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騎將)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밤에 태조(太祖)의 집으로 찾아가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가 굳이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柳氏)가 손수 갑옷을 들고 와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가 옹위하며 나왔다.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면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王公)께서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드셨다!”라고 하니, 이에 다투어 달려와 붙는 자가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치고 소리 지르며 기다리는 자도 10,000여 인이었다.
궁예(弓裔)가 이를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왕공이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끝났다!”라고 하며 곧 꾀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微服)을 입고 북문으로 빠져나와 도망가니, 나인(內人)들이 궁궐을 깨끗이 하고 〈새 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묵다가 굶주림이 심해지자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 먹었다가, 부양(斧壤) 백성에게 해를 입었다.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총서 정명 4년(918) 6월 을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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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 히틀러 엔딩 언급이 많은데, 토종 국산 엔딩 (...) 도 있어서 소개합니다.
많이 답답해 하시고, 좌절스럽지만
힌민족의 역사에서도 이렇게 폭군을 물리적으로 날려본 경험이 있으니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몽둥이와 곡괭이는 언제나 옳은
일목대왕은 흑화 이전에는 진골새끼들의 착취를 막아주고 그 새끼들을 물리적으로 죽여버린 업적을 세우기라도 하였죠
굥이나 좆힘이나 진골들과 같은 씨발들일 뿐
궁예, 동탁, 무솔리니 주유소...음..좀 더 고민해보죠.... 폭군 처리법에 대해서요
궁예의 몰락은 왕건측에서 조미료를 좀 첨가했다카던데요.
머머리 주유소가 최고지
궁예 앤딩은 국민이 직접 끓어내고 조진게 아니라서 딱히..
그냥 다 망한 거지 마무리만 한거 아닙니까.
궁예의 엔딩도 있겠지만, 팔공산 전투에 대패한 고려 태조께서 또다시 절치부심, 견훤왕과 싸우는 도중에 지역 호족들이 견훤왕에게 호응하고 반역을 시도하다 겨우 진압된 후 개경에서(패주 궁예와 같이) 그 반역자들의 가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남김없이 잡아들여 철퇴로 때려 죽이고 정리한번 하신 게 떠오르네요.
태조 수종에서 우리폐하는 철퇴 싫어하시는데 철퇴로 때려죽이셨다 세상에 이런거 본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