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
미국은 현재 전미자동차노조 파업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포드와 GM, 스텔란티스 등 3대 자동차그룹 소속 노조 노동자들이
노조 창립이래 최초로 3사 공동 파업에 돌입하며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인데요.
4년간 40%의 임금 인상을 바라는 노조 측과 20% 이상은 절대 안된다는 사측의 정면대결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며 일부 생산 공장의 중단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이 노조 파업의 유불리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심 참모까지 현장에 보내며 수습에 나서는 상황입니다.
이는 단순히 임금 인상의 문제 뿐 아니라 전기차 시대가 다가온 가운데
가솔린 등 기존 자동차 시대를 이끌어왔던 공장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존권과 직결되면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위기입니다.
과연 그 협상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는 파업의 당사자 중 하나인 포드를 창업한 헨리 포드입니다.
헨리 포드
세계 최초의 컨베이어벨트를 활용한 자동차 대량 생산에 성공한 기업가.
생존 당시 기준 보유 재산이 10억 달러를 넘긴 유일한 부자.
현대식 자동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헨리 포드는 살아있는 자동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자동차의 보급화는 사람들의 생활권역을 획기적으로 넓혀주며 삶의 방식 그 자체를 바꾸었는데요.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일을 위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확장됐고 주말의 여가를 보내는 방법들이 다변화됐습니다.
현대(Modern)의 시작이 바로 이 자동차의 대중화에서 비롯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동차는
삶의 양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간 부자나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던 자동차가 중산층 가정에 보급되는데 그의 공이 무척 큽니다.
포드 로고
헨리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 스프링웰스 타운십이란 농촌에서
윌리엄 포드와 메리 리토캇 오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며 어머니 메리 포드는 벨기에 이민자의 후손이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포드는 형제들과 함께 단칸방에 지내며 자랐습니다.
포드는 12살때 아버지로부터 회중시계를 선물 받습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시간이 날때마다
이 시계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면서 기계에 대한 흥미를 느꼈고
당시 포드는 ‘시계 수리공’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솜씨가 좋았습니다.
포드가 14살이던 1876년, 그의 어머니 메리 포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포드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오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느릿한 마차로 인해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이때부터
마음 한켠에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자리 잡았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은 꽤 컸다.
장남인 헨리 포드는 농장을 이어받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농장에 대한 경멸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중에 “나는 농장을 특별히 사랑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농장의 어머니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농장과 어머니에 대한 상실로 그는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가 13살이 되던 해, 그는 우연히 증기기관차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사람의 힘이 아닌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보고 다시 한번 탈 것에 대한 큰 흥미가 생겼다.
사실 포드는 중학교만 졸업한 중졸입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16세에 집을 떠나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로 향했다.
그는 그 곳에서 몇몇 제조기업에서 일을 하였다.
첫 직장은 제임스플라워앤브로스라는 곳이었다.
견습 기계공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고 솜씨가 좋은 기계공이었다.
또 웨스팅하우스의 휴대용 증기기관을 다뤄보며 동력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키워 나갔다.
잠시 집으로 돌아와 가업인 농장 업무를 돌보던 그는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농기계를 몇 개 만들었고 증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폭발성이 있고 재사용에 시간이 걸리는 증기기관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한 그는
직접 엔진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1887년 4사이클 엔진을 만들었고 1890년 2기통 엔진을 스스로 개발하였다.
엔지니어로서의 역량이 만개해가는 시점에 포드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조명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에디슨은 그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다.
사업가이자 발명가인 둘은 서로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고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다.
포드가 기존 증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자동차가 아닌 휘발유를 동력원으로 한 차를 만들겠다고 말하자
그의 아내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토머스 에디슨이 그의 계획에 박수를 보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헨리 포드(우측)과 토머스 에디슨
포드는 에디슨 조명 회사에서 수석엔지니어로 승진하며 자신의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 집중한 그는 에디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자체적으로 개발한 가솔린 차량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차량 개발에 성공한 포드는 에디슨 조명회사에서 퇴사한 뒤 디트로이트 목재 재벌 윌리엄 머피의 지원을 받아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과 달리 포드가 만든 자동차는 예상보다 품질이 낮았고 무엇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렇게 창업 2년만인 1901년 회사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포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26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포드의 능력을 높이 산 투자자들은 포드를 수석 엔지니어로 해 1901년 헨리 포드 컴퍼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헨리 리랜드라는 컨설턴트를 영입하였다.
하지만 포드는 자신이 주도하는 회사가 아니라며 이 회사를 떠났고
결국 이 회사의 이름은 그 유명한 캐딜락 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다.
결국 또다시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포드는 1903년 미시간주 디어본에 헨리 포드 자동차를 창업하였다.
지금의 포드사의 모태가 되는 회사다.
창업초 여전히 문제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자동차 공정상 그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그만큼 차의 가격도 높게 책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포드는 우연히 시카고의 한 도살장에서 쓰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는 1910년 자동차 공장에 차체 만들기, 타이어 끼우기, 차체 페인트 작업, 나머지 부품 조립, 최종검사,
출고 순으로 공정을 분류하고, 이를 가장 높은 4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며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동선을 꾸몄다.
부품들만 어지럽게 가득했던 4층이 공정 과정을 거쳐 완성된 차량으로 1층에서 등장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위로 작업을 모두 올리며
이제 작업자들은 그 자리에 서 있고 공정 과정이 흘러가는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
대량생산되는 포드 모델T
그렇게 그는 자동화 생산 시스템, 포드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그의 전략의 핵심은 표준화와 분업화 그리고 전문화입니다.
먼저 자동차라는 복잡한 기계 장치의 생산 공정을 세분화합니다.
철저히 나눈 자동차 생산 공정을 기준으로 생산에 참여하는 직원들은 철저히 분업화된 일을 반복 수행합니다.
누구는 문만 달고, 다른 사람은 바퀴를 설치하는 등 철저히 분업화된 일만 수행하며 그 능률을 높입니다. 또한 그 작업의 품질이 흔들리지 않게 철저히 표준화합니다.
동일한 규격,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작업을 통해 항상 같은 작업이 반복될 수 있도록 품질을 끌어올립니다.
또 한 공장에서 단일 모델만, 단일 색상만 생산토록 해 시간의 낭비를 철저히 줄였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고 쌓이면 전문성이 축적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생산성 증대로 이어졌다.
여기에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작업에 필요한 부품들과 장비들을 올려
정해진 시간안에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를 종합해 포드의 작업양식, 포디즘이라고 불리는 예술의 수준으로 높아진 작업 방식이 탄생하였다.
포드 공장 노동자들
포드가 창안한 이 시스템으로 기존 750분 정도 소요되던 자동차 제조 작업시간이 93분으로 줄었다.
1908년 포드의 대표작 모델T는 1시간에 1대씩 만들 수 있었지만 1914년 24초에 1대가 만들어질 정도로 그 속도가 빨라졌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1913년 처음 적용되기 시작했다.
투입노동과 시간 대비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1대당 평균 2000달러였던 차량 가격도 825달러로 떨어졌고
최종적으로 1925년 255달러까지 떨어지며 규모의 경제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생산 혁신은 중산층 가정의 자동차 보급률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고 자동차를 자가용이라고 불리는 시대를 열었다.
헨리 포드와 모델T
포드의 첫 전성기를 열어준 차는 모델 T입니다.
1908년부터 1927년까지 20년간 판매된 모델T는 전세계 최초로 국민차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대량생산되었다.
모델T의 누적판매량은 1650만대. 역대 판매차량을 통틀어도 4번째로 많이 팔린 단일 모델이 바로 모델T입니다.
일반 노동자의 2달 치 월급이면 모델T를 살 수 있었고
1920년대 미국 도 차의 절반 이상이 모델T로 채워질 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모델T는 한국에도 들어와 한반도 최초의 영업용 승합차란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차량은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포드의 전성기를 열어줍니다.
포드는 경쟁사였던 링컨사를 1922년 인수하며 그룹사로의 위용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만 너무 빨리 성공에 취해서였을까요. 모델T 중심으로만 전개된 판매 전략은 GM, 크라이슬러 등
후발주자들에 대한 견제에 실패했고 시장 경쟁력도 다소 빼앗기게 됩니다.
인기가 떨어진 모델T의 후속작 모델A는 1927년 출시됐고 이후 4년간 400만대 가량이 판매됐습니다.
이후 경쟁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포드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갑니다.
포드는 1930년대에 유압식 브레이크, 금속 지붕 등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포드는 여러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기도 했고 다시 되팔기도 하며 흥망성쇠를 반복합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픽업트럭 모델인 F-150 시리지를 필두로
대표적인 미국 자동차 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헨리 포드의 상징성과 T모델T의 압도적 인기만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포드 F-150 라이트닝 전기차
재미있는 사실 하나, 포드는 1914년 하루 근무 시간을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며
일당을 5달러로 올리는 파격적인 임금 인상을 단행하였다.
당시 타 공장의 노동자들은 평균 2.38달러를 받고 일하던 때였다.
종전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기간이 3달에 불과했는데 이러한 임금 인상 정책으로 다들 로열티를 갖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많은 차량을 생산할 수 있던 효율성의 결과 회사와 노동자 모두가
승리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현재 전국자동차노조와 사측이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현재, 이러한 포드의 파격적인 임금 전략이 새삼 대단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겠죠. GM과 포드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이 원하는대로 임금을 인상할 경우 회사가 파산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업에 나선 노조가 40%나 되는 임금 인상률을 제시한 이유는 사실 최고경영자 등 고위임원들의 임금 상승률이 40%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