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한국 사회
순자 철학의 이상 사회론과 도가 철학의 소국과민 사상을 중심으로
2022101245
철학과 오지효
“공동-체(共同體)「명사」 『사회 일반』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전체” 국립국어원 표준 국어 대사전이 말하는 공동체의 정의이다. 신석기 시대, 농경이 시작되고 정착이 가능하게 된 이후로 공동체는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과거에는 쉽게 오갈 수 없었던 서울과 제주가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지역적 공동체의 제한 범위는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의 내부는 해체되고 있다. 지역적 공동체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의 모습이 거의 소멸하여 가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과거 중국 고대사회가 말하는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공동체의 개념이 흐려진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을 후술하여 서로 비교하고자 한다.
공자 왈, “금수와 더불어 함께 무리 지을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들과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유가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공자는 인간은 사회를 떠나 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보고, 인간 간의 상호 협력과 사회생활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순자 역시, “인간의 삶은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공동체에 속해 사회적 행위를 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자가 말하는 ‘공동체’란 무엇이며, 어떤 공동체가 이상적인 공동체일까? 중국 고대철학자, 특히 순자 철학의 출발점은 ‘어떻게 하면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여 사회의 안녕질서를 이룰 수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고대 중국의 혼란한 상황과 패권 전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회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인간의 행복 성취가 가능한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순자가 생각하는 사회 혼란의 원인은 바로 구분이 없는 것이다. 공동체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구성하되, 그 내부에서 구분을 두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공자와 맹자의 ‘차별 있는 질서관’을 계승한 것으로 유가가 표방하는 ‘차등 있는 조화로서의 화(和)의 질서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유가적 질서관을 따른 순자는 ‘완전히’ 평등한 사회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만약 개인의 지적 능력이나 특성을 무시하고 모두 동등하게 대할 경우 사회적 신분이 균등해지고, 신분상의 구별이 없다면 권세가 가지런해져 반드시 다투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투면 혼란해지고, 혼란하면 궁핍해진다. 따라서 순자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차등이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까지만 들었을 때 우리는 순자를 신분주의자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자의 신분 구분의 기준은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고, 사회적 지위와 몫의 구분은 ‘의’에 근거한다. 도덕의식이나 마땅함, 공평함, 정당함을 함축하고 있는 ‘합리적인 가치 판단’에 의해 ‘사회적 지위와 몫’이 구분되고, 이렇게 구분된 사회적 지위와 몫을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의해 결정이 가능한, 사회적 지위의 유동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동체, 이게 바로 순자가 생각하는 이상적 공동체이다.
순자가 설명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신분’이라는 단어만 빼면 현재의 대한민국과 매우 흡사하다. 노력하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사회적 지위의 유동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왜, 여전히 대립하게 되고, 혼란스럽게 된 걸까? 이는 사회적 지위와 몫의 구분이 ‘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가 뚜렷하게 갈리고 한정된 자원을 가르는 기준 역시 ‘의’가 아닌 ‘자본’이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사실 매우 매우 희소하고, 한국 사회의 사회적 지위의 구분은 사실 원초적인 곳에서 기인한다.
유구한 여성 혐오와 아동 혐오, 장애인 혐오. ‘독박육아’, ‘쿵쾅’, ‘N번방’, ‘불법 촬영’, ‘강간 및 성폭행’, ‘노키즈존’, ‘아동학대’, ‘전장연 시위’, ‘특수학교 설립 반대’ 등등... 신문 기사의 사회면에는 항상 여러 약자 혐오가 넘실댄다. 그리고 한국은 사회적 약자의 구분을 소수에서 찾는다. 한 마디로 ‘주류가 아닌 이들’을 사회적 약자에 몰아넣고, 그들이 받는 고통은 내 고통이 아니니 신경을 끈다. 나는 어린이가 아니니 노키즈존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장애인이 대중교통 이용에 영향을 받건 말건 나는 그들의 시위로 인한 당장 내 출근길 등굣길이 문제다, 그들과 내가 같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공동체 의식’의 부재. 한국 사회의 다툼과 혼란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공동체 의식이란 무엇일까? 도덕경 80장에서 보면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이에 만족할 줄 안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과한 것을 욕심내지 말고 본인이 스스로 생활을 영위할 줄 알게 되면 이에 만족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말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잘 공감이 가지 않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의 빛에 눈이 멀어 고대서부터의 깨우침을 잊고 있다. 본인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것을 탐한다. 내 권리는 하나도 잃지 않으려 하고, 남이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내 권리를 나눠주어야 할까 봐 화부터 낸다. 아기가 오면 조용히 카페에 있고 싶은 내 권리가 사라지고,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내가 설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아내와 육아를 분담하면 당장 내 이틀의 꿀 같은 주말이 사라진다. 하지만 정녕 그것은 본인의 ‘권리’였을까? 약자들의 눈을 가리고 멋대로 취해간 혜택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공동체에 속해 살아간다. 순자가 말했듯이. 그리고 도가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은 지금도 가파르게 발전 중이고 이와는 반대로 전 세계가 경제적 불황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방어와 본인의 자존감을 지키려는 방향이 본인 내면을 향하지 않고 타인을 혐오하거나 배척하는 등 외부를 향해 잘못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노인분들을 보면 인사 할 줄 알고 길에 어린아이가 혼자 있으면 손을 잡고 부모님 연락처를 물어볼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올바른 공동체가 무엇인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에 대해서, 중국 고대철학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첫댓글 공동체라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개념이 뒤섞여 들어 있답니다. 대학 공동체라고 할 때는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모여있는 집단, 사회라고 할 때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모인 집단, 지역공동체라고 할 때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집단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 순자의 유가는 지역공동체, 곧 커뮤니티가 사회 또는 국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의 최소 단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공동체에서부터 인간다움, 곧 문화적 질서를 바로 잡으면 국가 사회도 문화적 질서 체제를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서양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분질서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그것과는 무척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구의 국가 개념을 시민 계급과의 협약을 통해 구축된 것이라는 근대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