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이야기 - 신동호
세 친구가 있었다.
세 친구는 산속에 들어가 함께 공부했다.
서로 돌아가면서 밥을 지었는데
한 친구는 자기 밥을 꾹꾹 눌러 담고 친구들 밥은 헐하게 담았다.
한 친구는 아주 공평하게 담았다.
한 친구는 자기 밥은 헐하게 담고 친구들 밥은 꾹꾹 눌러 담았다.
공평하게 밥을 담았던 친구가 공직자가 되었다.
산을 떠나며 오래 아쉬워했다.
어느 날 옛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산을 찾아갔다.
산어귀에서 뱀 한마리가 휙 지나가자, 놀라서 쫓아버렸다.
산속에 다다르자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신선이 나타났다.
자기 밥을 헐하게 담았던 친구였다.
바위에 앉아 수담을 나누며 신선 친구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그가 말했다.
산어귀에서 뱀을 보지 않았는가.
산에서 내려오자 백년이 흘러 있었다.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창비/ 2022
# 시 이야기
이 시를 읽고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다.
마치 이솝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참으로 우화적인 시, 그러면서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스쳐 가는 울림이 있다.
세상을 마냥 도덕 교과서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사람 됨됨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이렇게 밥 이야기로 울궈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시에 콕 빠지는 것도 내가 밥을 좋아하는 밥통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어머니, 고향, 가을꽃, 행복, 고독, 인생 등등,,
이런 것들에 관한 시는 그 동안에 살았던 시인들이 오래전에 이미 숱하게 써 먹어 버렸으니 신동호 시인의 이런 시가 더욱 돋보인다.
너무나도 많은 은유를 담고 있는 시인데다 작금의 시대와도 딱 어울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치 탑골 공원에서 바둑 삼매경에 빠진 두 노인의 대국을 옆에서 구경하는 느낌이다.
행마를 알면 구경꾼도 훈수 두고 싶은 생각이 드는 법인가. 오늘 이 시를 읽고 나는 할 말이 참 많아졌다.
## 내 이야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밥을 굶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꽁보리밥일망정 밥을 굶기지는 않았는데 국민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못한 나는 엄니 품을 떠나 도시로 왔다.
인천에서 공장을 다니던 누이가 막내 동생만큼은 절대 무식쟁이로 만들지 않겠다며 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 꿈도 잠시, 누이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산산히 깨졌다.
순박하기만 했던 열아홉 살 누이를 그 남자는 호시탐탐 노리다 성폭행을 했고 누이는 속절없이 당했다. 한 번 당하고 끝이 아니었다.
공장에 소문내겠다는 그 남자의 말에 누이는 억지로 치마를 내려야 했고, 이후로도 딱 한 번만 더,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에 속았다가 결국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기에 이른다.
별 수 없이 결혼식도 하지 않고 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간 누이는 나를 책임질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혼자 세상으로 나왔다.
꼬여 버린 누이의 인생을 내가 책임질 수 없었듯이 나를 책임지지 못한 누이를 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엄마 생각이 간절하게 나서 고향으로 내려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중학교 다닐 때 신문배달을 했었는데 신문 보급소 소장이 기술을 배우라면서 공장을 소개시켜 줬다.
가리봉동에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나는 우선 먹고 잘 수 있는 곳이 필요했는데 허름하지만 기숙사도 있었다.
열여섯 살인데도 나는 버스나 전철을 탈 때면 성인 요금을 내야만 했다. 제대 후 복학을 한 스물 일곱 살 대학생도 학생 할인을 받는데 열 살이나 어린 나는 성인 요금이다.
그래서 차비와 방값을 아낄 수 있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공장이 내겐 천국이었다.
나는 굶는 것이 무서웠지만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적어도 밥은 굶지 않는다는 것을,, 1년 후 설 명절에 엄니의 빨간 내복을 사서 고향에 내려 갔다.
엄니는 내 새끼가 힘들게 번 돈으로 산 옷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입겠느냐며 내복 상자를 쓰다듬으며 펑펑 울었다.
### 그 사람 이야기
가리봉동 공장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나의 첫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인데 오늘 이 시를 읽고 그 분이 생각났고 이 글도 쓰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사회에서 배운 것이 더 많고 당연 학교 스승보다 사회 스승이 대부분이다.
비빌 언덕 없는 내가 옆길로 빠져 어둠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겠지만 고비마다 내게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 친구이자 선배였고 한편 스승이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나중에 보니 그랬다.
공장 기숙사에서 그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서른 한 살이 뭐가 많냐고 할지 몰라도 나는 그때 서른 살 넘은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남자가 서른 살까지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어도 내게 서른 살은 아득한 나이였던가 보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고 했고 성수동(뚝섬?)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려 왼손 집게 손가락이 없었다.
그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정이 깊었다. 5명이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다른 형들이 나를 괴롭힐 때면 그러지 말라고 조용히 타이르기도 했다.
그분 덕에 유일한 10대였던 나도 무난히 공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선데이서울과 샘터 잡지를 뒤적이던 사람, 그리고 카세트 테잎으로 김상진과 나훈아 노래를 밤새 듣기도 했다.
바둑을 좋아했던 그가 바둑책을 보며 혼자 바둑을 둘 때가 자주 있었는데 나중 내게 바둑을 가르쳐서 접바둑을 두기도 했다.
공장 근처 허름한 밥집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기숙사 비용은 받지 않았지만 밥값은 월급에서 공제를 했는데 쥐꼬리 월급에서 절반 넘게 밥값으로 떨어져 나갔다.
당시 그 공장은 토요일에도 종일 근무였기에 밥 걱정은 하지 않았으나 공장 휴일인 일요일에는 밥집도 쉬었다.
기숙사에 머물던 다른 사람들은 휴일마다 어디론가 외출을 하고 우리 둘만 남을 때가 많았다. 일요일이면 그 형은 손수 밥을 했다.
그 형은 자기 밥보다 내 밥을 많이 펐고 맛난 반찬을 했을 때도 양보를 했다. 쭈볏거리는 내게 어쩔 땐 젓가락으로 덥석 집어 내 밥그룻에 올려 주기도 했다.
"너는 한참 먹을 때니까 많이 먹거라."
철부지 열여섯 살 소년은 눈치 없이 사양하지도 않고 덥석덥석 받아 먹었다. 훗날에야 알았지만 반찬 비용이 전부 그의 사비였다.
그분 덕에 나는 일요일에도 밥을 굶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그는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내 고향은 말여, 사방이 왼통 논과 산뿐이여."
"어딘 듀?"
"논산."
설 명절을 앞두고 내가 엄니의 빨간 내복이 든 가방을 들고 고향에 내려 갈 때 그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당시 화폐가치로 천 원도 작은 돈이 아니었다. 사양을 하자 내 주머니에 넣어 주며 잘 다녀오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자기 밥보다 내 밥을 먼저 챙겨 줬던 그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진정한 나의 첫 스승이었다.
열여섯 살 소년이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47년이 걸렸다. 그래도 백년보다는 짧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밥을 좋아할 것이다.
첫댓글 현덕님은 그래도 인떡이 많으셨네요.
잘보았습니다. ^^
네, 심송님 저 인떡이 많은 사람 맞습니다. 고비 때마다 우렁각시처럼 나타나서 도와 준 사람들이 있어서 험한 세상 잘 건너 왔지 싶네요.
이 답글 달면서 그분이 준 돈이 만 원이 아닌 천 원이었음을 수정합니다. 현재 화폐로만 생각하느라 오타를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글구 저는 시루떡도 좋아한답니다.ㅎ
어려웠지만 보람찬 청춘시절을 보냈군요..
그 시절의 내공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숙연해집니다
님의
참삶의 길을
동경하며
응원합니다!
ㅎ 모렌도 선배님,,
긴 글을 읽고 진정성 있는 고운 댓글 주셨네요. 뭐가 되겠다고 야무진 꿈을 갖고 살지는 못했어도 좋은 분들 덕에 무난하게 살아온 세월이었네요.
인연이란 게 억지로 엮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런 분들과의 만남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제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르니까요.
선배님, 응원 감사합니다.
그분은 요새 보기 드문 훌륭한 분 입니다
그때의 인연이 계속 이어갔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젊은 시절에 내 주위의 훌륭한 분들과
인연이 이어가지 못한게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제가 생각해도 그런 분 드뭅니다. 좋은 말도 많이 해 주었지만 행동으로 제게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친 분이네요.
저도 끊어진 인연이 많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끊어진 것도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아쉬움 달랜답니다.
태평성대님은 언제나 마지막 멘트인 충성과 호탕한 웃음이 읽는 이를 미소 짓게 만듭니다.
그 분과 이후 인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금 알려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질 후속편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ㅎ
훌륭하신
분입니다.
남을 돕고
남을 위한 헌신을
실천하시는
어쩌면 공,맹보다
더 훌륭하신
스승이십니다.
훌륭한 분이라는 혜전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았던 것이 그 분의 인품이기도 했습니다.
제겐 그분이 공자 맹자뿐 아니라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보다 더 훌륭하게 느껴집니다.
원한은 바위에다 새기고 은혜는 물에다 새긴다는 말이 있던데 저는 이분을 평생 스승으로 마음 속에 담고 사네요.
때론 잊기도 했지만 밥 이야기라는 시를 읽자 퍼뜩 생각이 났습니다. 선배님, 항상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난다..
화도 나고..
어찌 그리도 집이 가난하여
현덕씨를 고생시켰는지..ㅠㅠ
그 형님처럼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네요.
인색한 저는 그리
못 했을 겁니다.ㅠ
샤론님 오랜만이네요.
저도 아까 엄니 대목을 쓸 때 코끝이 매웠답니다. 내복 상자에 비닐 뚜껑이 있었기 망정이지 어머니 눈물에 홀랑 젖을 뻔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을 일종의 유산이라 여긴답니다. 한때는 지긋지긋했고 원망하기도 했으나 그 가난이 저를 살게 한 인내심의 원천이기도 했으니까요.
인생 공부를 묵묵히 시켜 준 그분한테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첫 스승인지는 훗날에야 알았지만요.ㅎ
밥 이야기에서
시 이야기
나의 이야기
그 사람 이야기로 이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세 친구 중 저는 아마 공무원 친구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ㅎ
나의 이야기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옛날에는 누나들이 남동생 공부를
시키는 집들이 많았지요.
누님의 이야기도 넘 가슴이 아프고요.
논산의 어원이 논과 산이 많아서
논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는데, 그 분도 그런 이야기를 했군요.
참 좋으신 분.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서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고 계시리라 생각해 보면서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베리아님이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중간이 다소 어두운 글이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이 환해졌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저도 이 시를 읽으면서 너무나 기발한 발상에 감탄을 했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고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런 시로 구현해내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지요.
제 누이는 젖먹이때부터 저를 키운 사람이기도 해서 각별하게 생각하나 보데요. 철 없던 시절 누이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눈물 흘리게 했던 일도 있어서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고마운 사람을 잊지 않는 것, 그 사람한테 받은 것을 저도 남에게 베풀면서 살려고 노력하네요. 평온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