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정봉주와 미래권력들(미권스)
 
 
 
카페 게시글
미권스 자유게시판 스크랩 ♬나가거든 - 조수미 [명성황후 ost]
오월의햇살 추천 1 조회 90 12.02.07 16:1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조선의 국모다. 비록 타오르고 타올라

그저 한줌의 재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빗물에 쓸려 외롭게 떠돌지라도

이것이 어찌 내 마지막이라 하겠는가..."

 

 

 

 

 

 

  

[일본 신사에 보관된 명성황후 시해칼]

 

조선후기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북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나무로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있다.  칼주인의 자객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위해

새긴 것이다. 시해 칼은 하젠도라고 불리며 16세기 에도 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이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시해용으로 만들어졌으며

칼은 명치 41년 (1908)토오 가쯔아키란 사람이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기증관련 서류 -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이 있고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중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쯔끼아끼,

나(데리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라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초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일로

저기 홀로선 별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부디 먼훗날 나가고 슬퍼하는 이 나 슬픔속에도

행복했다 믿게해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