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빗장을 풀었다’라는 표현은 마치 종모법의 시행이 양천교혼을 권장, 조장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양인 남성의 경우 자신이 노비인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낳은 자식이 노비 신분으로 판정된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해당 혼인에 보다 적극적일 수 있겠는가? 비인 여성의 경우 그나마 과거의 종부법 시행 당시에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양인 신분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었던 반면 종모법 시행 이후는 어떻겠는가? 양인 여성의 경우 종부법 시행 당시에는 후손이 노비가 될 가능성이 있어 양천교혼을
꺼렸으나 종모법의 시행되면 후손이 자신과 같은 양인이 될 것이므로 보다 자유롭게 노인 남성을 혼인 혹은 성적 대상자로 삼을 계기가 되었을까?022 이런 경우의 수를 고려해보면 종모법의 시행이 ‘양천교혼의 빗장을 풀었다’고 한 이영훈의 표현은 상당히 수긍하기 어렵다.
22 남성인 노와 양인 여성의 혼인 혹은 성적 결합은 ‘노취양녀’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데, 노취양녀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줄곧 금지의 대상이었고, 위에서 인용한 태종대 종부법 시행, 세종대 종모법 시행 당시에도 법으로 금지된 사안이었다. 다만, 이영훈은 본 저서에서 태종대 노취양녀의 금지는 매우 실효성이 있었던 법안인 것처럼 서술한 반면, 세종대의 조치는 마치 허울뿐인 법안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위의 책, 63쪽). 노취양녀의 경우 태종대와 세종대 공히 그 소생은 모두 관노비로 속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태종대 종부법의 시행 맥락에 대해서도 이영훈은 다소 의도적인 누락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태종대 종부법의 시행 맥락은 대소 관료들이 자기 소유의 비와 성적 관계를 맺거나 첩으로 들여 자식을 낳은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들은 혈연적으로는 관료의 자식이지만 당시의 법제로서는 노비 신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부모와 자식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주노 관계가 맺어지는 현상은 당시 지배층들에게 매우 불편한 사안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태조 6년 최초로 양부가 자기 소유의 비첩과 사이에서 낳은 소생을 종량시키도록 조치하였고, 태종 5년에는 조부의 비첩산까지도 종량시켜 사재감 수군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026 태종 14년 정월에는 3품 이상의 자기비첩산을 종량시키고 5품을 한계로 서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타인 소유의 비를 첩으로 들여 낳은 자식은 우선 자기 소유의 비로 속신한 이후에 사재감 수군에 충정하도록 하였다.027 같은 해 7월에는 문무관, 생원, 진사, 녹사, 유음자손의 경우 자기 비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뿐 아니라 처변의 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역시 속신을 통해 사재감 수군에 소속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028
이러한 조치가 양인에게까지 확대되어간 것이 바로 종부법이었다. 태종 14년, 하륜은 아버지가 양인일 경우 비첩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양인으로 삼자고 주장하였고,029 같은 해 6월에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종부법이 시행되었다.030 즉 종부법의 도입 맥락은 애초부터 사회에 만연한 양천교혼 현상에 대한 대비책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양반 관료들이 자기 비첩 소생을 양인으로 만드는 길을 열기 위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이러한 고민에서 시행된 유사한 제도가 바로 보충군 혹은 보충대였다. 앞서 언급한 사재감 수군을 확대개편한 보충군은 양반 및 양인의 비첩 소산들에게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제도였다. 이 보충군은 태종대에 처음 실시되었고, 이후 종모법으로 환원된 세종대 이후까지도 존속하였으며, 『경국대전』에도 해당 조문이 수록되었다.031 요컨대 종부법의 시행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는 양반들의 비첩 소산들의 신분변정 문제였던 것이다. 즉 종부법의 도입 취지는 양인의 수를 대폭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32
32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당대 사료에서도 양반 관료들이 종부법의 시행이 良少賤多한 상황에서 양인을 확대하는 하나의 방책인 것처럼 발언하고 있으며, 반대로 종모법의 시행이 천인이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물론 양반 관료들의 비첩 자식이 양인으로 판정되느냐 천인으로 판정되느냐에 따라 양인의 증감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조선 전체 인구 중 노비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줄이는 계기가 되느냐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다. 당대의 양반 관료들 역시 이러한 점을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으로 위와 같이 발언했을 것으로 보인다. 종부법 시행과 함께 관료들의 비첩 소생들을 양인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던 보충대 혹은 보충군의 경우, 태종대 처음 보충대가 성립될 당시 군액으로 설정된 수는 3천 명이었다(『태종실록』 권29, 15년 3월 8일 병오). 거기에 세종 5년 당시 충청도 지역의 보충군 입역자 수는 불과 88명이었다(『세종실록』 권20, 5년 5월 22일 신축). 보충대의 규모를 보았을 때 종부법으로 신분이 변정되어 양인으로 판정되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종부법이나 보충대의 대상이 되는 양반 관료들의 비첩 소생은 조선시대 노비 전체 수의 증감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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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적 내용에 대한 비판은 이미 상세히 전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왜’라는 질문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이영훈은 어째서 고려 후기 연대기 자료에 그토록 빈출하는 노비의 증가 현상을 외면하고 그것을 조선 건국 이후의 현상으로 치부하였던 걸까. 종부법과 종모법 같은 법제들과 양천교혼의 현상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왜 그것을 노비 증가의 배경으로 언급했던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성리학적 질서 속의 노비의 존재 양상은 왜 그토록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 다면적이고 활기찬 조선 노비제에 대한 이영훈 본인의 입장은 어찌하여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제도로 그 이미지를 바꾸게 되었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어는 바로 ‘유교’, 즉 ‘성리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스스로를 근대주의자, 시장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 역사를 해석해왔다. 한국의 역사가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지향하며 발전하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 해석을 부정하고, 한국사는 자체적인 근대화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한국 근대화는 식민지 경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경제사 연구의 대부분은 이러한 입론 아래 이루어졌으며 실제로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의 상당 부분은 ‘내재적 발전론’이 가진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 학계로 하여금 이를 반추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필자의 추론이지만, 이영훈은 한국의 전통사회가 그처럼 ‘자체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것은 유교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고 나서 유교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장악한 것으로 인해 한국사는 근대화로의 경로와 다른 길목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한국 사회의 유교화는 긍정적이지 못한 문명사적 전환이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역사 연구자들까지 그러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탐구하거나, 그 시대의 인물을 전 사회적인 상징으로 추앙하는 작금의 세태는 무척 개탄할 만한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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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본 비평을 준비하던 즈음, 이영훈의 ‘환상의 나라’ 시리즈 2권이 출간되었다. 『호수는 어디에』라는 저서인데, 김제 벽골제가 담수호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지리 감각이 환상 속의 중국을 한반도에 이입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차치하고, 필자가 눈을 의심했던 대목은 현대의 대중국관계에 대한 그의 서술이었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걸고 중국과 일대 대결을 벌일 것이 자명한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후의 한 명까지 그 일전에 매진할 수 있겠는가 하는 탄식이었다.041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던 일본의 군국주의자, 한국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의 상호 혐오 감정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사고와 발언이 21세기의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상당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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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최근 십수 년간 이어온 그의 발언과 행보들이 과연 스스로 이야기한 연구자로서의 태도에 부합하는지 묻고 싶다. 치열한 사료 탐독과 실증 과정을 거쳐 통설과는 다른 주장을 펼친 그가, 스스로의 연구 결과마저 부정하며 쏟아내는 언설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스스로 강조한 냉철한 연구자의 역할을 버리고 일종의 ‘선동가’가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을 과거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반추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없다면, 그가 펴낸 ‘환상의 나라’라는 책들은 이영훈 스스로 그려내는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경제사로 윤색된 뉴라이트 ‘유교망국론’―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노비제론 비판-소순규-
태종세종때 노비종부법과 종모법은 양천교혼확산하고는 별 연관관계도 없는데 이영훈이 과거하고는 달리 학술적으로 날카로운 면이 많이 사라졌다는걸 많이 안타까워하시네요
첫댓글 원래부터 이상했습니다. 적어도 식민지 근대화론 중 상당 부분은 거진 논파된 상황이고요.
또한 조선시대 노비의 상당수는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입역노비가 아니라 포(布) 등으로 신공을 납부하는 납공노비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국가에서 파악하는 납공노비의 수가 수 십만 단위였으며, 일반 사대부가의 노비도 상당수는 납공노비였다. 그런데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납공노비의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고려 혹은 그 이전 시기에 노비의 존재가 조선시대와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다면, 이런 현상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필자는 이영훈이 개략적으로 제시한 한국사의 노비제 발전 과정은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007 아울러 그가 제시한 노비제 전개 과정이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면, 각 시대 노비가 존재하는 양태 역시 조선시대와는 매우 다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영훈의 노비제 입론은 이러한 측면에서 충분히 평가되고 음미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도 저 분은 이영훈이 노비제연구에 한 기여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기도하고
요즘쓴글은 예전에 비하면 기초적인 사실관계확인이나 날카로움이 안보이니
이영훈은 외거노비를 농노제에 비유하면서 오히려 실드에 가깝던 입장이었는데 그깟 이승만이 뭐라고 저렇게 학자로서의 자존심도 다 내팽겨치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