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수술과 예의 제도
-예禮와 수數에는 늘 천지 질서가 있다-
앞에서 이미 수술의 기원 ‧ 기본 관념과 몇 가지 전형의 수술 형태를 소개한 바 있다. 이런 수술 형태의 기본 관념과 조작 행위에 대한 소개를 통해 일정하게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알려 주고 싶은 것은 수술 자체가 일종의 문화 형태로 역사상에서 장기간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 관념과 조작 행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옛날부터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 알려졌다. 근래는 ‘예의문화禮樂文化’로 전통문화 풍모를 개괄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예禮’란 무엇인가? ‘예’가 전통문화 가운데 도대체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가? ‘예’와 수술도 연관이 있는가? 본장에서 이런 몇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고대의 예제禮制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1. 예의 연원 -둘은 원래 같은 뿌리이다
원시인이 직면하게 되는 생존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이다. 더구나 원시사회의 생산력 수준 또한 매우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존해 나가려면, 반드시 공동체群體의 역량에 의지해 사냥 ‧ 채집 ‧ 경작부터 각종 공예 기술의 발명 내지는 각종 무술巫術 ‧ 종교 활동까지 이르게 된다. 만약 공동체 역량의 참여가 없다면,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향심력向心力과 온정성穩定性을 유지하고 각종 생산생활 행위의 효율을 제고 하려면 반드시 일련의 행위 규범과 질서를 제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禮의 기원이다.
‘삼례三禮’(《의례儀禮》‧《주례周禮》‧《예기禮記》)와 현대 인류학의 관점에 의하면, 사람이 있으면 예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있으면 문화가 있게 마련인 때문이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 되었고 또 자료도 부족하기 때문에 인류 초기의 에의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긍정할 수 있는 것은 고대문화의 문명이 발생하기 전후(약 BC 2,600년경~ BC 2,000년간)에 한 차례의 변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고고학 상에서 ‘용산시대龍山時代’라고 부른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대량으로 이 시기의 마을 유적과 고분 유적을 발견하였다. 이런 마을 유적의 규모와 배치로 보면, 그것들은 정체상整體上 어수선하게 흩어진 채 드러냈다. 모든 하나의 큰 마을 주위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또 어떤 중심 마을은 이미 후세의 성지城池 기능을 구비하였다. 그 가운데 발굴된 기물器物은 수량뿐만 아니라 질량에서도 모두 주위의 작은 마을보다 수준이 훨씬 높았다. 큰 마을과 작은 마을 사이의 거주자는 사회 지위에서 비교적 큰 거리가 있었다. 대형 고분유적의 부장품 중에서 특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옥기玉器과 순인殉人이다. 이런 옥기玉器의 속성을 고찰하여 연구하면, 그 제조가 정교하고 우수하다. 가능하면, 선조 ‧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따위 종교 활동의 용품으로 썼고,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큰 무덤 중에서만 나타나기에 재부財富, 권력權力 그리고 지위地位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순인殉人은 노예 혹은 전쟁포로일 수 있다. 보통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추단하건데, 큰 무덤의 주인이 독점하고 아울러 유기물類器物과 순인殉人을 부장한 것은 생전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선조 ‧ 신령과 교통交通하는 특권으로 죽은 후에 계속하여 부귀와 사치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데 것이다.
여기서 당시 사회의 의식 형태를 언급하고자 한다. 아직도 앞에서 제시했던 ‘절지천통絶地天統’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이 이야기가 반영한 시대와 용산龍山 시대가 대체적으로 같은 시기이다. 사실은 문명발생 전후의 ‘세계질서世界秩序’가 의식형태 영역에서의 집중적 구현이다. 수술의 기원을 소개할 때, 그 ‘절지천통’은 수술 산생의 하나의 필요한 전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사의 각도로부터 보면, ‘절지천통’은 일종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건립을 상징한다. 이런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신령과 교통하며 하늘과 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다시 아니 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수의성隨意性의 행위이 아니라 통치 계급이 독점하는 하나의 특수한 직능으로 변한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런 직능을 행사하는 것은 축祝 ‧ 종宗 ‧ 복卜 ‧ 사史 부류의 직관職官들이다. 그들은 각자가 자기의 그 직을 맡아 조리정연하게 공동으로 이런 ‘세계질서’를 세워 지키고 있었다. 이런 세계 질서와 그 관련되는 직관 체계職官體系가 바로 당시의 ‘예’이다. 이런 예의 체계 가운데 제사예의祭祀禮儀와 전장제도典章制度의 분야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의에서 ‘예’는 일종 ‘천지의 서열天地之序’이다. 그의 신성성을 모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예의 기원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바로 이러한 과정 중에서 수술과 예의 내적 연관이 발견된다고 할 것이다. 양자는 본래 같은 뿌리 혹은 ‘절지천통’이후 ‘예붕악괴禮崩樂壞’ 이전 수술이 근본적으로 예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예붕악괴’ 이후, 예가 정치화 ‧ 논리화가 되면서 동시에 그 가운데 신비주의 요소는 수술에 계승되어 계속 발전된 것이다. 양자가 초기의 이런 내적 연관은 후세의 어려운 분리를 미리 마련한 것이었다.
2. 수술과 예의 정치화 -‘팔일지무八佾之舞’
《논어》중에는 이런 한 가지 사실이 기록되었다.
孔子谓季氏 ‘八佾舞干庭, 是可忍, 孰不可忍也’
공자가 노 나라의 정경正卿 계평자季平子와 담론할 때에 ‘그가 감히 집에서 팔일八佾의 악무를 연주하니, 만약 이런 사실을 참는다면, 무슨 일을 참지 못하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한 사례의 일상적인 활동이 무엇 때문에 공주자孔老夫를 이렇게까지 화를 내게 했는가?
여기에서의 관건은 계평자가 사용한 ‘팔일의 춤八佾之舞’이 결코 심상치 않은 악무 활동이라는 데 있다. ‘일佾’은 행行 ‧ 열列의 뜻이다. 일佾이 여덟 사람이면 팔일八佾은 육십네 사람이다. 주례周禮의 규정에 의하면 천자만이 팔일의 춤八佾之舞를 사용할 수 있고, 제후는 육일六佾, 경대부卿大夫는 사일四佾, 사士는 이일二佾을 사용할 수 있다. 계씨는 정경이므로 예제에 의하면, 당연히 일종의 용인할 수 없는 예를 범한 행위인 것이다.
이상으로 전장제도典章制度로 하는 정치화의 ‘예’가 옛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신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대략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성한 지위는 주요하게 ‘수數’를 통해 구현된다. 사회의 신분 ‧ 지위의 같지 않음 ‧ 봉지封地의 대소 ‧ 주택의 규모 ‧ 봉록俸祿의 다소 ‧ 예빈禮賓의 규격 ‧ 상장喪葬의 형식 따위도 이에 따라 같지 않다.《좌전左傳》장공莊公 18년에, ‘王命諸侯, 各位不同, 禮亦異數’라고 되어 있다.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후인들이 자주 말하는 ‘예수禮數’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그럼 예제의 신성성의 내원來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실은 그래도 ‘예수’에 있다. 옛날 사람들은 ‘수數’의 신성성에 대한 동일시와 수술 가운데 신비한 숫자의 관념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의 신비성은 그것이 사람과 신의 관계와 ‘하늘과 땅의 서열天地之序’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예제는 ‘예’의 정치화로써 또한 ‘수’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신성성도 자연히 모욕하는 것을 허용되지 않았다.
예제의 신성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 일종의 종교 신앙에 가까운 열정을 산생하였다. 일반 백성들에 대하여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절대 명령으로써 자기 행위의 규범이었다. 통치자들에 대하여 말해도 각종 전장 제도와 시정 방침을 제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예를 들면,《사기》<봉선서封禪書>에서 이런 한 가지 사실을 기술하였다.
問 ‘故秦时上帝祠何帝也?’
對曰 ‘四帝. 有白 ‧ 青 ‧ 黄 ‧ 赤帝之祠.’
高祖曰 ‘吾聞天有五帝, 而有四, 何也?’ 莫知其说。
于是 高祖曰 ‘吾知之矣, 待我而具五也.’ 乃立帝祠,
命曰 ‘北疇’
한漢 고조(BC 256~BC 195)가 이전에 ‘진秦 나라에서는 어떤 천제들에게 제사를 지냈는가?’라는 물을 일이 있다. 수행인이 ‘4제四帝인데, 백제白帝 ‧ 청제靑帝 ‧ 황제黃帝 ‧ 적제의 제사赤帝之祠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고조는 ‘내가 듣기는 하늘에 5제五帝가 있다는데, 어떻게 4제四帝밖에 없는가?’라고 했다. 수행인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러자 고조는 ‘알았다. 이것은 내가 5제지사五帝之祠를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명령을 내려 흑제사黑帝祠를 건립하고 ‘북주北疇’라 하였다.
천제 제사가 4제에서 5제로 바뀐 것은 고대에서 일대 큰 사건大事이었다. 그런데 변화의 동인動因은 당시 사람들이 숫자 ‘5五’를 숭상한 데에 있다. 이것은 당시 음양오행학설의 유행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3. 수술과 예의 논리화 -‘3년상三年喪’
옛날 사람들이 이전에 ‘죽음을 섬기는 것은 삶을 섬기는 것과 같다’의 전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상장 예의喪葬禮儀가 더욱 발전했고 그 영향도 극히 심각하고 거대하였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간에서도 그바람에 따라 여운을 남겼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은이의 고향에서는 한 집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연고자가 상중麻戴孝에 이른 것을 제외하고는 기타 연고자는 조문했으나 사자死者에게 제전祭奠하는 이외에도 많은 금기가 있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것은 이 집 사람과 동족근친이 3년 이내에 혼사가 있으면 안 되고, 명절 때마다 폭죽爆竹나 연화煙花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소위 ‘삼년지상三年之喪’이다.
‘삼년지상’의 풍속은 사실 대부분 지역에서 모두 유행된 것이다. 그것의 근원도 매우 오래 되였다. 적어도 그것은 춘추 전국시기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 역사 이전의 주기성週期性 상의喪儀 가운데에서도 그 원형이 발견된다. 그래도 또 물을 수 있다. ‘삼년지상’의 ‘3년’은 어떻게 된 일인가? 무엇 때문에, 1년 ‧ 2년 혹은 5년이 아니고 반드시 3년인가? 이런 강구도 응당 수술 가운데 신비한 숫자의 관념에 관계된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많은 원시민족 가운데서 수數에 단독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1一’과 ‘2二’뿐이고 간혹 가다가 ‘3三’이 있을 때도 있다. 이 몇 개의 수를 초과했을 때 그들은 3을 2·1로, 4를 2 ‧ 2, 5를 2 ‧ 2 ‧ 1 따위나 혹은 아예 ‘많음’ ‧ ‘매우 많음’ 혹은 ‘매우 매우 많음’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원시인의 마음 속에는 ‘3三’을 ‘극極’으로 보거나 ‘많다’에 해당했다. 또 원시사유의 영향으로 인해 그것도 모종 신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3三’을 사용할 때, 왕왕 실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많다’는 관념의 표현인 동시에 자기가 숭배하고 경외하는 따위 감정의 표현인 것이다. 후세의 언어 가운데 ‘삼사이행三思而行’ ‧ ‘거일반삼擧一反三’ ‧ ‘용관삼군勇冠三軍’과 여기 ‘삼년지상三年之喪’ 따위도 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인류 이성의 발전에 따라 ‘삼년지상’이 상고 시기의 신비색채가 점차 옅어져 심지어 거의 다 사라졌다. 상례喪禮 자체의 신비한 의미도 점차 적어지고, 이제는 ‘삼년’의 유래도 뚜렷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여기에 이르러, ‘삼년’에 대한 이해가 다시 분기分岐하여 산생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바다 내에 평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왕文王을 안장할 틈이 없어서 그 시체를 싣고 행군하였기에 삼년지상이 되었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주 문왕이 죽은 후 무왕이 문왕의 공덕을 선포하여 주위의 작은 나라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국가들이 너무 떨어져 단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문왕의 상기喪期를 삼년으로 연장하여 먼 나라의 사자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미가 가장 풍부한 것은 그래도 공부자孔夫子의 해석이다.
子生三年 然后免于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아이가 태어나면 삼년까지는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녀들은 삼년간의 상복으로 부모에 보답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