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시집 <<한 잎의 여자>>
(문학과 지성사,1998)
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2001년
기혼남성의 사랑에 관한 흔들리는 정체성을 다룬 <푸른 안개>란 주말연속극을 기억할 것이다. 그 최종회 에필로그를 장식했던 시가 ‘한 잎의 여자’다. 다만 원작과는 달리 첫 연을 길게 행갈이로 늘여 엔딩 크래딧 처리했다. 당시 이 드라마는 평소에 멜로드라마를 외면해왔던 40~50대 남성 시청자들의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아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앉게 하였고, 나아가 시청자 의견이란 형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반응을 표출했다. 반응은 갈라졌다. 불륜 미화와 선정성의 극치라는 비난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진솔한 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잘 그렸다는 찬사를 보냈다.
46세인 극중 성재는 명문대를 나와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기반을 잡는 순조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가의 사업체를 맡아 운영하는데 빈틈없고 깔끔한 성격의 그는 외도를 죄악시 한다. 그런 앞만 보며 달려온 성재의 인생에 눈부신 23세의 재즈 강사 신우가 나타난다. 그녀는 사랑했던 아버지를 어린 시절 잃고 성재에게서 부성의 느낌을 더한 미묘한 감정을 갖는다. 성재 역시 너무나 맑고 자유로워 두려움이 뭔지조차 모르는 신우에게 빨려 든다. 둘의 사랑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성재는 신우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다. 성공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아직도 뛰고 있는 가슴을 느끼게 된다.
20대 미혼녀와 40대 유부남의 사랑은 수많은 멜로 영화와 드라마의 진부한 소재임에도 왜 그토록 ‘푸른 안개’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 과거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란 점을 환기하면 전통적 윤리와 규범을 깨부순 해방론적 사랑관이 적잖게 먹혀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남자에게 사랑이란 영원한 로망이며, 사랑이 공유된다면 유부남이란 조건과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가정과 사회적 지위까지 내던진 극중 이경영과 이요원의 사랑에 결실을 맺게 해달라는 상당수 남성 시청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요원을 떠나보낸 이경영은 지방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며 홀로서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이 결혼으로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기에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했다. 결혼이 사랑의 완결이 아니듯 사랑이란 반드시 결론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이 감정의 무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20대 여성 시청자의 상당수가 이요원처럼 사랑이 있다면 형식이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가정과 도덕을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충격이겠지만 사랑은 제도나 도덕에 앞선다는 입장의 여성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이중적인 허위의식을 드러냈다.
모든 남성들이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한 잎의 여자’에 목말라 할까.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은밀한 미숙성에 침을 꼴까닥 삼키고들 있을까. 드라마가 종영되고 1년 후 ‘푸른 안개’의 주인공 이경영은 극중에서처럼 여대생도 아니고 여고생과의 원조교제가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다. 그 여파로 아직도 그는 공중파 방송의 출연을 못하고 있다.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의 이 시를 두고도 오해가 없지 않다. 과연 잠재된 욕망 안에 꽁꽁 가두어둔 판타지만일까. 특정한 ‘한 잎의 여자’가 실존했던 걸까. 어쨌거나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로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한 잎의 여자’를 불륜의 이미지와 엮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 잎의 여자’가 갖는 함의와는 다르게 그 아류쯤으로 잘못 인식된 ‘영계’라는 말이 한때 횡횡했었다. 지금은 이런 말 자체를 함부로 뇌까리다가는 자칫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영계’는 원래 병아리보다 조금 크고 살이 아직 무른 중간 크기 정도의 어린 닭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이 어린 이성’을 속되게 부를 때 통용되고 있었다. 그것도 대개 성적인 것과 연관 지을 때 쓰곤 했다. 심지어 무슨 보약처럼 인식되어 딸 같은 이웃집 아이도 쉽게 강간하고 선생이 제자를, 목사가 어린 여학생 신도를 꼬드겨 욕망을 채우고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영계’는 인간의 양심을 무디게 하거나 마비시키는 말의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재작년에는 성역할이 바뀐 <밀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 잠깐 여성의 입에서 ‘영계’란 말이 툭 튀어나온다. 물론 그들 드라마는 둘 사이에 성적인 관계 이상의 다른 무엇이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처음엔 건전한 이성이 작동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잃을까봐 거침없이 다가오는 젊은 사랑을 밀어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열자 상황이 바뀐다. <푸른 안개>도 <밀회>도 똑 같이 그런 과정을 그렸다. 그 연애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고 ‘안개’가 걷힌 자아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가정이 파탄 날지언정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잎의 여자’가 아니라 ‘영계’를 탐하는 천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까지 용인할 수는 없으리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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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젖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 없어 보이지 않고 표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닿기만 해라
첫댓글 선악과의 유혹은 끝없이 넓고도 높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고독에 잠겨서 삶을 지루하고 힘들게 느끼면서 살지만~~~
범사에 감사하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이미 득도에 입문하신 분입니다.
보통사람의경우에는 영적인 대화가 되는 이성친구를 만나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고 행복감을 느낄 수가있습니다.
성숙한 플라토닉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전 푸른안개를 못보았답니다
권순진님 글이 있길레 모셔 왔는데
사진은 제 사진을 ㅎㅎ
젊을때 사진을 썼는데
전 젊을때 중년남자와 사랑에 빠져본적이 없어요
제 또래만 사랑했지요 ㅋㅋ
어렵게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님이 최고이십니다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남쪽에서부터
길위로만 서서히 올라오시는거죠?
언제쯤 서울에 올라올까요?
좋은 여행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