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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 마태오 복음 18,15-20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계기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그 중, 오늘 복음은 형제적 교정에 관해 들려줍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 형제의 파수꾼이다.” 카인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묻지만,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너는 네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다.”
‘교정한다’고 하면 우리는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칫 판단이나 꾸짖음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바탕에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에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 비유를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형제의 잘못을 깨우쳐 주라고 하시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그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잘못하면 가서 타일러라.”고 하십니다.
특히 “가서”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형제가 잘못했을 때 그에게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에게 보내십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으로 형제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짐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그의 삶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형제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이유가 언제나 사랑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말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괜히 어려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모른 척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형제에 대한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형제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면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어렵다면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고, 공동체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진리 없는 사랑은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게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묶을 수도 있고 풀어 줄 수도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음으로 누군가를 과거의 잘못에 묶어 둘 수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풀어 준 것,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 것,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애쓴 것은 하느님 안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형제적 교정은 단순히 ‘잘못을 고쳐 주는 일’이 아니라 ‘형제를 다시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내가 가진 옳음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형제의 파수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형제를 판단하기 위해 다가가는가, 아니면 다시 얻기 위해 다가가는가?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 풀어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형제를 묶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풀어 주고, 다시 얻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9월6일 [연중 제23주일]
에제키엘 33,7-9 로마 13,8-10
마태오 18,15-20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의 의미
오늘 복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작은 교회라 하고, 소공동체도 작은 교회라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이기 때문에 굳이 가톨릭교회에 속해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습니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분의 명예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명예란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으로 살라는 것은 곧 당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명예가 교회를 통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당신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정하였고, 교회를 통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까지 부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부여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교회의 사제였을 때부터 죄를 자신의 고행으로 용서받으려고 했지 교회에 부여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교회라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3주일 강론>
(2026. 9. 6.)(마태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누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누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형제애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고 해서 다 공동체인 것은 아니고,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9).
이 가르침은, “이웃이 너 자신인 것은 아니지만 너 자신인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이웃은 곧 너 자신이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 생색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형제애는 한쪽 손을 다치면 다른 쪽 손으로 치료하는 일과 같습니다.
누구나 당연히 하게 되는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내가 아프기 때문에, 또 내가 슬프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13).
이 말씀은, “잃은 양 하나 때문에 목자가 크게 슬퍼한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슬픔과 기쁨이 곧 우리의 슬픔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2) 15절에 있는 ‘너에게’ 라는 말은 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할 수도 있는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파문 단계까지 가는 것일까?
금방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단 교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또 성사 모독죄나 신성 모독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심각한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죄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죄인이라도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ㄴ).”
3)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시켜라.”만은 아니고,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이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형제를 회개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나는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은(1티모 1,15), 그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형제애는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을 타이르는 일이 아니라,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그런데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면서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사실 내가 회개하는 일과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은, 순서를 따질 것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타이르고 회개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라도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6일 [연중 제23주일]
복음: 마태 18,15-20: 용서하고 화해하라
1. 형제를 얻는 복음적 길: 공동체 안의 책임
오늘 복음은 교회의 내적 생활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라.”(15절) 사랑의 길을 제시하신다. 에제키엘서(33,7-9)는 예언자의 사명을 통해 공동체적 책임을 밝힌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는 백성을 심판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생명으로 돌아오도록 이끄는 파수꾼이다.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하여도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익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교회 안의 형제적 권고는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봉사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형제의 죄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냉담이다. 사랑은 진리를 말할 용기를 낸다.”(Homiliae in Matthaeum, 60,1 의역) 교리서는 “형제의 죄를 바로잡는 것은 자비의 영적 행위”(1829)라고 말한다. 즉,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2. 화해의 3단계: 사랑의 질서 안에서
예수님은 형제의 잘못을 대하는 세 단계의 방법을 제시하신다.
1)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15절): 이 첫 단계는 인격과 존엄을 존중하는 만남이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회개의 첫걸음은 비밀스럽고 진심 어린 대화로 시작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의 잘못을 남에게 알리기 전에, 먼저 그와 사랑으로 만나라. 사랑이 없는 진리는 폭력이 되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위선이 된다.”(Sermo 82,2 의역)
2)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라.”(16절): 이는 단순히 법적 절차가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 참여를 의미한다. 공동체는 죄를 단죄하는 집단이 아니라, 회개로 인도하는 치유의 공간이어야 한다.
3) “교회에 알려라.”(17절): 마지막 단계는 교회의 공적 개입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제명’이 아니라, 형제의 회복이다. 교회의 징계는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돌아올 문을 열어두는 징계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 안에서만 완성된다. 교회는 죄인을 벌하는 곳이 아니라, 자비로 그를 치유하는 어머니이다.”(DM, 12항 의역)
3.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교회의 권위와 사명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18절)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마태 16,19)을 공동체 전체에 확장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권위가 단일 인물에게서만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 안에 있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졌음을 뜻한다. 교회 헌장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모으시어, 성령 안에서 일치하게 하시며, 진리와 사랑 안에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9항 의역)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머무는 신비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지배나 통제가 아니라, 화해시키는 사랑의 봉사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기신 ‘화해의 임무’(2코린 5,18)를 수행한다.”(981항 의역) 이 직무의 목적은 언제나 화해이며, 공동체 안에서 죄가 은총으로 바뀌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4.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교회의 신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20절) 교회는 외적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일치하는 신앙 공동체, 곧 하느님 현존의 자리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Adversus Haereses, III,24,1 의역)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형제애의 사랑 안에 있다. 기도와 말씀, 화해와 용서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친히 머무시어 그 공동체를 당신 몸으로 변화시키신다.
5. 사랑, 율법의 완성: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로마 13,8-10)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즉,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In Episto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7,8 의역)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비난이 아닌 이해가, 배척이 아닌 화해가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공동체이기에, 그 사랑 안에서만 진정한 권위와 일치가 유지된다.
6. 화해의 영성: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공동체의 이상은 결코 추상적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 본당,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 용서와 화해의 영성이 살아나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화해하지 못하는데, 하느님과 화해할 수는 없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은, 우리가 먼저 형제와 화해하려는 마음 안에서만 생겨난다.”(2840항 요약)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증명된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 드러난다.
7. 맺음말: 사랑의 일치 안에 머무는 교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본질을 묻는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는가, 아니면 얻기 위해 노력하는가? 우리는 상처를 남기는가, 아니면 화해를 일으키는가? 주님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20절)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교회의 심장이다. 우리의 가정, 본당, 사회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할 때, 그분의 현존이 우리 안에 살아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만 드러난다. 그 사랑의 법을 실천할 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내가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