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꺼먼재산(400.7m)’은 금오지맥 상에 있는 봉우리.
지명의 유래는 알수가 없으나 ‘꺼먼’이라는 말이 ‘검다’라는 뜻을 떠올리게 된다.
북봉산과 다봉산은 약 400년 전부터 벽진이씨 북봉공파와 밀양박씨 경주공파가 집성, 거주하던 곳으로서 성남촌과 다복으로 불려져 왔으며 성남촌의 뒷산은 북봉산(등골산), 다복의 뒷산은 다봉산(범어골)으로 불려 왔다는 것.
꺼먼재산에서 내려선 점터고개는 옛날 옹기점(甕器店)이 있어서 '점터'가 되었고, '점티' 또는 '점현(店峴)'이 된 것.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인조 12년(1634년) 4월 영남으로 유람시 송준길 선생과 함께 성남촌(현 봉곡동)에서 벽진이씨 선조인 북봉 이민선을 만났다는 기록이 송자대전에 있으며, 당시 이민선은 뒷산의 이름을 따 ‘북봉(北峰)’을 아호로 삼았다고 한다.
최근 역사적 근거를 자료로 “북봉산(北峰山)과 다봉산(多峯山)이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들머리 원호고개 고가육교 건너편 나즈막한 봉우리 ‘평성산(坪城山 105)’은 옛지명 평성면(坪城面)에서 유래된 것.
접성산(接聖山 374.5)의 조선시대 지명은 ‘대황당산(大皇堂山)’으로 불렸다.
대황당산 중턱에 접성사라는 절이 있어 접성산 지명이 유래했다고도 하며,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접산·대황당산·봉화산’이라고도 하였다.
결코 높다라고 할 수 없는 접성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의 광활한 경치에 매료된다.
특히 낙동강 방면으로 보이는 구미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산행코스: 원호고개육교-평성산-다봉산-북봉산-꺼먼재산(U턴)-점터고개-봉화산(377.2)-헬기장-접성산-간바위갈림길-야은길재 생가터-봉한2리마을회관(11km,4시간 50분)
궤적.
걷는 시간은 4시간 15분이나 총 산행시간은 4시간 50분.
미리 준비한 표지기. 377.5m봉(봉화산)은 현지에서 급조했다.
네비엔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산42-5'를 입력하였으나 댈 곳이 마땅치 않아 조금 더 이동 한적한 곳에 차를 댔다.
산길은 육교를 올라 데크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착각을 했다. 육교 건너편에 평성산이 있어 다녀와야 하지만 반대로 올랐다가 되돌아 갔다 온 것. 씨익 씨익~
정자가 있는 평성산에 올랐다.
고도라 해봤자 약 105m.
육교 건너 데크를 오르는 길이 꺼먼재산 가는 진행방향.
솔숲길.
군데군데 이정표가 길안내를 하는 등로.
목교를 건너고...
다시 솔숲을 오르는 길에...
육체노동자의 굵은 심줄처럼 노출된 소나무 뿌리.
벤치쉼터가 있는 다봉산(多峯山)에...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고...
이정표도 확인한다.
다봉산 정상석.
다봉산에서 채 1km가 되지 않는 북봉산이 솔숲 위로 솟았다.
전형적인 육산에 이따금 박혀있는 바위들.
다봉산에서 20여분 만에 북봉산에 올랐다.
북봉산은 벽진 이씨들의 뿌리같은 산.
북봉산 등산로.
북봉산에서 다봉산과 꺼먼재산이 각각 0.9km.
표지기를 건 뒤...
꺼먼재산 200여m 직전에서 점터고개 갈림길이 있다. 꺼만재산을 다녀온 뒤 이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
꺼먼재산에 도착하자 되돌아 가는 선두그룹들. 그들은 금오지맥 '송천산(397.2)'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중이다.
안내판.
꺼먼재산의 삼각점.
점터고개로 내려서다 앞서간 일행들 틈에 끼여 요기를 한 뒤 신설임도를 건넌다.
솔밭길에서...
금세 점터고개 2차선 아스팔트에 내려선다.
접성산 오르는 입구의 안내판과 이정표.
안내판.
'店峴' 표지기를 건 뒤 높이를 대강 적어 넣었다.
뒤돌아 본 모습.
등로 우측으론 채석장인 듯.
산길은 내내 솔숲.
봉우리 커다란 봉분의 주인은...
'일선 김씨'와 '밀양 박씨' 쌍분.
이정표의...
작은 등산로 안내판.
또다시 이정표. '대황정'은 접성산을 말한다.
방공호가 있는 이지점이 '봉화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급조하여 매달았다. 접성산보다 높이는 더 높은 것. 접성산을 봉화산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이 봉우리를 말하남?
봉화대가 있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금세 만나는 헬기장에서 '야은 길재생가터'로 내려갈려고 길을 찾으니 온통 잡목숲이어서 난항.
헬기장 이정표를 확인한 뒤...
곧 '간바위 50M'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길은 뚜렷.
우선 봉황정 팔각정자에 오른 뒤..
준비해간 표지기를 건 뒤...
아주 관리가 잘 된 팔각정자를 보다...
대황정 현판을 당겨 잡는다.
기념사진을 찍고...
안내판과...
주변 풍광을 비교한다.
클릭 <파노라마>
접성산에서의 조망.
#2
간바위 갈림길로 되돌아가 '간바위'를 지난다. 유래는 알 수 없어...
내려와서 뒤돌아 보았다,
계곡에 떨어져서...
울타리 쳐진 묘지의 주인은...
'은진송씨가족묘원'.
임도를 내려오면...
'고려문화주서 야은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遺墟碑)'.
야은 길재는 고려 후기의 인물로서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태종이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선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컬어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을 추모하였다.
'길재선생유허비'는 여기 말고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9'와 충남 금산의 '청풍서원'에도 있다.
述志(술지) / 뜻을 말하니 冶隱 吉再(야은 길재)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 시냇가 초가집에 혼자 느긋해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 달 밝아 바람 맑아 흥 일어 넘쳐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 바깥 손 아니 와도 산새 지저귐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 평상 옮겨 대밭에 누워 글 읽어
내려오며 돌아본 모습. 길가 좌측 자그마한 바위에 시가 새겨져 있다.
죽림사 절마당으로 들어가...
마당 한가운데의 오층석탑을 카메라에 담는다.
배불뚝이 포대화상과 정면 3칸 팔작지붕 대웅전.
죽림사를 돌아나오자 오죽(烏竹)이 빼곡하다. 사찰 이름이 죽림사(竹林寺)가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포장도로를 내려오자...
마당이 제법 너른 곳.
'봉한2리마을회관' 앞이다.
회관 앞 길가에 똬리를 틀었다.
첫댓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