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66/‘냉파’]딱 요맘때즘의 추어탕과 토란탕
3주나 한 달 간격으로 아내가 내려온다. 못난 남편의 내조(빨래와 청소, 반찬 장만)가 안쓰럽고 눈물겹다. 어제도 그랬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말로 엉덩이 한번 소파나 의자에 붙이지 못하고 내내 서서 가사家事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용인집에 있으면 산책 등으로 하루 2만여를 걷는데, 시골에 오면 산책은커녕 부엌에서만 1만5천보를 걷는 셈이라니 기도 안찬다. 오는 즉시, 빨간 장화를 신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다음엔 온갖 그릇들을 다시 부시고(씻고), 행주를 삶으며 세탁기를 돌린다. 머리 속에 스케줄표나 정리정돈 시스템이 입력돼 있는 듯하다. 우리 어머니가 구십 평생 보따리 싸기의 달인이었듯. 두 방과 거실 청소는 그 다음이지만, 아내의 고생을 생각해 아내가 오기 전에 1시간여 청소기를 돌려도 완전히 “새칠로(새로)”다. 그러니, 사실 일할 맘도 안생기지만, 그것조차 안해놓으면 금세 아는 재주가 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게 냉장고 정리인데, 버릴 건 버리는 등 남은 반찬 정리와 새 반찬 메뉴를 생각해 오수장 쇼핑을 시킨다. 콩나물, 계란 한 판, 김치찌개용 목살, 양파 등을 사와야 한다. ‘냉파’를 아시리라. ‘냉장고 파먹기’. 착한 여동생들이 시도때도없이 이런저런 고기나 반찬을 사와 쟁여놓은 바람에 냉파를 해야 한다. 냉파할 때 유의사항. 꽁꽁 언 물건들이 떨어져 발등이나 발톱을 찧은 것을 조심해야 한다. 명절 때 들어온 훈제오리, 제주에서 날라온 추자도굴비, 형들이 보내준 비비고 국거리들(소고기미역국, 장터국밥, 육개장, 사골곰탕, 도가지탕, 삼계탕 등)을 카테고리별로 분류하기에 바쁘다. 나는 그저 신기神技에 가까운 노동을 감탄해 바라볼 뿐이다. 약간의 도움을 준다는 게 양파와 멸치를 까고, 꽈리고추를 다듬는 것 등이다. 순전히 새우 보관용으로 냉동고를 샀지만, 시골어부는 저수지를 확장하는 바람에 새우잡이는 포기했다. 대신 추석 무렵 뒷산을 더트며 알밤을 엄청 많이 주었다. 줍자마자 삶아 냉동고에 넣어둔 알밤뭉치를 아내가 발견했다. 곧바로 한 솥 삶아 마을회관에 동네 아줌마-할머니들에게 가져다 드렸다. 아내 덕분에 나는 아주 착한 동네청년이 됐다. 노치원에서 돌아온 아버지도 좋은 일했다며 모처럼 칭찬하셨다. 어제는 또하나 큰일이 생겼다. 논산 동생이 한 상자 가득 가져와 창고에 놓아둔 토란 껍질을 ‘장갑을 끼고’(맨손으로 하면 손이 엄청 가렵다) 벗겼댜. 무려 두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나는 이런 일만큼은 잘하는 ‘착한 남편’이다. 한 가지 더 발견한 것은 냉동고에 넣어둔 옥수수(깡냉이)다. 녹여 옥수수 알맹이를 일일이 떼내 다시 냉동, 밥할 때 얹어먹으면 이것도 별미.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마음 건강, 신체 건강.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화신化身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아내가 이제껏 마늘과 멸치, 양파를 깐 적이 거의 없는 건 이런 소소한 일들은 순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늘을 몇 접이나, 멸치를 몇 상자나 깠을까. 무릇 기하.
이윽고 저녁식탁에 오른 토란국. 土卵은 바로 ‘땅이 낳은 계란’이 아니던가.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가는 길목인 딱 요때쯤, 이만한 민속, 토속음식이 추어탕을 제외하고 또 있을까? 추어탕과 토란국, 별미 중의 별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김장김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토란국은 땅에서 막 뽑은 무를 어슷비숫하게 삐져 넣어야 제맛이다. 계피가루(깨즙. 들깨가루)는 필수. 토란을 입에 넣고 혀로 한번 훼훼 돌려보라. 그 포근포근한 맛이라니?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긴다. 어떻게 우리 어머니 맛을 그대로 낼까, 나는 그것이 늘 궁금하다. 아내의 ‘청교도식 청결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고생하는 걸 눈으로 보는 고통 때문), 토란국을 이렇게 맛있게 끓여주는 아내에게 어떻게 100점을 주지 않겠는가. 아니, 120접을 주고도 남을 터.
토란국을 서울과 시골에서 맛보는 맛은 유별하다. 나는 10대의 두 아들에게 토란국의 묘미妙味를 알려주고 싶어 늘 하던 잔소리가 생각나 마음이 찡하다. 잔소리는 별 거 아니다. “아들아, 이 토란알 입에 넣고 혀로 홰홰 돌려봐라. 이것이 진짜 우리 조선음식이란다”. 아니, 피자 치킨 등 서울음식 맛에 길들여진 애들이 토란국을 어찌 즐기고, 토란알을 어떻게 돌리며 그 웅숭깊은 맛을 알 수 있었겠는가. 토란탕을 듣고 보기나 했을까. 모르겠다. 나의 이 잔소리가 이 녀석들이 환갑을 넘으면 떠오르고, 그 맛을 보고 싶을까.
다음은 추어탕이다. 지난 화요일 남원의 ‘현식당’추어탕 10팩을 인천의 큰아들에게 택배로 보냈다. 1봉지 7000원. 택배비 무료이니 10개 7만원. 그 식당에서 먹으면 한 그릇에 12000원(달포 전 1만원이었는데, 흑흑). 내가 맛본 수많은 추어탕 중에 내 입맛에 가장 맞는다. 또 한 곳 있긴 한데, 서울 정동극장 골목의 ‘남도식당’이다. 그곳은 이제 15000원쯤 할 터, 서울에서 가장 비싼 추어탕. 그 좁은 골목에 11시반부터 1시까지 줄이 100여m는 섰다. 걸죽한 맛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말린 무청(실가리) 때문일까? 추어鰍魚 , 가을물고기, 왕년엔 추수가 끝나 또랑을 치면 토종 미꾸리가 시글시글했었다. 빨간 다라이에 가득 담아 소금을 뿌려놓고 덮어놓으면 숨이 죽었다. 확독에 갈기로 하고, 통째로 국을 끓이면 두세 그릇은 후다닥이었다. 촌넘들은 그 맛을 다 안다. 경상도처럼 방아잎 넣으면 우리는 별로다. 추어탕은 역시 남원. 원조집을 잘 찾아야 한다. 큰아들, 어제 저녁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은 처음 먹어본다’며 고맙다는 절을 꾸벅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울토박이인 새아가도 맛있다고 옆에서 거든다. 내가 좋은 선물을 했구나 싶다. 며느리는 탈모 방지 특효인 샴푸를 보내겠다고 한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제 주고받아야 정이 붙는건가.
아무튼, 소설小雪이 지나 환절기인 요즈음, 강추하는 민속요리. 추어탕과 토란국이다. 장어탕, 메기탕, 쏘가리매운탕도 저리 가라닷! 엊저녁 허벌나게 먹었는데도 오늘 점심에 또 먹을 생각을 하니 침이 꼴까닥, 얼굴이 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이련가. 게다가 손으로 찌이찍 찢어먹는 막 담은 가닥김치는 또 어떤가? 한 술 먹고 양념 묻은 손가락도 꼭 빨아먹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지만, 나는 먹기 위해서 산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맛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이번 주말은 온통 행복투성이. 행복이 차고 넘친다. 을씨년한 날씨야, 서울엔 눈이 제법 온다는데, 내 고향 임실, 차분히 채곡채곡 쌓이는 ‘첫 눈’ 한번 선보이면 안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