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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5일 토요일 [(배)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계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신다(복음).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3-35 그때에 예수님의 33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 잉태 순간부터 일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셨습니다.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가셔야 했으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시는 기쁨의 자리에서도 가슴을 찌르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그분께서 그곳에 남으신 것을 모르고 돌아오시다가, 예수님을 찾아 헤매신 적도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처절한 장면마저도 말없이 바라보셔야만 했지요. 끝내 돌아가신 아드님을 품에 안으신 아픔과 어머니로서 아들의 장례를 치르시는 비통함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이렇게 성모님께서 크게 일곱 가지의 고통을 겪으셨기에,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과거에는 성모 칠고 축일(聖母七苦祝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 뜻으로 파악하고 말없이 받아들이셨지요. 당신께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 내셨기에 끝내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시며 당부하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로써 우리에게도 어머니가 되신 것이지요. 온갖 고통을 극복하신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과 하느님의 시간 기다리기! 교회는 어제와 오늘, 연이어 우리를 고통과 십자가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으며 못박히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하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내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오랜 세월 노력해온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영성생활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고통과 십자가가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실 고통과 십자가를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26장 39절)
그러나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난 데 없이 다가온 정말 원치 않은 불행, 이유가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런 신비로서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1.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 수용. 2. 하느님의 시간 기다리기. 이 두 가지입니다.
현대 영성 안에서 더 이상 사서 고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그런 분들이 없을 것 같은데 과거 수도자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밤마다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서는 원치 않은 고통과 십자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열심히 운동하고, 올바른 식습관으로 식사하고, 근심걱정 물리치고, 그래서 건강하게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대신 기다리다보면, 또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나이를 조금씩 먹어 가다보면 하나 둘 원치 않은 십자가들이 찾아옵니다. 그때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십자가라고 여겨지면, 그때 그간 쌓아 오신 실력을 발휘하시면 됩니다. 십자가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여기고, 그 십자가를 통해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의 핵심입니다.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면 사방이 고통 덩어리요 십자가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매일이 기적이요 매순간이 은총입니다. 만사가 축복이요, 세상은 온통 수많은 감사꺼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무거운 십자가 속에서도, 수많은 축복과 감사꺼리를 헤아리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영성생활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실락원’을 쓴 밀턴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당파 부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매리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매리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밀턴의 청교도적인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나는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밀턴의 엄격한 청교도적 삶은 견딜 수가 없다.”
밀턴은 인내심을 갖고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2년 후, 매리는 밀턴에게 돌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당시 매리의 가정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밀턴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밀턴의 이 불행한 신혼시절은 ‘실락원’을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소재가 됐습니다. 자신의 낙원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명작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이가 자꾸 불에 손을 갔다 대면 그것이 뜨겁다는 것을 조금 느끼게 해 주는 게 좋다고 합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느껴야 다시 손을 갖다 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갑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순종은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난을 싫어한다면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순종을 위해 유익합니다.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고통의 열매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 것들입니다. 두 발로 일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으로 하는 말 한 마디까지 모두 고난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기는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 수천 번의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면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고난에 더 익숙한 사람이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만큼 큰 영광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속자의 어머니가 되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드님도 힘드시지만 성모님도 힘드십니다. 아들은 눈에 보이게 못 박히시지만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게 못 박히십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고난에 잘 훈련된 분이셨기에 이 고통을 잘 견뎌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 백배의 더 큰 고통이 따르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는 불순종의 고통을 알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시련으로 순종을 배우지만 성모 마리아가 우리와 다르신 것은 불순종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셨음에도 죽기까지 순종할 줄 아셨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짓지도 않고 그 죄에서 오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순종한다면 그 믿음은 대단히 크다 할 것입니다. 순종은 그래서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아멘!’하셨습니다. 이 순종이 당신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가져왔지만, ‘아멘’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큰 행복임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순종이었습니다.
고난을 겁내면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순종도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과 덜 고통스러운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뿐입니다. 다만 불순종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순종의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다.
높은 바위에서 메말라 가는 바다 가재가 있습니다. 그 바다 가재에게는 바다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기 위한 고통을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만일 바닷물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 바다 가재는 그곳에서 말라 죽고 맙니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바다 가재는 자신의 1미터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에 도달해서 살 수 있습니다.
순종은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큰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불순종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더해집니다. 나에게 오는 고통만 잘 묵상해보아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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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축일
🌹통고의 복되신 마리아 축일🌹(9월15일)
🌵부속가
🌹(통고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 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 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 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 죄인 누가 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 보며 함께 받는
성모고통 누가 슬퍼 않으리?
7. 우리 죄로 채찍 모욕 당하시는
아들 예수 성모 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 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 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 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에 불이 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12. 저를 위해 상처 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 나눠 주소서.
13. 사는 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 울게 하소서.
14. 십자 곁에 저도 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 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 슬픔 저도 울게 하소서.
16. 주님 상처 깊이 새겨
그리스도 수난 죽음 지고 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 상처 십자가 위
흘린 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 날에 영원 형벌
불속에서 저를 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 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 죽어 제 영혼이 천국 영광
주 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녀 가타리나(Catherine)
신분 : 과부, 신비가
활동지역 : 제노바(Genova)
활동연도 : 1447-1510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지아코포 피에쉬(Giacopo Fieschi)와 프란체스카 디 네그로(Francesca di Negro)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Juliano Adorno)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생활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카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Cattaneo Marabotto) 신부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영성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1510년 9월 15일 제노바에서 선종한 카타리나는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니체타(Nicetas)
신분: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375년
같은이름:니체따, 니체따스, 니체타스, 니케따스, 니케타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고트(Goth) 사람으로서 도나우(Donau) 강변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에 울필라스라는 어떤 선교사로부터 개종하였다.
이 선교사에 따르면 니케타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고, 동고트족(Ostrogoths)의 왕인 아타나릭이 로마 제국을 침략하면서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를 일으켜서 그 역시 희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화형을 당하였고, 유해는 실리시아(Cilicia)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에
안장되어 큰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