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5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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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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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f9LESz_nhY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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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못지않게 역사에 길이 족적을 남긴 대 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성격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습니다.(집회서 48장 1~3절)
엘리야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설설 기던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도, 난다긴다 하던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했고, 철퇴 같은 불호령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약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에 대한 불타는 열성 덕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1 마카베오 2장 58절)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서 48장 9절)
엘리야 예언자는 예전에 모세가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느님을 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역할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왕국의 아합 임금은 페니키아 공주이자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제벨의 종교인 가나안의 종교를 장려했습니다. 이제벨은 상아궁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계획들만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벨은 바알 신전에서 바알 예언자들 수백 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 번영과 풍요를 보증하는 가나안 신들과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는 하느님 사이에서 가나안 신들 쪽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르앗의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격정을 느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에 힘입어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살아가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받을 때마다 불꽃처럼 일어섰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강력히 도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예언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을 강탈하기 위해 나봇을 살해한 아합 임금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의 사명과 연관시킵니다. 나인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사렙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성령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불꽃같이 자신의 삶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멋진 예언자, 거짓과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예언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부패한 권력 앞에서는 할 말 제대로 하는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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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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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엘리야들>
2016년 루터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개신교 청년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며 교회를 향한 30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개신교의 문제만이 아닐듯하여 그중에서 몇 마디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특정 성직자 혹은 목회자들의 개인소유물이 아닙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합니다. 금권선거는 물론이거니와 절차를 무시한 여러 편법이 난무합니다.
한국교회의 재정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여러 불투명한 방식으로 소위 ‘재량껏’ 사용, 즉 남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며, 예수의 제자 됨을 훈련하는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삶과 신앙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도 기복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통해서, 일방적인 성공지향적인 복(福) 개념을 강요하고, 개인 신앙에 몰두하게 하고, 개교회(개체교회)의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회적 성공이 개인 신앙의 열매로만 인식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의 말씀선포에는 시대적 메시지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알맹이 없는 설교에다가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긴 설교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흥미를 떨어뜨립니다.
꾸준한 성경공부와 성경연구를 하지 않는 강단에서의 권위주의, 특별히 능력 없는 권위주의에 반대합니다.
일부 교회목회자들의 사치와 탐욕은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고급 자가용은 물론이고, 서민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소비, 해외여행, 취미 심지어 연봉 그리고 퇴직금까지 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고 있습니다.”
루터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금 개신교 청년들이 부르짖는 이와 같은 모습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청년들이지만 조심스럽게나마 그들이 오늘 복음말씀처럼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파견된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을 만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예언자를 합치면 850명이었지만 하느님의 예언자는 엘리야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예언자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멜 산에서 그들과 시합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재단에 바친 재물을 사르는 시합이었습니다.
우상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했지만 엘리야는 내리게 했습니다.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엘리야가 없었다면 마지막까지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죽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상의 영화를 섬기는 이들과 대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참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을 볼 눈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포하러 오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다고 그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줄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역할은 세상의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광야로 끌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집착한 이들은 나눔의 실천으로, 쾌락에 집착한 이들은 절제로, 시기와 질투, 미움 등에 사로잡힌 이들은 용서와 겸손으로 이끄는 것이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야는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도시의 쾌락을 좋아했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재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비웃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부터 무시하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먼저 끊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엘리야와 같은 인물을 거부하였으니 그가 만나게 해 줄 메시야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오도록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먼저 믿고 마음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알아 뵈옵고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해도 오류에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기로 예정된 엘리야가 요한임을 알아보지 못했듯, 수많은 사람이 성변화 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엘리야적, 혹은 세례자 요한적 역할이 매우 감소한 것처럼 보입니다.
강의하면서 신자들보고 “돈이 더 좋아요, 예수님이 더 좋아요?”, “가난한 게 행복한 건가요, 부자가 더 행복한 건가요?”라고 물으면 이 단순한 질문에도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성당 다니면 세상에서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렇게 된 책임은 현재 교회에도 있습니다. 자아와 그것이 일으키는 세 욕망(三仇)과 싸워 이겨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음을 온전히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돈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엘리야 역할,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하게 될 때, 세상은 점점 바알과 아세라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혹은 메시아가 탄생하기 이전의 어둠의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점점 더 세속의 유혹이 강력해져 가는 이때, 점점 더 새로운 엘리야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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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그리스도 왕 대축일 때입니다. 제의실에서 성전으로 가려는데 복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다니엘이 ‘오늘은 성당 안으로 입당하자고 제안 하였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복사 중에 가장 나이가 적은 라파엘이 성당 밖으로 입당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복사들과 독서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나이가 많은 복사와 어른들은 성당 안으로 입당하자고 하였고, 나이가 어린 복사들은 성당 밖에서 입당하자고 하였습니다. 다수의 의견을 들어서 성당 안으로 입당하려고 했는데 전례분과장님이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니 성당 밖에서 입당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춥더라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생각하며 성당 밖으로 입당하였습니다.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할 지라도, 비록 그 길 때문에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를 칭송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 청하여 비가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청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엘리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는 많은 정보와 권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목동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들판을 달려 예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메온과 한나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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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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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마태 17,1-9 참조)의 후속 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십니다. 앞서 마태오 복음 16장 21절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운명은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이어서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예고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중심을 이룹니다. 먼저, 제자들이 엘리야와 그의 역할을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말라키 예언서 3장 23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마태 11,14 참조) 마태오 복음 17장 2-3절에서 예수님과 모세뿐 아니라 엘리야의 발현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의 나타남이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는 메시아의 오심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를 같은 인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마태오 복음 17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보다 강한 어조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받고 고난받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모습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셨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은 다가올 예수님 당신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준다고 이해하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런 예언자적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자적 활동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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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님]
<우리 가운데 엘리야>
사제로 살면서 내 삶에 실망과 아쉬움을 가질 때마다 새기는 말이 있다. ‘사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은 오늘도 당신의 전능하신 손으로 네가 참 사제가 되도록 서품 때 시작하신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
결과에만 집중하고 결과로만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들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체험하지 못한다.(do not recognize)
그래서 뜻밖의 힘겨운 일을 겪거나 계획한 일이 실패하면 즉시 불행과 원망에 휩싸일 뿐 그것을 통한 더 깊은 배움과 성숙의 섭리는 깨닫지 못한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첫 본당주임을 나가서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미사 · 강의 · 교육 · 면담 · 방문 등을 했지만 당장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또 예전보다 더 악화되었다는 생각에 교우들과 자신에게 실망과 아픔을 느껴야 했다.
오로지 내 생각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즉시 완성을 보고자 했다. 그러다가 안 되면 결국에는 ‘안 돼 ! 안 돼는 거야. 다 쓸모없는 거야.’ 하며 그 일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와 활동을 알아보지 못하고 낙담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더 성숙한 사제가 되도록 모든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앞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데, 교우들의 마음을 읽고 돌보는데,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본당 사목하는 데 더 따뜻한 마음으로, 더 하느님께 의탁하며 행하도록 나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앞으로 있을 모든 순간에도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도록 엘리야의 존재와 역할을 그때 그 자리인 첫 본당 임기 중에 마련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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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참고 기다림을 몸소 가르치시는 하느님>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부 이스라엘의 길르앗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정을 지니고 바알 숭배자들과 투쟁하였다.
당시 왕은 아합이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띠로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세벨은 바알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였다. 그녀는 바알을 위한 신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데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알 숭배를 장려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에게 하느님의 징벌로 가뭄이 올 것을 예언했다.(1열왕 17,1)
그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적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고 바알의 예언자들을 죽였다.(1열왕 18,20-46)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으며,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엘리사를 통하여 예언자단 안에서 소중하게 보존됐다. 엘리야는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서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말라기서는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말라 4,5-6) 하고 예언하였다.
오늘 집회서는 예언자 엘리야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을 기리며, 그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인류구원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구세주를 보내시지 않으셨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하느님께서는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떠돌이 민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키우셨다.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온갖 죄악에 빠지고, 그로 인하여 온갖 고통을 당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심으로써 다시금 축복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키우시며 인류구원의 때를 준비하셨다. 때가 이르자 동정녀 마리아를 택하여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셨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이 구세주를 맞이할 수 있도록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들까지도 미리 보내셨는데, 그가 곧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이며, 세례자 요한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인류구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마음을 쓰시면서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무수한 세월 동안 준비하셨고, 한 민족을 택하시어 준비하신 기간만도 1800년이란 길고 긴 기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참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 사람에게 기다림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세월동안 기다리시면서 세세하고 면밀하게 준비하심으로써 기다림이란 단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준비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마치 농부가 땀 흘려 수고함으로써 수확을 얻듯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땀 흘려 수고하며 참고 기다려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대림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래를 기획하고 설계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자. 막연히 시간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소중하고 귀하게 준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모든 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를 성급하게 바라기보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자.
우리의 인내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준비가 크면 클수록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은 더욱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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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 좋다>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이런 사람이 좋다>
열린 이에게
사랑을 받고
닫힌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나누는 이에게
사랑을 받고
움켜쥔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올바른 이에게
사랑을 받고
그릇된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진실한 이에게
사랑을 받고
거짓된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짓밟힌 이에게
사랑을 받고
짓밟는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굶주린 이에게
사랑을 받고
탐욕스런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살리는 이에게
사랑을 받고
죽이는 이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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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엘리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나>
주님의 사제로서 종교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지만,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적 악의 구조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비록 주제를 모른다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성과 속, 육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의 총체적인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로서 온 생명 걸고 교회를 지켜가지만,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에는 결코 함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고 욕을 얻어먹을지라도. 특정한 종교적 지향을 지닌 소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한 뜻으로 창조된 모든 이를 하나로 모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나의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억압받는 이의 편에 서서 억압하는 자와 맞서겠습니다. 사제가 특정인을 편애하는 것은 잘못이라 비난할지라도.
억압받는 이를 품에 안으심으로써 오히려 억압하는 이를 회개시키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길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생각하는 주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드러내야 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기존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굳건히 주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러 주님에 앞서 세상에 온, 온갖 불의를 불태웠던 불의 예언자 엘리야처럼.
세상 부패와의 완전한 단절을 외쳤던 회개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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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17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 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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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를 다룬 ‘프리다’(2002)의 주인공은 셀마 헤이엑(프라 칼로 역)입니다. 그녀는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면서 사회 안에서 자기 역할에 늘 충실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관계에 대한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겁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른 언어로 욕을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알아듣지 못하는 욕은 내게 의미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면 상대의 말과 행동이 나 자신에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대해석해서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상처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이로 인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특히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는 의미가 아닌, 힘을 얻을 수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절대로 욕 먹을 일이 아닌데도,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예수님을 향해 “틀렸다”라며 화를 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댓글 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사실과 다름에도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데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 정이란 것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해 정이 뚝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십니다. 하느님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인간이시기도 하기에 과연 가능할까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에게 했던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꾸짖으시기까지 하십니다.
주님 뜻과 반대되는 모습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를 두고 힘들어하면 할수록 그 잘못된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께 향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의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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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부분 남자아이가 그러는 것처럼 저도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큰 사고 중 하나는 제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많은 아주머니가 마당에 솥 걸고 음식을 만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잔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불을 유난히 좋아하여 부지깽이로 불놀이를 하던 저는
부지깽이에 붙은 불로 저희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집이 타올랐지만 다행히 어른들이 많이 계셔서 집을 다 태우지 않고 불을 껐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불의 속성을 일찍 깨쳤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고, 불은 번진다는 것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 태워 없애버립니다. 무화하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입니다. 없애야 할 것이 있으면 태워버리면 됩니다.
불은 또한 번집니다. 작은 불이 그래서 큰불이 됩니다. 작은 빛과 열도 번지면 큰 빛이 되고 열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안에 불이 있습니다. 이 화火가 화가 되고 이 화火가 욕정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화火가 욕정欲情이 아니라 열정熱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욕정은 타서 재가 되지만 열정은 타서 빛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불처럼 타올랐던 엘리아처럼 욕정은 타서 재가 되게 하고 열정은 타서 빛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열정이 열정으로 번지고 빛이 더 큰 빛, 그리스도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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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시다>
- 우리가 기다리는 분 -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기도하시면 마음에 깊은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미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집회서를 읽을 때 마다 아주 오래전 90년대 초반 어느 수녀의 편지글에 잠시 행복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집회서 마지막 구절입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 48,11)
바로 엘리야를 지칭한 당신인데 바로 저로 착각해 이해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번역이 더 친근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집회서는 온통 엘리야 예언자의 찬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은 엘리야 예언자인지 다음 집회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이나 불을 내려 보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3-4.9)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48,11)
여러분은 이런 당신같은 분이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이런 당신으로 삼아 관계를 깊이할 때 참 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여러분이 이웃에 이런 당신같은 존재처럼 사랑의 향기를 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이런 엘리야의 재림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구약 가장 끝 구절, 말라기서의 예언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 역할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메시아 예수님곁에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도 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예수님의 자상한 해명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해명을 듣고서야 무지의 눈이 열려 비로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아 알게 된 제자들입니다. 엘리야, 세례자 요한에 이어 당신의 고난을 예감한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했던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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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지금 이 시대에 엘리야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BC 850경)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을 겪은 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여 세워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던 구약의 대표적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말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주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 주님의 길을 닦는 사자로서, 주님에 앞서 오시는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17,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이 물음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전한 물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앞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11,14)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를 엘리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일'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엘리야와 엘리야의 일을 하는 또 다른 예언자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 하면서, '나와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지금 우리 안에 파견되어 있는 엘리야와 엘리야의 일을 하는 예언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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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exd79CCpt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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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수난과 고난은
어렵고 힘들기에
길을 찾아줍니다.
버려진 역사 뒤에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다루는
이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신앙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십니다.
분명하게
회개의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이들을
핍박합니다.
신앙은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고난을
감수(甘受)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기다림을
만나는 대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세례자 요한의
피흘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함께
선포됩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다루는
교만함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닦는
십자가의 시간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대림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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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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