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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악산 오르는 도중에 바라본 서쪽 조망, 왼쪽이 호남정맥 백암산(?)
岧嶢絶頂倦游筇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지팡이 놓고 쉬니
雲霧重重下界封 운무가 겹겹이 시야를 막았다가
向晩西風吹白日 이윽고 서풍 불어 태양이 눈부시고
一時呈露萬千峯 천봉만학이 일시에 드러난다
不亦快哉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不亦快哉行)」 20수 중 제5수
▶ 산행일시 : 2022년 11월 20일(일), 맑음
▶ 산행코스
진악산 : 수리넘어재(진악광장),600m봉,진악산,735.1m봉(물굴봉),도구통바위,영천암,보석사 은행나무,보석사,
주차장
선야봉 : 원고당,원고당교,480.3m봉,635.5m봉,선야봉,552.1m봉,원고당
▶ 산행시간 : 4시간 55분(진악산 : 2시간 40분, 선야봉 : 2시간 15분)
▶ 산행거리 : 진악산 도상 5.4km(이정표 거리 6.8km), 선야봉 도상 5.7km
▶ 교 통 편 : 신사산악회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02 - 신사역 5번 출구, 버스 출발
07 : 22 - 죽전정류장( ~ 07 : 30)
08 : 34 - 죽암휴게소( ~ 09 : 00)
09 : 50 - 수리넘어재(진악광장), 진악산 산행시작
10 : 23 - 600m봉
10 : 40 - 진악산(進樂山, △732.3m)
11 : 08 - 735.1m봉(물굴봉)
11 : 32 - 도구통바위
12 : 00 - 영천암(靈泉庵)
12 : 20 - 보석사 은행나무, 보석사(寶石寺)
12 : 30 - 주차장, 산행종료, 점심( ~ 13 : 45), 선야봉 들머리로 이동
15 : 00 - 원고당, 선야봉 산행시작
15 : 50 - 635.5m봉
14 : 10 - 선야봉(仙冶峰, △758.7m)
16 : 40 - 552.1m봉
17 : 15 - 원고당, 산행종료(17 : 45 버스 출발)
19 : 00 - 신탄진휴게소( ~ 19 : 15)
21 : 20 - 신사역
2-1. 진악산 지형도(국토지리정보원, 금산 1/25,000)
도구통바위 표시가 잘못 되었다. 도구통바위는 735.1m봉(물굴봉) 남동쪽 아래 안부께에 있다.
2-2. 선야봉 지형도(국토지리정보원, 금산 1/25,000)
▶ 진악산(進樂山, △732.3m)
내 여태 진악산은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진악산보다는 진악산 기슭 보석사 앞에 있다는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인 노거수라고 하니 더욱 보고 싶었다. 오늘 산행 진행대장인 Opro 수석알엠 님은 먼저 자기소개부터 한다. 산행
경력 38년이라며 백두대간은 24구간으로 끊은 울트라백두대간을 포함하여 수차례 하였고, 9개 정맥을 물론
기맥, 지맥, 분맥, 단맥 등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는 섭렵하였다고 한다. 비록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어느 산을
막론하고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물어보시더라도 자세히 답변해드리겠다고 한다.
이어 진악산은 수리넘어재(진악광장, 해발 370m)에서 오를 텐데, 정상 찍고 다시 수리넘어재로 올 것인지(이때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라고 한다), 아니면 남동쪽으로 계속 진행하여 도구통바위를 지나 보석사 주차장으로 갈
것인지(이때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라고 한다) 묻는다. 아무 대답이 없자, 그렇다면 보석사 주차
장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겠단다. 우리는 우레 같은 박수친다. 이어 선야봉은 그 들머리인 원고당까지 이동하는데
버스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리고,
선야봉은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약 3km인데, 왕복 6km 소요시간은 발 빠른 사람이 1시간 50분 정도 걸리고 대개
2시간 30분 정도면 넉넉하다고 한다. 선야봉은 출입통제구간(아마 산불방지기간이라서 통제하지 않을까 한다)인
데, 산행경력 38년인 백두대간 울트라를 포함하여 수차례 했고 9개 정맥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를 섭렵한
Opro 수석알엠 진행대장님이 산림청 관계자를 30분 걸려 설득하여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어렵게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가 원고당 마을에 사는데 서울에서 모처럼 산 친구들이 온다고 하여 선야봉을 가자고 했다며, 내 동네 산을
갈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설득한 게 먹혔다고 한다. 그러니 산림청 승인 받은 선야봉 정상을 오른 길 그대
로 내려오시라고 신신당부한다. 다른 길로 갔다가는 벌금을 낼 수도 있을 거라고 덧붙인다. 우리는 손바닥이 얼
얼하도록 박수친다. 그런데 박수는 치고 나니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진악산만 해도 산행공지한 대로 진행하
면 되고, 선야봉도 당연히 갈 수 있어서(또는 갈 수 있게 해서) 가는 게 아닌가.
진악산 들머리인 수리너머재(진악광장) 주차장이 한산하다. 진악산 2.0km 이정표 안내대로 데크계단을 오른다.
진악산 자락에 영천암, 보석사, 원효암, 관음암 등 명찰이 많아 혹시 108 계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어
보았다. 그랬다. 108 계단이다. 물론 가파른 오르막이라 곧이어 목재계단이 계속되기는 한다. 108계단부터 갈지
(之)자 크게 그리며 오른다. 능선에 이르고 잘난 길은 그 너머 사면을 길게 돌아가지만 직등하는 흐릿한 인적이
보인다.
나는 직등한다. 미끄러운 낙엽에 몇 번이나 엎어질 듯하며 거친 숨 긴 한 피치 올라 사면을 돌아오는 주등로와
만난다. 걸핏하면 사면 도니 완만한 오르막이다. 되똑하게 솟은 암봉인 600m봉도 오른쪽으로 돌아 넘는다. 그런
데 등로 약간 벗어나 600m봉 뒤쪽에서 오른 인적이 보인다. 들른다. 짧은 한 피치 바위 슬랩 오르면 너른 암반인
정상이다. 경점이다. 지금까지 하늘 가린 숲길이었는데 고개 들자 일시에 만학천봉이 드러난다. 이러니 산을 좋
아하지 않을 수 없다.
진악산 오르는 도중에도 바윗길이 나오면 수렴 헤쳐 너른 들판 끄트머리 서대산과 천태산을 기웃거린다. 진악산
정상이 가깝다. 정상은 헬기장으로 옆에 데크전망대를 설치했다. 조망이 훤히 트인다. 금산읍이 한갓 의질(蟻垤)
로 보인다. 삼각점은 깨져 안내판으로 알아본다. 금산 22. 진악산은 충남에서 서대산(903m), 계룡산(84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용재 이행(容齋 李荇, 1478-1534)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금산군의 진산(鎭山)은 북쪽 2리에 있는 ‘소산(所山)’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이름조차 찾을 수가 없고
이 진악산을 진산으로 여긴다.
3. 멀리 가운데는 서대산
4. 왼쪽은 백암산, 그 오른쪽 뒤는 선녀봉
6. 진악산 가는 도중의 암봉(600m), 경점이다
7. 진악산 오르는 도중에 서쪽 조망
9. 멀리 가운데는 천등산
10. 왼쪽은 천등산, 오른쪽은 대둔산(한듬산)
진악산 정상을 오른 의식으로 배낭 벗어놓고 물 한 모금으로 목 추긴다. 남동진한다. 이 다음 봉우리는 진악산에
서 가장 높은 735.1m봉이다. 평탄한 숲길 1.8km이다. 막판에 돌계단 잠시 오르면 널찍한 공터에 돌탑 있는
735.1m봉이다. 이정표와 안내판에 ‘물굴봉’이라고 한다. 다음은 안내판의 내용이다.
“진악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35.7m)로 봉우리 아래 바위굴이 있는데 너댓 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진악산 물굴봉이 머리이고 금성산과 서대산이 몸통이며 영동 양산이 용의 꼬리에 해당되
어 용이 사는 굴이라 용굴이라고도 하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영험이 있다고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진악산 내용이다.
“(진악산) 동쪽 봉우리 아래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서너 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로는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東峯下有石穴,入四五步許,水聲洶涌,深邃不測。俗傳龍之所處。天旱沈虎頭,有應。)”
물굴봉 정상에서는 사방 키 큰 나무숲이 가려 아무 조망이 없지만 정상 전후로 약간 벗어나면 여기를 뭇 산의
맹주로 여길만한 조망이 트인다. 도구통바위 가는 길. 급전직하로 떨어진다. 데크계단 내리고 돌길 우르르 쏟아
졌다가 등로 살짝 비킨 전망바위에 살금살금 들러 산 첩첩 둘러본다. 운장산과 구봉산이 보인다는데 옅은 연무로
알아볼 수가 없다. 사면 길게 돌아 주릉에 들고 곧 도구통바위다. 지도에도 표시된 바위이기에 대단한 줄로 생각
했는데 왜소하다. 도구통은 절구통의 이 지방 방언이다.
도구봉바위에서 몇 걸음 내리면 ┣자 갈림길 안부인 도구통재이다. 오른쪽 사면 길이 보석사로 간다. 오른쪽이나
왼쪽 능선을 가도 보석사로 이어지는데 별다른 조망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얌전히 잘난 길 따라 내린다. 한 차례
가파르게 내리고 골짜기가 가까워지자 부드러운 사면 도는 길이다. 너른 포장도로와 만나고 영천암 갈림길이다.
이정표에 영천암 0.1km이라기에 들른다. 가다 보니 0.2km가 넘는 오르막이다. 땀난다.
영천암(靈泉庵)은 보석사와 같은 년대인 885년 신라 헌강왕 때 조구화상이 수행도량으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영천암이란 이름은 절 뒤에 바위굴이 있는데 이 바위굴에서 석간수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며, 이 물이 모든 병에
특효가 있는 영험한 샘이라 하여 이에 따왔다고 한다. 절 뒤 바위 아래 유리창문을 설치한 시설이 영천인가 보다.
그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들르지 않았다. 영천암 본전인 무량수각(無量壽閣) 주련은 서산대사 임종게
(臨終偈)를 썼다. 그 일부다.
千計萬思量 온갖 것 꾀하던 만 가지 생각들
紅爐一點雪 불타는 화로 속 한 점 눈이네
泥牛水上行 진흙소가 물 위로 가고
大地虛空裂 대지와 허공이 찢어진다
영천암부터는 포장도로다. 도로는 골짜기와 이웃하며 내린다. 도로 옆에 ‘샘물바위’를 명찰보고 알아본다. 이윽고
광장이 나오고 여러 치장을 걸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내가 보고자 했던 보석사 은행나무다. 과연 우람하다.
수령 1,100년, 높이 34m, 가슴높이 둘레 10.72m. 조구대사가 885년(신라 헌강왕 11)에 보석사를 창건할 때 제자
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365호다. 전후 좌우 상하로 두루 살피고 나서 다리 건너 보석
사 절집에 들어간다.
보석사는 조구 스님이 청건 당시 절 앞산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대찰이라기보다는 명찰이다. 아담하다. 지금은 마곡사 말사이지만 한 때는 이곳에 강원(講院)인 심검당
(心劍堂, 보석사는 ‘심’을 찾을 ‘尋’이 아닌 마음 ‘心’을 썼다)이 있어 많은 학승을 배출하였으며, 31본산 중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한 사찰이었다. 여러 당우에 걸린 현판과 주련을 들여다본다. 주련은 행초로
써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친절하게 한 쪽에 그 해석을 붙여 놓았다.
11. 진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대산과 금산읍내
금산군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금산읍 소개이다.
비단 같은 푸른 이불무늬로 산과 들이 덮여 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른다는 금산읍은 (…) 백제는 멸망하고 부흥
군은 그래도 백제를 일으켜야겠다고 저항하여 고을은 불바다가 되고, 이어 그 후손들이 한을 안은 채 세월을 넘
기며 조선시대에 이르렀을 때는 왜적의 침입으로 다시 불바다가 되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그 자연의 유산이나마
보전하려는 꿈을 동학군의 소란으로 다시 불바다가 되고, 또한 6.25동란 때는 패주하는 공산집단의 잦은 습격으
로 또다시 전화에 묻혔던 금산읍 …
그래서 전통은 항시 전화의 잿더미에서 몸부림 치고 자연의 경관인 진악산만이 아래를 굽어보는 지역이다.
12. 진악산 정상에서 동쪽 조망
13. 진악산 정상에서 동쪽 조망, 멀리 왼쪽 희미한 산은 천태산(?)
14. 멀리는 천등산과 서대산
15. 오른쪽 중간은 백암산(?)
16. 중간 가운데가 백암산(?)
17. 물굴봉 가는 길에 남쪽 조망, 가운데는 마리산(?)
18. 물굴봉 아래 전망바위에서 남동쪽 조망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 의선각(毅禪閣) 주련이다. 한시의 출전을 찾아보았다. 제1연은 서산대사의 선시(禪詩)이
고, 둘째 연은 서산대사의 「초옥(草屋)」이고, 셋째 연 두 구는 서산대사의 「등백운산(登白雲山)」 앞 두 구이다.
梨花千萬片 천만조각 배꽃들이
飛入淸虛院 빈 집에 날아드는데
木笛過前山 목동이 피리를 불며 앞산을 지나가건만
人牛俱不見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네
石上亂溪聲 바위 위 냇물 소리 어지러운데
池邊生綠草 못가에는 푸른 풀 돋아나네
空山風雨多 빈산에 비바람 몰아치니
花落無人掃 꽃 져도 쓰는 이 없구나
桂熟香飄月 계수 열매 익은 향기 달에 나부끼고
松寒影拂雲 소나무 찬 그림자 구름에 스치네
적묵당(寂黙堂) 주련이다. 서산대사의 「옛 사람의 뜻을 따라(古意)」이다.
風定花猶落 바람은 자건만 꽃은 오히려 떨어지고
鳥鳴山更幽 새가 우니 산은 더욱 그윽하네
天共白雲曉 하늘은 흰 구름과 함께 밝아 오는데
水和明月流 물은 밝은 달과 어울려 흘러만 가네
첫 구는 진(晉)나라 때 사정(謝貞)이 여덟 때 지었다는 「춘일한거(春日閑居)」에 나오는 시구이고, 둘째 구는 왕적
(王籍, ? ~ 547?, 남조 양나라 사람)의 「입약야계(入若耶溪)」에 나오는 구이다. 셋째 구와 넷째 구는 융흥부(隆興
府) 경복(慶福) 일여선사(日餘禪寺)에게 어떤 승려가 도에 대해서 묻자 대답한 게송이라고 한다.
절집을 나서면 거목인 전나무가 볼만하고, 풀밭에는 꽃무릇(석산)을 심었는데 가을 추석 무렵이면 꽃핀 꽃무릇이
장관이겠다. 꽃무릇은 법화경 서품에 등장하는 하늘의 귀한 꽃 ‘만수사화(曼殊沙華)’로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잎이 꽃비가 되어 무수히 내렸다고 한다.
보석사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길 바로 옆에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와 영규대사의선각비(靈圭大師毅禪閣
碑)가 있다. 의병승장비는 1592년 8월 18일 치러진 제2차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순절한 승병장
영규(靈圭)대사와 승병을 추모하기 위해 1839년에 금산 보석사 입구에 세운 비이다. 영규대사의선각비는 동판에
양각하였는데 글씨가 빽빽하고 거무스름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읽어 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그 전문은
너무 길고 일부를 옮겨 적는다.
“(……) 청주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웠다. 관군은 모두 패하여 달아나고 대사가 거느린 의병만이 적과 맞서 싸우는
데 마침 의병장 조헌(趙憲)이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오니 마침내 청주 서문에서 적군은 몰래 달아나게 되었다. 이
때 조헌이 금산(錦山)에 들어온 적군을 진격하려하므로 대사는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대사는 조공이 혼자
서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그대로 함께 따라 나섰다. 금산읍에서 십리 쯤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침 비가 쏟
아져서 우리 군대는 미처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대사는 전쟁이란 태세가 갖추어진 뒤에라야 후환이 없는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태세를 정돈한 후에 싸우자
고 하였으나 조공은 적의 병력은 우리 힘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소. 나는 다만 군대들에게 충의의 정신
을 고무하여 의기로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것뿐이오 라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적군이 습격
해 왔는데 아군은 병력이 약할 뿐더러 후속 부대가 이르지 않아 조공이 전사하고 전군이 모두 죽었다. 어떤 사람
이 적군이 이렇게 몰려드는데 왜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 하였으나 대사는 도리어 그를 꾸짖으며 이제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느냐고 하며 더욱 힘을 내어 싸우다가 또한 장렬하게 순절했다.(……)”
주차장이다. 산행 중 온갖 해찰을 부렸음에도 2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은 12시 30분이다. 14시에 선야봉 들머
리로 이동한다고 하니 시간이 넉넉하다. 물굴봉 내려올 때 만난 토요일 님과 함께 휴업 중인 농산물판매장에서
점심밥 먹는다. 토요일 님이 가져온 탁주와 마가목주를 느긋이 분음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보석사를 또 들
르고 은행나무를 다시 본다.
19. 물굴봉 아래 전망바위에서 남동쪽 조망
21. 도구통바위, 아래 토요일 님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22-1. 보석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356호다. 보석사 앞에 있다
22-2. 보석사 현판
범종루 누각에 걸렸다.
현판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썼다. 그의 약전이다.
서화가. 중국에 유학, 명승 고적을 유람하고 진ㆍ한ㆍ당ㆍ송(秦漢唐宋) 명가의 진적(珍籍)을 연구했다. 귀국 후
영친왕(英親王)의 스승, 시종원(侍從院) 시종장을 역임했다. 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등 전반 서예에 능하고
묵란(墨蘭)ㆍ묵죽(墨竹)ㆍ묵목단 등 묵화를 잘 그렸다. 한국 최초로 서화 연구회를 조직, 서화 미술 발전에 공헌
하였다. 산수화 중 그가 그린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는 유명하다.
글씨 주변의 난초와 대나무는 해강의 제자인 죽농 안순환(竹儂 安淳煥, 1871~1942)이 그렸다. 그는 궁에서 대령
숙수(待令熟手)를 지낸 만큼 조선음식전문가로서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조선 궁중 요릿집을 열기도 했다. 그는
해강과 함께 전국 사찰을 돌면서 주로 해강이 현판에 글씨를 쓰고, 그는 난죽도를 그렸다. 난초 그림에 쓴 화제는
靜坐(정좌), 開幽(개유), 馥竗(복묘), 在有(재유), 無向(무향)이다.
22-3. 보석사 대웅전 현판
장호 금산문화원장이 충청투데이 2019년 11월 29일자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쓴 글씨이다. 창암의 첫 이름은 奎奐(규환)
이었는데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글씨 쓰기에 몰두해 살림이 어렵게 되자
학문, 교유, 혼인이 자연히 늦어졌다. 이런 이유로 그는 3가지가 모두 늦었다 해 三晩(삼만)이라 개명했다. 자는
允遠(윤원)이요, 호는 젊었을 때는 强巖(강암)이라고도 했으나 중년에 蒼巖(창암)으로 바꾸었다.
보석사의 현판글씨는 그가 쓴 현판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서 창암이 한창 필력이 오를 때의 힘찬 글씨이
다. 창암 같은 대가의 글씨가 금산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동국
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글씨라 더욱 더 정겹게 느껴진다.
▶ 선야봉(仙冶峰, △758.7m)
선야봉 들머리인 원고당 마을을 가는 길이 꽤 멀다. 금산읍을 빠져나와 북쪽 외곽을 돌아 진산을 지나고, 이치를
넘고, 천등산을 돌아 산골짜기 깊숙이 들어간다. 원고당은 옥계반석의 계류가 흘러 여름철 유원지다. 지금은
철시하여 황량하다. 우리의 산행경력 38년인 백두대간을 울트라를 포함하여 수차례 했고 9개 정맥은 물론 우리
나라 모든 산줄기를 섭렵한 Opro 수석알엠 진행대장님은 재차 선야봉을 오른 길 그대로 내려오시라 당부하고,
17시 20분께가 일몰이니 헤드램프를 꼭 준비하시라 이르고, 자기도 함께 오르겠다고 한다.
15시에 산행을 시작한다. 다리 건너 마을 고샅길 지나 임도를 따라가다 이정표 방향대로 오른쪽 얕은 골짜기를
오른다. 가파른 사면은 낙엽이 수북하여 여간 미끄럽지 않다. 그래도 경주하듯 오른다. 우리의 산행경력 38년인
백두대간을 울트라를 포함하여 수차례 했고 9개 정맥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를 섭렵한 Opro 수석알엠
진행대장님은 선야봉은 아무 데도 조망이 없고 도대체 볼거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줄지어 역주하는 우리를
보고 지리산 토벌대 같다고 한다.
긴 한 피치 올라 능선 안부이다. 능선 길 역시 가파르다. 봉봉을 넘는다. 길게 올랐다가 약간 내리고 다시 길게 오
르기를 반복한다. 무릇 사진은 발로 찍는 것. 바위 슬랩지대 나오면 발로 조심스레 수렴 걷어 조망 살핀다. 오른쪽
은 산 첩첩 너머 운장산과 곰직이산이 왼쪽은 천등산이 우뚝하다. 가쁜 숨을 돌릴 때는 잠시 멈춰 카메라 셔터 누
를 때다. 그러고 나서 기다시피 오른다. 일행들의 기다랗던 줄이 흐트러졌다. 경점인 635.5m봉을 넘고 넙데데한
능선을 오른다.
선야봉 삼각점은 정상 0.2km 전에 있다. 금산 315, 1980 재설. 평탄한 숲속 지나 정상이다. 널찍한 공터다. 사방
에 키 큰 나무 숲 둘러 조망이 가렸다. 어찌할 것인가, 내내 고심했다. 오던 길을 내릴까, 오른쪽 능선을 돌아내릴
까 하고. 지도와 예전 등산로는 오른쪽 능선을 돌아내릴 수 있다. 이정표에는 ‘위험’하다고 폐쇄했다. 프로바둑
기사 이세돌 9단의 얘기가 생각난다. 수가 보이는데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관전하는 사람들은 판세가
유리한데도 굳이 모험하는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길이 보이는데 가지 않을 수 없다. 오던 길을 다시 가는 건 얼마나 따분한 일인가. 위험하다니까 더 가고 싶다.
더구나 내 앞서 바로 한 분이 그리로 가더라고 하지 않는가. 산림청 직원이 이 시간에 선야봉 날머리에 머물러
벌금을 물릴 리는 만무하고. 우리의 산행경력 38년인 백두대간을 울트라를 포함하여 수차례 했고 9개 정맥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를 섭렵한 Opro 수석알엠 진행대장님이 자칫 볼세라 얼른 금줄을 넘는다.
한적하고 오붓한 산길이다. 이제야 산을 가는 것 같다. 해거름에 낙엽 지치는 소리가 경쾌하다. 바위지대 경점에
서는 천등산을 위시한 모색(暮色)의 산 첩첩을 본다. 차마 이 가경을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한참을 바라본다.
여기 이 경치만으로도 진악산은 물론 선야봉 하루 산행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지도에 눈 박고 간다. 앞사람의
발자국은 낙엽에 묻혔다. 552.1m봉 넘고 Y자 능선 갈림길에서는 왼쪽 능선을 잡는다.
위험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테고 그 위험을 언제쯤 만날까 궁금했다. 여기다. 소나무가 몰려 있는 절벽과 맞닥
뜨린다. 왼쪽 사면을 돈다. 대단히 가파르다. 수적(獸跡)일까? 어지럽게 낙엽을 헤집어 놓았다. 나도 덤빈다. 무릎
차는 낙엽과 긴 사태 져서 내린다. 트래버스 하여 능선을 잡을 틈을 놓쳤다. 골로 간다. 가을이 얼마 전까지 머물
다 간 숲속을 지난다. 이런 경치를 만나다니 뜻밖에 횡재한 기분이다. 어스름하여 골짜기 사방 댐을 지나고 마른
계곡 너덜을 내린다.
방갈로 폐가 마당을 지나고 선야봉을 오른 임도에 내려선다. 어둑하다. 원고당 마을 보안등은 불을 밝혔다. 다리
아래 계류에 내려 세면탁족 한다. 그러고 보니 선야봉을 오르고 내리는 2시간 15분 동안 한 번도 배낭을 벗어놓고
휴식한 적이 없다. 몰아서 휴식한다. 차안에서 엷은 졸음 사이사이로 진악산에서와 선야봉 내릴 때 본 경치를
파노라마로 떠올릴 것이니 미리 즐겁다.
23. 선야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천등산과 대둔산(한듬산)
24. 오른쪽이 천등산
26. 멀리 오른쪽은 운장산
27. 선야봉 정상,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아무 조망 없다
28. 멀리 왼쪽에 조금 보이는 산은 구봉산
29. 왼쪽은 칠백이고지
30. 선야봉 내리면서 남서쪽 조망
31. 멀리 왼쪽 희미한 산이 운장산
32. 오른쪽은 천등산, 해질 무렵이다
33. 선야봉, 육산이다
34. 원고당이 가까운 골짜기다. 능선 절벽에 막혀 왼쪽 사면을 낙엽과 사태 져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