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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鄭慶演,1605년(선조 38) ~1666년(현종 7)
)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증손(曾孫)이다.
아들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년(인조 26) ~ 1736년(영조 12))는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고,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정종명(鄭宗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직(鄭溭)이고,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에 《정경연유허비(老隱面 水龍里 鄭慶演遺墟碑)》가 있는데, 유허비 전면(前面)에는 유명조선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청안현감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영일정공경연유허비(有明朝鮮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淸安縣監贈大匡輔國崇祿大夫義政府領義政迎日鄭公慶演遺墟碑)라고 쓰여 있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블로그에서 옮김.
◇차례
1)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년(인조 19) ~1721년(경종 1))
한수재집(寒水齋集), 《현감(縣監) 증(贈) 참판(參判) 정공(鄭公) 경연(慶演) 묘표(墓表)》,
번역문, 원문.
2)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1628년(인조 6) ~1692년(숙종 18))
노봉집(老峯集), 《사헌부 감찰 정공 행장〔司憲府監察鄭公行狀〕》,
번역문, 원문.
3)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년(인조 9) ~1695년(숙종 21))
남계집(南溪集), 《사헌부감찰정공묘지명(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
번역문, 원문.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원》에는 박세채의《사헌부감찰정공묘지명(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이 있으나, 원문만 있는데 번역문을 실어 보았다.
(1)《한수재집(寒水齋集)》
한수재선생문집 제32권 / 묘표(墓表)
《현감(縣監) 증(贈) 참판(參判) 정공(鄭公) 경연(慶演) 묘표》
번역문
근세(近世)의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 휘 철(澈)이라는 분은 충절과 청백 그리고 강하고 깔끔하기로 선조(宣祖) 시대에 이름난 명신(名臣)이었는데, 공은 그의 증손(曾孫)이다. 조부 휘 종명(宗溟)은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였고, 아버지 휘 직(溭)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청덕(淸德)이 가문을 이어갈 만했으며, 어머니 비안 박씨(比安朴氏, 比安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이다.)는 감찰(監察) 준(峻)의 딸이다. 공은 휘가 경연(慶演)이요 자는 모(某, 정경연의 字는 善餘다.)로서 만력(萬曆) 을사년 11월 17일에 태어났는데,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도 스스로 학문에 노력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언젠가 동정어룡희(洞庭魚龍戲) 제목의 시(詩) 1백여 운(韻)을 지었는데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보고는 기재(奇才)라고 칭찬이 대단하였고, 숙조(叔祖, 작은할아버지)인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 역시 크게 흐뭇해 하였다.
약관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어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가 경기전(慶基殿)으로 옮겼다. 그 뒤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에 오르고 다시 전생서(典牲署)로 옮겼다가 예에 따라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옮겼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있다가 청안 현감(淸安縣監)이 되어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뒤에 또 금오랑(金吾郞)ㆍ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역임하고 평릉 찰방(平陵察訪, 平陵驛이 지금 동해시 평릉동에 있었다. )을 끝으로 늙은 어버이를 위해 귀양(歸養)하였다. 잠시 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服)을 마쳤는데, 달을 넘긴 뒤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그때 나이 63세였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모시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부엌일(廚爨之役)까지도 직접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병환 중에는 부축하는 일에서부터 약달이는 일까지 남을 시키지 않았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이상한 병증이 있어 한참 동안 숨을 쉬지 못하자 손가락의 피를 입에 넣어 소생케 함으로써 10여 년 동안 수명을 연장케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죽만 마시며 몸이 야위도록 슬퍼하였으므로 날이 갈수록 점점 기력이 쇠약해졌는데, 자식들이 울면서 간(諫)하니, 이르기를 “요즘은 세상에서 상을 당하고도 옛사람들같이 못하고 있어 내가 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지금 병이 대단치도 않은데, 어떻게 차마 예를 어길 것인가.” 하였다.
※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상을 당해서는 죽만 마시며 몸이 야위도록 슬퍼하였으므로 날이 갈수록 점점 기력이 쇠약해졌다. 여러 자식들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드시라고) 간(諫)하니, (정경연은) 이르기를“요즘 세속에서는 상을 치르는 것이 옛사람들만 못하니, 나는 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지금 내 병이 그리 심하지 않은데 (어찌 차마 예법을 어기겠느냐?)” 하였다.
(及喪啜粥哀毀。日就澌瘁。諸子泣諫則曰近俗居喪不如古。吾實恥之。今病不甚。何忍越禮。旣卽吉。]
상를 마치자 숙부(叔父)인 진선공(進善公)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필시 온전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너를 다시 보는구나. 건강하면서도 예를 다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너의 죄인임을 이제야 알겠다.” 하였다. 평상시 새벽이면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고 제사 모시는 예절에 더욱 정성을 다했으며, 제사를 당하면 언제나 눈물이 피처럼 소리없이 솟아 흘렀다.
관직에 있으면서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백성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정사가 번거롭지 않고 공평하여 이서(吏胥)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마승(馬丞, 驛丞)이 되었을 때 도롱이[簑衣]를 상공(上供)하고 나서 으레 나눠 갖는 것이 있어 그것을 ‘지미(知味)’라고 하였는데, 공은 웃으면서 “도롱이가 어디 맛을 아는 물건인가.” 하며 물리쳤다. 이런 식으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오점을 남기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상관들도 대부분 그를 존경하였다. 지조가 굳고 편안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관직을 제수 받을 때마다 한 번도 자신이 구해서 된 경우가 없었으며,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그가 요직에 있으면 그의 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못난 듯이 자신을 지키며 되도록 빛을 감추었기 때문에 끝내 하위(下位)에 머물고 크게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려국 평장사(平章事) 균지(均之)를 시조로 삼는다. 아조에 와서 공간공(恭簡公) 홍(洪)ㆍ정숙공(貞肅公) 연(淵)이 모두 크게 세상에 드러났는데, 그로부터 3세(世)를 거쳐 송강에 이르렀다. 공은 죽은 지 몇 해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모관(某官)에 추증되고, 배위인 이씨(李氏)도 이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충주(忠州) 보련산(寶蓮山)에 장사하였다가 그후 재이(災異)로 인하여 고을 북쪽 매사(梅沙)로 이장하였고,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또 고을 남쪽의 어느 마을 어느 좌향의 둔덕으로 옮겼는데, 두 부인도 부장되었다. (初葬忠州寶蓮山。後以災移州北梅沙。某年某月日又遷于州南某村某坐原。)
※ 後以災移州北梅沙, 여기서 梅沙는 금가면 매하리(梅下里)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遷于州南某村은 지금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라 한다.
부인 이씨는 관향이 덕수(德水)이고 그의 아버지는 학생(學生) 직(稷)인데 인자하고 온화하며 예를 잘 지켜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들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주(澍)ㆍ인(潾)과 주부(主簿) 필(泌)이며, 딸은 현감 홍수풍(洪受灃)과 한치상(韓致相)에게 시집갔다. 민 부인(閔夫人)은 관향이 여흥(驪興)이고 아버지는 광환(光煥)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섭(涉), 대사헌 호(澔), 현감 진(津), 봉사(奉事) 온(溫), 영(泳)이고 딸은 목사(牧使) 조태기(趙泰期)에게 시집갔다. 주의 아들은 문과로 현감이 된 서하(瑞河)와 장하(章河)이며, 인의 아들은 명하(明河)ㆍ소하(昭河)ㆍ위하(緯河)ㆍ채하(采河)이며, 필의 아들은 귀하(龜河)ㆍ용하(龍河)ㆍ기하(騏河)ㆍ여하(驪河)이며, 섭의 아들은 곤하(崑河)ㆍ계하(啓河)ㆍ윤하(崙河)이며, 호의 아들은 희하(羲河)ㆍ순하(舜河)이며, 진의 아들은 규하(奎河)와 어린아이 하나이며, 온의 아들은 현하(玄河)ㆍ만하(萬河)ㆍ성하(聖河)이며, 영은 아들이 없어 순하를 후사로 삼았다. 증손과 현손은 다 쓰지 않았다.
아, 뜻과 행실이 공처럼 높은 분이 무엇인들 남만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공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공 역시 남이 모르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타고난 그대로 생활하다가 미련없이 세상을 마쳤으니, 그만하면 어질다고 하겠다. 지금 대사헌(丈巖 鄭澔)
이 행실을 잘 닦으며 학문을 독실히 하여 가성(家聲)을 이어가고 있고, 후손들도 번창하여 마치 난초와 향초가 자라오르듯 하고 있으니, 정씨 가문의 복이 다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아마 그렇게 보시(報施)를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봉(老峯) 민 상공(閔相公, 閔鼎重)이 쓴 행장(行狀)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대사헌의 명(命)에 따라 그 줄거리를 추려 기록하여 묘비에 새기도록 하였다.(今以大憲之命。撮其槩而記之。俾刻于墓石。)
※정호(鄭澔)가 대사헌에 오른 것은 1710년(숙종 36)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0
《현감(縣監) 증(贈) 참판(參判) 정공(鄭公) 경연(慶演) 묘표》
원문
《縣監 贈參判鄭公 慶演 墓表》
近世有松江鄭相公諱澈。以忠淸剛介。爲 宣廟朝名臣。公其曾孫也。祖諱宗溟。江陵大都護府使。考諱溭。成均生員。以淸德世其家。妣比安朴氏。監察峻女。公諱慶演字某。以 萬曆乙巳十一月十七日生。六歲而孤。能自奮勵爲學。忘寢與食。嘗作洞庭魚龍戲詩百餘韻。李五峯好閔亟稱之曰奇才奇才。叔祖畸菴公亦大加嘉賞。弱冠居王父憂。制除中司馬。薦授 英陵參奉。未幾換 慶基殿。陞司瞻奉事。復換典牲署。例遷司宰直長,軍器主簿。移司憲府監察。出爲淸安縣監。無何賦歸。後又歷金吾郞內資主簿。爲平陵察訪。以親老歸養。俄丁內艱。服闋踰月而病不起。壽六十三。公性至孝。奉慈闈竭其誠。雖廚爨之役。不厭躬執。其有疾也。扶持湯煎。不使人代。嘗有奇症。氣塞移時。進指血獲穌。延壽十餘年。人以爲孝感。及喪啜粥哀毀。日就澌瘁。諸子泣諫則曰近俗居喪不如古。吾實恥之。今病不甚。何忍越禮。旣卽吉。叔父進善公垂涕謂曰。意汝必不全。今乃復見汝。始知強壯而不自盡禮者。皆汝之罪人也。平居晨起拜廟。祭祀之禮。尤致愨謹。每遇喪餘。淚瀉如血。當官以潔己愛民爲本。莅政簡平。吏胥慴伏。其爲馬丞。 上供蓑衣。例有封餘。謂之知味。公笑曰蓑豈知味之物耶。却之。所在不以一毫自汚。上官多敬重焉。志操堅貞。雅喜恬靜。前後差除。未嘗有自求者。雖親友若居要顯。迹不踵門。自守若拙。務爲韜晦。以故終於下位。不克有施。迎日之鄭。以高麗平章事均之爲上祖。入我 朝恭簡公洪,貞肅公淵。皆大顯於世。歷三世而至松江公。公歿後幾年。以子貴 贈某官。配李氏從 贈貞夫人。初葬忠州寶蓮山。後以災移州北梅沙。某年某月日又遷于州南某村某坐原。二夫人祔焉。李夫人貫德水。其考學生稷。仁和率禮。有孝婦稱。三男澍,潾,泌主簿。女適縣監洪受灃,韓致相。閔夫人貫驪興。父曰光煥。五男涉,澔大司憲,津縣監,溫奉事,泳。女適牧使趙泰期。澍男瑞河文縣監。章河。潾男明河,昭河,緯河,采河。泌男龜河,龍河,騏河,驪河。涉男崑河,啓河,崙河。澔男羲河,舜河。津男奎河。一幼。溫男玄河,萬河,聖河。泳無後。以舜河爲後。曾玄不盡錄。嗚呼。若公志行之高。何渠不若人。而世無知公者。公亦不以不知爲慍。全其太素。悠然以歿其世。於是乎賢矣哉。今大憲以淸修篤學。承繼家聲。後孫蕃衍。如蘭茁芝秀。鄭氏之福蓋未艾也。天之所以報施者其在斯歟。老峯閔相公狀公行甚悉。今以大憲之命。撮其槩而記之。俾刻于墓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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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노봉집(老峯集)
노봉집 제9권 /행장(行狀)
번역문
《사헌부 감찰 정공 행장〔司憲府監察鄭公行狀〕》
공은 휘(諱)가 경연(慶演)이고, 자(字)는 선여(善餘)이며, 성(姓)은 정씨(鄭氏)이다. 그 선조는 연일현(延日縣) 사람이다. 휘가 균(均)인 분이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 휘 사도(思道)와 공간공(恭簡公) 휘 홍(洪)을 지나 병조 판서(兵曹判書) 휘 연(淵)에 이르러, 우리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을 섬겨 이름난 신하가 되었으니, 별세한 뒤에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고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숙공이 자숙(自淑)을 낳았으니, 자숙은 김제 군수(金堤郡守)를 지냈다. 군수공이 휘 위(潙)를 낳았으니, 위는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다. 참봉공이 휘 유침(惟沈)을 낳았으니, 유침은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고,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가 철(澈)로, 의정부 좌의정을 지내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가 송강(松江)이다. 할아버지는 휘가 종명(宗溟)으로,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대대로 맑은 덕을 집안에 전했으니, 송강공(松江公)은 충직하고 깨끗하여 한 시대를 진동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대부들이 그 명예와 절개를 우러른다.
아버지는 휘가 직(溭)으로, 성균 생원(成均生員)이고 지조와 행실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조상은 비안(比安)에서 나왔으니, 효행과 청렴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른 휘 박준(朴峻)의 딸이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11월 17일 한성(漢城)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랐다. 어머니를 섬길 적에 지성으로 효도하였으니,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 이윽고 학문을 배우게 되자 개연히 선대의 유업(遺業)을 계승함을 뜻으로 삼아, 분발하고 힘껏 노력하여 밤낮으로 글을 읽으면서 간혹 잠자거나 밥 먹는 일을 잊기도 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경계하기를 “미망인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단지 네가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병이 날까만 걱정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 고달프게 하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소자는 스스로 이것을 즐기므로 고달프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동정호에서 물고기와 용이 노니는 것을 보다〔洞庭觀魚龍戲〕〉라는 시 100여 운을 지었는데, 오봉(五峯) 이공(李公 이호민(李好閔))이 보고 찬탄하기를 “뛰어난 재주로다, 뛰어난 재주로다.”라고 하였다. 종조(從祖) 기암공(畸庵公) 홍명(弘溟)이 편지를 보내 권면하기를 “문벌의 쇠퇴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부지하는 일은 오로지 너만 믿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20세 때 할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상주 노릇을 하며 예(禮)를 다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 병이 나서 몸이 파리해졌다. 상복을 벗고 나서 경오년(1630, 인조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기암공이 집안의 가난함을 이유로 녹봉을 위해 벼슬살이하도록 권하였으나 학업 때문에 나아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어머니를 모시고 충주(忠州) 농가로 돌아갔으며, 오랑캐의 변란〔병자호란〕을 겪은 다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힘써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조정에서 향천(鄕薦)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바뀌어 제수되었다가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로 옮겨 승진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전생서 봉사(典牲署奉事)로 바뀌어 제수되었으니, 용진(龍津)에 나뉘어 파견되어 억새풀 베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일은 ‘요사비(饒私費 사사로운 수입이 많은 자리)’로 불렸는데, 공이 이미 이 일을 담당하여 털끝만큼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러자 바야흐로 본서(本署)를 관장하던 이상 시백(李相時白)이 칭찬하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으로 승진하여 어공(御供)의 여러 물품을 담당하였다. 이때 이서(吏胥)들이 연줄을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하였는데, 본래 금하여 막을 수 없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공이 자신을 매우 부지런히 단속하면서 아랫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자, 대부분 두려워 복종하면서 스스로 서로 일러 경계하기를 “이전에 했던 익숙한 방식으로 하지 말라. 정관(鄭官)이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에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2)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가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신년(1656, 효종7)에 다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청안현(淸安縣) 수령이 되었다. 이때 정사(政事)는 간편하고 공평함을 따르고 업무는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제거하자, 아전과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거워하였다. 무술년(1658, 효종9)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 전관(銓官)이 오랫동안 산관(散官)에 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주의(注擬)해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에 제수하자, 명을 받들었으나 곧 해직되었다. 갑진년(1664, 현종5)에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에 제수되고, 또 외직으로 나가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다.
을사년(1665, 현종6)에 어머니 곁에 시중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해 가을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곡읍(哭泣)을 서럽게 해 안색이 슬프기 짝이 없자, 조문하는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다. 공은 이전 할아버지 상 때 너무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법을 더욱 엄격하게 지킨 나머지 겨우 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몸을 훼손하여, 앉거나 설 때 지팡이를 짚어야 했으나 제전(祭奠)을 올리며 절하고 무릎을 꿇을 적에 오히려 자력으로 하였다.
정미년(1667, 현종8)에 상복을 벗은 지 겨우 한 달 만에 운명하였으니, 11월 21일의 일이었다. 향년 63세였다. 무신년(1668, 현종9) 3월 2일에 보련산(寶蓮山) 해좌(亥坐 남남동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 첫 번째 부인인 이 의인(李宜人)과 합장하였으니, 고향과의 거리는 5리로 가까웠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지조는 굳고 곧았다. 오직 소박함만을 좋아하고 사치스러움을 가장 싫어하였으니, 남들이 견딜 수 없는 나쁜 옷과 나쁜 음식으로 생활하면서도 매우 편안하게 여겼다.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간에 고질병을 얻어 학업에 전념할 수 없자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평상시 새벽에 일어나 집안의 사당에 참배하고 어머니를 문안한 뒤, 서실(書室)로 물러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저녁때까지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평소 한가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벼슬살이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전후로 벼슬에 임명된 것은 일찍이 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교유하거나 친밀하게 사귄 사람들 중에 요로(要路)나 현관(顯官)에 있는 자들이 있었지만, 자취를 거두어 그 문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벼슬을 맡을 적에는 오직 자신의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공의 숙부인 장령공(掌令公) 양(瀁)이 행실과 절개로 당대에 추앙을 받았는데,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네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할 적에 사람들이 모두 청렴결백하다고 일컬었으니, 선대의 유업을 잘 지킨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성품 또한 효성이 독실하였으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만 홀로 모신 지가 50년이나 되는데, 좌우에서 기쁜 낯빛으로 모시면서 일찍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몸소 음식을 마련하여 드리고 맛좋은 음식을 반드시 갖추어 드렸다. 근력이 이미 쇠약해졌는데도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 문안 인사를 올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몸이 편치 않으면, 앉거나 누울 때 부축하는 일과 약을 달이거나 죽을 쑤는 일을 모두 자신이 맡아 하고 남이 대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고 옷을 벗지 못하였다. 일찍이 원인 모를 이상한 병에 걸려 갑자기 기절하여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적에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드려 소생하게 하여 수명을 10여 년 연장해 드리자, 사람들이 공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은 상중에 있을 적에 염습하기 전에는 마시는 물조차도 입에 대지 않은 채 곡읍하다가 갑자기 까무러쳤다. 이미 빈소를 차린 뒤에는 단지 미음만 마셨다. 장사를 지내고 돌아온 뒤에 몸이 파리하여 조석을 버티지 못할 듯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울면서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60세인 사람은 너무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고, 성인의 경서(經書)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목숨을 잃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경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정신이 혼미한 노인이지만, 어찌 이러한 말을 모르겠느냐? 근래의 풍속을 돌아보건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질병을 핑계 대고서 마시고 먹는 것을 태연하게 하는 자들이 많으니, 내가 참으로 이러한 짓을 부끄럽게 여긴다. 지금 병이 심하지도 않는데, 어찌 차마 저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상복을 벗자 장령공이 대하여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생명을 상하게 할 것이라 여겼으니, 어찌 오늘 네 얼굴을 다시 보리라 생각이나 했겠느냐? 나는 비로소 지금에야 건강하면서도 예제(禮制)를 스스로 지키지 않는 자들은 모두 너의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제사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 격식을 일정하게 갖추었고, 기장과 피를 미리 마련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집안사람들을 경계시켰다. 혹 질병에 걸려 몸소 제사를 모시지 못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갖추어 입고서 단정하게 앉아 기다렸다. 만약 어버이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반안인(潘安仁 반악(潘岳))의 〈과부부(寡婦賦)〉를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자,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문선(文選)》을 읽으면서 이 편을 젖혀 두었으니, 참으로 정서상 차마 읽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마관(馬官 찰방(察訪))이 되어 강릉(江陵)에 이르렀다. 이때 국구(國舅)의 휴가 행차를 마중 나갔는데,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자 공이 곧 사양하고 일어났다. 국구가 괴이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선조께서 이곳에서 벼슬을 하다가 별세하여, 항상 마음에 애통한 나머지 감히 편안하지 못합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국구가 감탄하여 즉시 거두어 치우게 하였다. 도롱이〔蓑衣〕를 상공(上供)하고 나면 으레 여벌로 남은 것을 ‘지미(知味)’라고 하였는데,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롱이가 어찌 맛을 아는 물건인가?”라고 하고는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공은 항상 자신을 지켜 못난 듯이 하고 두터운 덕행을 겸손하게 감춘 데다 또 낮은 지위에서 벼슬살이를 마쳐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에 역시 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몸에 덕을 쌓은 점만은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하니,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갔는데, 다 의인(宜人)이라 불렀다. 이 의인(李宜人)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큰 성씨이니, 증조 휘 이통(李通)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할아버지 휘 이경안(李景顏)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아버지 휘 이직(李稷)은 벼슬살이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씨(申氏)로, 승지(承旨)를 지낸 고령(高靈) 신경락(申景洛)의 딸이다.
이 의인은 만력(萬曆) 기유년(1609, 광해군1)에 태어났다. 어질고 정숙하며 인자하고 온화하였으며, 예로써 자신을 지켰다. 가족들이 번성하였는데, 그 할머니 유 부인(柳夫人)은 일찍이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내외의 여러 손자 100여 명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단정하고 엄숙하며 영특하고 뛰어나기로는 이 손녀와 같은 아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씨에게 시집온 지 17년이 되었지만,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집안사람들이 본 적이 없다. 시어머니를 섬김에 곡진하게 순종하였으니, 시어머니는 늘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포대기를 채 떠나기도 전에 기묘년(1639, 인조17) 3월 21일 병으로 별세하였으니, 향년 31세였다.
둘째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 휘 민영모(閔令謨)의 후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민여충(閔汝忠)의 증손녀이며, 현감(縣監) 휘 민강(閔棡)의 손녀이고, 사인(士人) 휘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며, 찰방 남양(南陽) 홍할(洪劼)의 외손녀이다.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교훈을 익히고 법도를 따랐다. 이미 시집가서는 남편을 받들고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다. 8남 3녀를 보살펴 길렀는데 다른 소생이 끼여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였다. 의지할 데 없는 이모의 딸을 거두어 집에서 길러 적기에 시집 보냈다. 무격(巫覡)의 황당한 말을 매우 싫어하여 일체 금지하고 배척하여 문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여러 아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자, 더욱 엄하게 독려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과부의 아들은 마땅히 자립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때때로 사람을 시켜 아이들의 행동을 엿보게 하였는데, 만약 “글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라고 하면, 매우 기뻐하였지만, 혹 “술상을 베풀거나 장기와 바둑을 두며 놉니다.”라고 하면, 크게 경계하고 책망하였다.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이 화산(華山)에서 후학들을 인도할 때, 여러 아들들이 찾아가 배우고 싶지만 비용이 없어서 어렵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의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이름난 스승을 얻어 학업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내가 비록 머리카락을 팔아 뒷바라지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아깝겠느냐?”라고 하고, 당일로 비용을 빌려서 행장을 꾸려 보냈다. 얼마 후에 송 선생이 죄를 입어 먼 곳으로 귀양을 가자, 여러 아들들에게 과거 공부를 중지하고 빨리 가서 억울함을 풀어 드리도록 명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어진 스승이 무함을 받았는데, 문인이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선조의 아름다운 유업을 이었는데, 모두 의인의 가르침으로 그러한 것이라는 소문이 사우들 사이에 있었다.
공보다 12년 뒤인 무오년(1678, 숙종4) 2월 25일 별세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 7월 28일 태어났으니, 향년 56세였다. 선영의 모향(某向) 언덕에 합장하였다.
공의 여러 자식들 가운데 주(澍)ㆍ인(潾)ㆍ필(泌)과 도사(都事) 홍수례(洪受澧)ㆍ사인 한치상(韓致相)의 아내는 이 의인이 낳았고, 섭(涉)ㆍ호(澔)ㆍ진(津)ㆍ순(洵)ㆍ영(泳)과 현감 조태기(趙泰期)의 아내는 민 의인이 낳았다. 주는 아들 서하(瑞河)와 장하(章河)를 두었고, 인은 아들 명하(明河)와 소하(昭河)를 두었으며, 필은 아들 귀하(龜河)를 두었다. 홍수례의 맏딸은 곽성징(郭聖徵)에게 시집갔고, 한치상의 맏아들은 한이원(韓以原)이다. 그 나머지 내외의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정중(鼎重)은 일찍이 장령공(정경연의 숙부)에게 사랑을 받은 인연으로 공을 두세 번 뵈었다. 이번에 병으로 향리에 누워 있으면서 다행히 공의 여러 아들들과 교유하여, 공의 행실이 매우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고 직무를 받들 적에 오직 삼갔음을 익히 알게 되었다. 이에 집안에 전해오는 기록에 근거하여 다만 위와 같이 기록할 뿐이다.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채택하기를 바란다.
[주-D001] 녹봉을 위해 벼슬살이하도록 : 원문의 ‘祿仕’는 녹봉을 위해 벼슬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벼슬은 가난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맹자가 말했는데, 이를 녹사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벼슬하는 것은 본래 도(道)를 행하기 위한 것이나, 혹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으면 시대가 뜻에 맞지 않더라도 녹이나 받기 위하여 조그만 벼슬을 하는 것을 녹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02] 저녁에 …… 일 : 원문의 ‘晨昏’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어버이를 제대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주-D003] 60세인 …… 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온다.
[주-D004] 성인의 …… 경계하였습니다. :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사흘이 지나면 죽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머리를 감고, 일 년이 지나면 연제(練祭) 이후의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극히 애통해하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지 말아,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주-D005] 마관(馬官)이 …… 이르렀다 : 1664년(현종5)에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된 것을 말한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이주형 김건우 유영봉 (공역) | 2015
원문
《司憲府監察鄭公行狀》
公諱慶演。字善餘。姓鄭氏。其先延日縣人。有諱均之仕麗朝。爲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始顯於世。歷寶文閣直學士諱思道,恭簡公諱洪。至兵曹判書諱淵。事我太宗世宗。爲名臣。卒贈議政府左議政。諡貞肅。生諱自淑。金堤郡守。郡守生諱潙。健元陵參奉。參奉生諱惟沈。敦寧府判官。於公爲高祖。曾祖諱澈。議政府左議政。寅城府院君。號松江。祖諱宗溟。江陵府使。世以淸德傳家。松江公忠直介潔。風動一時。至今士夫仰其名節。考諱溭成均生員。志行絶人。不幸早卒。妣朴氏。系出比安。擧孝廉官至司憲府監察諱峻之女。以萬曆乙巳十一月十七日。生公于漢師里第。六歲而孤。隨母育于外氏。其事母。誠孝異凡兒。旣受學。慨然以追述先業爲志。奮發刻厲。日夜誦讀。或廢寢食。母夫人戒之曰。未亡人相依爲命者。徒以汝在。惟疾是憂。何自苦如此。對曰。子自樂此。不爲疲也。嘗作洞庭觀魚龍戲詩百餘韻。五峯李公見而歎曰。奇才奇才。從祖畸庵公弘溟貽書勉之曰。門戶衰替。一至於此。立揚扶持。專恃汝耳。及冠。丁王父憂。執喪盡禮。幾至毀滅。仍成羸瘠之疾。服闋。中庚午司馬。畸庵公爲其家貧。勸令祿仕。以學業未就辭。丙子。奉母歸于忠州田舍。自經虜搶。無意於世。力穡爲養。癸未。朝廷用鄕薦。除英陵參奉。乙酉。換授慶基殿參奉。轉陞司贍寺奉事。戊子。換授典牲署奉事。分差監刈于龍津。是役號饒私費。公旣莅事。不以絲毫自汚。李相時白方提擧本署。奬歎不已。己丑。陞司宰監直長。職掌御供諸物。吏胥夤緣作奸。素稱莫可禁杜。公自飭甚勤。御下以法。擧皆畏服。自相告戒曰。毋狃於前。爲鄭官知。庚寅。陞軍器寺主簿。辛卯。遷司憲府監察。以疾去官還鄕。丙申。復監察出宰淸安縣。政從簡平。務去煩苛。吏民安樂。戊戌。引病辭。辛丑。銓官惜其置散久。擬除義禁府經歷。拜命旋解。甲辰。除內資寺主簿。又出爲平陵道察訪。乙巳。爲親側無侍棄歸。是秋遭艱。其哭泣之哀。顏色之戚。弔者莫不愍然出涕。公前毀於喪。至是持制尤嚴。氣息綿綴。坐立須杖。而祭奠拜跪。猶能自力。丁未。除喪僅踰月而告終。十一月二十一日也。壽六十三。以戊申三月二日。葬于寶蓮山亥坐之原。與元配李宜人同封。去其鄕五里而近。公天資聰敏。志操堅貞。惟喜朴素。最厭華侈。惡衣惡食。人所不堪。而處之甚安。自少有意於古人之學。而中嬰痼疾。不能專業。常以爲恨。平居晨起。展謁家廟。省侍慈闈。及退書室。正冠束帶。終夕無惰容。雅好閑靜。不慕仕宦。前後差除。未嘗因求而得。舊遊親交有居要路顯官者。斂迹不造其門。當官。唯以潔己愛民爲本。公之叔父掌令公瀁以行誼節槩。見推當世。嘗謂公曰。汝歷官內外。人人皆稱廉白。可謂善守先業矣。性又篤孝。早失所怙。偏奉母慈者。五十餘年。左右怡愉。未嘗離側。躬親廚爨。甘旨必具。筋力已衰。晨昏不懈。其有不安節。則坐臥扶持。湯藥煮粥。皆自任。不使人代。寢食不遑。衣帶不解。嘗有奇疾。猝急氣窒者移時。公割指取血以進而蘇。延壽至十餘年。人謂孝感所致。其居憂未殮。水飮不入口。哭泣頓絶。旣殯。只啜糜粥。其葬而反也。羸瘠若不能朝暮。諸子泣陳古禮六十不毀。聖經滅性非孝之戒。公曰。吾雖荒迷耄昏。豈不知此。顧近俗遭親喪。託以疾病。飮啗自如者多矣。吾實恥之。今病不甚。何忍從彼之爲乎。及服闋。掌令公相對曰。謂汝必至傷生。豈意今日復見汝面。吾乃今知強壯而不能自致於禮制者。皆汝之罪人也。尤致謹於祭祀。品式有常。粢盛豫具。戒家人毋得他用。或遇疾病。不能躬事。亦必盥櫛具服。整坐以俟。若値親諱。涕出如血。人有請受潘安仁寡婦賦者。公垂涕曰。吾少時讀文選。廢此篇。實以情事有不忍讀也。其爲馬官。至江陵。迎候國舅恩暇之行。及設酒張樂。卽辭起。怪問之。對曰。先祖卒官於此。常痛於心。不敢安也。言出而淚下。國舅動容感歎。卽撤去。上供蓑衣。例有副件。謂之知味。公笑曰。蓑豈知味之物耶。命却之。公常自守若拙。厚爲謙晦。又終於下位。不克有施。世亦無知公者。然其畜德於躬。可以爲法於後。類如此矣。公凡再娶。皆號宜人。李宜人德水大姓。曾祖諱通郡守。祖諱景顏。司諫院正言。考諱稷。不仕。母申氏。承旨高靈景洛之女。生於萬曆己酉正月初三日。仁淑慈和。以禮自持。家族貴盛。其祖母柳夫人。嘗以壽席。會內外諸孫百餘人。乃曰。端莊英秀。無如此女。歸鄭氏十七年。家人未嘗見其啓齒。事姑婉順。姑常以孝婦稱之。生三男二女。俱未離襁褓。己卯三月二十一日。以疾卒。壽三十一。後配驪興閔氏。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諱令謨之後。僉知中樞府事諱汝忠之曾孫。縣監諱棡之孫。士人諱光煥之女。察訪南陽洪劼之外孫。自幼服習古訓循蹈法度。旣歸奉承君子。盡誠事親。撫養八男三女。人不知其有異。取姨女之無依者。養于家。以時嫁之。甚惡巫祝不經之說。一切禁斥。使不得近門。及公棄諸孤。勉勵勸課益嚴曰。寡婦之子。宜知所以自立矣。時時使人覵其私。如曰有讀書聲。甚喜。或云有杯盤棋博之娛。大加戒責。聞尤齋宋先生在華山引進後學。諸子有欲往從。而以無資爲難者。宜人曰。汝若得名師。學業有成。吾雖鬻髮何愛。卽日假貸裝送。旣而宋先生被罪遠謫。命諸子停擧業。速行伸理曰。安有賢師受誣。而門人噤無一言乎。諸子皆承訓庭闈。克濟世美。有聞於士友間。皆宜人之敎然也。後公十二年戊午二月二十五日卒。距其生癸亥七月二十八日。壽爲五十六。祔于先兆某向之原。公之諸子。澍,潾,泌。都事洪受澧,士人韓致相妻。李宜人出也。涉,澔,津,洵,泳。縣監趙泰期妻。閔宜人出也。澍有男瑞河,章河。潾有男明河,昭河。泌有男龜河。洪受澧長女適郭聖徵。韓致相長男曰以原。其餘內外孫男女皆幼。鼎重嘗獲款於掌令公。因得拜公者再三。及今病伏鄕里。幸與公諸子遊。習知公制行甚備。奉職惟謹。茲據其家傳。第錄如右。庶幾立言之君子有以采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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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계집(南溪集)
번역문
南溪先生朴文純公文外集 卷第十四 (14)
사헌부감찰정공 묘지명(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 경신년(1680년) 2월
고(故) 사헌부 감찰 정공(鄭公)의 휘는 경연(慶演, 목판본 원문에 慶衍으로 되어 있다.)이요, 자는 선여(善餘)이다. 숭정(崇禎) 정해년(1647년, 인조 25년) 11월 21일에 충주(忠州)의 전사(田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3월에 고을의 보련산(寶蓮山) 아래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여러 제고(諸孤, 자식들)가 노봉(老峯) 민공(閔公) 정중(鼎重)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 반남(潘南) 박세채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므로 사양하다가 허락하고 다음과 같이 적는다.
공의 선조는 연일(延日)의 대족(大族)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균(均)에 이르러 드러났고, 직학사(直學士) 사도(思道)를 거쳐 우리 조에 들어와 공간공(恭簡公) 홍(洪)과 정숙공(貞肅公) 연(淵)에 이르러 대대로 유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다시 몇 세대를 거쳐 좌의정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휘 철(澈)에 이르렀으니, 선조(宣祖) 때 국상(國相)이 되었으나 당의(黨議)에 얽매여 그 경륜을 다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분이 진실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부사(府使) 휘 종명(宗溟)이요, 아버지는 생원(生員) 휘 직(溭)이며, 어머니는 비안 박씨(比安朴氏)로 감찰 휘 준(峻)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약관의 나이에 조부의 상을 당하였으며, 상을 마치고 사마시에 합격하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服闋。登上庠。) 오래되어 천거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있어 경기전(慶基殿)으로 옮겼으며,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로 승진하였다. 다시 전생서(典牲署)로 옮겼고,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승진하였다. 감찰로 전임(轉任)하였다가 질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 년 뒤에 다시 감찰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몇 년 뒤에 의금부 경력·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평릉찰방(平陵察訪)이 되었는데, 늙은 어머니(親老)를 위해 귀양(歸養)하였다. 얼마 안 있어 내간(內艱, 어머니 상)를 당하였고, 상복을 벗은 지 겨우 한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자질이 민첩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평생을 청렴·근신·효도·의리로 스스로 단속하여 선열(先烈)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였다. 어려서부터 힘써 학문에 힘써 글을 읽고 외우기를 부지런히 하여 혹 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기도 하였으나, 어머니(母夫人)가 말려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동정관어룡희(洞庭觀魚龍戲)〉 시 100여 운을 지으니, 오봉(五峯) 이공(李公, 李好閔)이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병자호란의 난이 일어날 무렵 마침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힘써 농사지으며 봉양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고, 하루 종일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다. 한가롭고 고요하며 소박함을 좋아하여 사물로 인해 마음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不以事物累心, 명리(名利)나 세속의 일, 외적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고, 언제나 마음의 담담함과 평정심을 유지했다는 뜻.)
벼슬길에 나가서는 정사가 간편하고 평탄하여 특히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전생서에 있을 때 나누어 파견되어 풀 베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예로부터 사사로운 이익이 많던 자리였다. 그러나 공이 일을 보면서 털끝만큼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니, 제조(提調) 이충익공(李忠翼公, 이시백)이 거듭 칭찬하고 가상히 여겼다. 평릉(平陵驛 察訪을 지냈다.)에 있을 때 임금께 올릴 도롱이[御蓑]를 포장해 보내고 나면, 예에 따라 포장하고 남은 것으로 나뉘 갖는 것이 있었다.(嘗味, 知味. 例因封餘爲嘗味. 한수재의 묘표(墓表)에 다음 구절이 있다.
마승(馬丞, 驛丞)이 되었을 때 도롱이[簑衣]를 상공(上供)하고 나서 으레 나눠 갖는 것이 있어 그것을 ‘지미(知味)’라고 하였는데, 공은 웃으면서 “도롱이가 어디 맛보아 아는 물건인가.” 하며 물리쳤다. )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맛이 있는 물건인가?
(公笑 笑曰此豈有味者耶)” 하고는 마침내 물리쳤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숙부인 진선공(進善公) 양(瀁)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네가 내외의 직책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결백함을 칭찬하니, 또한 가업을 잘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母夫人)를 모신 지 50여 년 동안 좌우에서 부드럽고 기쁘게 해 드렸으며, 친히 맛좋은 음식을 공양하여 늙어서도 하루같이 하였다. 그 몸에 편안하지 못한 기색이 있으면 곁에서 부축해 드리고 약과 음식을 드려 정성껏 모셨다. 남에게 대신 시키는 일이 없었다. 간혹 기이한 병(奇疾)을 만나 거의 구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間値奇疾。幾不救。) 공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마시게 하니 병이 크게 나았다. 나중에 누린 수명이 한 지피(之紀, 一紀, 12년)를 넘었으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결과라고 여겼다.
서울에서 벼슬살이할 때 자안(慈顔, 어머니의 얼굴)을 꿈에 뵙고는 곧 마음이 동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였다. 상(喪)을 당하자 슬피 울며 통곡하다가 음식을 전폐하였고(哭泣頓絶), 빈소를 차린 뒤에는 미음만 마셨다. 여러 아들이 번갈아 가며 늙어서 몸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를 아뢰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요즘 세상 풍속을 보면 어버이 상을 당하여 질병을 핑계 대고 먹고 마시기를 태연하게 하는 자들이 많은데, 내가 참으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하물며 병이 심하지도 않은데 어찌 차마 그들의 행동을 좇겠는가?” 하였다.
진선공(叔父)이 또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세상의 장정들 중에도 제 부모의 상을 다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은데, 너는 모두의 죄인이다(不能自盡親喪者 皆汝之罪人也). ”라고 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더욱 삼가서 제기와 제수가 모두 잘 갖춰지도록 하였다. 혹 질병이나 사고가 있어도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어 정좌한 뒤에 일을 끝마치기를 기다렸다.
일찍이 과부부(寡婦賦, 중국 서진(西晉) 문인 반악(潘岳, 247~300, 자: 반안인 潘安仁)이 지었다.)를 가르쳐 달라는 이가 있었으나,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문선(文選)》을 익혔으나 항상 이 편은 제쳐두었으니, 나의 정서상 참으로 차마 읽을 수 없어서이다.”라 하고 응하지 않았다.
후에 우신(郵臣, 郵官, 찰방)으로서 강릉에서 국구(國舅, 와의 장인)를 맞이하여 영접할 때, 술자리가 베풀어지고 풍악이 울리자 공이 문득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선조(先祖)께서 이 부(府)에서 돌아가셨으므로 지극한 통분이 마음에 있어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국구가 태도를 바꾸어(動容)하여 술자리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첫 부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아버지는 직(溭)인데, 어질고 온화하며 예를 잘 지켰고 모부인(母夫人)은 늘 ‘효부’라 칭찬하였다. 아들 3형제를 낳았으니 주(澍), 인(潾), 필(泌)이며, 딸 2명은 홍수례(洪受澧)와 도사 한치상(韓致相)에게 시집갔다.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계처(繼妻, 후처)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아버지는 광환(光煥)이다. 어려서부터 여훈(女訓)을 익혔고 정씨 집에 시집와서는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기르며 남편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다. 여러 아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이 화양동(華陽洞)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행장을 마련(資裝)해 주어 나아가 배우게 했다. 나중에 (송공이) 귀양을 갔을 때 다시 (과거) 공부를 멈추고 억울함을 펴도록 독촉하였으니, 그 현숙함을 알 만하다.
아들 5형제를 낳았으니 섭(涉), 호(澔), 진(津), 순(洵), 영(泳)이며, 딸 1명은 현감 조태기(趙泰期)에게 시집갔다. 공보다 12년 뒤에 졸(卒)하였다. 두 부인 모두 합장하였다. 세채(世采)는 젊어서 파산(坡山) 두 선생(讀坡山二先生書, 坡州의 두 대유학자인 우계 성혼(成渾)과 율곡 이이(李珥).)의 글을 읽었으며 평소 인성공(寅城府院君 정철)의 충효와 청직함을 사모하여, 세속에서 공명을 좇는 이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또 공의 계조(季祖, 막내할아버지)인 기암공(畸庵公)이 선인(先人, 선친)과 형제간(昆弟, 兄弟처럼 친한 사이라는 뜻.)이어서 문학으로 부지런히 탁마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공(公) 가문의 법도와 원류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한 것이 없었다. 진선공(進善公, 정양(鄭瀁). 송강 정철(鄭澈)의 손자이자,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의 아들이며 정경연의 아버지 정직(鄭溭)의 아우.)이 절행(節行)으로써 사림의 중망을 받았기에 인하여 그의 문하에서 공을 뵈올 수 있었고, 문득 그가 마음이 편안하고 참되며 후덕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공의 행장을 살펴보니 상례(喪紀)를 지극히 거행했다는 대목에 더욱 감동하는바, 이에 명(銘)을 붙인다.
명하여 이르기를,
이락(伊洛)의 가르치심이 있어, 천하의 군신·부자·형제·부부 사이에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이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노라.
※이락(伊洛)은 송나라 정호(程顥, 명도선생)와 정이(程頤, 이천선생) 형제를 말한다.
백세 뒤에 누가 그 맛을 음미하리오. 오직 공의 효행은 이 뜻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진실로 몸소 힘씀이라.
부인(어머니)을 슬퍼함이여, 상복을 벗고 소복(吉服)을 입자마자 마침내 그 몸을 다치게 하였네.
대저 어찌 본성을 해침이리오, 오히려 그 본성을 온전히 함이로다.
이에 그 그윽한 아름다움을 밝혀 세상의 모범으로 보이노라. (銘曰。 伊洛有訓。嘗思天下君臣父子兄弟夫婦。有多少不盡分者。百世在後。孰嚌其味。惟公於孝。無愧斯志。固勉于己。蓋疾夫人。旣纎而吉。竟殞厥身。夫豈滅性。抑以全性。肆闡幽美。用視式樣。)
원문
남계집(南溪集)
南溪先生朴文純公文外集卷第十四
墓誌銘
《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 庚申二月
故司憲府監察鄭公諱慶衍(원문에는 衍이나 慶演이 맞다.)字字善餘。以崇禎丁未十一月二十一日卒于忠州田舍。卜以明年三月葬州之寶蓮山下亥坐之原。諸孤介老峯閔公鼎重狀。乞幽誌於潘南朴世采。辭不獲。按公之先延日大族也。蓋自高麗平章事均之顯。歷直學士思道。入我 朝恭簡公洪貞肅公淵。世有名人。復歷數世至左議政寅城府院君諱澈。入相 宣祖時。困於黨議。不究其用。寔公曾祖也。祖諱宗溟府使。考諱溭生員。妣比安朴氏。監察諱峻之女。以萬曆乙巳十一月十七日生公。六歲而孤。比冠丁王父憂。服闋。登上庠。久之以薦除 英陵參奉。俄易授 慶基殿。陞司贍寺奉事。復易典牲署。陞司宰監直長,軍器寺主簿。轉監察。疾免還鄕。數歲再由監察出爲淸安縣監。未幾辭歸。又數歲歷義禁府經歷內資寺主簿。出爲平陵察訪。以親老歸養。俄遭內艱。服闋堇踰月而告病。公資敏而志堅。平生以廉謹孝義自飭。庶幾無忝于先烈者。少知力學。誦讀刻厲。或忘寢食。母夫人止之。猶不得。嘗作洞庭觀魚龍戲詩百餘韻。五峯李公見而奇之。及丙子虜難將作。遂奉母還鄕。力田爲養。居常晨起謁廟。冠帶終夕。閑靜朴素。不以事物累心。旣仕涖政簡平。尤爲吏胥所憚服。其在典牲。分差監刈。舊饒私費。比公視事。不以一毫自汚。提調李忠翼公時白亟加嘉奬。在平陵。當封進 御蓑。例因封餘爲嘗味。公笑曰此豈有味者耶。仍却之。其自守類是。叔父進善公瀁聞而喜曰。汝歷職中外。人皆稱其廉潔。亦可謂善繼矣。性本篤孝。事母夫人五十餘年。左右婉愉。躬親甘旨。至老猶一日。其有不安節。扶護藥餌。未嘗使人代之。間値奇疾。幾不救。公刺指血以飮。疾良已。後享壽踰紀。人以爲孝感焉。其或仕宦在京。夢見慈顏。卽心動決歸。及遭艱。哭泣頓絶。旣殯只啜糜粥。諸子迭陳耆艾不毀之戒。公曰吾豈不知此。顧近俗居喪託疾。食飮晏如者多矣。吾實恥之。況疾未至劇。何可狃從彼爲。進善公又泣曰世之強壯。不能自盡親喪者。皆汝之罪人也。致謹享祀。儀物畢備。或遇疾故。亦必盥櫛整坐。以待卒事。嘗有請授寡婦賦者。公垂涕言久習文選。恒廢此篇。爲吾情事誠不忍讀爾。不應。後以郵官迎候 國舅江陵。酒至張樂。公輒起。怪問之。對曰先祖歿於此府。至痛在心。不敢安也。 國舅動容命撤酒。公凡再娶。初室德水李氏。父曰溭。仁和率禮。母夫人常以孝婦稱之。生子三人。澍,潾,泌。女二人適洪受澧,都事韓致相。先公卒。繼驪興閔氏。父曰光渙。幼服女訓。歸鄭氏。上事下育。無違公敎。勸課諸子甚勤。聞尤齋宋公授徒華陽洞中。資裝使就學。旣而被謫。復趣停試頌冤。其賢可知已。生子五人。涉,澔,津,洵,泳。女一人適趙泰期縣監。後公十二年卒。二夫人皆從葬。世采少讀坡山二先生書。素服寅城公忠孝淸直。非世志功名者可比。且惟公季祖畸菴公與先人昆弟。文學砥礪弗怠。由是於公家法源流。靡不習聞矣。進善公繼以節行重士林。因獲拜公于其門。輒知爲退然善厚人也。今按公狀。益有感於致崇喪紀之說。乃係以銘。銘曰。
伊洛有訓。嘗思天下君臣父子兄弟夫婦。有多少不盡分者。百世在後。孰嚌其味。惟公於孝。無愧斯志。固勉于己。蓋疾夫人。旣纎而吉。竟殞厥身。夫豈滅性。抑以全性。肆闡幽美。用視式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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