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믿음으로 자백할 수 있는가?
(2)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미쁘시고"에 이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 "
사람들은 죄 사함을 하나님의 사랑 혹은 인자나 자비와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여기에 나오는 '의로우사'를 하나님의 미쁘심과 연관시켰습니다. 『주기도문 해설』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1:9)라고 하였다. 혹자는 이 말씀이 아래와 같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자비하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말이다. 아니, 그러나 그는 의로우사 그들을 사하신다. 왜 의롭다고 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겸손한 죄의 고백자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 자기 자신을 속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예수님의 대속과 연결시킵니다. 『요한 서신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공의는 우리 마음에 형벌과 연관되어 있으며, 죄 사함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갚으시고,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신'다면(출34:7), 어떻게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신적 난제이다. 만유의 재판장께서 가볍게 죄를 감하실 수는 없다. 사실상 십자가는 그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시어 우리 죄를 위한 '화묵제'가 되셨기 때문이다(2:2). ... 간단히 말해서 그가 미쁘시어 죄를 사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며, 의로우사 죄를 사하신 것은 그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로우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찰스 프라이스입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용서의 토대
죄 용서함을 누리는 데 있어 장애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해의 부족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합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와 공의 중 어느 것을 토대로 하여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믿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관대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완벽하게 의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설 죄를 용설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를 토대로 하여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그분의 자비를 토대로 하여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셨으면 십자가는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공의로운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함으로써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십자가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이 되게 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우리 죄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행동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3: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요구가 만족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요청할 수 있고, 또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이 아닙니다. ...
죄 사함을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로 생각하는 한 나는 하나님 편에서 죄를 용서하셔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무 자주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고갈시키면 비록 전에는 나를 용서하셨을지라도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느끼는 죄책감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다루시는 것을 생각할 때 십자가와 그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마귀는 십자가의 충분성과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죄는 정복되었고, 십자가를 통해 마귀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용서하시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공의롭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으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죄를 자백한다고 지은 죄가 없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자백을 해도 여전히 죄는 남습니다. 물건을 훔친 사람이 도둑질했다고 자백하면 그 죄가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교도소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자백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자백하면 용서받는 이유는 자백 때문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깊은 반성과 후회, 상한 마음, 탄식과 흘리는 눈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은 필요하지만 죄 용서를 위해 반드시 오래도록 슬퍼하거나 탄식하거나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워드 스톰이 간증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가 사후체험을 통해 천국에 갔을 때 천국에 있는 존재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실이었다면 너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의심하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또, 전에 소개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예언도 도움이 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오, 저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과거 곧 제가 저지른 그 실수들과 잘못들과 실패들과 그 끔찍한 나쁜 것과 죄에 대해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으로 주가 말한다. 나의 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 말라. 기억하라. 나의 피 곧 보혈, 신성한 피,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의 피가 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려졌다. 그리고 참으로 주가 선포하였다. 나 곧 나는 너희 허물을 도말하는 자라. 그러므로 나는 너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곱씹어 생각하지 말라."
그러므로 자백할 때 자기의 죄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십시오. 보혈 때문에 용서는 단지 자비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가 된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자백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있다!
요한일서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였습니다.
출애굽기 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에스겔 37장에 거듭 나오는 '대언'이라는 단어를 볼 때(겔37:4, 7, 9-10, 12)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라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길성남 교수님은 그 의미를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다른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인 성령님은 '돕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중재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요14:16, 26; 15:26; 16:7).
그러나 요한일서 2:1에서는 죄를 범한다는 개념("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과 함께 나오기 때문에 '파라클레토스'를 단순히 돕는 자가 아니라 피고를 위해 변론하는 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니라 죄를 범한 신자들을 위한 중재자 혹은 변호자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죄를 범할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위해 중재하거나 변론하는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ESV와 NRSV 그리고 NASB도 '변론자'(advocate)라고 바르게 번역했고, NIV는 '아버지께 우리를 변호하는 분'(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이라고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재자 또는 변론자로서 죄를 범한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변론하십니다."
또, 김동수 교수님은 그 의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파라클레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것으로 예수님 혹은 성령님에 사용된 명칭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죄를 변호해주는 법정적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대언자보다는 변호사(자)가 더 나은 번역이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에서 대언자인지 아시겠지요!
저는 자백할 때, 이것을 상기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자백할 수 있는 키입니다. 사람들이 자백하고도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만 자백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할 때 우리를 위해 '대언'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주여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소서!'라고 자백할 때,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모두 담당하신 화목제물로서 "내가 이 사람의 죄를 모두 담당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우리를 위해 대언하십니다. 우리의 자백은 예수님의 대언과 함께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예수님의 대언을 묵살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찰스 피니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대언자이신 그리스도」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빚을 갚으신 대언자로서 변론하십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 자신을 속죄제물로 제시하십니다. ...
대언자 그리스도는 또한 그가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 것,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떠맡으신 것, 그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것을 변론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길성남 교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대언의 효과를 이렇게 장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요일2:2)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신자들을 위한 그분의 중재나 변론은 즉각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의로운 변론자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변론자이시며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1:9)."
길 교수님의 말이 옳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이 세운 구원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성자의 대언을 어찌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의 대언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님의 대언은 아벨의 피와 달리 심판이 아닌 용서를 구하는 피의 외침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어찌 아들의 피의 호소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 모두 능히 믿음으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