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전라북도 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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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19:14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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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여기다가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 설화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것이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미륵사는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 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진이 지은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불타버린 것과 달리 다른 원인으로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은 대부분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 결과 일연이 기록한 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에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을 일직선상으로 하나씩 배치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는 넓이가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석탑인 서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탑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주로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러던 중에 익산 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가지고 미륵사 탑을 만들게 되는데, 이 탑을 만들면서 목조 건축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사 탑은 신라시대에 경주 감은사 탑으로 이어지고, 다시 석가탑을 통하여 완벽하게 완성된다.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미륵사 터는 넓이가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석탑인 서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 달리 2기가 있다.
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 뒤편에 자리잡은 천호산 자락에 천호 동굴이 있다. 천호산 아래 펼쳐진 여산은 오늘날 익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이다. 하지만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까지만 해도 독립된 하나의 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군의 진산은 호산이었다.
여산군 객관의 동북쪽에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누각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윤향은 “늦은 아침에도 밤비는 완전히 개지 않았는데, 연한 풀 새로 핀 꽃은 한 뜰에 가득하구나. 오직 담장 동쪽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대나무는 영롱하게 지난해의 푸른빛 변치 않았네”라는 시를 남겼고, 성임은 그의 시에서 “서 있는 대나무는 천 그루의 낚싯대요, 꽃은 백 일의 붉은 것일세. 송사가 한가하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시대가 태평하니 고을에는 성이 없다. 멀리 뵈는 나무는 연기 속에 아득한데, 기울어지는 햇빛은 비 뒤에 더욱 밝구나. 어지럽게 솟은 산 창칼을 비껴 세운 듯한데, 새 차를 연에 갈아 내는도다”라고 하였다.
성임의 시처럼 송사가 없어 한가했다던 여산은 지금은 면 소재지로 한가할 따름인데, 옛 시절 이곳이 군 소재지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산동헌만이 남아 있다.
여산동헌은 여산면 당산리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의 납도리집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때 여산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양로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진남루와 문루정이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찾을 길이 없고, 내동헌 터와 양재역 터, 연방죽리에 있었던 옥 터 등은 그저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또한 장수가 오줌을 누어 골이 졌다는 시시내골도, 왕비가 태어났다는 왕비안골도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다.
여산면 원수리에서 시조 문학으로 우뚝 선 가람 이병기가 태어났다.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인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달은 이병기는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과 국사 연구를 시작한다. 또한 시조를 연구하고 짓기 시작한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2년에 옥고를 치른 그는 광복 후 전북대, 중앙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스스로 술 복과 제자 복, 화초 복이 있다고 자랑했던 그는 시조 문학을 활짝 꽃피워냈고 『한중록』, 『춘향전』 등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비는 전주 다가공원에 세워져 있고, 여산 남초등학교 교정에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별」을 새긴 시비가 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지금은 익산시에 딸린 함라면 소재지 부근에 함열현이 있었다. 철도가 개설되면서 함열이라는 이름을 빼앗긴 채 함라라는 이름을 얻은 함열에 유배를 왔던 교산 허균이 남긴 글을 보자.
무신년(선조 41, 1608) 공주에서 파관(罷官)되고 나서 전사(田舍)를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을 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균은 그 뒤 이곳에 있으면서 현감으로 온 한후의 요청을 받아 「함열현 객사대청 중건기(咸悅縣客舍大廳重建記)」를 지었다.
함열의 고을 됨이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못 되고, 백성은 가난하여 저축이 없으며, 또한 큰 산이 없어 편남(楩枏)과 예장(豫章) 같은 좋은 재목이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낮고 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 지었다. 또한 정유년 난리를 겪으면서 왜적이 몹시 잔학하여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자가 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십중팔구다.
이 기록을 보아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함열향교는 1437년에 창건되었는데,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8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미륵암 대웅전
미륵산에 위치한 미륵사 암자. 미륵사는 백제 최대 사찰의 규모라는 명성에 걸맞게 명당의 조건에서도 손색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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