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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죽음과 서자들
(창 25: 1-18)
(요약)
아브라함의 서자들과 임종을 전후한 사건을 통해 그가 마지막을 얼마나 잘 정리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 아브라함의 마지막을 통해 말씀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지 잘 계시해 준다. 즉 믿음의 결국은 기쁨과 평안이다. 믿음의 결국은 성령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은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은 죄와 세상을 심판하고 결별하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은 육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결국은 천국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강해)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죽음과 서자들]이라는 제목입니다.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의 죽음 뿐 아니라 이스마엘의 죽음 그리고 아브라함의 모든 서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서자들이 흩어져서 오늘날의 중동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중동인류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도태되거나 흡수되어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대부분 중동인을 이루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족보로 가득찬 이 본문에서 무슨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요? 설교자들에게 이런 본문 만날 때가 가장 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족보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총결산을 보게 됩니다. 나아가 이 족보는 말씀을 따라서 일생을 산 아브라함의 총결산이라는 점에서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럼,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의 결국은 무엇일까요?
1. 믿음의 결국은 기쁨과 평안입니다.
7-8절에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랬습니다.
여기 “수가 높고”란 ‘백발의 나이가 되어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이 많아”는 ‘만족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주님이 주신 수한을 다 누렸고 내세를 위한 영혼의 준비가 얼마나 잘 되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창15:15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하셨고, 또 잠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자기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표현은 그들의 내세관으로 앞서 간 선조와 만난다는 뜻으로 참된 기쁨과 안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일생 믿음으로 살아간 아브라함의 축복된 결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성도의 믿음의 결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벧전1:8-9에“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처럼 믿음의 시작은 십자가 길이지만 믿음의 결국은 구원과 기쁨과 안식입니다. 이것을 어떤 분은 나팔통 소망이라. 날이 갈수록 복된 소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은 시작에도 결말에도 안식이 없어요. 사8:20에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 살 때 말씀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참된 안식과 평강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의 결국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6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기 자손들이 창대할 것을 알고 생전에 여러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동방으로 가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모든 소유를 상속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손들을 잘 정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불만 없도록 만들고 서로 피해를 끼치지 않게 만들고 9절에 암시되듯 화합하도록 만듭니다. 본문을 볼 때 아주 개운한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 더 큰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상속자인 이삭에게 아무런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넓게는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이루고 언약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신앙 때문입니다. 결국 적자인 이삭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고려해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자기 생전에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이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국이에요. 믿음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덕과 질서와 유익과 평안을 줍니다.
이처럼 말씀 따라가는 믿음의 결국이란 성령 중심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중심으로 우리 몸과 마음 모든 지체가 충돌하지 않고 그 앞에 순복하고 협조하고 만족하고 평안을 누립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면 육신이 성령을 거슬리지 않습니다.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됩니까? 롬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했듯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고 그 때 성령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가르쳐 주니까 너무 쉽지요?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해 일생을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이 방황을 종식 시키는 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이 생명적 임하심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만 임하는 크신 은혜입니다. 혹시 사울처럼 일시적으로 은사 받았어도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롬8:1-2)이라 했으니 예수 모르면 생명의 성령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셔서 예수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말씀 따라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믿음의 결국은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9절에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삭과 이스마엘이 힘을 합해 아브라함을 장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두 사람은 상호 대립관계입니다. 이스마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상속자인 줄 알았는데 이삭이 태어나 자신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 버리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리고 알다싶이 이스마엘이 얼마나 이삭을 조롱했습니까? 그리고 그 어머니 하갈도 여주인 사라를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그래서 두 번이 쫓겨나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 방성대곡하고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을 주시며 네 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순종하라고까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일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대항하고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과 이스마엘은 합해질 수 없는 대립관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두 사람이 아브라함을 장사합니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동안 우려했던 모든 염려를 다 잊고 죽을 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즉 이것은 진정한 화해를 암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화평한 마음으로 눈 감을 수 있었던 말씀 따라 살다간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국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의 시초에는 갈등이 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말씀도 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갈등이란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니 우리 안에서 죄의 성향과 의의 성향이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12:51-53) 무슨 뜻이냐? 넓게는 가족 간의 의견 충돌이요 좁게는 우리 마음 속의 갈등현상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따라서 예수 복음을 알고 또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을 배워 은혜 받고 변화하여 성경의 가르침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내가 복 받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나의 갈등은 물론 가족과의 갈등도 끝나고 모두 감동 받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며 얼마나 갈등합니까? 그러나 복음을 정확히 알고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을 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고 찬양합니다. 이처럼 예수 복음 안에서 마음의 갈등이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믿음의 결국은 죄와 세상을 심판하고 결별합니다.
1-4절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이들은 아브라함의 첩과 서자들인데 이름의 뜻은 “그두라”는 ‘향기’라는 뜻이요, 시므란은 ‘찬양하는’, 욕산은 ‘새 사냥꾼’, 므단은 ‘분쟁’, 미디안은 ‘심판’, 이스박은 ‘버리는자’, 수아는 ‘부귀’라는 뜻으로 이들은 아브라함 장사에도 참여 못할만큼 멀리 멀리 떠나보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세상입니다. 그 아들 미디안이라든가 다 세속이에요. 이 얼마나 성경이 신비합니까? 멀리 떠나 보내고 다시는 상관하지 않고 이렇게 성경은 신령한 면을 가르쳐 주는 섬세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따라 가면 세상 죄에 대해서 죽어져 나와 상관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5. 믿음의 결국은 육신을 잘 쳐서 복종됨입니다.
16절에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복 주신대로 됩니다. 아브라함의 임종을 통한 이삭과 이스마엘의 화평의 아름다움은 물론 그의 후손 역시 열 두 방백으로 창성함을 누립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 즉 열 두 지파와 열 두 방백은 우리 성도의 영육 간의 변화된 모습을 예표합니다. 즉 열두 지파가 영혼의 변화라면 열두 방백은 육체의 성향마저 갈등관계를 갖지 않고 선한 일에 좋은 도구가 됨입니다. 이것이 말씀 따라 살 때 생기는 은혜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방자히 행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이 방백이 모두 촌락과 부락대로 이름을 지었다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좋은 곳을 만나면 자기 이름으로 그 성을 개명하거나 돌에 이름 새기기를 좋아하건만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그 만큼 겸손과 순복을 의미하고 자신의 개성과 생명과 본질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 쳐서 복종시켜 잘 길들여진 육체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3-6)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영육의 갈등 현상이 사라지고 한 인격으로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6. 믿음의 결국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10절에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여기 아브라함이 장사된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 막벨라 굴은 전에도 말씀했듯이 천국의 예표입니다. 예수 복음을 믿음으로 살아가면 처음에는 별거 아닌 것 같고 또 가시밭길과 같고 좁은 길 같지만 그것이 천국의 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천국이 시작되어 점점 더 풍성함으로 나가다가 부르시면 영원한 천국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글에 이현필 선생의 마지막 임종 장면을 적어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 하고파 무척 애썼읍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 않았다가 다시 돌아올 때 다시 “아이고 기뻐! 오 기뻐!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 거리에라도 나아가서 전하고 싶어”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하기를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않은 채로 얼굴을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임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말씀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구원과 기쁨과 평안과 갈등 없고 영에 속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