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폭락
http://v.media.daum.net/v/20220910112614473
환율폭등
http://v.media.daum.net/v/20220909140102559
https://cp.news.search.daum.net/p/123282609
https://cp.news.search.daum.net/p/123317287
외환위기 도래?
http://v.media.daum.net/v/20220910080113170
어쩌면 이번 추석이 한동안 명절같은 마지막이 될지...
1997추석이래 몇년동안 명절제대로 못 지낸 가정많았음.(기업부도로 줄도산 +개인신용불량자급증+가정파탄으로...)2008년도 유사...벌써 명절대목실종에 시장경기급냉임.
한은의 baby ㅡstep으로 외환위기 못막음.정부 외환보유액이 이미 너무 줄었음.가용외환보유고는 큰소리쳐도 상당액이 미국국채에 묶여서 얼마안됨.결국 연말에는 미국 등떠밀려 올릴수밖에 없는데 어디까지 갈지.(.개인적으로 5%이상갈거라고 생각.)못해도 연말부터 외환위기아니면 금융위기+ 돈맥경화가 가시화될것임.
1980년 은행금리가 10..20%였음.학교마다 애들코묻은 돈으로 적금통장하나씩 만들어 졸업할때 등록금보태는 운동했었음.(엄마가 본인초등입학시 만들어준 통장이 대학입학때 목돈됨)
Imf때 18..20%..요즘 젊은 애들 이런 어마무시한 금리들으면 빚못썼을 텐데...이제 금모으기운동해도 팔아먹을 금도 없음.
각자 도생 요망
참고로 역사를 좀알면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서민경제 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주범인줄 뼈저리게 알것임.거품위에서 즐겼으니 이제 계산해야 될때가 왔음.
로마가 왜 인플레로 망했겠나?
https://blog.naver.com/demiamin1/222839114188
출처 ㅡ나무위키
1979...1980년 2차유류파동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물가는 상승하면서 실업 등의 문제는 오히려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미국의 FRB는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15] 이 결과 미국에 잔뜩 외채를 끌어다 국내의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이나 폴란드 같은 비산유 개발도상국들은 졸지에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맞았고 경제가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금리 정책은 오일 쇼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어서 1980년대 중남미[16]와 동유럽 외채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문서에 나와있는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하는 정책"과 비슷한 경제 정책이 동유럽과 중남미에서 널리 펼쳐졌을 때가 바로 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복지 지출마저도 줄이면서 국민들의 삶이 막장화된 건 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산권 붕괴에도 오일 쇼크가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이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를 위시로 동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성장률 둔화 현상 극복과 수출 증대를 위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 서구권으로부터 많은 빚을 끌어 모았는데, 당장은 경제적으로 크게 윤택해졌지만, 문제는 갑작스럽게 오일 쇼크가 터지며 수출액이 줄어듬에 따라 세수가 줄어들고 갚아야할 부채가 급증하면서 재정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긴축 재정을 시행하는 상황이 왔다는 것이다. 인민들 입장에서 서구권에 비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차에 그나마 누려왔던 복지가 축소되었는데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불만이 쌓이고 쌓이게 되면서 공산 정권을 지탱하던 토대가 취약해졌고, 그나마 버텨 주던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군비 증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한 막대한 복구 비용에 후술할 1986년 유가 폭락으로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조차 먹여 살리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결국 1980년대 말에 공산권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 내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1981년 런던국제석유거래소를 설립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83년에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원유 선물 거래를 취급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들통나기 시작했다. OPEC는 이에 대응해 1983년 감산에 합의하고 가격도 배럴당 34달러에서 29달러로 완만하게 인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 프로듀서로서 홀로 감산을 했던 덕분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외의 다른 OPEC 회원국들은 감산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이란과 이라크는 전쟁 중이라 감산할 턱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회원국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비 OPEC 회원국들의 북해, 멕시코만 유전은 합의 대상도 아니라 감산할 이유가 없었고, 소련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감산할 수 없었다. 2년 동안 감산 고통을 홀로 감내한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1986년에 석유 치킨 게임에 참전해 생산량을 1일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증산했다. 1985년 배럴당 30달러였던 유가는 1986년 7달러까지 폭락하면서 2차 오일쇼크는 역쇼크로 막을 내렸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아메드 자키 야마니 석유부 장관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 해 경질시켰다.
1979년 상반기부터 원유 도입값이 인상되어 하반기 들어서 오일 쇼크의 조짐이 보여 박정희 정권 몰락의 원인들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특히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며 연간 제조업 성장률이 20% 이상을 상회해 1차 석유 파동 당시보다 석유 의존도가 훨씬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타격이 컸다. 또한 물가 상승률도 1978년에 14%의 물가 상승률에서 1979년는 18%로 상승하였으며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였던 역대 최고의 설비 투자 증가율은 꺾여져 파산, 해고가 급속히 늘어 본격적인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1979년에는 8.7% 성장을 하였지만 1980년 1분기에 전후 최초의 역성장인 -1.6%, 물가상승률이 29%로 급등해 1차 오일 쇼크 때보다 극심한 경제적 시련을 겪었다. 제5공화국의 병크라고만 알려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도 알고보면 오일 쇼크로 인한 자동차 수요 급감이 한몫했다. 이러한 불황을 능가하는 상황은 외환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8년이었다...중략...
IMF여파 ㅡ19997년 한국금융권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 당시 기준금리였던 콜금리는 40%였지만 당연히 콜은 하루짜리니까... 실제로 민간은행에 적용되는 기준금리인 RP(2008년부터 한국은행 기준금리 지표물이다) 금리는 27%까지 올라갔다."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물론 실물경제 자체가 파탄나지 않는 한 단기적 악화는 원상회복이 될 수는 있으나 당장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언제 원상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확장을 거듭해온 국내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기업의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연쇄부도를 발생시키고, 대량의 실업과 경기후퇴를 유발하였다. 비상식적인 고금리에 대해 한국 내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제프리 삭스 등의 경제학자들조차도 IMF의 고금리 정책이 몰고 올 부작용을 경고하였으나, IMF측은 이 경고를 완전히 묵살했다.결국 고금리정책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1998년 1월 하순에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하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5월에는 IMF가 마침내 정부측의 금리인하 요구를 받아들이고 IMF 프로그램의 금리 항목을 '조심스러운 인하'에서 '계속 인하'로 변경한다. 그러나 1998년 5월에는 실업률이 이미 6.9%에 달해 1년전의 3배가 되는 등, 고금리 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날 대로 나타난 시점이었다.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 위해 차환기채(돈 빌려 돈 갚기)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 만큼 비활성화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금리 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 결정적으로 당시 전년대비 1/3토막 난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소량의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게다가 고금리는 외자가 급했던 DJ정부의 다른 정책과 맞물려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금융시장 개방 과정에서 일본 대부업 자본에 한국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 시기 일본 정부는 때마침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쿠자들의 자살보험 이용을 막기 위해 이자제한법을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야쿠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사채 사업의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으로 사채 관련 사업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고야 계열 조직들의 입지를 크게 흔들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내에서 재일교포 간부 및 단원들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 조직원과 간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한국 내 커넥션을 활용하여 한국 사채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채를 단속하기 위해 만든 이자제한법 폐지를 진행하였고, 살인적인 고금리와 맞물려 일본계 사채업자들은 야쿠자 조직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토종 대부업체들을 싸그리 밀어내 버리고 사업을 독점하게 된다. 산와머니로 대표되는 일본계 대부업체의 광고가 부쩍 늘어난 것도 이것이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당시 가장 먼저 한국에 진출한 기업 중 하나인 아프로파이낸셜대부(현 OK금융그룹의 모태)는 J&K 캐피탈이라는 일본 쪽 페이퍼컴퍼니가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최윤 회장은 현재는 한국인임을 전면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OK저축은행 문제로 국적 건이 논란이 되기 전만 해도 나고야 출신 및 나고야 대학원을 다녔다는 기록이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20년 정도가 되어 가는 2010년대에는 상장기업을 인수 경영하고, 기업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행동하고, 증권, 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하는 데에 이르렀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