돌볼 겨를이 없게 하였으니, 어찌 기꺼이 들어오려 하겠습니까. 급보(給保)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들로 하여금 한정(閑丁)을 자망(自望)하게 한다면 소요스러워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날 정사호(鄭賜湖)가 입시하였을 때 말하기를 ‘전결(田結)로써 면포(綿布)를 내게 하여주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어제 호조판서가 친히 비변사에 와서 계산해 보니, 30결에서 1필을 내게 하면 넉넉하게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일에 없던 역(役)을 지금 새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기꺼워하겠습니까. 그때 자리에 있던 여러 신하들은 ‘이런 때를 당하여 어찌 부(賦)를 더하겠는가.’라고 의심했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훈련도감의 급보(給保) 역시 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백만명이나 되는 왜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전결로써 포를 거두는 것은 옛날에도 그런 규정이 없었으니 옳은지 모르겠다. 군사들에게 급보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지만 이 1천여 군사에게 줄 수는 없다. 이 일을 거행하였을 경우 사관(史官)이 책에다 쓴다면 후세에서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사체가 매우 온편치 못하다.”하였다.
오억령이 아뢰기를,
“전번 적의 사신이 왔을 때 중국에 주문하기까지 하였고, 또 그들의 글에 답서(答書)를 써 보냈는데, 이는 임시방편의 일에 불과합니다. 적정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방비를 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리는 항상 적이와 있을 때와 같이 해야 합니다. 장수를 뽑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군기(軍器)와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일 등을 착실히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상의하도록 하소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적이 오지않는 것을 믿지 말고, 나에게 대비가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군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미리 교양(敎養)을 하지 못합니다. 고려 정종(定宗) 때 광군(光軍) 30만을 두어 그 후 강감찬(姜邯贊)이 거란(契丹)을 막았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칠 때에도 군사가 20만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호구(戶口)가 어찌 그때보다 줄어들었겠습니까. 뽑는 것을 삼가지 않아서 장정이 많이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병농(兵農)은 분리시켜야 합니다. 호적만 가지고 초출(抄出)하면 용이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정예로운 자들을 뽑되 큰 고을에서는 수백명을 작은 고을에서는 1백여 명을 뽑아, 뽑힌 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요역을 착실하게 견감해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훈련에만 마음을 쓰게 한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하고,
검토관 최상중(崔尙重)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군사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양식이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장수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신이 보건대, 임진란 때 용인(龍仁)에서 이광(李洸)이 싸울 때 우리측 군사가 거의 8만 명이나 되었으니, 그후 굶어죽거나 적의 칼날에 죽은 자가 비록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가 3분의 1은 넘을 것으로 3만명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남 지방 사족(士族)의 집은 노자(奴子)가 10여 명이 넘는데, 이처럼 국사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노자를 다 내지는 못한다하더라도 한 집에서 2∼3명씩만 내어도 5∼6만명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사의 숫자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량으로 말하면, 지난 날 세 제독(提督)이 왔을 때에도 역시 지탱해 냈으니 잘 조치하면 양식 역시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장수를 얻을 수 없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지금 장수들이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적과 싸우다가 군사의 절반을 죽이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변란 초에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이 거느린 군사가 적지 않았는데도 군율이 해이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탄환에 맞으면 전군(全軍)이 도망하여 일을 그르쳤습니다. 이는 군율을 밝히지 않은 탓입니다.
신이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3년 동안 있었는데, 그를 따라 도산(島山)에서 싸울 때 경리(經理)가 아군으로 하여금 진공(進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뒤에 처진 자는 참(斬)한다는 군령(軍令)을 내었었는데, 어떤 수령이 조금 후퇴하자 이시언(李時言)이 직접 참하여 조리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일도 성공하지 못하면서 그릇 살인(殺人)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시언이 그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는데, 권율이 몹시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은 일마다 이러하니 어떻게 용병을 하겠는가’하였습니다. 대개 장수가 잘 검칙해서 군사들로 하여금 항오(行伍)를 굳게 지켜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조금만 어겨도 즉시 참하면 어찌 한번 싸워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군중에 있으면서 매번 하유를 보건대, 군율을 엄히 밝히라고 하교하시었습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착실히 거행하지 않고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민력(民力)을 기르고 부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 바로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남쪽과 북쪽의 적이 조석으로 염려가 되는데도 사람들은 굳은 뜻을 지니지 못하고 모두 도망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찌 천승(千乘)의 나라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길이 적의 모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군율을 신명하여야 합니다. 만약 적을 만나 물러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전과 같이 궤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각도의 제장에게 신칙해야 합니다.”하였다.
사시에 파하고 나왔다.
○卯正, 上御別殿, 講《周易》。 參贊官吳億齡, 自《復卦》六四中行, 止皆反道而凶也。 上讀億齡進講處訖, 億齡曰: “《復卦》之義, 或人靜言, 或以善惡言。 動靜, 謂天道也, 善惡, 謂人道也。 天道則一陰一陽, 互爲升降, 循環往來矣, 人事則若篤於善, 而不間斷, 則非如陰陽之往來, 終必純善無惡矣。 此則人事之功夫也。 天下之事, 有消長賓主之勢。 《姤卦》, 一陰在下, 五陽在上, 而其勢一陰當盛, 故不能遏《復卦》, 五陰在上, 而一陽在下, 故亦不能遏。 陽道之長盛, 此不可不察。 今以國事言之, 阽於危亡之域而中興, 如一陽之初復也。 以朝廷言之, 紛挐攻擊之餘, 近稍少安, 亦如一陽之初長也, 當於此時, 陰陽消長、賢邪進退之機, 破去朋黨, 進用善人, 扶陽抑陰, 使善類布滿, 幸甚。” 講畢, 大司諫黃愼進曰: “關王廟造成官員, 非徒無功勞, 當此蕩竭之時, 不惜財力, 三年興役, 淹延時月, 甚者至於軍人調發, 財料處置之際, 亦多有失, 外議狼藉。 前者限年施罰, 至今以爲非, 今復加賞, 物情莫不憤鬱。 請從速還收成命。” 掌令李軫賓曰: “關王廟, 官員泛濫之事極多。 當初論啓之時, 以辛丑以後, 不至如庚子以前, 故不爲幷論, 非謂無罪也。 今不加罰, 而反施賞, 不得不還收成命, 請早快從。” 上曰: “論賞, 未爲不可, 似難改之。” 黃愼曰: “亂後學校之政不修, 敎訓之道不明, 此由於書冊蕩失, 師表無人, 且國家亦多事, 未遑而然。 今則稍安, 而如此棄置, 此大可憂。 儲養人才, 急先之務。 必須擇師儒, 使之勸課, 如《小學》等書, 蒙士不可不知。 古人以灑掃應對, 爲第一科程。 出以事公卿, 入以事父兄, 皆由於此。 此書卷秩不多, 或開刊京中, 或開刊外方, 使之優數印出, 廣布中外, 如館學等處, 必以能通此書以上之人, 許令赴試, 各別申明行之爲當。” 領事金命元曰: “此最切急之言, 外議亦皆以此爲憂。 曾聞外方, 有開刊處, 今已多數印出矣。” 上曰: “近日內官, 自嶺南試才而來, 得聞其處之事, 言書冊絶無, 士子之欲爲學者, 或相傳誦而讀, 或相謄書而讀云。 此極可慮。 有冊然後, 能勤讀。 無冊則豈可爲乎?” 軫賓曰: “小臣曾遞守令, 流落鄕村, 聞見監司之所爲。 守令賢否, 監司未嘗不知, 而守令或有父兄之勢, 或爲監司所曾識, 則雖有不治之甚者, 亦不用於殿最。 必須別遣暗行御史, 摘發重治。 若監司, 不以啓聞, 而見發於御史, 則其道監司, 爲先罷職, 然後可革此弊矣。 但近來御史, 多不擇人, 雖稱暗行, 而出入官家, 酒肉爛熳, 縱其下人, 受賂狼藉。 如此則雖遣亦無益矣億齡曰: “民生休戚, 係於守令。 守令賢否, 必名實綜覈, 然後可知。 近來守令, 以治名者, 官家凡事, 專不留意, 上司差役, 必皆圖免, 百姓之有無、倉庫之虛實、軍器之措置, 一應切務, 棄置不顧, 務要虛譽於民間而已。 爲御史監司者, 亦不過以民間道聽道說之言, 聞見狀啓, 是以, 虛僞之事益多。 今若遣御史, 則必先聞民間之言, 次聽公論, 又必須査覈官家所爲之事, 盡皆修治, 然後狀啓, 則似無此弊矣。” 黃愼曰: “近日守令除拜, 自上特命, 懸錄薦擧者之姓名, 蓋出於愼擇之意, 而竊聞銓曹守令薦, 只有庚子、辛丑兩年置簿, 而己亥以前, 則皆無存者。 近日守令有闕, 例以此兩年被薦者擬望, 其他則曾經守令有聲績者, 亦不得擬望, 以此可擬者乏少。 當初愼擇之意, 反爲苟充之弊, 不可不速爲變通。 且前日守令薦, 皆是循例, 泛然薦擧, 今須申明薦擧之法, 使知幷罪擧主之意, 更使各薦所知, 着實擧行, 則薦擧必(措)〔操〕心, 而不敢妄爲矣。” 命元曰: “此言極是。 所謂守令薦者, 例是新出之人。 若曾經有治績者, 雖前有薦, 而今則無有, 故反不得參, 此極可慮。” 上曰: “平時則有禁軍內三廳。 兵曹何不復設如平時之整齊? 所以取才者, 各有規式, 申明此法可也。” 知事韓應寅曰: “平時則內三廳, 皆有取才十四矢, 〔入〕格者, 則卽爲口傳, 十二矢, 則濟州入防, 然後爲之。 亂後, 今始復設內禁衛, 而出身實多, 實、預差, 皆以出身充數。 羽林衛, 則時無自願取才者矣。” 命元曰: “羽林衛, 則庶孽爲之, 而亂後則皆爲許通, 故無取才之人矣。” 應寅曰: “許頊頃於筵中, 言江邊出身之苦。 政院曾已取稟, 量減徭役事, 言于該曹, 故已爲移文于本道矣。 亂後出身者多, 自軍士, 稍解操弓者, 皆出身也。 渠等家業, 豈有完富者乎? 兩南, 則本處入防, 忠淸、江原道, 則赴防舟師, 京畿、黃海道, 則遠赴北道。 渠等從軍戍邊, 而本官侵虐自如, 罷戍而歸, 妻子饑餓, 閭里蕭然, 或有結項而死者, 或有掛紅牌於官門, 而逃者云。 其怨苦之狀, 極矣。 請自今下諭各道, 戶內雜役, 量爲蠲減, 使之優恤可也。” 上謂命元曰: “昨見備邊司啓辭, 以京畿兵使差出, 爲當云。 然事必慮終, 或有非便, 則後必難處。 姑以防禦使, 兼水原府使, 試行兵使模樣, 以爲差出之權輿如何?” 命元曰: “昨日臣亦參此議, 群意以爲: ‘雖出兵使, 無軍可給云。’ 權宜之道言之, 則上敎允當。” 應寅曰: “備邊司將議出京畿兵使, 欲處置所屬軍兵之事, 要臣會議, 臣謂大臣曰: ‘凡事慮始, 然後能久遠無弊。 今以一人之言, 遽爲設立, 沿革極爲關大。 且欲以花梁、月串水軍之在陸者, 及本府上番之軍, 專屬兵使, 此事極難處。 各道上番之軍, 多至之月, 僅九百餘名, 而京中用軍之處極多, 如闕內及左右伏兵, 各處分送之際, 每患不足。 水原正軍, 盡屬兵使, 則其代上番之軍, 別樣處置後, 可無相礙之事矣。” 上曰: “亂後新良人極多, 兵曹何不爲處置乎?” 應寅曰: “此類已爲處置。 正軍有闕處, 或以此人充差, 或以爲選上, 價布徵納矣。 頃見李德馨狀啓, 則亦以爲砲殺率丁, 宜以此人充定云矣。” 上曰: “予嘗聞之, 祖宗朝, 金宗直以生員, 仍爲軍保云, 而今則率多謀免, 此弊不可不防。 前朝鄭世雲, 討紅巾時, 曾率二十萬軍。 我國雖在平時, 豈能辦此乎? 非今日人數, 不如前朝, 想不入軍保而然也。 且都監之軍募入, 今已十年, 老者物故, 壯者已老, 而今若不添補, 則不久此軍將盡矣。 必須更爲簡閱, 汰去老殘, 選入丁壯可也。 但人皆厭避, 必無應募者云云, 若爲國事, 則人言不可顧。 大槪以渠厭憚, 而不爲抄入, 則終不成事。 且渠之厭避, 亦必有故, 須使樂從, 而有興起之心可也。” 應寅曰: “此軍設立, 在於甲午。 其時凶荒, 民皆餓死, 而此軍給料厚撫, 故人皆樂入。 其後別無加厚之事, 而南北防戍, 爲先調遣, 使其妻子, 有不暇顧, 豈肯樂從哉? 給保不可不爲, 而令渠自望閑丁, 則騷擾而難成。 頃日鄭賜湖入侍時, 言以田結出綿布以給, 則爲當云, 而昨日戶曹判書, 親來備邊司, 打算計之, 則三十結出一匹, 可以贍給云。 前日所無之役, 今始設行, 民豈樂乎? 其時座上諸臣以爲: ‘當此之時, 豈可加賦乎?’ 無不致疑也。” 上曰: “我國, 訓鍊都監之給保, 亦不能爲, 豈能禦百萬倭子乎? 田結收布, 古無此規, 亦未知其可也。 軍士給保, 理之當然, 而不能給此千餘之軍, 乃爲此擧, 則史官若書之於冊, 後世其謂如何? 事體極未穩矣。” 億齡曰: “頃以賊使來到, 至於奏聞天朝, 且爲修答其書以送矣。 此則不過權宜之事, 賊情難測, 防備不可不僅。 在我之道, 宜常若敵來之時, 如選將鍊兵, 措置軍器糧餉等事, 不可不着實擧行, 請令大臣商議可也。 古人云: ‘不恃敵之不來, 恃吾有以待之。’ 我國兵非不足, 敎養之不預也。 高麗定宗時, 置光軍三十萬, 其後姜邯賛, 禦契丹, 尹瓘攻女眞之時, 其軍皆不下二十萬。 今日戶口, 豈下於彼哉? 不過抄出不謹, 而使精壯多漏故也。 大槪兵農, 不可不分。 若以戶籍抄出, 則不可易爲矣。 若簡閱精銳, 大邑則數百, 小邑則百餘, 被選之人, 則一應徭役, 着實蠲減, 使之專意鍊習, 則豈有不成之理乎?” 檢討官崔尙重曰: “我國或謂無兵之國, 或謂無糧之國, 或謂無將之國。 以臣觀之, 壬辰李洸龍仁之戰, 戰士幾至八萬。 其後飢餓、賊鋒死者雖多, 餘存尙不下二分之一, 則猶爲三萬名也。 至於兩南士族之家, 奴子小不下十餘人。 當此國事危急之時, 雖未盡出, 若令各出二三人, 則亦不下五六萬矣。 如此則軍數不患不足。 以無糧言之, 頃日三提督之來, 亦能支過。 善爲措置, 則糧亦有裕矣。 但將帥未得, 此極可憂。 今之爲將者, 率軍一萬, 而與賊戰, 雖殺己軍之半, 勝之則可以爲矣, 而變初, 李鎰、申砬所率之軍, 非不多也, 軍律弊弛, 故一人中丸, 全軍奔北, 以致僨事。 此由於軍律之不明也。 臣爲都元帥權慄從事官三年。 其從戰島山也, 經理令我軍進攻。 其時出令, 在後者斬云。 有一守令少退, 李時言手斬以徇, 衆議皆以爲, 不成事而枉殺人, 時言以此幾獲罪。 權慄極以爲恨曰: ‘我國事事如此, 何能用兵乎?’ 大槪將帥次次檢勑, 使守行伍, 堅定不移, 小違則立斬, 豈不能爲一戰乎? 臣在軍中, 每見下諭, 以嚴明軍律爲敎, 而將帥不能着實擧行, 苟玩度日。 當此之時, 愛養民力, 輕徭薄賦, 乃是急務, 然南北之寇, 朝夕可虞, 而人無固志, 敵來則皆思退走。 豈以千乘之國, 不能一戰, 而長被侮於敵哉? 必須申明軍律, 若遇賊而退者, 必死不免爲規, 則庶有畏懼之心, 不至如前日之潰散矣。 幸以此意, 下諭于各道諸將, 申勑可也。” 巳時, 罷黜。
선조 146권, 35년(1602 임인/명만력(萬曆) 30년) 2월 5일(무진) 1번째기사
전대 제왕 등의 묘를 정비하라고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전대 제왕(諸王)의 능묘(陵墓)를 변란을 겪은 뒤이니 각기 그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파훼(破毁)된 곳을 수치(修治)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리고 전대의 충신으로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양(金陽), 백제의 성충(成忠)·계백(階伯), 고려의 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의 무덤도 또한 봉분을 만들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한두 가지만 예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 나머지는 다 말하지 못하니 예조에 말하라.”
○戊辰/傳曰: “前代諸王陵墓, 經變之後, 似當令各其本官, 修治破毁, 禁其樵牧, 前代忠臣, 如新羅之金庾信ㆍ金陽、百濟之成忠ㆍ階伯、高麗之姜邯,ㆍ鄭夢周之墓, 亦似當封塡, 禁其樵牧。 只擧一二而言, 餘不能悉, 言于禮曹。”
선조 166권, 36년(1603 계묘/명 만력(萬曆) 31년) 9월 9일(임술) 1번째기사
전대 임금의 능묘의 일을 의논하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전대(前代) 임금들의 능묘(陵墓)는 변란을 겪은 뒤이므로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훼손된 곳을 수리하고 초목(樵牧)을 금해야 할 듯하다. 전대의 충신으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양(金陽)과 백제의 성충(成忠)·계백(階伯) 및 고려의 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같은 이의 묘소도 봉식(封植)하고 초목을 금해야 할 듯하다. 한둘만 들어서 말하고, 나머지는 다 말하지 않는다.”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성교(聖敎)를 보건대 이대(異代)를 차별없이 추숭(追崇)하여 봉식하라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예조를 시켜 널리 더 듣고 보아 전대 임금들의 능묘와 충현(忠賢)으로서 뛰어나게 일컬어지는 자는 상교(上敎)에 따라 편의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였다.
일이 예조에 계하(啓下)되자, 예조가 아뢰기를,
“듣고 본 것이 넓지 못하고 전적(典籍)에는 의거할 곳이 없으므로 쉽사리 거행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각 고을을 시켜 전에 봉식하고 수리한 전대 임금들과 충현으로서 뛰어나게 일컬어져 사람들의 이목(耳目)에서 잊혀지지않은 자를 낱낱이 탐문하여 아뢴 뒤에 처리할 일로 팔도의 감사(監司)와 개성부 유수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이제 각 고을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뛰어난 자인지를 가리지 않고 다만 지경 안의 유명한 분묘를 범연히 써 보낸 곳도 있습니다. 국가가 봉식하는 성전(盛典)을 혼잡하게 시행할 수 없으므로 계하(啓下)에 따라 뛰어나게 일컬어지는 사람과 전대의 임금들의 능묘를 각각 계본(啓本)에 실린 것에 따라 뒤에 나열하여 적었으니, 각도를 시켜 먼저 봉식하고 나무하거나 방목하는 것을 금하게 하소서. 전대의 임금들과 충현이 이뿐만 아닐 것인데 비망기에 언급된 성충·계백·강감찬같은 이를 각도에서 적어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각도의 감사에게 다시 이문(移文)하여 상세히 탐문하여 치계(馳啓)하라고 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능묘는 다음과 같다.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는 노산군(魯山君)의 묘,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의 경내에 있는 소목릉(昭穆陵) 열곳, 경상도 김해(金海)에 있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 경주(慶州)에 있는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능, 김춘추(金春秋)의 능, 김양(金陽)의 묘, 미추왕(味鄒王)의 능, 효소왕(孝昭王)의 능, 선덕왕(善德王)의 능,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묘, 진주(晉州)에 있는 증대사간(贈大司諫) 조식(曹植)의 묘, 예안(禮安)에 있는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황(李滉)의 묘, 인동(仁同)에 있는 고려의 충신 주서(注書) 길재(吉再)의 묘, 청도(淸道)에 있는 김일손(金馹孫)의 묘, 밀양(密陽)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묘, 흥해(興海)에 있는 증영의정 이언적(李彦迪)의 묘, 함양(咸陽)에 있는 증우의정(贈右議政)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묘, 현풍(玄風)에 있는 증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묘, 경기 장단(長湍)에 있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묘,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묘, 증우의정 서경덕(徐敬德)의 묘, 주계군(朱溪君)의 묘, 고양(高陽)에 있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양위(兩位)의 묘, 용인(龍仁)에 있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묘,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묘,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묘, 평안도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의 묘, 중화(中和)에 있는 동명왕(東明王)의 묘.
○壬戌/備忘記曰: “前代諸王陵墓, 經變之後, 似當令各其本官, 隨便修治破毁, 禁其樵牧, 前代忠臣如新羅之金庾信、金陽, 百濟之成忠、階伯, 高麗之姜邯賛、鄭夢周之墓, 亦似當封植, 禁其樵牧。 只擧一二而言, 餘不能悉。” 政院啓曰: “伏覩聖敎, 其無間異代, 追崇封植之意, 至矣。 令禮曹, 廣加聞見, 前代諸王陵墓及忠賢之表表著稱者, 依上敎, 從便施行宜當事。” 啓下禮曹。 禮曹啓曰: “聞見未博, 典籍無憑, 勢難容易擧行。 令各官, 在前所封植修治前代諸王及忠賢表表著稱, 在人耳目, 不至(諲設)〔湮沒〕者, 一一訪問, 啓聞後處置次, 八道監司及開城府留守處, 竝爲行移何如?” 上從之。 禮曹又啓曰: “今見各官所報, 或有不辨表表與否, 只將境內有名墳墓, 泛然書送之處。 國家封植之盛典, 不可混施。 依啓下表表著稱人及前代諸王陵墓, 各以啓本內所載, 開錄于左, 令各道, 先爲封植, 禁其樵牧。 前代諸王及忠賢, 必不止此。 如備忘記所及成忠、階伯、姜邯賛, 各道不爲開報。 是必年代久遠, 未能聞知而然。 各道監司處, 更爲移文, 詳細訪問馳啓事, 行移何如?” 啓依允。 江原道寧越魯山君墓、開城府高麗始祖顯陵境內昭、穆陵十處, 慶尙道金海駕洛國始祖首露王陵、慶州新羅始祖赫居世墓、金春秋陵、金陽墓、味鄒王陵、孝昭王陵、善德王陵、大角干金庾信墓、晋州贈大司諫曺植墓、禮安上洛公金方慶墓、贈領議政李滉墓、仁同高麗忠臣注書吉再墓、淸道金馹孫墓、密陽文簡公金宗直墓、興海贈領議政李彦迪墓, 咸陽贈右議政文獻公鄭汝昌墓、玄風贈領議政文敬公金宏弼墓、京畿長湍文成公安裕墓、文敬公金安國墓、贈右議政徐敬德墓、朱溪君墓、高陽高麗恭讓王兩位墓、龍仁文忠公鄭夢周墓、文正公趙光祖墓、黃海道海州文憲公崔冲墓、平安道平壤箕子墓、中和東明王墓。
선조 195권, 39년(1606 병오/명만력(萬曆) 34년) 1월 23일(임진) 2번째기사
삼정승·관반 이호민·원접사 유근 등과 중국 사신 영접, 북로남왜 방어, 진연, 중삭연 등 국사를 논의하다
오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관반 이호민(李好閔), 원접사 유근(柳根)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윤방(尹昉), 기사관 서경우(徐景雨), 조사 가주서(詔使假注書) 곽천호(郭天豪), 기사관 오익(吳翊)·유학증(兪學曾)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나올 날짜가 아마도 머지않았을 터인데 모든 일의 조치가 얼마나 진행되었는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관중(館中)의 제반일은 현재 조치하고 있는 중이고 모든 기구에 관한 일도 각 해사(該司)를 시켜 지금 조치하고 있습니다. 각처의 수리 및 가가(假家)와 기계 등에 대해서 산역(山役)은 현재 실시하고 있으나 토역(土役)은 날씨가 추워 크게 벌이지는 못하고 양지바른 곳에서만 조금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정(卜定)할 물품들은 누차에 걸쳐 대신과 상의한 다음 마련하여 이미 하유하였으나 기한 전에 제대로 올라올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전에도 원접사를 지냈는데 이번에 또 관반이 되어 노고가 많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이 일을 감히 노고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전에 없었던 변란을 당하여 국가에 욕됨이 많았습니다. 이를 생각하노라면 정신이 아찔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면(辭免)할 생각을 말고 지성으로 접대하는 것이 좋겠다. 어찌 매번 전일과 같기야 하겠는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국가가 신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것은 신이 문장을 조금 이해한다고 여겨서이나 근래 책을 놓은 지가 벌써 오래고 또 나약한 체질로 일찍 노쇠하여 견디어 내기가 어렵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저께 죽음을 무릅쓰고 진사(陳辭)하였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여 마음이 매우 답답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의 행차가 어느 때쯤 당도하겠는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신이 동지달에 차제(差除)되었다고 합니다. 무릇 사신이 조정을 하직한 뒤 통주(通州)에 도착하여 40일 동안 행장을 꾸리는 것이 상례이니 이 예가 여태 남아 있다면 3월 그믐이나 4월 초승께는 당도할 것입니다. 동지사의 선래 통사는 근간에 반드시 올 터인데도 여태 오지 않고 있어 아래에서도 고대하고 있습니다.”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동지사의 선래통사는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기별은 진작 치계되었는데 그때 나온 통사가 바로 선래통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사신은 이름이 있는 사람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겠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주지번(朱之蕃)은 곧 을미년에 장원한 사람인데 중국의 과거는 우리나라와 달라서 장원은 반드시 가려서 시키므로 이름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본다해도 그가 심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조(中朝) 사람 가운데 근래 책을 새로 지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다고 합니다. 신이 그저께 이덕형을 보았더니, 덕형이 ‘중국 사람들이 학사 문장을 꼽을 때는 초굉(焦竑)·황휘(黃輝)·주지번 세사람을 든다’ 하였습니다. 아마 이름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지은 시가 경들이 보기에 어떠한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기력(氣力)과 격률(格律)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대개 시에 공력을 들인 사람입니다. 무릇 시란 본래의 공부가 없이 억지로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데, 과거 고천준(顧天峻)·최정건(崔廷健)의 시는 갑자기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본디의 공부가 있지않은 듯하였으나 이 사람은 반드시 시에 종사한 자인 듯합니다. 그가 지은 작품을 보건대 오로지 공교에만 힘써서 격률은 대단치 않은 듯합니다. 대개는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은 시라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접사의 소견은 어떠한가,”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소신이 어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시란 종사하지 않은 경우에는 작품이 반드시 껄끄러운 법인데, 이 작품의 경우는 반드시 시에 힘을 기울인 사람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소신은 북경에 갔을 적에 들었는데 주지번은 학사중에서도 매우 유명하다고 합니다. 또 초굉이 지은《사기기평(史記奇評)》과《한서기평(漢書奇評)》을 보았는데 《사기기평》은 황홍헌(黃洪憲)이 서문을 썼고 《한서기평》은 주지번이 서문을 썼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글은 내가 아직 듣지 못한 글이다. 아무리 문장에 능하다하더라도 사람이란 각기 장점이 있는 법이다. 그가 혹시 시로 명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그가 지은 글을 보건대 노력을 많이 한 듯하니 반드시 시로 명성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하고,
유근이 아뢰기를,
“그가 지은 글을 보면 당나라 기풍을 숭상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명나라의 시체입니다. 그리고 자득한 내용도 없는 것같고 또한 자질이 뛰어난 데도 보이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시는 시정이 풍부해 보인다. 중국인의 글은 대개 원기가 풍부하다. 그러나 이것이 화려한 것인지는 모르겠다.”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속성의 솜씨인 듯합니다. 그의 시가 더러 화려한 곳도 있으나 구법(句法)은 어느 것을 모방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은 소견이 매우 넓은데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나 서로 차운(次韻)하는 것은 내가 본래 좋지않게 여긴다. 고천준·최정건이 왔을 적에도 내가 좋지않다는 뜻을 말한다. 조사(詔使)와 겨루기라도 하듯이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설사 실력이 부족하다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다만 지성으로 접대하라는 것이 곧 나의 뜻이다.”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지난번 사신이 나온다는 기별이 마침 경연(經筵)을 열고 있던 날에 입계되어서 소신도 입시한 반열에 있었습니다. 그때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무릇 접대의 일이란 오로지 지성으로 할 따름이지 수작으로 승부를 겨루려는 뜻은 본디 옳지 못하다. 그리고 이기려고 하여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더욱 적절합니다.”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이번 사신이 나올 적에 대신들이 명을 받들고 빈청에 와 모여 소신도 불러다가 원접의 임무를 맡기려 하기에, 신이 대신들의 좌중에서 ‘수작하고 창화(唱和)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하니, 대신들 가운데 어떤 이가 ‘창화하는 일만은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전일 하교하신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접대할 즈음에는 반드시 성의를 다하여야 하는 것으로 성의를 보이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수작하는 한 가지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낼 적에는 반드시 문학하는 인사로 가려서 차출하므로 수작에 있어서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의 생각으로는 창화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예부터 해온 일이다. 나의 뜻은 해서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접대하는데 지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벗이나 하인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데 더구나 중국인의 경우이겠는가. 내가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는 아무리 관질이 낮은 무장이더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조사이겠는가. 원접사가 떠날 적에 내가 분부하여 보낼 일이 있다. 우리나라는 인심이 교사하여 진실한 뜻이 없으니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나도 사신을 많이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지난날 경험한 일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조사 허국(許國)이 타락죽을 즐겨 먹어서 매일 이른 아침이면 반드시 타락죽을 대접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인가 전대로 타락죽을 대접하니, 사신이 조금만 먹고 곧 그만두었다. 나중에 괴이쩍어서 그 죽을 보았더니 이는 흰죽 위에다 타락죽을 띄운 것이다. 또 어느 조사가 관사(館舍)에 도착하여 상사(上使)가 병풍을 걷으라고 하였더니 병풍 위의 보이는 곳 외에 병풍으로 가려진 곳은 도배를 전혀 하지않아 더럽기 이를데 없었다고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사 당고(唐皐)가 서로(西路)의 어느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어떤 중 한 사람이 시를 지어 올리니 사신이 ‘그대가 유가의 학설로 지어 올렸으나 나는 불가(佛家)의 말로 지어 수답하겠다’하고 드디어 차운하여 주었다고 한다. 중이 감히 사신 앞에 시를 지어 올리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또 한 가지의 일이 있다.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은 원래 예의의 일이 아니니,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날 어떤 사신이 여악(女樂) 및 심부름하는 여인을 금지하여 달라고 백패(白牌)를 써서 보내왔었다고 한다. 여인은 사신이 보는 곳에 나다니게 할 수 없다. 근래 중국 장수를 접견하여 문아(門衙)에 이르렀을 적에 음식을 장만하는 곳에서 여인들이 아이를 업고 심부름을 하므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깥까지 요란하게 들렸으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형군문(邢軍門)이 접대도(接待圖)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여인이 질항아리를 이고 달음질치는 모양도 그려졌더라고 한다. 중국의 여인이 어찌 심부름을 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이번 사신이 나올 때의 도감사목(都監事目)에는 여인을 엄금하도록 하였으나 전부터 이 사목을 심상히 보아 넘긴 채 거행하지 않았다. 평안·황해·경기 일로(一路)는 경이 일체 엄금하여 여인이 심부름을 하지 말도록 하라. 또 서울에서는 여인이 다 좌시(坐市)하는데, 중국에서야 어찌 여인이 시장을 열겠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중국은 여인이 시장을 여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조사가 서울에 머무를 날이 많아야 열흘인데 열흘 동안은 시가(市街)에 여인들을 일체 금단하소서. 그리고 조사가 서울에 들어올 적에 구경하는 여인들을 일체 금할 수가 없다면, 신이 산해관(山海關)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남자는 왼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으로 다녔는바, 이번에 우리도 남자는 왼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으로 다니게 할 것을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로 하여금 미리 알려서 시행하게 하고, 각 아문은 각별히 신칙하여 금단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식성(食性)이란 같은 나라의 사람일지라도 서로 같을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우리나라와 중국이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조사에게 접대하는 음식물은 반드시 먹을 수 있게 해서 접대해야 한다. 우리의 상차림은 가짓수 많은 것만 예의로 여기고 생숙(生熟)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아서 비린내가 풍기게까지 한다. 조사가 반드시 돌아보지도 않을 터인데 더구나 수저를 대겠는가. 내가 중국 장수를 살펴보건대 모두가 우리나라의 반찬을 먹지 않는데 내가 수저를 들면 마지못해 수저를 대는 척만 하니, 서로 접대한다는 것이 도리어 불경(不敬)인 듯하였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전번 조사 때에도 하교하시어 음식물의 냄새를 가지고 깊이 경계하신 것을 소신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그릇에 대한 일은 이미 마련하여 계품하였거니와, 수저 등에 대해서는 전대로 쓰되 사옹원의 사기(沙器) 가운데 자기(磁器) 정도라면 중국인이 반드시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중국의 체양(體樣)대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릇은 체양이 크면 담기는 물건이 너무 많아 냄새가 나게 됩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옹원 관원이 내려갈 적에 대내(大內)에서 이미 전교하여 일체 중국 그릇의 체양대로 만들라고 일렀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어찌 꼭 매번 고천준(顧天峻)·최정건(崔廷健)과 같을까마는 그보다 조금 낫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접하기는 어려울 것인데 유사(有司)의 조치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임시해서 군색스러워질 우려도 있으니, 도감은 반드시 잘 헤아려서 대신에게 의논하라. 또 지난번 호조에서 납은 공사(納銀公事)를 입계하였는데, 이처럼 좋지 못한 일을 어찌 제왕의 상례로 삼겠는가. 불시에 다급한 일이 있어 우연히 요구한 것이지 늘상 시행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리로서는 미리 조치하지 않을 수는 없다.”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중국은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니 다소 필요하다싶은 물건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인 가운데 근래 나온 사람은 좋지못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어쩌다 동충(董忠)과 같은 자를 대동하고 나온다면 반드시 지난 일을 다 말하게 될 것은 물론 꾀어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도 있게 될 것이다. 동충 한사람 뿐만이 아니라 동충과 같은 무리는 반드시 적지 않을 것이니, 이같은 무리들을 많이 거느리고 온다면 지탱하기가 어려울 우려도 있다.”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고천준·최정건 때의 사람이 이번에 다시 나온 폐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충과 같은 자는 방언(方言)을 잘 알고 우리나라의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니 반드시 끼치는 폐단이 많을 것이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신이 납은 공사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았는데 성상의 배려는 말할 수 없이 감탄스러웠습니다. 다만 지난날과 같을 경우엔 은자(銀子)에 대한 조치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찌 고천준·최정건과 같이만 볼 수 있겠는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조사가 고천준·최정건보다 나을는지 아니면 그들보다 심할는지에 대해서는 미리 알 수 없으니, 은자는 형편상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해사(該司)가 소유하고 있는 은자와 인삼으로는 너무 모자랍니다. 지난번 호조의 공사에 의하면 단천(端川)에서 규정 밖의 은자를 더 바치도록 할 것을 청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반드시 제때 상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국가의 수요가 매번 예상 밖에 발생하고 있으니, 사체에 그다지 해롭지 않다면 형편에 따라 미리 준비하였다가 불시의 수요에 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양각삼(羊角參)은 10여 두(斗)를 캐어야 겨우 한두냥(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갑자기 마련할 수 없고, 명삼(明參)은 작기는 하지만 합쳐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마련하기가 퍽 쉽습니다. 이것을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하니 명삼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2백 근은 이미 준비시켰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이것은 초삼(草參)이므로 예단(禮單)에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에게 매우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산백희(鰲山百戲)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물력이 탕갈되어 해낼 수 없습니다. 고천준·최정건이 왔을 때도 이 사정을 말하자 퍽 불만스러워하였는데 그는 목적이 더 큰 욕심에 있고 이 오산백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주지번(朱之蕃)은 곧 예를 아는 사람인데 만약 《대명회전》을 인용하여 말한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갑자기 준비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임시해서 난처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바로 나의 뜻과 같다. 오산백희는 조사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제명(帝命)을 기쁘게 맞이하자는 뜻에서이다. 옛날에는 대장이 성공하고 돌아올 때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이 오산백희를 베풀어 교영(郊迎)한 경우가 있었으니, 곧 고려 강감찬(姜邯贊) 때의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대례(大禮)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전부 폐할 수는 없으니 이 말이 매우 옳다. 평시처럼은 못하더라도 약식을 설행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오산백희는 재인(才人)들이 하는 것이니, 경외(京外)의 재인을 많이 모아다 풍악을 올리며 놀이판을 벌여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임인년에 윤거(輪車)와 잡상(雜像)을 만들려다가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정지한 일이 있습니다.”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지금의 물력으로는 결코 준비하기 어려우니, 간략히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
“신이 도감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청하려 하였으나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오산백희는 실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희자(戲子)의 경우는【곧 정재인(呈才人)이다】 외방 사람을 대부분 불러 모았으니 간략하게 배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예관·대신이 같이 의논하여 처리하라.”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참도(站道)에 관한 일도 미리 정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유근(柳根)이 오목참(梧木站)을 기와로 일 것을 청하였는데 존경하는 뜻은 지극하나 다만 이 참은 근래 수리를 하지 않아서 기둥이 모두 비바람에 썩었기 때문에 기와를 이려면 반드시 개조한 뒤에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참은 곧 유근이 경기 관찰사로 있을 적에 임시로 설치한 곳으로 예부터 개설한 참이 아닙니다. 근래 듣건대 동파참(東坡站)에 역졸이 점점 모여든다고 하니, 동파참을 설치한다면 오목참은 당연히 폐쇄해야 됩니다. 폐쇄해야 될 참을 일시적인 일로 인해 기와를 이기까지 한다면 일은 별로 긴요하지 않으면서 그에 따른 폐단만 클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직 이엉으로 이어두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안성(安城) 등의 참을 이설(移設)하는 일은 원접사가 알아서 조처하겠지만 운암(雲巖)·부산(釜山) 등의 참은 또한 긴요하지 않은 듯하니 폐쇄하여도 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들은 원접사가 알아서 처리해야 된다”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오목참을 폐하고 동파참을 설립해야 된다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행로(行路)란 예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임시하여 비를 만난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질병이 난다던가 하면 과참(過站)이 숙참(宿站)으로 되기 마련인데 만약 숙참으로 된다면 조사가 유숙하는 곳이 초라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처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서로(西路)의 여러 참에 대한 일은 신이 내려갈 적에 관찰사와 상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운암·부산은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하였다.
상이 원접사에게 이르기를,
“또 한 가지의 일이 있다. 전일 조사가 나왔을 적에 대강군(擡扛軍)이 많이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여러날 동안 먹지도 못한 백성이 무겁게 메고 쫓아다녔으니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군에게도 차사원이 있는가, 차사원에게 분부하여 잘 거느려서 전일처럼 굶주려서 쓰러져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강군에게도 차사원이 있습니다. 그때의 일을 소신이 아는데, 조사가 회정할 적에 많은 강군이 사상(死傷)되었기 때문에 차사원을 함께 나국(拿鞫)하였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회정(回程)할 때의 일인가,”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회정할 때의 일입니다. 조사가 서울에서 떠날 때에는 짐의 수가 적었으나 개성(開城)에 도착하면서 점점 많아지더니 서로(西路)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아 강군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사원은 강군이 도망쳐 달아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숙참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강군을 몰아다 읍옥(邑獄)과 관창(官倉)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점검하여 짐을 매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강군이 얻어먹지를 못하여 굶주려 죽었으니 그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즉시 분부하여 서둘러 밥을 지어서는 싸 들고 뒤따라가며 그때그때 밥을 먹여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만, 어느 한 곳에 이르니 5리 안에 쓰러져 죽은 사람이 서너 명이나 되었습니다.”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그때 죽은 사람은 10여 명이 넘습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
“이번에 상의 분부가 여기까지 미치시니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예전에는 참로(站路)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않기 때문에 강군이 자주 쉴 수 있었으나 지금은 참로가 멀어서 강군이 쉴 수가 없는 듯합니다. 반드시 여군(餘軍)을 미리 뽑아서 서로 교대를 해가며 쉴 수 있도록 한다면 전일과 같은 폐단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
“여군이 있으면 이러한 환난은 없을 것입니다.”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근래 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로 말미암아 북방에 대한 일은 마치 잊은 듯합니다. 이번에 장계를 보건대 저들의 사정이 전과 퍽 다릅니다. 선전관이 북에서 돌아오면서 비로소 홀추(忽酋)와 노토(老土)가 서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였으나 그 허실에 대해서는 아직 모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토는 일찍이 노을가적(老乙可赤)과도 서로 통하였는데 또 홀호(忽胡)와도 서로 통한다는 말인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번호(藩胡)가 진고(進告)한 말에 의하면 그렇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번호의 진고가 믿을 만한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번호의 진고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여길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 진고한 말에 의거, 방어사에게 군사를 청하였는데 이수일(李守一)이 명천(明川)·길주(吉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 명천에 머물러 형세를 보아 진퇴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상시와 같이 부실한 진고였다면 어찌 그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이미 첨병(添兵)하였으니 장관(將官) 등을 반드시 잘 뽑아 보낸다면 적이 나온다해도 어찌 실패하겠습니까. 대개는 선전관이 나올 적에 관찰사가 신에게 통지하기를 ‘군량을 이어대기가 극히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들도 이 때문에 군량을 이어댈 길을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계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너무도 염려스럽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소요를 일으키려 했다면 건퇴(件退)에게 패배당했을 때가 바로 그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첨병하였고 중국 장수가 또 개유(開諭)하고 있다. 적을 무찌를 지의 여부는 나로서는 아직 모르겠다.”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봄철이 되어서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지는 걱정이 있게된다면 이 때는 매우 두렵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북도에서 군량을 타 먹고있는 숫자가 3만여명이라고 하는데 허다한 수졸(戍卒)이 벌써 4∼5개월이 지났으니, 3월 이후가 극히 염려스럽습니다.”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양즙(梁,)의 인품은 전번에 관찰사가 포장하고 어사 이정혐(李廷馦)이 또 포장하였기 때문에 명천부사(明川府使)에 제수하였는데, 이번에 관찰사가 범람하다는 이유로 파출(罷黜)시켰습니다. 합당한 사람을 서계(書啓)하려 하나 그 교대가 극히 어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당한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바깥 의논은 지난번 만포첨사(滿浦僉使)와 북우후(北虞候)에 추천된 사람 가운데서 헤아려 서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시발(李時發)이 신에게 사사로이 통지하기를 ‘이광영(李光英)이 북도에서 성망(聲望)이 있었고, 또 북방의 일에도 익숙하니 이러한 사람을 차정하여 보낸다면 합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면 제수하여도 되겠다. 그리고 북우후 이인경(李寅卿)은 내가 그의 인품을 모른다.”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호남 사람인데 용력으로는 이름이 가장 높습니다.”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성우길(成佑吉)도 위명(威名)이 있어서 노인(虜人)이 매우 꺼립니다. 그 대임에는 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천거하였던 것입니다. 만포첨사는 꼭 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뽑지않더라도 글을 알고 담략(膽略)이 있는 사람이면 족히 감당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리고 양향은 달리 조치할 계책이 없는가, 영남의 쌀을 영동을 통하여 수송하는 일은 운반하기는 어렵더라도 하지않을 수 없다. 하루아침에 군량이 떨어진다면 일을 할 수가 없게 된다.”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적에게 지혜 있는 자가 있어서 허장성세하여 우리의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를 첨가하기 어렵게 될 때를 기다렸다가 도발해 온다면 다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의 일은 조정에서 심력을 다 쏟아도 수송해 들여보낸 뒤 더러 허술한 폐단이 있다. 그곳에도 구관(句管)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목동(木同)의 일로 보더라도 허술하다는 걱정을 면치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허술한 폐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모두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 계미년 운량(運糧) 때에 이발(李潑)이라는 자가 쌀섬을 숲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잡혀오기도 하였다. 외람된 사람이라면 이러한 폐단이 있을 수도 있다. 단 한 섬의 운송도 극히 어려운데 중간에서 이처럼 허술히 한다면 반드시 쉽게 탕갈될 것이니, 어떻게 대처하여야 될지 모르겠다. 둔전(屯田)도 할 수 없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둔전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사(評事) 최기남(崔起南)이 병에 걸려서 경성(鏡城)에 돌아와 누워 있다고 하니, 둔전에 대한 제반 일은 더욱 구관(句管)할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의 양향(糧餉)도 북도로 수송하고 있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권태일(權泰一)이 방금 이 일로 내려갔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면포를 작미(作米)하여 수송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면포로 쌀을 무역하여 수송하는데 마상선으로【동해(東海)의 사람들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를 마상선이라 한다】실어나르기 때문에 많은 양을 운송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계획은 어떻게 하려 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다른 방법으로는 곡식을 얻어낼 수 없고 다만 면포로 쌀을 무역하여 수송하려 하나 그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개가죽을 북도에 들여보냈는데 벌써 다 나누어주었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개가죽을 들여보낸 숫자는 1천벌인데 지난번 장계(狀啓)를 보건대 나누어 준 수는 4백여벌뿐이라고 하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기자헌이 아뢰기를,
“개가죽에 대한 일은 극히 허술하였습니다. 변장(邊將)의 종들이 그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나온 자가 흔하게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진주(陳奏)할 문서는 진하사(進賀使)편에 부쳐야 할 것입니다. 전일 거론된 선유(宣諭)에 관한 일은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릴 것을 주청하여 바로 선유하게 하는 것은 과연 미안스러웠습니다. 그 뒤《이문등록(吏文謄錄)》을 상고하여 보았더니, 성화(成化)5616)연간에 바로 주청한 일이 있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로 오랑캐들에게 선유하라고 했는가, 나는 사체에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전일 전교하였던 것이다. 주청하고 싶다면 전례를 원용하여도 되겠다.”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이른바 성화 연간에 청한 일이란 번호(藩胡)가 진고(進告)한 ‘호인(胡人)이 중원 지방에 모여서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있다.’는 말만 듣고서 선유해줄 것을 주청한 것입니다.”하고,
기자헌은 아뢰기를,
“이 일은 오늘날의 일과 다릅니다.”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이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나 조사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주문(奏聞)하자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어코 바로 주청하려 한다면 문서 내용에 반드시 전례를 원용하여 써야 될 것이다.”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진주하는 문서는 바로 주청하는 것이 옳으나 그랬다가는 무진(撫鎭) 등의 아문(衙門)에게 저지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노추(老酋)가 홀추(忽酋)와 서로 연대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전일 노추의 차호(差胡)가 광녕(廣寧)에 들어갔을 적에도 이성량(李成樑)이 아주 후대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아문에서도 일을 야기시킬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주문하면 여러 아문이 제대로 무어(撫御)하고 있지 못한 것이 노출될까 싶어 주문을 꺼린다고 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두 가지 일 중 어느 것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얼핏 듣기에 여러 아문의 기색이 이 조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진 등의 아문에 보고하면 각 아문이 저들대로 처치할 뿐이니 군문(軍門)에게 보고한다면 군문의 일은 반드시 병부(兵部)에 행이(行移)되므로 혹시 제주(題奏)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남쪽의 일은 평조신(平調信)이 죽은 뒤로 사기(事機)가 자못 달라졌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남쪽은 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조신이 죽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기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들 경직(景直)이 또 다시 은연중 협박하는 태도가 있으니, 이 뒤에 뜻밖의 요구가 있으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근래 북도에 분쟁이 있음으로 해서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보니 마치 남쪽은 잊어버린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장계(狀啓)를 보니 요왜(要倭)5617)가 ‘평수뢰(平秀賴)가 폐출되었다.’고 하였다는데, 과연 사실인지 모르겠다.”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그 장계의 내용은 곧 수뢰를 폐출하고 그의 둘째 아들을 세우려는 의도이지 이미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하고,
기자헌과 윤방이 아뢰기를,
“신이 본 바로는 이미 그렇게 된 일로 여겨집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도 수뢰는 이미 폐출되어 식읍(食邑)으로 가고, 둘째 아들이 관백(關白)이 된 듯하다.”하자,
유영경이 아뢰기를,
“수길(秀吉)은 만세의 원수입니다. 가강(家康)은 임진년에 관동(關東)의 군사는 한명도 바다를 건너보내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니 본디 수길에 비길 바는 아닙니다. 적사(賊使)가 이처럼 오가는데도 저들의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수뢰가 폐출되었는지의 여부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에 사람을 차출하여 어떤 일을 핑계로 대마도에 들여보낸다면 저들의 내막을 혹시 탐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야 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꼭 유정(惟政)·손문욱(孫文彧)과 같은 무리를 차출하여 보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영리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 또는 부산첨사(釜山僉使)의 군관이라 일컬어 보내면 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리상 나쁠 것이 없다면 보내도록 하라. 예전에도 양진(兩陣) 사이에 왕래를 폐하지 않았으니, 비변사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좌의정 뜻은 어떠한가,”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괜찮다고 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미열한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 역관과 군관을 각별히 보내야 한다. 그런데 무슨 일을 칭탁하여 보내야 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신들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조처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경상좌수사를 이천문(李天文)으로 차정하였으나 이제 듣건대 천문은 주사(舟師)의 직임을 거치지 않았고 또 그 인물을 보니 차분하지 못한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미심쩍은 데가 있으면 당연히 개정하여야 된다.”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수사를 체차(遞差)해야 합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체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진연(進宴)에 관한 일은 대신이 진계하였는데도 아직 윤허하지 않으시니, 저희들은 매우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진하(陳賀) 때에 사람들의 심정이 다같이 친림(親臨)하시기를 원한 것만 보더라도 인심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연하려 하는 것은 천리로 헤아려보나 인정으로 살펴보나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진연에 대한 일을 신들이 계달하려 하였으나 번거로울까 두려워 감히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마침 윤방이 아뢰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겠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40년 동안 연락(宴樂)을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불행스럽게도 중간에 변란을 당하였기 때문에 연락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상한 일까지도 줄이셨으니, 신들이 어찌 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우리나라 경사중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 진하하던 날 모두가 친림하시기를 바랐고 바깥 의논은 심지어 신들이 누차 진계하지 않는 것을 잘못되었다고까지 하니, 인정의 소재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연을 억지로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진연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뜻은 이미 다 알았다. 그리고 찬선(饌膳)을 꼭 차려야만 되는가. 이러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하간의 뜻이 어떻게 통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계사를 보고 아랫사람의 뜻을 알았으니, 그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면 윗사람의 뜻도 알 것이다. 그런데 어찌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억지로 해서는 안될 일을 어찌 기어코 강행하려고 하는가.”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중삭연(仲朔宴)은 지금 실시하려 합니다. 공신에게는 음악과 꽃을 내리려 하시면서 상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여 이처럼 굳게 거절하시니 아랫사람인들 어떻게 마음 편하게 연회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공신을 우대하는 뜻이다. 공신에게는 내가 친히 잔을 잡고 권하고 싶으나 내가 연회에 참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나는 국가의 변란을 만났는데 어찌 공신과 다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잔치를 내리고 공신이 이것을 받는다는 것은 곧 좋은 일이다.”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상의 뜻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너무 지나치다고 합니다. 일이란 중도를 얻는 것이 귀중한 것이니 쾌히 윤허하소서.”하고,
유근이 아뢰기를,
“법전에도 ‘위에서 진연을 받지 않으면 아래에서도 연회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신시(申時) 초에 파하였다.
註5616]성화(成化): 명 헌종의 연호.註5617]요왜(要倭): 요여문(要汝文).
○午初, 上御別殿, 引見領議政柳永慶、左議政奇自獻、右議政沈喜壽、館伴李好閔、遠接使柳根、都承旨尹昉、記事官徐景雨、天使假注書郭天豪、記事官吳翊ㆍ兪學曾入侍。 上曰: “天使出來想必不遠, 凡事措置幾何?” 李好閔曰: “館中諸事, 時方措置, 而凡器具之事, 亦令各該司, 方爲措置。 各處修理及假家、器械等事, 山役則方始爲之; 土役則因日寒, 未得大作, 而向陽處, 亦稍爲之矣。 卜定之物, 屢與大臣, 同議磨鍊, 已爲下諭, 而未知能趁期限前上來也。” 上曰: “卿前爲遠接使, 今作館伴, 勞苦多矣。” 李好閔曰: “秋毫敢言勞乎? 不幸値無前之變, 辱國甚多。 思之至此, 迨爲爽然。” 上曰: “毋爲辭免之計, 以至誠儐接可也。 豈必每如前日乎?” 李好閔曰: “ 國家以臣爲此任者, 以臣粗解詞章。 而邇來, 放冊已久, 且蒲柳早衰, 恐難支堪。 頃者冒萬死陳辭, 而未得蒙允, 心切憂悶矣。” 上曰: “天使之行, 何時當到?” 李好閔曰: “未能的知, 但此天使, 至月差除云。 凡天使辭朝後, 到通州, 留四十日治裝, 例也。 此例倘存, 則三月晦, 四月初間, 似當來到矣。 冬至使先來, 近必來矣, 而尙不來, 自下亦爲苦待耳。” 柳根曰: “冬至使先來, 今不更來矣。 天使之奇, 曾已馳啓, 其時出來通事, 乃是先來云矣。” 上曰: “今此天使, 有名之人乎? 未知何如人也。” 李好閔曰: “朱之蕃乃乙未年壯元也。 天朝科擧, 不如我國, 壯元必擇而爲之, 非有名則不得爲之。 以此見之, 亦知其非尋常之人也。 且中朝之人有新作書冊者, 使此人爲之序云。 臣頃見李德馨則德馨云: ‘中原之人, 數學士文章, 只稱焦竑、黃輝、朱之蕃三人。’ 蓋有名之人也。” 上曰: “ 天使所製詩, 於卿等所見如何?” 李好閔曰: “氣力格律, 未知如何, 而大槪用功於詩之人也。 凡人之於詩, 非素業則固難勉强爲之。 顧、崔之詩, 猝効而爲之, 似非素業, 此人則必(平)〔乎〕其從事者也。 觀其所製, 專務工巧, 而格似不高, 大槪尙唐之詩也。” 上曰: “遠接使所見如何?” 柳根曰: “小臣何能知見? 但人之於詩, 不爲從事, 則所製必生。 而此則必致力於詩者也。” 尹昉曰: “小臣赴京聞, 朱之蕃, 學士中甚有名稱。 見焦竑纂《史記奇評》、《漢書奇評》, 而《史記》則黃洪憲爲序, 《漢書》則朱之蕃爲序矣。” 上曰: “此書, 予所未聞之書也。 雖曰能文, 人各有所長。 未知以詩有名乎?” 李好閔曰: “見其所製, 用功似多, 必有詩名之人也。” 柳根曰: “以所製見之, 則似爲尙唐, 而實是明詩之體也。 似無自得之意, 而亦未見天分之高也。” 上曰: “其詩似富贍矣。 唐人之文, 大槪元氣厚。 但此, 未知華麗乎?” 柳根曰: “似是速成手段矣。 其詩或有華麗處, 而句法, 亦有未知何倣者也。 然, 唐人所見甚博, 未知如何。” 上曰: “詩韻相次, 予意, 素以爲未安。 顧、崔時, 予亦言其未安之意矣。 何必與詔使, 如相較者? 然, 設使不及, 亦無妨也。 但待以至誠, 是予之意也。” 沈喜壽曰: “去番天使之奇, 適於經筵日入啓, 小臣亦在入侍之班。 自上下敎曰: ‘凡接待之事, 專以至誠而已, 酬酢務勝之意, 元是不可。 且雖欲勝, 亦不可及矣。’ 如是下敎, 尤爲丁寧矣。” 柳根曰: “今此天使之來, 大臣承命, 來會賓廳, 亦邀小臣, 將屬以遠接之任。 臣於大臣坐間謂: ‘酬酢唱和, 乃是餘事’ 云云, 則大臣或: ‘謂唱和一事, 亦不可忽’ 云矣。” 沈喜壽曰: “前日下敎之意至矣。 接待之際, 必致至誠, 至誠之外, 果無他事? 但酬酢一事, 亦不可忽也。 中朝遣使於我國, 必擇文學之士以差之。 至於酬酢之間, 亦有不及, 則此非細事。 臣意以爲, 當爲第二事矣。” 上曰: “此, 自古爲之之事。 予意, 非謂不可爲, 大槪待人, 以至誠爲本。 雖在接朋友、待下人, 亦必以至誠, 況於上國之人乎? 予接見天將, 雖至秩卑武將, 不敢小忽, 況於詔使乎? 遠接使去時, 予有敎送之事矣。 我國人心巧詐, 無眞實之意, 是甚可慮。 予亦多接天使, 前日所經之事, 尙可歷記。 許國天使, 嗜進駱粥, 每朝早飯, 必進駱粥。 至某地, 亦依前進之, 則天使小領, 還止撤。 後怪而視之, 乃於白粥之上, 被以駱粥矣。 又一天使到館, 上使之撤屛, 則屛風上露見處外, 屛風所障蔽之內, 則全不塗褙, 陋莫甚云, 待人之道, 豈可如是? 唐皐天使到西路, 某官有一僧人, 以詩投呈, 天使曰: ‘汝雖以儒說製來, 我則以禪語製答。’ 遂爲次給云。 僧人敢以詩, 進天使前, 豈有如此事也? 又有一事焉, 男女混處, 元非禮義之事, 是甚可愧者。 前日有一天使, 以女樂及執役女人禁止事, 書于白牌以送云。 大槪女人, 不可使行走於天使所見處也。 近來接見天將, 及至門衙, 則熟設之處, 女人負兒執役, 啼哭之聲, 喧聞于外, 豈有如此事乎? 邢軍門作接待之圖, 而女人之戴陶盆, 奔忙之狀, 亦爲繪畫云, 中原女人, 豈有執役之理? 今此天使時都監事目, 嚴禁女人, 而事目, 自前視爲尋常, 慢不擧行, 平安、黃海、京畿一路, 卿可一切嚴禁, 勿使女人執役。 且京中女人皆坐市, 中原豈有女人爲市?” 柳永慶曰: “中原無女人爲市者。” 尹昉曰: “天使留京, 多不過十日十日之內, 市街女人一切禁斷。 且天使入京時, 女人觀光者, 如不能一切禁止, 則臣見山海關出入之人, 男左女右。 今亦男左女右事, 令漢城府五部, 前期知委施行。 若各衙門則各別申飭, 禁斷何如?” 上曰: “人之食性, 雖一國之人不能相同。 況我國於中國, 豈不相異? 天使前所進之物, 必使可食可也。 我國盤排, 以多爲禮, 其於生熟, 專不致意, 使腥臭發聞天使, 必不顧視, 況爲下著? 予見, 唐將皆不食我國之饌, 予擧箸則不得已略爲下箸, 而相接之際, 反似不敬矣。” 李好閔曰: “前天使時, 亦有下敎, 深以飮食之臭爲戒, 小臣亦聞之矣。 今者器皿之事, 曾已磨鍊啓稟, 而如匙箸等, 則依古爲之, 司饔院沙器, 如磁器則中原之人必以爲美, 若依唐制, 精造用之則可矣。 大槪器皿體大, 則所盛之物狼藉有臭矣。” 上曰: “司饔院官員下去時, 自內已爲傳敎, 使之一依唐器體樣, 造之矣。” 上又曰: “ 天使, 豈必每如顧、崔? 雖差勝於顧、崔, 亦必難待。 有司措置, 未知如何, 而恐有臨時窘迫之患, 都監必爲商度, 議于大臣。 而戶曹頃日, 亦以納銀公事入啓, 如此不好底事, 豈可例爲帝王之政? 臨時有急, 偶一爲之, 非所常行之事。 然在我之道, 則不可不預爲措置。” 柳永慶曰: “中原賂遣成風, 多少需用之物, 不可不預備。” 上曰: “唐人邇間出來者, 多有不好底人。 倘帶如董忠者出來, 則必悉言前事, 且有敎誘爲弊之事矣。 非徒董忠一人, 如董忠之輩, 必不小矣。 如此之輩若或多率以來, 則恐有難支之患矣。” 尹昉曰: “顧、崔時人, 今不無更來之弊矣。” 上曰: “如董忠者, 能解方語, 我國之事無所不知, 必多貽弊之事矣。” 李好閔曰: “臣見納銀公事批答, 聖意所在, 極爲感嘆。 但若如前日, 則銀子措置, 不可忽也。” 上曰: “待人, 豈可以顧、崔相期?” 李好閔曰: “天使之或賢於顧、崔; 或甚於顧、崔, 未能預知, 銀子勢不得不備, 而今者該司所儲銀參, 尤甚絶乏。 頃日戶曹公事, 雖請端川規外銀子, 而必不能趁期上納。 國家需用, 每出於意外, 如非甚害於事體, 則隨便預備, 以應不時需索可也。 且聞, 羊角參採得十餘斗, 僅得一二兩, 故未能猝辦。 至於明參則雖小參, 合而造之, 故頗爲易辦, 而唐人亦甚好之云, 明參所當多備矣。” 上曰: “二百斤已令措備矣。” 李好閔曰: “此則草參, 當用於禮單者也。 臣有隱慮之事, 《鰲山百戲》乃《大明會典》所錄也, 而物力蕩竭, 不得爲之。 顧、崔亦以此爲言, 意頗不快, 而其志有所大欲, 而不在《鰲山》, 故終乃許之矣。 今聞, 朱之蕃乃知禮之人, 若引《會典》而爲言, 則未知何以處之也。 此非猝辦之事, 恐有臨時難處之患矣。” 上曰: “卿言正合予意。 《鰲山百戲》非爲天使所以歡, 延帝命之意也。 古者, 大將成功而還, 人君有率百官, 設《百戲》郊迎者, 前朝姜邯賛時事, 是也。 大禮所係, 不可專廢, 此言甚是矣。 雖不能如平時, 略爲排設可也。 且百戲, 卽才人也。 多聚京外才人, 張樂呈戲, 使之歡迎可也。” 尹昉曰: “壬寅年, 輪車、雜像將爲之, 而以臺諫啓辭, 停止矣。” 柳永慶曰: “以今時物力, 決難措辦, 從略爲之似當。” 李好閔曰: “臣箏監, 欲請此事, 而不敢矣。 《鰲山百戲》, 決難爲之。 如戲子【卽呈才人也。】則外方之人, 多所招集, 略爲排設甚當。” 上曰: “都監、禮官、大臣同議爲之。” 李好閔曰: “站道之事, 亦不可預定。 頃者柳根請於梧木站蓋瓦。 其尊敬之意, 則至矣, 但此站, 近來不爲修理, 棟柱皆爲風雨所朽, 若將蓋瓦, 則必須改造, 然後方可。 而且此站, 乃柳根爲京畿監司時權設之地, 非自古開設之站也。 近聞, 東坡站驛卒稍集云, 若設東坡則梧木自當廢矣。 當廢之站, 因一時之事, 至於蓋瓦, 則事似不緊, 而其弊正大。 臣意則姑爲蓋草, 亦可也。 安城等站移設之事, 遠接使將有處置, 而雲巖、釜山等站, 亦似不緊, 廢之可矣。” 上曰: “此等事, 遠接使可爲量處。” 柳根曰: “梧木之當廢與東坡之設立, 時未能知之, 而凡行路不可定。 或臨時値雨、或卒有疾病, 過站之爲宿站, 亦未可預知也。 若爲宿站, 則天使經宿之地, 不可草草, 故如是磨鍊矣。 西路諸站之事, 下去時, 當與方伯, 商議處之。 雲巖、釜山則臣意亦然。” 上謂遠接使曰: “又有一事。 前天使時, 擡扛軍多有顚仆致死者云。 累日不食之民, 重擡驅逐, 安得不死? 扛軍有差使員乎? 分付差使員, 善爲領率, 勿使飢餒顚斃, 毋如前日之所爲」可也。” 李好閔曰: “扛軍有差使員矣。 其時之事, 小臣知之。 天使回程, 扛夫多致死傷, 故差使員竝爲拿鞫矣。” 上曰: “ 天使回程時事乎?” 李好閔曰: “回程時之事也。 天使自京離發時, 扛數雖少, 至開城府漸多, 至西路尤多, 扛軍不能堪。 差使員恐有扛軍逃散之患, 到宿站則必驅扛軍, 囚之邑獄及官倉, 明曉點出荷扛。 故, 軍多不得食者, 飢餓顚仆之狀, 有不忍見。 臣卽爲分付, 急急炊飯, 令人裹而隨之, 且饋且行, 而到一處則五里內顚斃者, 三四人矣。” 尹昉曰: “其時死者, 過十餘人矣。” 李好閔曰: “今者上敎及此, 極爲幸甚。” 柳根曰: “古者站路, 相距不遠, 故軍得頻休; 今則站路似遠, 軍不得休息。 必須預抄餘軍, 使得相替休息, 則可免前日之弊矣。” 李好閔曰: “若有餘軍, 可無此患矣。” 柳永慶曰: “近來因天使支待之事, 北方之事, 有若相忘者然。 今以狀啓見之, 彼間事情, 與前頗異。 宣傳官自北而還, 始言忽酋與老土相通之狀, 而未知虛實矣。” 上曰: “老土曾與老乙可赤相通, 又與忽胡相通乎?” 柳永慶曰: “藩胡進告之言, 如彼云矣。” 上曰: “藩胡進告, 信乎?? ?柳永慶曰: “藩胡進告, 雖不可盡信, 亦不可謂必無也。 頃以此進告之言, 至於請兵於防禦使, 而李守一領明、吉之軍, 時留明川, 以爲觀勢進退之計。 若此常時不實之進告, 則何至如是乎? 已爲添兵, 而將官等必亦皆擇送, 賊雖出來, 豈必見敗? 大槪宣傳官出來時, 監司通于臣曰: ‘繼餉極難。’ 云云。 臣等亦以此, 爲繼餉之道, 百思無策, 極爲可慮。” 上曰: “賊若欲作耗, 則件退見敗之際, 此爲時矣。 今則已爲添兵, 天將又爲開諭, 仆賊與否, 予未可知也。” 沈喜壽曰: “春來, 若有師老、糧盡之患, 則此時, 甚可畏也。 曾聞, 北道糧餉三萬餘石云, 而許多戍卒, 已經四五箇月, 三月之後, 極爲可慮。” 柳永慶曰: “梁諿爲人, 前者監司褒奬; 御史李廷馦亦爲褒奬, 故, 使爲明川府使,今者, 監司以泛濫罷黜。 可合人將爲書啓, 而交代極難矣。” 上曰: “誰可爲者?” 柳永慶曰: “外議, 將以頃日滿浦僉使、北虞候之薦, 量度書啓矣。 但李時發私通于臣曰: ‘李光英有聲於北道, 又習於北方之事, 若以如此者差送, 則似爲可合。’ 云矣。” 上曰: “時未赴任, 亦可爲之。 且北虞候李寅卿, 予不知其爲人也。” 奇自獻曰: “湖南人也。 以勇力最著名。” 柳永慶曰: “成佑吉有威名, 虜人頗憚之。 其代不可不以勇力之人爲之, 故薦之矣。 滿浦不必專擇勇力之人也, 能知文, 有膽略之人, 則足以堪之。” 上曰: “予意亦然矣。 且糧餉, 他無可措之策乎? 嶺南之米, 由嶺東輸送, 則轉運雖難, 亦不可不爲。 一朝糧盡事, 無可爲者矣。” 柳永慶曰: “使賊如有智慮, 虛張聲勢, 以待我糧餉絶乏、戍兵難添, 而竊發則無復可爲之事矣。” 上曰: “糧餉一事, 自朝廷甚費心力, 而輸入之後, 或有虛疎之弊。 彼處亦有句管之人乎?” 奇自獻曰: “以木同之事見之, 則亦未免虛疎之患矣。” 上曰: “非謂必有虛疎之弊也, 但人未能盡爲守法。 曩去癸未年運糧之時, 有李潑者, 私置米石於林藪之間, 見捉而拿來矣。 若泛濫手段, 則或有如此之弊。 一石輸運極難, 而中間若是虛疎, 則必致易竭, 未知何以處之。 屯田亦不得爲之乎?” 柳永慶曰: “屯田亦不得爲之云矣。 且評事崔起南有疾病, 還臥鏡城云, 屯田諸事, 益無句管之人矣。” 上曰: “慶尙道糧餉, 亦輸于北道乎?” 柳永慶曰: “權泰一方以此事, 下去矣。” 上曰: “木同作米以輸乎?” 柳永慶曰: “以木同貿米以輸, 而以亇相船【東海之人鑿木爲舟, 謂之亇相船。】載運, 故所輸不敷矣。” 上曰: “廟堂區畫, 將何以爲之?” 柳永慶曰: “他無得穀之策, 只以木同貿米, 而輸運亦不易, 以此爲悶矣。” 上曰: “頃以狗皮入送北道, 已盡分給乎?” 柳永慶曰: “狗皮入送之數一千領, 而頃見狀啓, 則分給之數, 只四百餘領。 此, 未可知也。” 奇自獻曰: “狗皮之事極爲虛疎。 似聞, 邊將之奴子等, 衣其狗皮而出來者, 比比有之云。” 柳永慶曰: “陳奏文書, 當付于進賀使矣。 前日宣諭一款, 特請聖旨, 直爲宣諭, 果爲未安, 其後考見《吏文謄錄》, 則成化年間, 有直請之事矣。” 上曰: “直諭胡中云乎? 予則以爲事體未安, 故前有傳敎矣。 雖欲請之, 可援例矣。” 柳永慶曰: “成化年間所請之事, 只以藩胡進告胡人會於中原地方, 㤼掠人畜。’ 之說, 奏請宣諭矣。” 奇自獻曰: “此則與今日之事異矣。” 沈喜壽曰: “此雖小事, 係干天使, 故奏聞矣。” 上曰: “必欲直請, 則文書中, 當引前例而爲之。” 柳永慶曰: “陳奏文書, 直請可也, 而恐爲撫鎭等, 衙門所阻也。” 上曰: “何意耶?” 柳永慶曰: “中朝時未知老酋與忽酋相連之狀, 故前日老酋差胡, 入往廣寧, 則李成樑亦厚待云。 諸衙門, 亦慮其生事矣。” 上曰: “我國奏聞之擧, 有若諸衙門不能撫御者然。 以此忌其奏聞云乎?” 柳永慶曰: “兩事中雖未能的指, 而乍聞, 諸衙門氣色, 必不好此擧措云矣。 報于撫鎭等衙門, 則各衙門只自處置而已, 若報軍門, 則軍門之事, 必移兵部, 或爲題奏云矣。” 柳永慶又曰: “南方之事, 平調信死後, 事機頗異, 殊爲可慮。” 沈喜壽曰: “南方極爲可慮。 調信之死, 於我國雖爲可喜, 然其子景直, 又復隱然有恐脅之狀, 此後如有意外之言, 則甚爲難處。 近因北道有警, 未遑南事, 有若相忘者然矣。” 上曰: “曾見狀啓, 要倭言: ‘平秀頼見廢。’ 云, 未知果實否。” 柳永慶曰: “其狀啓之辭, 乃將欲廢秀頼, 而立其第二子之意也, 非已爲之事也。” 奇自獻、尹昉曰: “臣所見以爲, 已爲之事也。” 上曰: “予所見則以爲, 秀頼已廢黜之食邑, 而第二子爲關白矣。” 柳永慶曰: “秀吉, 世讎也。 家康則自言: ‘壬辰年, 關東一卒, 不爲渡海’ 云, 固非秀吉比之也。 賊使如是往來, 而彼中事情, 邈無所知, 秀頼見廢與否, 亦不能知之, 今若差人, 托以某事, 入送于馬島, 則或可探得彼中情形矣。” 上曰: “以何人差遣乎?” 柳永慶曰: “非必如惟政、孫文彧輩差送也, 擇伶俐之人, 稱以東萊府使、釜山僉使軍官, 而遣之則似可。” 上曰: “無害於義理, 則送之可也。 古者兩陣之間, 往來不廢。 備邊司當爲議處可也。 且左相意, 如何?” 奇自獻曰: “臣意亦以爲無妨。” 上曰: “迷劣之人不可送也。 譯官及軍官, 各別擇送可也。 但托以何事而送之乎?” 柳永慶曰: “臣等當退而議處。” 上曰: “更議處之。” 柳永慶曰: “慶尙左水使以李天文爲之, 而今聞, 天文曾未經舟師之任, 且見其爲人, 似未從容。” 上曰: “有疑則當改之。” 尹昉曰: “水使遞差乎?” 上曰: “似當遞差。” 尹昉曰: “ 進宴一事, 大臣陳啓, 未得蒙允, 下情極爲悶鬱矣。 陳賀時, 群情咸願親臨, 亦可見人心所在矣。 今者王世子欲率百官進宴, 揆之天理人情, 實不可廢也。” 柳永慶曰: “ 進宴事, 臣等欲啓達, 而恐涉煩瀆, 不敢於榻前陳達。 適會尹昉啓之, 故敢啓矣。 自上卽位四十年, 不喜宴樂之事。 中間不幸値變, 故非徒不喜宴樂, 雖尋常間事, 亦爲減却, 臣豈不知上意所在? 但今日之事, 我朝慶事中初見之事也。 陳賀之日, 咸願親臨, 外議至以 ‘臣等不爲屢度陳啓爲非’ 人情所在, 亦可見矣。” 上曰: “進宴何必强爲? 雖不進宴, 已領群情矣。 何必排設饌膳, 然後爲可哉? 如此之事, 不爲可也。” 永慶曰: “不如是, 則上下之情, 何得通?” 上曰: “予見啓辭, 予知下情; 啓辭所答, 亦可見上情, 何謂不通也? 不可强爲之事, 何必强爲之?” 永慶曰: “仲朔宴今將爲之。 功臣則至於賜樂、賜花, 而自上過爲謙損, 如是牢拒, 在下之人豈能安心受宴?” 上曰: “此則優待功臣之意也。 功臣則予欲親執爵以宴, 而予難於參宴, 故不得爲之矣。 予則逢國家變難, 豈得與功臣無異也? 自上賜宴, 而功臣受之者, 乃好事也。” 永慶曰: “上意至矣, 但或爲過。 事貴得中, 願賜快許。” 柳根曰: “法典內亦云: ‘自上未受宴, 則自下未有受宴之事。’ 矣。” 申初罷黜。
광해 25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2월 6일(임자) 3번째기사
전대 제왕·충신 등의 능묘 수리에 대해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전대 제왕(前代諸王)의 능묘가 세월이 오래되었는데다 수호하는 사람이 없으니 필시 허물어질 걱정이 많을 것이다.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편리에 따라 수선하고 소제하게 하여 나무하는 사람과 소먹이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게 하라. 그리고 전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양(金陽), 백제의 성충(成忠)·계백(階伯), 고려의 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은 이에 대해서는 그 묘를 봉분해 주고 나무를 심고서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하게 하라. 이것은 단지 그 중에 한둘만 거론한 것이다. 나머지는 다 말할 수가 없다.”
○傳曰: “前代諸王陵墓, 年久之餘, 守護無人, 必多頹毁之患。 令各其本官, 從便修掃, 禁其樵牧。 前代忠臣表著者, 如新羅之金庾信,金陽、百濟之成忠,階伯、高麗之姜邯贊,鄭夢周等, 亦令封植其墓, 禁火、禁伐。 此只擧其一二, 餘不能盡言。”
인조 17권, 5년(1627 정묘/명천계(天啓) 7년) 8월 7일(경자) 1번째기사
주강하다. 호패제와 진관제의 복구, 축성 등을 둘러싸고 이귀와 논의하다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이귀가 아뢰기를,
“치병(治兵)을 잘하는 자는 여럿이 동시에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나라에는 태공(太公)이, 한나라에는 한신(韓信)이, 당나라에는 이정(李靖)이, 우리나라에는 강감찬(姜邯贊)이 있었으며, 국조(國朝)에도 김종서(金宗瑞) 등이 있어서 병사(兵事)를 전적으로 주관하여 공을 이루었습니다. 대개 장임(將任)은 상임(相任)과는 다릅니다. 상임은 혹 잘 처리하지 못할 경우 대간이 비평하고 좌우가 구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임에 이르러서는 시기에 임하여 승부를 결정지으며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욕되게 하니, 신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장(智將)이나 모사(謀士)가 있다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김류가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었으니 팔도의 일을 전적으로 김류에게 맡겨 스스로 결단하게 하여야만 위급할 때 군사를 조발하여 출정(出征)하는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김류의 말을 듣건대, 마음대로 할 수 없다합니다. 이러고서도 공을 이루도록 책임지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류의 말 중에 따라주지않은 것은 남병(南兵)을 조발해 들여보내는 한가지 일뿐이고, 그 밖에 것은 모두 따라 주었다. 무슨 일이 요청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던가,”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무슨 일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정(軍政)을 닦고 거행하는데는 인심을 얻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심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군병이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쓸 수가 있겠습니까. 호패(號牌)를 혁파한 것을 다시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얼마 전에 이원익을 만났더니 그 역시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호패를 혁파한 뒤에 7만이나 되는 도망치거나 죽은 군사를 무슨 수로 충정하겠습니까. 비록 여정(餘丁)이 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이 일정한 거처가 없어 조석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외방에서는 호패를 혁파한 뒤에는 반드시 보충할 기약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합니다.
오늘날 법제 역시 옛 법을 따르지 않고 모두 변혁하여 진관제(鎭管制)를 영장제(營將制)로 변경하였는데, 조종의 법전(法典)이 어찌 지금의 제도만 못하겠습니까. 소읍(小邑)은 대읍(大邑)에 소속되고 대읍은 진관이 되는 것이니 진관이 바로 영장입니다. 이 제도로써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각각 영장 하나씩을 내어 진관 위에 올려놓으십니까. 신이 김육(金堉)의 상소를 보건대, 어느 하나 현재의 병폐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신이 평양의 경우로써 말하겠습니다. 평안감사가 부찰사(副察使)가 된 것은 개국(開國) 이후로 없었던 일입니다. 감사가 어찌 팔도의 감사를 절제(節制)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훤(尹暄)이 부찰사를 겸직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정병 2천명을 징발해 평양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튿날 군사가 무너져 흩어져 정호서(丁好恕)가 거느린 바는 약간의 민병(民兵)뿐이었습니다. 만약 호서가 이로 인해 주살된다면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축성(築城)의 거조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맨몸으로 탈출하거나 전쟁에서 부상당한 잔약한 백성들을 몰아다가 성을 높게 쌓고 못을 깊게 파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김육이 축성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한 것은 매우 시무(時務)에 맞는 말인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시는 뜻을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축성의 불가함을 말했는데,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즉시 수축해야 된다고 하기에 억지로 따른 것이다.”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무사를 뽑아 어영군(御營軍)에 소속시켜 집에서 변란을 기다리게 하였다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장수를 명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을 이루고 적을 깨뜨리는데 있어 어찌 성의 유무에 힘입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성을 쌓아야 한다면 안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가야 하니, 금년에 행주(幸州), 명년에 평산(平山), 또 명년에 서흥(瑞興)에다 산성을 쌓고 점차로 황주(黃州)·평양(平壤)·안주(安州) 등의 성을 쌓아,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치 늘어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자 늘어나게 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또 신은 황주의 성랑(城廊)은 더욱 무익하다고 여깁니다. 적이 사닥다리를 이용해 성에 올라와 섶을 묶어 화공(火攻)할 경우,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무익하다는 것을 안다. 묘당에서도 서서히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지금 수축 중이라 하니, 일을 담당할 신하가 반드시 무슨 견해가 있어서일 것이다. 김육이 논한 성랑에 대한 일절은 참으로 옳다. 영장 제도가 비록 장구한 계책은 못 되지만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데는 도움이 없지 않으니 쉽게 고치기 어려울 듯하다.”하였다.
○庚子/上晝講《孟子》。 講訖, 李貴曰: “善治兵者, 世不竝出。 故周有太公, 漢有韓信, 唐有李靖, 而我東有姜邯賛, 國朝亦有金宗瑞等, 專主兵事, 克成厥功。 蓋將任與相任有異, 相任則或不能善處, 而臺諫可以評之, 左右可以捄之, 至於將任, 則臨機決勝, 酬酢萬變, 一有差誤, 喪師、辱國。 若不信任, 則雖有智將、謀士, 難以成功。 當今金瑬, 旣爲八道都體察, 則八道之事, 全委於金瑬, 使之自斷, 脫有緩急, 調兵出征, 可鎰力。 臣聞金瑬之言, 則亦不得自由云。 如是而可謂責成乎?” 上曰: “金瑬之言不從者, 只調入南兵一事而已, 其餘則盡從, 何事不得請云耶?” 貴曰: “未知爲何事, 而其言如此也。 軍政之修擧, 莫如得人心。 人心不順, 則雖有軍兵, 何可用之? 號牌旣罷, 言之無益, 而臣頃見李元翼, 則亦以爲悔矣。 號牌旣罷之後, 七萬逃故之軍, 焉得而充定乎? 雖有餘丁, 民無定居, 東奔西走, 朝移暮徙。 臣聞之, 外方號牌罷後, 必無充補之期云矣。 今日法制, 不由舊章, 率皆變革。 鎭管之制, 今變爲營將。 祖宗朝法典, 豈不及於今日乎? 小邑係於大邑, 大邑爲鎭管, 鎭管卽營將也。 以此治兵, 何所不可, 而各出一營將, 加之於鎭管之上乎? 臣見金堉上疏, 則無非切中時病。 若不用如此之人, 則亡國必矣。 臣請以平壤言之。 平安監司之爲副察使, 是開國以來所無之事也。 監司豈有節制八道監司之理乎? 尹暄以兼副察之故, 調入黃海精兵二千於平壤, 翌日潰散, 丁好恕之所率, 只若干民兵而已。 好恕若以此被誅, 誠極冤抑。 築城之擧, 雖出於不得已, 而驅赤脫瘡殘之民, 高其城、深其池, 有何益乎? 金堉之言築城不便, 深得時務, 而殿下斥之, 臣未之知也。” 上曰: “卿言築城之不可, 予意亦然, 而廷議以爲當卽修築, 故勉從矣。” 貴曰: “爲今之計, 莫如抄出武士, 屬於御營軍, 在家待變, 脫有緩急, 命將出征, 則成功、破敵, 何賴於城池之有無? 然必欲築城, 則宜自內而外。 今年築幸州, 明年築平山, 又明年築瑞興山城, 漸次而築黃州與平壤、安州, 譬如得寸則王之寸, 得尺則王之尺也。 且臣尤以黃州之城廊, 爲無益也。 賊若以雲梯駕城, 束草以火攻之, 則非徒無益, 而又害之。” 上曰: “予亦知其無益。 廟堂又有姑徐之議, 而今方修造云, 當事之臣, 必有實見得也。 金堉之論城廊一節, 誠是矣。 營將雖非長久之計, 至於目前救急, 則未爲無助, 似難容易更改也。”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4월 16일(갑진) 5번째기사
윤휴가 병거의 일로 사직하자 이를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윤휴(尹鑴)는 그가 진달(陳達)한 병거(兵車)의 일이 시행되지 아니함을 분하게 여겨 소(疏)를 올려 묘당(廟堂)을 배척하고, 물러나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요사이 병거를 만드는 일은 다만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즉시 중관(中官)을 시켜 자세하게 살펴보게 하였다. 그 도형(圖刑)을 보니 위급한 경우에도 사용할 만하고, 또 적(敵)을 방어하는 데도 장기(長技)가 될 만하였다. 이와 같다면 어찌 물력(物力)이 많이 피폐해질 것을 아까와하겠는가, 곧 양국(兩局)569)과 관서(關西) 지방에 분부하여 요리(料理)하여 만들어서 음우(陰雨)를 대비하게 하겠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윤휴의 소(疏)가 들어오자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화원(畫員)을 인솔하고 가서 병거의 제도를 보고 모양을 그려서 들이게 한 뒤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으니, 이는 대개 환시(宦侍)들이 힘써 찬성하였기 때문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옛날 우리나라가 삼국(三國)으로 나뉘었을 적에 고구려(高句麗)는 조그만한 나라였지만, 능히 수(隋)와 당(唐)의 백만(百萬)의 군사를 달아나게 하였고, 승국(勝國)570)에 이르러서도 강감찬(姜邯贊)이 또한 거란(契丹)의 군사를 쳐서 깨뜨렸으니, 이는 장상(將相)에 적임자를 등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나라 형세로써 윤휴와 같은 미치고 어리석은 자에게 맡기는 것은 마치 촉(蜀)의 임금 소원(昭遠)이 철여의(鐵如意)571)를 휘두르면서 스스로 제갈양(諸葛亮)에게 비기는 격이니, 석진(石晉)572)의 화(禍)같은 것이 발뒤꿈치 돌릴 사이도 없이 곧 닥치게 될 것이다.”
註569]양국(兩局): 훈련도감과 어영청.註570]승국(勝國): 고려를 말함.註 571]철여의(鐵如意): 쇠로 만든 채찍.註572]석진(石晉):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後晉).
○尹鑴忿其所陳車事之不先施, 疏斥廟堂, 乞退歸。 上答曰: “頃日兵車造成事, 只慮物力之不逮矣, 卽令中官, 詳細看審。 見其圖形, 則可以足用於緩急, 亦足爲禦敵之長技。 如此則何惜物力之多弊? 卽令分付於兩局及關西, 料理造成, 以爲陰雨之備, 安意勿辭。” 鑴疏入, 上令宦侍率畫員, 往見車制, 圖形以入, 始下批, 蓋宦者力贊之也。【史臣曰: “昔東國三分之日, 以高句麗蕞爾之國, 能走隋、唐百萬之師, 至勝國姜邯賛, 亦擊破丹兵, 此在將相之得人而已。 以今日國勢, 任鑴狂愚, 則若蜀王昭揮鐵如意, 自方諸葛亮耳, 石晋之禍, 不旋踵矣。”】
숙종 4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2월 7일(경신) 1번째기사
신숭겸·곽재우 등의 사우 문제를 품처토록 하고, 조지겸과 이세화를 삭탈하도록 하다
삼복(三覆)하였다.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대구(大丘)에 신숭겸(申崇謙)·김낙(金樂)의 사우(祠宇)가 있고, 현풍(玄風)에 곽재우(郭再祐)·곽준(郭䞭)의 사우가 있고, 금천(衿川)에 강감찬(姜邯贊)·서견(徐甄)·이원익(李元翼)의 사우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절행(節行)의 사실이 드러났으나, 모두 사제(賜祭)와 사액(賜額)을 거행함이 없었으니, 흠전(欠典)이 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官)에서 향수(享需)를 주고 사액하는 일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하였다.
윤휴(尹鑴)가 또 체부(體府)의 일을 발설하여 지금 곧 차출(差出)하기를 청하였는데, 허적(許積)이 우선 사행(使行)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뒤에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윤휴가 또 관교(官敎)를 먼저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후일 정사(政事)에 계하(啓下)할 것을 명하였다. 집의(執義) 유명현(柳命賢)이 전계(傳啓)한 뒤에 마음에 품은 바를 가지고 조지겸(趙持謙)·이세화(李世華)를 〈죄주자는 의논은〉 윤허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진계하고, 허적도 조지겸의 죄는 파직에만 그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명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하지 말고, 삭탈(削奪)만 하도록 하였다. 헌납(獻納) 이수경(李壽慶)이 또 이세화는 죄줄 만하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재주와 식견이 없지 않기 때문에 윤허하지 아니한다.”하였다.
이수경이 말하기를,
“재식(才識) 가운데 식(識)자는 부당(不當)하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재국(才局)으로 이르는 것이 오히려 혹시 옳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래 글자는 과연 잘못되었다.”하였다.
뒤에 삭탈(削奪)의 일로써 잇달아 아뢰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庚申/三覆。 許穆曰: “大丘有申崇謙、金樂祠宇, 玄風有郭再祐、郭䞭祠宇, 衿川有姜邯賛、徐甄、李元翼祠宇。 此等人節行事實表著, 而俱無賜祭賜額之擧, 似爲欠典。” 上曰: “官給享需, 賜額事, 令該曹稟處。” 尹鑴又發體府事, 請趁今差出, 許積請姑待使行回還後, 上可之。 鑴又請先降官敎, 上命於後日政啓下。 執義柳命賢傳啓後, 以所懷陳趙持謙、李世華啓, 不可不允從之意, 積亦言持謙之罪不可止於罷職, 上命勿爲門黜, 只削奪。 獻納李壽慶又言李世華之可罪, 上曰: “不無才識, 故不允矣。” 壽慶曰: “才識之識字, 臣謂不當, 謂之才局, 猶或可矣。” 上曰: “下字果誤矣。” 後以削奪事, 連啓不已, 上從之。
숙종 5권, 2년( 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1월 8일 신묘 3번째기사
곽재우, 곽준, 강감찬, 서견, 이원익의 사우에 액호를 내리다
곽재우(郭再祐), 곽준(郭䞭), 강감찬(姜邯贊), 서견(徐甄), 이원익(李元翼)의 사우(祠宇)에 액호(額號)를 내리기를 명하였다.
○命賜郭再祐、郭䞭、姜邯贊、徐甄、李元翼祠宇額號。
정조 45권, 20년(1796 병진/청순치(順治) 1년) 7월 21일(갑자) 2번째기사
현충사에 임경업·황일호를 배향하게 하다
예조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현충사의 위차(位次)에는 이미 고려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과 아조(我朝)의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을 아울러 배향하는 반열에 두었는데, 충렬공 황일호도 아울러 배향해야 합니다. 충장공(忠壯公) 최효일(崔孝一)의 경우는 속국의 배신(陪臣)으로서 대의를 앞장서서 부르짖고 마침내 또한 황릉(皇陵) 옆에서 순절하였으니 실로 천고에 드문 한 사람입니다. 성상의 전교에 의거하여 임경업·황일호 두 충신과 아울러 배향하는 반열에 올리소서. 육의사(六義士)의 경우는 동서로 나누어 배식(配食)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따랐다.
○禮曹判書閔鍾顯啓言: “顯忠祠位次, 已以高麗太師姜邯賛、我朝忠愍公林慶業, 竝列妥侑, 忠烈公黃一皓, 亦當竝享。 至於忠壯公崔孝一, 以屬國陪臣, 首倡大義, 終又殉節於皇陵之傍, 實是千古一人。 依聖敎, 與林、黃兩忠臣, 竝躋。 至於六義士, 則分東西配食爲宜。”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1월 27일(양력) 6번째기사
연로에 있는 선비들과 이름난 신하들의 사당에 치제하도록 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국토를 개척하여 돌에 새겼으니 공로와 업적이 특출하다. 행차가 서쪽 지방으로 향하는데 솔밭이 바라보인다. 고려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우리나라의 공자(孔子)로서 아낙네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칭송하고 있다. 행차가 임진강(臨津江)을 지나서 화석이 바라보이니 맑고 시원한 기상을 직접 보는 것 같다. 선정(先正)인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도를 독실하게 실천하여 길이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행차가 그가 은거하였던 고장을 지나게 되니 감흥이 더욱 크다. 선정인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세월이 이미 오래되고 흥하고 망한 것이 일정하지 않기는 하지만 나라를 하나로 합치고 우리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으니 보답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숭의전(崇義殿)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고려의 현릉(顯陵) 이하 여러 능들에 대해서도 지방관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각별히 보수하여 주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행차가 고려의 옛 도읍지를 지나니 위인들을 두루 셀 수 있다.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은 강대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안정시켰으며, 시중(侍中) 최충(崔沖)은 학교를 일으켜 세우고 국력을 배양하였으니 그 특출한 공적이 길이 빛날 것이다. 그들의 묘지를 다같이 찾아보고 보수하며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임금의 학문을 높이고 선비의 기풍을 추겨 세워 지금도 특출한 공로가 빛나고 있으니 그것은 누구의 공인가, 행차 길에 멀리 사당을 바라보니 숭엄해진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바른 기운이 모여 성리학의 근본이 되고 영혼을 모셔 여러 어진이들을 숭엄하게 배향하고 있으니 숭양서원(崧陽書院)에 지방 관리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한 조령을 내리기를,
“예의를 시행하는 것이 정밀하고 밝으며 도에 나가는 것이 독실하고 깊어서 참으로 선비들이 크게 우러러보게 되었다. 행차가 평산을 지나 무덤 나무들이 바라보인다. 선정인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무덤에 지방 관리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詔曰: “斥疆勒石, 勳績卓犖。 輦路西指, 松杉入望。 高麗侍中尹瓘墓, 遣地方官致祭。” 又詔曰: “我東夫子, 婦孺皆誦, 駕過臨津, 花石入望, 光風霽月之象, 怳如親覿。 先正文成公李珥祠版, 遣地方官致祭。” 又詔曰: “踐道醇篤, 百世儒宗, 駕過考槃之鄕, 尤切曠感之想。 先正文簡公成渾祠版, 遣地方官致祭。” 又詔曰: “歷年旣久, 興替雖殊, 混一區宇, 功德之在我民者, 厥有崇報之典。 崇義殿, 遣地方官致祭。 高麗顯陵以下諸陵, 遣地方官奉審, 各別修治。” 又詔曰: “駕過勝國古都, 歷數偉人。 太師姜邯贊, 摧拉强寇, 奠安王業, 侍中崔沖, 振興學校, 培養國力, 豐功卓績, 千載曠感。 其墓地, 竝訪問修治, 令地方官致侑。” 又詔曰: “尊聖學振儒風, 至今彬彬。 繄誰之功, 蹕路遙望, 堂斧有儼。 文成公安裕墓, 遣地方官致祭。” 又詔曰: “正氣所鍾, 理學之祖妥靈之所, 群賢儼配, 崧陽書院, 遣地方官致祭。” 又詔曰: “踐禮造道, 精明篤深, 允爲儒林之所景仰。 駕過平山, 墓木入望, 先正文純公朴世采墓, 遣地方官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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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眞保)-양(揚)-비웅(非熊,인헌공 13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