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학선 宋學先(1897 ~ 1927)】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계획 주도"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天然洞, 현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송학선(宋學善)과 송인수(宋仁秀)를 사용하였다. 13세 때 부친이 하던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어려운 생활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1916년 남대문의 일본인 농구점(農具店)에 고용원으로 취직했으나, 1922년 각기병(脚氣病)에 걸리면서 해고되었다. 각기병은 3년이 지나서야 치유될 수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총독 처단 의거를 일으키기 몇 해 전에 친구들과 진고개(현 충무로 일대)에 놀러 갔다가 고서점에서 우연히 안중근(安重根)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안중근을 흠모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뜻을 품었다.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면서 받은 멸시와 횡포로 반일 감정은 깊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식민 지배의 우두머리인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의지가 굳어져 갔다. 그 후로 신문이나 책을 통해 사이토 마코토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의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1926년 3월 남대문의 경성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작지만 예리한 칼을 주웠는데, 이를 사용할 기회가 빨리 오기를 고대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오전 6시 융희황제(순종)가 사망하였다. 일제는 이 사실을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오후에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이 때는 혼자서 노점상을 막 시작하던 무렵인데,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귀가하여 옷을 차려입은 뒤 창덕궁(昌德宮)으로 달려가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호곡(號哭)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조선총독 사이토가 조문할 때를 기해 의거를 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튿날에는 비수를 품고 돈화문 앞에서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조문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 경찰의 경계만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일제는 탑골공원에 기관총부대를 설치하는 한편 전국의 일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면서 철통같은 경계망을 폈다. 거리에는 온통 일본군과 일제 경찰로 가득 찼고, 무장시위를 감행하면서 공포분위기로 몰고 갔다.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경 창덕궁 돈화문과 금호문(金虎門) 사이를 오가며 기회를 엿보던 중, 덮개가 엎는 자동차에 일본인 3명이 타고 창덕궁 서남쪽 출입구인 금호문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사이토가 탄 것으로 생각하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2명을 칼로 찔렀다. 거사를 마치고 뒤쫓아 오는 기마 순사를 비롯한 일제 경찰과 격투를 벌였으나, 혼자의 힘으로 수십 명을 당할 수 없어 끝내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총독인 줄 알고 처단하려던 자는 사이토가 아니라 경성부협의회(京城府協議會) 평의원 겸 일본인민회(日本人民會) 이사 사토 도라지로(佐藤虎太郞)와 국수회(國粹會) 부회장이면서 경성부협의회 평의원이던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였다.
금호문 의거 다음날 국수회 회원 수십 명이 일본도와 장창 등으로 무장하고 국상 중인 창덕궁내에 뛰어들어 온갖 욕설과 함께 한국인을 구타하는 한편 각종 시설을 파괴하는 등 야만적인 행패를 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창덕궁 경비를 맡고 있던 일제 군대와 경찰들은 국수회 회원들의 난동을 보고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일제는 금호문 의거가 사회에 끼칠 파장을 우려해 언론 보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나섰다. 때문에 의거 사실은 즉시 보도될 수 없었고, 5일이 지난 뒤인 5월 2일에 가서야 일반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보도 통제가 풀리자 각 신문들은 일제히 사이토 처단 의거를 앞 다투어 대서특필하였다. 더욱이 지극히 평범한 필부(匹夫)가 결행한 단독 의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의 충격과 한인들의 감동은 배가되었다. 『동아일보』는 의거를 “조선 민중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였고, 『시대일보』는 대중운동의 ‘선구자’로 비견해 보도하였다.
재판 과정은 초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법정에는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일본 재판관이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며 의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혔다.
1926년 6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3일에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1927년 1월 27일 사형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19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