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로 만든 도마가 있었다 백정 무태의 도마였다 크기와 무게와 그 견고함으로 단연 도마의 왕이었다 수많은 칼질에 피와 살이 파고들어 이것으로 모진 학대를 견딜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마는 성벽 위에 올려져 잠시 방패가 되었다 조총 탄환이 박히고 불에 그슬렸지만 아직 쓸 만한 도마는 다시 칼을 받았다
오랜 세월 후 갈라지고 부스러져 옹이 부분만 남은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한 떼의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다 석화되어 단단해진 이 목재를 발견하고 공들여 깎고 기름에 튀겨 화승대 총알을 만들었다 도마가 이제 피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마는 없다 박물관에도 역사책에도 도마는 보이지 않는다 도마들은 남아 있을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이름 없는 도마들을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_황정산 시인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시집 『거푸집의 국적』 저서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