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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어떤 상황에서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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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떤 상황에서도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이 얘기하는 초대교회 상황은 그야말로 ‘격동’, ‘격변’입니다.
그리고 격동과 격변으로, 교회 상황은 바람 앞의 불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계속 가면 교회는 망할 것 같습니다.
모두 흩어졌다고 하는데, 모두 흩어지면 교회는 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두 가지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진 사람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은 것을 보겠습니다.
사도들도 나중에는 로마로 가고 곳곳으로도 가겠지만
당분간은 예루살렘을 딱 지키고 있습니다.
동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이렇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고통과 죽음이 닥칠지라도 변함없는 주님 사랑을 믿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주님이 돌아가신 최악을 이미 경험했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 부활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격동의 상황에서는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그 동요 없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임을 구성원들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신자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전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흩어졌어도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보면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말씀을 놓치거나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가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모든 짐을 다 놓고 떠나도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은 갖고 떠나듯 신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떠난 겁니다.
이렇게 신자들이 흩어지니 하느님 말씀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싸우고 결별하고 절망하고 흩어졌다면 교회는 망하고 말았을 텐데
박해 때문에 흩어지고 말씀을 안고 떠나니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봅니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퍼지는 놀라운 섭리 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처음에는 흩어지는 것이 퍼지는 것인 줄 몰랐을 겁니다.
자기들이 흩어지는 것이 복음이 선포되는 것인 줄 정녕코 몰랐을 겁니다.
처음에는 흩어져 자기들 신앙이나 간직하고 살려는 마음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간직하고 있으니 땅속의 씨가 한참 뒤 싹을 틔우듯이
말씀이 싹이 돋고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간 것입니다.
우리나라 박해 때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피신한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고,
우리 신앙이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간직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이것이 신앙 공동체요 부활의 공동체임을 오늘 초대교회에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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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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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이 오늘을 감당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서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의탁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성체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모두를 내어 주셨듯이 나도 내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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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년 동안 신문사의 주방을 도와주시던 어르신이 ‘병가’를 얻었습니다. 다행히 팔순 잔치를 잘 마치셨고, 자녀들과 이웃들이 축하 해 주었습니다. 어르신은 참 부지런하였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기쁘게 하였습니다. 마당에 텃밭을 일구어서 깨, 방울토마토, 고추, 호박을 심었습니다. 신문사 직원이 먹기에 충분하였고, 이웃들에게도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모상 앞에는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꽃들이 성모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어르신은 참 알뜰하고 검소하였습니다. 마트에서 준 비닐 봉투가 큰 박스로 있었습니다. 냉동실에는 언제나 물건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창고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물건이 많았습니다. 어르신이 건강을 회복하여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르신의 병가를 계기로 창고와 냉장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이제 사람을 새로 구하기보다는 저도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전에 토론토에서 지낼 때도 혼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해 먹고 지냈습니다. 직원들도 저의 홀로서기를 응원하였습니다.
문명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예전에는 당연히 하였던 일들이 잊혀지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공유하지만 자연의 향기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늘 주방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청소를 해 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인지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보니 많은 사제들이 주방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한국처럼 바쁘지 않아서 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한국에서 교포사목으로 온 신부님들 중에도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손수 불을 피우시고 음식을 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스마트 폰의 검색 창을 보고, 유튜브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것 같고, 그래야 어딘가에 소속된 것 같습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의 바다에서 헤매는 것 같습니다. 문명의 옷이 우리의 오감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깊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은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검색창의 커서에 있지 않습니다. 신선하고 새로울 것도 없는 가십거리 뉴스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현실에서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성공과 권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교회에서 첫 번째로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고, 천국 시민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늘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박해의 풍랑을 넘어서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사도들에게 박해도, 고통도, 죽음도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문명이라는 옷이 우리를 따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옷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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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공원을 산책하다가 영산홍이 활짝 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활짝 핀 꽃이 너무 예뻐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싶어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많은 꽃송이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떨어져 있었을 때는 모두 똑같아 보였는데,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긴 사람도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겉모습이 똑같아 보이는 쌍둥이도 부모와 가족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기도가 똑같을까요? 사람이 모두 다르듯,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어조와 음색을 가진 목소리로 같은 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바치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기도 역시 늘 새롭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기도만 해서 지루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언어이고 똑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베르나데트 수비루 성녀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성녀는 ‘성모송’ 이외의 다른 기도를 바칠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발현을 18번이나 목격하실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기도 같지만, 그 안에 자기의 마음을 정성껏 담았기에 그리고 주님께서도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기에 매번 다른 기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시작된다는 어느 신비가의 말씀이 와닿습니다. 성호경 한 번 긋는 것도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어떤 기도보다도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은 기도만 외워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이 마음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려는 의지 등을 담을 때, 주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먹지만, 이스라엘 사람은 주식으로 ‘빵’을 먹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빵이나 밥으로 대표되는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기도는 달라도 뭐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성호경을 그어도 주님 앞에서는 다른 내용이 되고 맙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라고 말하는 알맹이 없는 믿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나의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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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심지를 굳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 묵묵히 나아갈 것이다(마크 주커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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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빵
-“예수님은 영원한 도반이시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시편66,1-2)
논어 맨처음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은 언제 읽어도 공감이 갑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영원한 도반으로 둔 우리 구도자들이자 수행자들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찾는 끊임없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이 진리를 공부하게 하고 도반을 찾게 하고 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은 여러 도반들과의 진실하고 소박한 만남도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늘 흘러야 맑은 물이든 늘 흘러야 맑은 삶입니다. 늘 한결같이 주님을 목말라, 배고파 찾을 때 맑은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주님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주님 향해 흐르는 강”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이런 ‘산(山)과 강(江)’의 영성을 삽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만이 우리의 근원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다리는 주님이요 끊임없이 주님 향해 흐르는 우리의 삶입니다.
“목말라 눈떴고, 눈뜨면 목말랐다
아픔에 눈떴고, 눈뜨면 아팠다”
지금도 여전히 새벽마다 일어나 강론을 쓰게 하는 주님께 대한 목마름이요 아픔입니다.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만이 영혼의 갈망을, 영혼의 아픔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지금도 여전히 애송하는 7-8월에 배밭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초 “메꽃”에 대한 무려26년전 자작시입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피어내며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사실 사람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이런 하늘이신 주님을 찾는 끝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습니다. 바로 이런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의 초대는 늘 들어도 반갑고 기쁘고 고맙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우리 영혼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찾아 만나야 하는 생명의 빵,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 왔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정체와 예수님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결코 우연한 우리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 주신 아버지의 선물들인 우리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아버지의 선물들인 우리를 예수님은 결코 물리치지 않을 것이며 다음 대목에서 그분의 결의는 더욱 빛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이 아닌 누구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런지요. 그리하여 살아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한결같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 영적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지는 박해로 들불처럼 번지는 말씀의 불길이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차 바오로 사도로 변할 섭리의 인물 사울이 언뜻 눈에 띕니다. 마치 주님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바싹 마른 영혼들이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활활 타오르는 분위기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입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곳곳에 말씀을 전하였고 군계일학(群鷄一鶴) 필리포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필리포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람들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 참으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 회복된 모습이 흡사 기쁨으로 활짝 피어난 파스카의 꽃들 같은 다음 장면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요! 더러운 영들 가득한 혼란한 사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소비주의, 중독,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온갖 질병들, 생존경쟁, 탐욕, 두려움, 질투, 이념갈등, 곳곳에서의 분쟁과 전쟁등 더러운 영들이 발호하는 시대 같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 무지의 죄악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들인데 잘못 중독되어 미쳐 폐인들, 괴물들 가득한 시대 같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 무지의 죄악에서, 주님을 잊는 업보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이 모두에 대한 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실 분은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시편6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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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들을 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무엇을 보았나요. 인생이라는 처음 걷는 길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았나요. 사랑과 자비, 선행과 보살핌 혹은 위선과 가식, 배신과 외로움 등을 보았나요.
맞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또 볼 것입니다. 즉 본다는 복음 말씀의 의미는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영적인 눈 혹은 경험의 눈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상처받고 아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을 제 삼의 눈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 매일 보는 것이 바로 십자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일 것입니다.
십자 나무에 매달려 피 흘리신 그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보려면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희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길이 얼마나 힘겨운 길인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얼마나 외로운 길인지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합니다.
단순한 십자 나무가 아닌 주님의 온 삶이 바로 십자 나무였습니다. 구약시대에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구리 뱀을 만들어 나무 위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눈으로 본 사건이 아닙니다.
영적인 통회와 자비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생명을 구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십자가를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가 하늘나라의 열쇠이고, 십자가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탕 주는 사람
따라 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걸으며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의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유혹은 절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 만큼 아끼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유혹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손에 들고 흔들며 말합니다.
그쪽이 아니야. 이쪽이야. 이쪽.
그리고는 빛의 반대쪽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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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믿습니다>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믿습니다
길을
보았으니
나는 걷습니다
사랑을
보았으니
나는 사랑합니다
희망을
보았으니
나는 희망이 됩니다
살림을
보았으니
나는 살립니다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당신처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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