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영도 씨의 글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표현한 많은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제가 쓴 거의 유일한 비평문인 [드래곤 라자 비평문]부터 이후에 나오는 그의 많은 글에 대한 감상/단평에서 그에 대한 호의와 호감을 가득 드러낸바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영도 씨의 등장은 우리나라 환상 소설 광장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유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감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영도 씨는 한국의 엘리트 문학판을 깰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했고, 일정부분의 성과를 얻었으며, 많지 않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변태(!)하고 있다는 사실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엘리트 문학판, 이라는 말은, 등단제도 및 추천제도를 통해서만 기성 소설판에 들어올 수 있는 제도적인 제약 탓에, 많은 소설 지망생들이 자신의 재주를 꽃피워볼 기회를 잃고 - 쉽게는 신춘문예 같은 경우에라도 심사위원들의 <기호>를 맞춰야 입상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지요 - 만년 지망생으로 마치는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며, 그 위에는 소수의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소설판을 짜버리고 그대로 유지해왔다는 고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소설판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새로운 시도들은 폄하되거나 자극적인 관심을 잠깐 받다가 스러지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제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대립도 깨어져 더 이상 <시대적인 갈등>을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 기성작가들이 새롭고 요상한 시도 - 이문열 씨의 [여우사냥]이나 [아가]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지요. 이슈화해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 사실주의적인 창작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사실의 갈등을 글로 끌어와야하고, 반드시 무리수를 낳겠지요 - 를 계속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젊은 독자들의 관심을 잃던 그 때이며, 속칭 - 속칭입니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에요 - <B급소설>이라고 일컫는 추리 소설, 무협 소설 등이 PC 통신 속에서 붐을 타고 젊고 가벼운 - 비하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가볍다,는 표현은 진중한 성찰을 진중한 방식보다는 경쾌한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들을 뜻합니다 - 이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합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1996년여, 김근우 씨의 [바람의 마도사]가 스포츠신문의 가십성 기사로 소개되고, 톨킨의 [반지의 군주]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던 때이지요. 시류라는 것은 어찌보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나우누리가 생겨나면서 PC통신 열풍이 불고, 그 안에서 아마추어 습작가들이 자신의 창작욕을 마음껏 누리고, <시장>이 그런 열기를 주목하고, 테크놀로지컬한 문학의 시도인 <통신 문학>이 본격적인 모양새를 띄던 그 때. 출판물 시장 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환상 소설은, 통신 문학의 붐 안에서 서구의 몸통에 기대어 가지를 뻗기 시작합니다. 그게 1997년 부근이지요.
그것을 <검증되지 못한 문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 저는 엘리트적 사고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이 소설 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검증은 독자가 내리는 것입니다. 물론, 무비평 - 비판, 이 아닌 - 의 열광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그다지 좋지 않을겝니다. 그런 면에서 이영도 씨 같은 경우에는 많은 독자들이 그의 글을 호평한 바 있고, 그만큼의 근거를 갖추기도 한 것이 사실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한국의 엘리트 문학판을 깨뜨리는 단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영도 씨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환타지를 쓰는 것은, 나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환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환타지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와 주제, 그리고 그 속에서 명멸하는 인간을 쓰는 작가입니다. 환타지는 도구일 뿐이죠. 우리 문학이 이제 환상 소설에도 눈돌릴 수 있도록 - 상업성의 여지에서도 - 만든 그에게, 현상의 대립에만 목을 매는 엘리트 문학판의 균열을 가지고 왔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일정부분의 성과에 대해서, 우리는 이영도 씨가 거둔 성취를 두세가지로 말할 수 있을겝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 <좀비>를 자처하며 달려드는 일군의 독자군과, 상업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것, 그리고 통신 문학에서 환상 소설로써 전이해 낸 그의 변태(!!)까지.
문학이 그 매력을 잃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문학만큼 매력적인, 혹은 더 매력적인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문학마저도, 21세기의 현란한 엔터테인먼트 문화 기법의 하나로 열광받을 뿐, 활자화 된 텍스트의 의미로는 그 매력이 점차로 무시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책이,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기법의 문화 매개체와 연관되어 큰 반향을 일으킬 뿐, 고전적인 의미의 독서는 그 매력을 발산할 기회를 얻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디지털 도구들 밑에서 아날로그 식의 소통과 사고는 점점 뒷걸음질을 강요당하고 있고, 독서는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읍시다!> 이만큼 공허한 구호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독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취미 중에 가장 고상한 것에 속하니, 군말없이 하자, 라는 막무가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다른 세계의 문학과는 특별히 다른, 마치 고인 웅덩이의 물같이 변화를 도외시하는 문학판에서 아무리 저런 구호를 외쳐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외계어와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오래된 메아리를 울리듯, 그런 글들은 쓰레기라는 말을 해야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문학이 변모해야할 동기를 부여하고, 그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달려나가는 그런 모습, 그것이 필요하고, 이영도 씨의 소설은 꿋꿋이 그런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에 열광하는 일군의 독자군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 시대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 중 하나일 뿐입니다. 순수문학/대중문학 혹은 장르문학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타파하고, 세상에 글이라고 생겨먹은 것들 중에서, 글의 효용성을 심하게 훼손하는 문학에 대한 곁가지를 쳐내고 나서는, 모든 문학에 동일한 무게를 주고, 그 무게의 정당한 근거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이영도 씨의 독자군은 중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그것을 해내야하는 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영도 씨는 그런 독자군을 그의 벗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런 독자군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상업적인 가능성까지 보여준다는 것은 마치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파리 잡은 격이 아니겠습니까. 어찌보면 순수한 독자-작가의 소통 속에서 작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 상업성은 결코 악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리스트가 공존하는 이상, 아마추어들은 프로들을 위할 때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프로의 성취로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프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새장에 넣ㄱ... (퍼억!) (농담입니다; 이놈의 농담기는 가시지를 않아서;;) 이영도 씨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환상 소설 혹은 소설이라고 하는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얼마 안되는, 전업작가입니다. 그 가능성을 폄훼당하는 소설 부류 - 장르가 아닙니다! - 로 보여준 것이 바로 그의 성과가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그는 <결국> 그 자신으로 비롯한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오롯이 그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했습니다. [드래곤 라자]는 그 주제 면에서 이영도 씨의 소설의 바이블이 될 정도로 많은 사유를 담고 있지만, 통신 기반의 실시간 소통 문학이라는 특색 탓에 느릿느릿한 아날로그적 (독자와의) 간극을 유지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드래곤 라자]는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에 지나치게 신경 쓴바가 선연히 보이죠. 그러나, 점차로 그는 그 자신의 호흡을 보여주고 있으며, 폴라리스 랩소디의 충격적인(!) 결말은 이제 이영도 씨가 자신의 호흡대로 독자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덕택에, 그의 글 말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잡담의 양이 현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매일 <좋은 밤 되세요> 라니요! 가끔은 슬프고 서러우며 힘든 밤도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의 잡담 분량이 많아야 이 호 씨가 [이영도 잡담 모음집] 업데이트를 생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성과가 적지 않은 것이라해도, 그에 대한 폄하는 상당히 큽니다. 기성 판 위에 있는 사람들의 폄하는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원체 노는 판이 다르니까... 그러나 적어도, 작가의 고유한 이야기를 침해하는 비난은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물론, 이영도 씨는 자신의 잡담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가 무엇에 기반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표절과 체화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데카르트 적인 사고를 하고 헤겔에 경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데카르트가 아니고 헤겔과는 거리가 먼, 바로 <나 자신>일 뿐입니다. 저건 누구의 생각이네, 어디서 베꼈네 식의 폄훼여서는 곤란합니다. 특히 [드래곤 라자]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작가의 말장난이 싫다, 는 글을 많이 보았습니다. 분명히 독자의 피드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피드백은 부정적인 면에 국한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소통을 위해서 만난 사람입니다. 독자는 작가를 평가하는 심사자가 아니라, 작가와 때로는 공명하며 때로는 선을 긋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서로에 대한 확인의 과정을 거치는, 동반자입니다. 작금의 긁읽기 중에서, 공명의 의도가 아닌, 폄훼의 의도가 분명한 긁읽기를 심심찮게 보게 되는 바,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정말 공명할 것이 없다면, 왜 없는지를 예의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독자의 소통입니다. 하물며... 어마어마한 노작으로 1년에 한 번씩 독자를 심란하게 만드는 작가에 대해서라면 더욱 말이죠.
2) 그러나 아쉬움 서너개
이제 이영도 씨가 자신의 글을 이 세상에 내어둔지 약 8년 여가 되었습니다. 첫 작품인 12권의 [드래곤 라자] 부터, 지금 연재 중인 도대체 몇 권이나 나올지 알 수 없는 [피를 마시는 새] 까지. 글을 더해갈수록 느끼는 독자로서의 아쉬움 몇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일단, 이영도 씨의 글은 [드래곤 라자]와 일맥상통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그 중에서도 특히 능동적인 개인의 변화가 우선될 때, 우리가 사는 사회도 살만하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환상 소설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은 분명히 비현실적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에 맞닿지 않는다면 환상이 아닙니다. 말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몽환과 환상은 엄밀하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몽환이 현실에서 그 대척점 또는 지지점을 찾을 수 없다면, 환상은 그것 아래에서만 기필코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상 소설은 반드시 현실적인 바, 늘상 알레고리 소설과 묘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혼동되는 경향이 있는 것일 겝니다. 그럼, 환상을 통해서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에 어떤 장점이 있는가.
주제가 현상/현실과 중의적 의미를 띄는 경우를 막을 수 있습니다. 혹은, 주제가 현상/현실의 부수적인 요소로 위상이 격하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수난 이대(하근찬)]라는 소설은, 부자간의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뒷다리를 쥐고 있는 것은 징용과 6.25입니다. 현실의 고통 속에서 화해하고 소통하는 부자간의 관계,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징용에도 6.25에도 무감각합니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그렇다고 팔과 다리가 각각 하나씩 없는 부자관계는, 일반적인 부자관계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현실에 기반한 사실주의적인 소설의 한계는, 시대와 병렬되어야 그 의미가 온전해진다는데에 있습니다. 뫼르소(이방인, 까뮈)의 태양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커다란 자각의 문제가 아니며, 정우와 윤수의 죽음(환상수첩, 김승옥)은 처열한 삶과 죽음을 살아낸 그들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에게로 수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상/현실을 주관하는 사유의 도도한 흐름을 있는 모습 그대로 공유하는데, 환상의 기제만큼 순수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시대적인 흐름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는데에서는 현학적인 부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테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현실과 현상에 대한 현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영도 씨의 [드래곤 라자]는 충실하게 그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변주는 있지만, 신곡은 없는 것이 독자가 느끼는 안타까움의 제 일번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변주는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솔직담백하게, 혹은 설익고 섣부르게 작가의 생각을 내비쳤다면 - 11권까지는 꼼짝없이, 작가가 칼인줄 알았습니다. 아니더군요 - [폴라리스 랩소디]는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들과 잘 버무려서 맛있는 글로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케이건 드라카의 믿음은 바로, 칼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후치가 뻔뻔하게 뒤쫓은 신뢰였습니다. 세리스마의 독백, 그리고 케이건과 갈로텍의 땡깡부림... 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가득함에도 - 비형과 케이건, 그리고 사모 페이 - 불구하고 독서를 마친 독자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 말고, 제 3의 작품을 기대하는 제게, 이번 [피를 마시는 새]는 그래서 남다른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또 다른 안타까움울 이야기하라면, 나아진 묘사와는 달리 서술은 여전히 작중 인물의 입에 많이 의존한다는 사실이며 혹은 그것이 당연한 바일지라도 당연하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설명하라> <말하라>. 작가는 이제 작중인물을 조금 덜 혹사해도 될 것입니다. 사모 페이, 혹은 치천제의 입에서 나오는 저 타협과 상상의 여지 없는 단어는, 케이건 혹은 키 드레이번의 입에서도 가끔 등장하던 단어입니다. 그것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이제 작가는 출연진의 교체를 고려해 볼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매력적인 캐릭터를 잔뜩 깔아놓아도 -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니어엘 헨로와 그의 까는 부위 외 다수의 부하들, 사라말 파라말 형제, 짜증나지만 이영도 씨의 캐릭터로써 첫 선을 보이는 헨로 모녀 등이 등장하죠. 아아. 그러고보니 매력남들이 득시글거리던 [폴라리스 랩소디]를 따라가지는 못하는군요... - 곤혹스럽게 만드는 장수 캐릭터들은 변화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제가 변주되는 폭의 좁음과 유사한 캐릭터의 인물이 극을 주도한다는 사실의 불변함에 이은 또 다른 독자의 안타까움은, 글이 재미없다는 사실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의 <물었군> 혹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날아라!>가 너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확실히 재미가 줄었습니다. 짜임새는 더 단단해졌고, 인물들도 더 생동감있게 움직이며, 이야기도 더 폭넓어졌는데, 이상하게 재미가 줄었습니다. 다행히, [피를 마시는 새]에서 니어엘 헨로 <일당>의 화살질과 사라말, 파라말, 아트밀 세 친구의 바다여행은 흥미진진하고 심장이 벌렁거릴만큼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버거웠다는게 초보 독자의 느낌입니다. 아울러, 작가의 잡담도 잡담이 아닌 제 2의 소설연재화된 것이 조금 섭섭했습니다.
이건 조금 개인적인 느낌을 이야기한 것이라서 그다지 큰 설득력이 있지는 않겠지만, 누가 뭐라고해도, 저는 갈색산맥을 휘감아 넘으며 크라드메서를 통구이하러 달음박질하던 폐태자와 중늙은이 일당이 마음에 듭니다. 비록 그 말장난들이 이영도 씨의 평가에 소소한 덜미가 되어서 놓지 않고 있지만, 이영도 씨야 그런 것에 대해서는 눈깜짝도 하지 않을 터이고, 그를 읽어내려가는 독자들은 적어도 말장난과 작가의 삶을 구분할 수 있는 체 정도는 들고 있을테니, 그것을 마음껏 소망해 보렵니다.
2. [피를 마시는 새] 이야기
0) 미완결인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담감
자그마치 25챕터나 연재된 글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창고가 그득하게 차올라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넘쳐나야하겠지만, 작가가 이영도 씨인 관계로 그건 기대할 수가 없겠습니다.
[폴라리스 랩소디]의 예를 생각해볼 때, 기껏 따라잡았던 것을 마지막에서 뒤엎어 갈아놓고 새로 재단하는 것이 작가의 취미이자 성격(!)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니, 이건 도통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작가와 공명을 이루거나 혹은 이 글을 쓰는 독자 모 군의 또 다른 해석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끄덕/갸웃갸웃/절레절레 할 수도 있겠지요.
0‘) 아마추어 독자의 작은 자기 변명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저는 <생업>의 가능성 유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서 쓰는 독자는 흔히 평론가라고 말하는 프로들이고, 저는 이미 집짓는 일로 먹고살고 있으니 저는 아마추어 독자이겠지요. 그러니, 아마추어로써 대우해주세요. 그리고, 제 글을 읽는 아마추어 독자분들께서도 제 글에 대해서 아마추어다운 반응을 보여주세요.
타이모와 아실에게서, 저는 작가와 독자를 봤습니다. 타이모가 작가라면, 아실은 독자입니다. 그것도 훌륭한 독자...
타이모의 분리주의 자체는, 그다지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실이 더하고 빼고 뭉치고 흩어두니까 멋진 분리주의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분리주의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결국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거칠게나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작가를 만드는 것은 독자입니다. 그래서 독자가 중요한 것이죠. 제아무리 훌륭한 이야깃거리를 써내어도 독자가 알아보지 못하면 흔히 <사장된다>고 하는 슬픈 일을 겪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표현이 유사한 것이죠. 그래서 명작 중에서는 동시대에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우도 꽤 많지요. 유명한 예가 이상, 이라는 작가의 예겠습니다.
한편, 허섭한 작가라도 독자가 그의 글에 대해서 편견없이 잘 읽어준다면, <독자의 적절한 해석이 붙은 작품>은 뛰어난 텍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질 높은 비평/감상은 작가에게나 2차적 독자 - 작가의 글과 비평/감상글을 다 읽은 독자 - 에게 의미있는 행동이 됩니다.
그리고 작가를 키우는 것은, 독자로부터의 긍정적인 시선과 정확한 평가, 그리고 양자간의 사유의 접점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독자와 작가는 모두 승자가 될 수 있겠지요. 글에 대한 부정확한 비판, 혹은 이유 박약한 부정적인 시선은 양자에게뿐만 아니라 2차적 독자에게도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겠지요.
비단, 분리주의가 아실의 것이든, 타이모의 것이든간에, 중요한 것은 타이모와 아실이 만들어낸 <분리주의 - 작가와 독자의 공유된 사유>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독자와 작가에게 의미를 가진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1) 유료도로당
쉬운 이야기부터 해보지요. 유료도로당, [피를 마시는 새(이하, 피새)]에서는 더 큰 세력으로, 주제의 중심부에 서 있습니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이하, 눈새)]에서는 작중인물인 케이건 드라카의 개인사에 더 큰 초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유료도로당은 꽤 괜찮은 집단체로써 전작에 등장한 바 있고, 후작인 [피새]에서도 (지금까지는) 유사한 모양을 띄고 있습니다.
유료도로당의 사상은, 인간의 삶을 평가하지 않는다, 는 공평함에 있습니다. 그들의 공평함이란, 모든 인간은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정한 것이 아니라,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 유료 도로당원들에게, 주퀘도 사르마크도 권능왕도 단지 <은편 열 닢>으로 밖에는 취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 - 킴(인간)도, 도깨비도, 레콘도, 심지어는 나가도 - 은 모두 길을 이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평가되며, 그 평가는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지 않는 지극히 객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가 물질 중심적이며, 그렇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물질적인 잣대로 평가받는 어이없는 사회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또 실제로 느끼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비인간적이며, 인간이 더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라고 자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사회의 <인간의 가치화>가 유료 도로당에 의해서는, <인간의 평등화>로 바뀌어 버립니다. 왜입니까.
유료도로당은 모든 인간의 <가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왕도, 왕이 될뻔한 자도, 나가도, 인간도, 레콘도, 도깨비도, 심지어는 신을 잃었기에 가장 귀중한 것을 잃은 두억시니 마저도, 유료도로당에게는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유료도로당에게 패배한 주퀘도가 쓸쓸히 관문을 통과할 때, <은편 열 닢>이라고 값어치를 매겨버리는 그런 이면에는, 유료도로당 앞에서는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인간을 단지 인간으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무슨 대학 출신> 혹은 <무슨 직업을 가진 사람> 또는 <어디 가문 태생> 같은 딱지를 붙인 인간을 보는 것은 모두 헛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유료 도로당원들 앞에서, 신을 잃었기에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두억시니는, 비로소 그들의 삶의 목적 - 나가와 레콘, 도깨비와 딱정벌레를 쫓는 - 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단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걷는 나그네의 눈물에 동참할 수 있지만, 그와 함께 걸어가지는 않는 유료도로당의 모습은, 철저하게 인간 본연을 위한 시선이자 삶의 태도입니다. 모름지기 의지를 가진 인간이 있다면, 그 의지가 바로 삶의 목적이며, 그 삶의 목적만으로 인간은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금을 내지 않는 두억시니를 통과시키지 않는 유료 도로당의 행위는? 그것은 바로 원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정을 가치 판단의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두억시니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유료 도로당원들은 그런 불쌍한 두억시니에게,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가치를 인정받은 <인간인 두억시니>가 그들의 의무를 다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두억시니에게 부여된 그러한 원칙은 가혹한 것입니까? 그러나, 유료 도로당원들은 사모 페이가 요금을 대신 내는 것까지 막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길잡이>인 케이건 드라카가 두억시니의 요금을 대신 내어주기를 슬며시 시험합니다. 그것은 존중되는 원칙 가운데,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원칙은 깨어지지 않으면서, 모두가 존중되고 동일한 가치를 부여받는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젊은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에게 그들의 도로를 팔아버린 당의 행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도로 판매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다 할지라도 원칙에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자 타인에 대한 따뜻함입니다. 그래서 유료도로당은 사라말 아이솔에게 동편 한 닢에 도로를 팔고는, 금편 500닢에 도로를 사들인 후에, 그 돈이 가치있게 쓰이도록 방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의 문제, 모든 사람을 돈으로 가치판단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만약에 유료도로당이 그들 자신의 축재를 위해서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들의 돈은 온전히 길을 걷는 이들에게 돌려집니다. 길은 보수되고 확장되며 평탄하게 됩니다. 돈은 가치판단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다름에 대한 인지일 뿐입니다. 레콘과 나가가 덩치도 다르고 보폭도 다르듯이, 그냥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제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료도로당을 보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공정함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보다 - 자유무역당 - 공평함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비록 세상의 양적인 증가에는 이바지하기가 어렵겠지만, 질적인 성장에는 큰 몫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는 시작이라는 것이겠습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온 것, 하늘치 유적 발굴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요. 물론 [눈새] 이야기가 아니지만, 기왕에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늘치 유적 발굴단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담백한 그들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공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제2차 대확장 전쟁 중에, 그들은 다시 모입니다. 라수 규리하가 북부군을 특공대화 시켜서 키보렌으로 진격하고, 나가 군대는 자신들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서 뒤따라 내려가는 그 순간, 조금은 한가해진 북부의 땅에서 롭스는 4년 만에 다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호출받은 사람은, 모두, 전쟁 통에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상황과 형편에 대해서는 한 가닥의 의심도 없이 다시 돌아옵니다. 오레놀은 걱정합니다. 세계를, 미래를, 또한 자신을. 그러나 하늘치 유적 발굴단에게 전쟁의 공포도, 암울한 잿빛 미래도,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보는 자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늘치 유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치는 <복수>의 키 드레이번 선장과 놀랍게 닿아 있습니다. 그 유적은 암담하게도 보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적입니다. 그래서 유적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 손은 허무하게 유적을 통과합니다. 그 때, 만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뻗은 손에, 유적은 걸려듭니다. 소망과 욕망은, 그 바람(hope)의 삿됨 유무에 따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망, 내부에 어떤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단지 유적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을 때, 유적은 발굴단의 소망을 실현시켜줍니다.
놀랍도록 노스윈드 선단과 닮아있는 집단. 하늘치 유적 발굴단은 모든 생사를 던져버리고 단지 하늘치 유적에 올라가겠다는 소망 하나로 모여들고, 기필코 올라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소망 앞에 모든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 그리고 암울함은 그 힘을 잃고 말죠.
대적자 티나한이 하늘치 유적 발굴단의 단장이었다는 사실을 뛰어 넘어서,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힘껏 일하는 자들의 모습, 그리고 이루어지는 소망,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 저도 동일한 꿈을 가지고 있기에 -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치는 소망을 담아 살아낸 그들 때문에, 북부의 인간들에게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하늘누리의 시작은 바로, 소망을 담아 믿음으로 산 사람들로부터이지요.)
1‘) 자유무역당
유료도로당 만큼이나 개성은 넘치면서, 그렇게 정이 가지는 않는 집단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자유무역당입니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독자 모 군의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 - 물론 독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지식은 피상적이고 세심하지도 못합니다 -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정이 가지도 않고 하는 짓이 예뻐보이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모습 때문일까요? 바로 얼마 전에는 비셀스 규리하를 돈으로 발라보려는(!) 음흉한 시도까지 나오더군요.
그러나, 실상 자유무역당의 사상은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유료도로당이 공평을 향해서 그들의 모든 것을 내어두고 있다면, 자유무역당은 공정을 위해서 자신들을 경영하고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공정함이란, 두루두루 살핀 후에 옳은 것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두루두루 살펴야 한다는 것은 일견 공평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반드시 자신의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지고 부지런히 달려나갑니다. 자유무역당의 생각은 바로, 모든 인간이 풍부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물산을 유통시킬 수 있는 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공정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가증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삶은 자신들의 삶까지도 물산의 유통을 위한 비용으로 보고 있으며 그 비용까지도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허름하고 허섭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결국 독자로써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무역당은 공평 이후에 공정의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옳은 것[正]을 골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우 규리하를 황제로 만드는데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생각과 다르다면 자유무역당에 의해서 배척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유료도로당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유는, 유료도로당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正>을 인정은 하고 고개는 끄덕이지만, 함께 달려나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산을 싸게 공급하는 것, 은 중요한 일이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선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른 것이 희생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료도로당이 도로이용비를 받는 이유는, 자유무역당이 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인정하되, 그들 자신의 목적만큼의 비용을 통해서 공평하게 <길을 준비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옳은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는 나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그가 가는 길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나의 길로 강제하는 짓 따위는 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자유무역당은 묘하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제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공정함을 인간의 영역으로 두고 있지 않는 독자 개인의 성향 탓일 수도 있겠지요.
(하나 더, 혐의를 두고 싶은 것은, 과연 그들이 돈을 벌어서 뭐에 쓰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건을 저렴하게 유통하는데에 이익을 다 소진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상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켜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공작>에 그들의 돈을 밀어넣더군요. 물론 사태가 진정되는 것이 저렴한 물산의 순환을 돕는 직접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돈은 돈답게 써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말이 있는데... 얼마 전에 이야기를 하나 읽었던 바, 연말에만 기부하는 졸부들의 행태마저도 고맙다는 글이었습니다. 비록 함부로 벌어 마음껏 써버리지만, 체면 때문에 위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부하는 그들의 돈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정말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단돈 몇 푼 버는 우리들이 그 중에 빈약한 금액이라도 십시일반할 때 사회가 바뀐다는, 소박하고 당연한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 돈 만원이라도 그런 곳에 하고 있는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2) 신화를 가진 세계가 누릴 수 있는 것
앞의 유료도로당 이야기가 [눈새]에서 연관지어 건너오는 그것이라면, 이번 신화에 대한 모 군의 생각은 [피새]만의 것입니다. 사실, [피새]를 읽으면서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글의 시작이 [눈새]와 두 세대 정도의 사이를 두고 맞닿아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드래곤 라자(이하, 드라)]와 [퓨처워커(이하, 퓨워)]의 맞닿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영도 씨는 두 가지를 고작 말 이름 정도만 연결시킵니다. (제레인트의 말 이름이 후치였지요.) 연결되어는 있지만 두 이야기는 실상 다르고도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맞닿아있되 시간의 간극이 약간 다릅니다. 승천한 티나한의 이야기가 나오고 어르신이 된 비형 스라블은 해몽서를 씁니다. 그리고 폐허 속에 전설의 도시가 되어버린 침묵의 도시, 하텐그라쥬는 여전히 장엄한 폐허 속에서 대선풍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피새]의 세계는 일상이었던 세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 신화가 되어버린 바로 그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대사는 신화를 잃은 역사입니다. 신화라는 것이 굳이 머나먼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시대의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의 신화가 될 수도 있는 것으로써의 신화라면, 우리의 현대사는 신화 없는 대결과 투쟁, 그리고 고단한 삶의 무게만이 짓누르는 모양새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계속된 이데올로기의 투쟁, 60년대 이후를 관통하는 독재와의 대결, 그리고 먹고 살아남기위해 감당하는 삶의 질곡은, 우리에게서 신화를 앗아갔습니다.
신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앞에 살아간 사람이 내게 남겨둔 긍정적인 산물이 바로 신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새]의 시대는 신화와 현실이 오버랩되는 세계입니다. 마치 신화인 듯한 그들은 그러나, 지금 이 공간을 지키고 살아내는 <그들의> 삶에 한 켠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두억시니 연구가인 장군 앞에 갈바마리가 머리들을 흩날리며 뛰어들고, 한 자루 쉬크톨과 흑사자의 모피를 두른 채로 북부를 주유하던 여인은 다시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입증합니다. 해몽서를 집필하는 어르신은 규리하의 지배자의 머릿속에 가장 오래 사는, 그러나 모두가 피하는 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그리고 조각가는 레콘의 승천을 노래합니다.
기나긴 정체와 처절한 전쟁 속에서 북부와 남부인들은 대결하였고, 이제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에 와서는 대결은 사라지고 피비린내 나는 신과 인간의 대향연은 신화의 이름이 되어 현재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의미는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이자 회한입니다. 이영도 씨의 글들을 주욱 살펴보자면, 글 속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 혹은 작가의 소망이라고 볼 수도 있는 - 이야기들이 작가의 세계와 인물들에 녹아들어가곤 합니다. 짧지 않은 글인 [피새] 속에서 비형과 티나한의 자취, 혹은 사모 페이와 갈바마리의 삶을 보면서 친숙함에 기댄 큰 기대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겝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신화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독, 우리나라는 풍부한 신화에도 불구하고, 환상 소설의 자취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의 질곡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으며, 회한과 고통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도, 마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아들의 추억처럼, 신화를 가져야 할 것을 소망할 때가 되었습니다.
3) 분리주의
나는 타이모의 목표를 잘 차려진 요리상에 비유하고 싶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도깨비가 도깨비답게, 그리고 레콘이 레콘답게 행동하면서 그 모든 행위가 조화를 이루는 제국이다....레콘이 왜 수동적인 동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능동적이라는 말의 예로서 부족함이 없는 레콘들도 자신의 숙원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 레콘들은 치천제의 지배권을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본문 중)
분명히 밝히자면, 이영도 님은 글에 개념을 담는 이는 아닙니다. 분리주의, 라는 말이 나왔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피새]가 분리주의의 교과서가 되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혹자의 평가대로, 세상에 널려있는 이야깃거리를 자신의 글로 투박하게 - 요즘은 많이 세련된 모양으로 - 끌어오는 작가이며, 그러한 모양새로 글을 쓰는 이들은 꽤 많습니다. 이문열 씨의 [사람의 아들]은 성경을 모티브로 하면서, 구전되어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얼기설기 엮어내었지만, 결국 [사람의 아들]은 예수와 아하스페르츠의 이야기가 아닌, 민요섭과 남경사의 이야기이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작가의 담론인 것이지요. 이영도 씨가, 분리주의라는, 어찌보면 기독교 교회사의 역사 같은 것에서나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을 글의 큰 하나의 줄기로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이영도 씨가 줄곧 이야기해왔던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첫 작품인 [드라]의 대주제는 바로, 공존을 위해서 인간이 해야하는 자기 변화, 일 것입니다. 누구나, 타인이 변하기를 바라지, 자신이 변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헬턴트 마을의 사람들은 헬카네스의 검은 창인 아무르타트을 맞아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죽음과 침략, 그리고 희망이 공존하는 묘한 사회. 초장이 후보와 중늙은이, 그리고 작은 영지의 전사는 세상을 돌아보면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의 변화를 열어두는 것이 아닙니까. 후작인 [피새]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기실 분리주의는 공존 이전의 동일한 출발선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분리주의는, 레콘 독립국을 세우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국으로부터 분리하자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고, 이후에는 다시 제국으로 편입해 들어오겠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이야기한 타이모(혹은 아실)의 의도는, 다른 종족들이 이미 누린 집단체를 레콘도 누릴 필요가 있다는 것에서 귀결됩니다.
다른 민족과 달리, 오만한 개인주의자 - 이기주의자와는 그 종류가 다른 존재 - 인 레콘은 흔히 공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들로 묘사됩니다. 그의 추구하는 숙원, 그리고 신부 탐색은 타인과 공유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레콘은 씩씩하게 달려나갑니다. 그런 달음박질 속에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제국>이라는 연합체는 레콘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계속 언급되는 <가짜 레콘>이 바로 그러한 것이지요.
이영도 씨는, 그의 글에서 집단을 아주 소중하게 다룹니다. 한 번 맺어준 집단을 웬만해서는 깨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혹, 그 집단을 <RPG의 party> 개념으로 이해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손오공·사오정·저팔계와 오로라공주는 party가 아닙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지요. 환상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글 속에서, 집단이 보이기만 하면 모조리 파티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은, [눈새]의 구출대 안에서 파티의 혐의를 찾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오해를 미리 방지해두고, 이영도 씨는 한 번 맺어준 집단체를 꾸준히 유지시켜나가곤 합니다. 집단체 - 혹은 공동체 - 의 필요와 소중함을 아는 작가라고 할까요? 그리고, 이제 거대한 집단체의 일원이 된 레콘은, 수동적인 동의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어합니다. 가짜 레콘, 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지요.
오만한 개인주의자, 자신만 안다 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야할 방향이 정해지면 후회없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겠지요. 기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 뒷걸음질치면서 새눈을 뜨고는 다른 길을 탐색합니까.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겸허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오만한 개인주의자라는 호칭은 찬사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길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길을 보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조건, 타인의 방식, 타인의 소유, 타인의 결과를 곁눈질하면서 자신의 숙원이 아닌 타인의 숙원을 탐색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일겝니다. 인생은 정해져있고, 가야할 길은 분명한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다른 것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겁니다. 아니, 우리의 의지가 바로 그것인양, 마치 뭄토가 스스로의 숙원을 그렇게 치환시켜 넣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그러하다는 말일겝니다. 그런 도전과 함께 작가는 지멘을 쫓는 엘시 에더리와 여섯 명(!?)의 레콘들을 통해서, 숙원을 향해서 오만하게 걸어가는 그들 개인주의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계명성을 지르며 세계를 달음박질해야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분리주의라는 것은, 레콘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한 번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평등에의 이야기입니다. 락토 빌파는 그러한 레콘의 공동체를 수단으로, 아실은 그것을 목표로 여기고 있지만, 분리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공존 이전의 평등, 어찌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것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자신을 변화시키면 될 것을, 서로에 대해서 여전히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며 아집과 질투로 뭉쳐있는 사회입니다. 공존 만으로는 되질 않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레콘에게도 기회를! 그 기회는 케이건의 - 그만의 방식으로 - 티나한을 용납할 때, 그리고 숙원을 가진 레콘들이 엘시에게 자신의 자투리를 나눠줄 때, 비로소 가능해진 것입니다.
4) 엘시와 스카리, 사랑의 모습, 인간의 모습
이영도 씨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꼽으라면, 저는 두말하지 않고 에름 후작과 이루미나 공주의 이야기를 꼽을 것입니다. 사랑과 고통은 길항작용이 아니라는, 에름 후작의 선언은 사랑의 완결이며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서 켈커의 88일간의 사랑이 수용하는 사랑이라면, 에름 후작과 이루미나의 사랑은 용납하는 사랑일겝니다. 적극적으로 원하기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의 모양새를 바꾸어놓을 수 없는 것.
우리는 [눈새]에서 매력남을 하나 발견합니다. 비록 그 매력이 독자의 눈에는 그다지 매력적인 모습으로 비취지 않지만, <나의 시간은 모두 부냐의 것>이라고 말하는 스카리 빌파의 자기 충만적인 모습은 꽤 <인간적>입니다.
모두들 느끼시겠지만, 이영도 씨의 작품에는 그다지 인간적으로 보일만한 것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탈인간 적이지요. 환상 소설이 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환상 소설은 인간 자체 - 본연 - 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인간을 산산히 조각내어서 하나하나의 인물에게 덧입혀주고는 정형화시킬 수 있는 창작의 방식이며, 그것을 통해서 환상 소설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에, 환상 소설의 인물은 편향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모디사는 그나마 인간적입니다. 인간적이란, 바로 그들이 스스로를 통해서 총체적인 인간을 투사한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스카리의 사랑은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스카리의 사랑은 4년간 바둑을 배울 만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스카리의 사랑은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 아버지의 등짝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랑도 그렇게 끝간데 없고 대책없이 질주하는 것이죠.
반대항에는 엘시 에더리가 나옵니다. 제국이 부냐를 사랑하게 만들겠다, 는 그의 선언에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낍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는 제 와이프 하나 사랑하기도 벅찬데 말입니다... 세상이 사랑하게 만들겠다는 그 오만함은, 사랑보다 더 큰 것이었나 봅니다.
감정대로 움직이는 스카리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엘시, 그리고 늘상 그렇지만 작가는 이성의 편입니다. 아직 미혼인 작가의 알 수 없는 트라우마 때문일까요? (웃음) 아직도 사랑을 머리로 아는 한계일까요. (죄송해요... 한 번 웃겨보려고;; 쿨럭!)
그저 그렇습니다. 누구의 편도 들기 어려운, 왜냐하면 둘 다 나의 모습이니까. 때로는 이성에, 때로는 감정에 사로잡혀버리는 나의 모습들이니까. 환상 소설의 매력은, 복합적인 나를 분리해서 따로 두고 볼 수 있다는 것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5) 변화와 변질
이미 <가짜 레콘> 이야기를 조금 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화한다는 것은, 이영도 씨가 줄기차게 이야기해오던 바입니다. 그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이제 변화가 아닌 <변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가 긍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변질은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사고하더라도, 자신을 긍정적인 위치에 두는 우를 범하는, 혹은 스스로 자각하였다 할지라도 애써 그것을 외면한 채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줄 아는 족속입니다.
뭄토는 그런 존재의 대표입니다. 그는 숙원을 훔치고 흉내내려고 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는 지멘을 보면서 그의 숙원이 아닌 그가 보이는 현상에 열광합니다. 인간의 숙원 - 삶의 목적 - 과 인간의 삶의 양태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말 그대로 목적과 수단의 차이입니다. 지멘은 자신이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오만하게 걸어가는 행로 속에서 목숨을 걸고 물 속에 걸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뭄토는 그 현상을 목표로 하면서 아실을 훔쳐냅니다.
삶의 극적인 순간에서 자신이 견지하던 태도 대신에 타인의 (직접적인, 혹은 암묵적인)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모양을 바꾸는 것을 우리는 변화라고 합니다. 이영도 씨의 소설에서는 변화의 모습들이 넘칩니다. 넥슨 휴리첼, 할슈타일 후작, 그리고 대(?)마법사 세실리아와 (어줍잖지만) 세리스마까지. 그리고 이제 그는 당당하게 변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진실한 수용 없이 그 모양새만을 흉내내고, 베끼고, 대강 그적거리는 것. 그것은 변질입니다.
사회가 커질수록, 왕래가 많아질수록, 서로의 생각과 사고를 확인하면 할 수록, 인간은 서로를 베끼고 흉내내는 모양을 가지겠지요. 좋은 것은 가지고 싶고, 훔치고 싶고, 흉내라도 내고 싶은 그 모양새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우리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혹시 삶에의 거대한 도전 앞에서 온몸으로 고꾸라져서 자신을 회한하고 변화해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겉모습, 껍데기만 흉내내면서 자신의 모습에 뒤섞어들여 웃기는 짬뽕을 만들면서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가짜 레콘이 모여서 서로를 흉내내면서 이리저리 들썩거리는 모양새는 바로, 한 번 뿐인 인생, 온전한 숙원에 자신을 내어놓을 엄두도 내지 못한채, 이리저리 주유하다가 삶의 찌끄레기 같은 모양새를 흉내내는데 그치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우리네 모양과 다를 것은 무에겠습니까.
작가의 도전은 그래서 감미롭지 않습니까?
3. [피를 마시는 새] 세계관
한국형 환타지, 라는 망언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모양새야 어떠하던지 간에, 우리 생각을 우리 것에 담아야 가장 적확하다, 는 생각은 어떤 의미로도 부적절합니다. 그 안에는 자국과 자국 이외의 세계를 갈라놓는 이분법적인 사고 또한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국수주의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톨킨의 세계는 북구의 것입니다. 세계의 것이 아니죠. 그리고 그 세계로 이야기를 쓴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지독스레 많죠. 그리고 기실 그것은 톨킨의 세계도 아닙니다. RPG의 세계관 아닙니까. (제가 던젼 앤 드래곤 쪽의 이야기는 전혀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는 이야기만 살짝 던져두고 갑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배경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을테니까요. 그러나 그것의 필요성 또는 당위성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거기에서부터 타협없는 우열의 판단이 시작될테니까요.
[눈새]에 도깨비가 나오는 순간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던 것은, <그렇다면 구운몽은 중국의 소설입니까?>라고 냉소했던 이영도 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냉소와 도깨비의 등장이 어쩐지 맞지 않는다는 말들. 그래서 환상 소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그렇게 널리 저변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환상이 환상인 것은, 환상의 성격인 환상성에는 규칙이 부재한다는 사실때문일겝니다. 환상은 그 자체로써 환상일 뿐이지, 환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식이 존재한다던지, 혹은 환상을 수호하기 위한 규칙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환상은 개별적이며 독특하며 그 자체로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상 소설의 환상은, 이야기를 위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준비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환상 소설에서의 세계관의 구축입니다.
그렇다고 세계관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을겝니다. 세계를 위해서 쓰여지는 소설도 존재하니까요. 사실 톨킨 교수의 일련의 저작들은 북구 신화를 기반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노작들이며, 세계관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 자체로 자신의 환상을 드러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피새]의 세계관, [눈새]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이 글의 세계관은, 당연히 이영도 씨의 것입니다. 심장적출, 어르신, 혹은 공수증의 무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톨킨이 누렸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오마쥬를 이끌어내게 할만한...
그러나, 독특하고 놀라운 부분은, 후작인 [피새]에 오면 확연히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역시, 전작에서는 다양한 종족간의 차이와 특색을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지만, 이제 [피새]에서는 소드락이 17분 동안의 효과를 거두게하는 특수 알약이며 도깨비의 불장난은 좀 거세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에 이제 새로운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3‘. 그 덕택에...
그래서 이제 독자는 뒤집어지는듯한 상식의 반전과 파괴에 놀라고 혀를 내두릅니다. 지멘이 (다른 의미에서) 물 속으로 들어가고, 도깨비의 불이 열은 없는 빛의 속성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 등등등.
분명, 환상 소설에서 세계관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효율적이고 놀라운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독자의 생경함에서 근원하는 때가 많은 바, 사실 환상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환상이 개인적인 것일뿐더러 독창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독자가 환상 소설 내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상당수는 작가가 짜놓은 거미줄 위의 한 미끼인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즉, 독서 전의 배경지식이 따로 존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 환상 소설의 경우에는, 작가가 던져주는 유니크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미처 작가가 보여주지 않았던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고 일리가 있는 이야깃거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눈새]가 그런 식의 효과를 잔뜩 거두었다면, 이제 [피새]에서는 환상 소설의 생경함이 아닌, 짜임새 속에서 이야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어려움을 작가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를 물리게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띄웠던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지금까지는 무리 없이 독자를 자극하는 듯하여 기쁘고 좋습니다.
4. 인물들
솔직히,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이영도 씨의 소설은 그 끝을 보지 못하면 어떤 이야기도 하기 어려운 바라...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인물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제대로 된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간혹 스카리 빌파가 좀 생각 없이 굴고, 이미 고인이 된 락토 빌파는... 전형적인 인물은 아닌 이야기를 이야기되게하는 인물 - 그래서 이야기와 일체한다기보다는 도드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 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평가이고, 제이어 솔한에서는 탁! 막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어긋날 것이 분명하지만, 이영도 씨의 급전직하적인 결말에 대해서 한 마디 거들고 지나가자면, 도대체 그것이 왜 문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소설은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의 순서대로 쓰여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에 대해서 평한 믿을만한 이론을 들은 적이 없는 바, 결말이 짧고 허무하다는 것이 글의 악평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자간에 분명한 개인차가 존재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평가를 해보자면, [폴라리스 랩소디]의 경우에는 에필로그가 가장 적절한 길이의 결말이었습니다. 더 쓸 말이 없지 않습니까. 사족이 될 수 있는 말들을 달아서 글을 망치고 싶은 작가는 없을테니까요. 쓰여진 글은 그런 의도로 쓰여졌고, 그 의도에 걸맞는 결말이 났으니, 독자들은 비록 노스윈드의 일곱 해적이 제국도 노략질하기를 바랐겠지만, 대화의 주체는 작가였으니 왜 그랬냐는 둥의 말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5. 글을 접으면서
용두사미, 라는 말이 있지만, 이 짧은 감상글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피새]가 (심정적으로는) 절반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마쳐지지 않은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제 남겨진 이야기는 글의 완결을 보고 나서, 감상의 형태가 아닌 <비평>의 형태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피새]는 앞으로 이어질 [독을 마시는 새]와 [물을 마시는 새] - 독자만의 바람일 수도 있겠지요 - 에서 <승>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작가는 그의 전작인 [눈새]를 통해서 <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새] 4부작 - 그렇게 계획되었다고 하는 낭설(인지 믿을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 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어떤 도전을 줄지 많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부디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6. 부록
글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들
1) 니어엘 헨로가 그의 9014부대 - 마치 이전의 6217명이 생각나는군요... [피새]는 90편 14챕터의 글이던가;; (두둥!) - 와 함께 걷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피새]에서 가장 유쾌한 장면이죠. 까는 부위 릿폴, 식인부위 네미, 미친 개 카루스... 큭큭큭! 버스에서 읽다가 아주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눈물이 다 나서... 흐흐흐.
경쾌하고 유쾌한 서술입니다. 걷다보니 어느새 영웅이더라, 마치 얀 웬리의 제 13함대의 승전가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혹여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라고 하시는 분에게는... 전쟁에도 희와 애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비셀스 규리하가 성을 파묻는 장면은 역시 강렬하지요.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신념과 믿음은 사실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지요. 신념은 능동적인 것이며 나로 인한 것이지만,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며 타인에게 기대는 것입니다. 정우는, 인간을 믿어보기로 했지요. 그리고 스카리의 병신짓(!!) 당시에 상처입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도 함께 상처 입게 됩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상처 입힘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성취할 수 있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상처입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접게 되겠지요. 아무튼, 비셀스 규리하가 믿음을 어떻게 지키는지 지켜보지요.
3) 최후의 대장간의 변질은 충격적입니다. [피새]가 변질에 대한 이야기라는 강력한 혐의를 두는 부분은 바로 가짜 레콘과 최후의 대장간의 모습 때문입니다. 시모그라쥬가 그렇게 바뀌었을 때에 알아봤어야 하는데... 미처 몰랐던 것은 환상 소설이기 때문일까요? 그만큼 작가가 꼭꼭 잘 감추어두어서일까요?
매우 좋은 글입니다!! -마는, 톨킨과 D&D 그리고 RPG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톨킨이 50년정도 앞섭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톨킨의 완전독창세계라는 것은 아니지만, 기실 RPG나 D&D라는 것도 온 세상의 떠도는 것들을 죄다 때려박아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첫댓글 구뜨! >_<
매우 좋은 글입니다!! -마는, 톨킨과 D&D 그리고 RPG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톨킨이 50년정도 앞섭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톨킨의 완전독창세계라는 것은 아니지만, 기실 RPG나 D&D라는 것도 온 세상의 떠도는 것들을 죄다 때려박아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fan/ 글을 잘 못읽으셨나본데, 톨킨, 디앤디, 알피지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타자 님이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를 쓴 것도 아니구요. 아울러 저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 아직은 없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