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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디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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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스크랩 토마스 아 켐피스와「그리스도를 본 받아」
섬김이 추천 0 조회 13 18.09.21 01: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토마스 아 켐피스와「그리스도를 본 받아」                 -출처 보기-


제가 읽어보니, 간략하게 핵심을 잘 요약한 글이라서, 스크랩 했습니다.



◑1. 생애와 업적 - 타고난 수도승 토마스 아 켐피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삶에는 종획을 긋는 면이 별로 없다.

세상을 방황하며 결국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찾은 어거스틴의 삶과는

다른 모양을 가진다. 

고요한 개혁자로서 토마스는 거의 한평생인 70년 이상을

수도원 작은 골방에서 보냈다.


그는 1379/80년 독일 켐펜(독일 중부 도시 뒤셀도르프에서 북서쪽 근교에 위치)에서

평범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그는 네덜란드의 데벤터(Deventer)와 빈데스하임(Windesheim)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여기서 ‘공동생활 형제단’을 알게 되었다.


1399년 그는 플로렌치우스 라데베인의 권유로 츠볼레(Zwolle) 근교

성(聖) 아그네스 수도원(어거스틴 수도원)에 입신하였다(서약은 1406년).

이곳은 그의 형 요한이 수도원장으로 봉직하던 곳이었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141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토마스는 그렇게 큰 학식은 소지하지 못했으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영적인 향기였다.

한마디로 그는 성서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산책하고

그리스도의 품을 거닐었던 수도승이었다.


그의 소명직은 성서를 포함한 사본들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필사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전히 그가 베낀 성서본은 오늘도 끝없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평생 그는 성서를 네 번이나 필사하고 

미사서와 중세의 신비주의자인 성(聖) 클레아보의 버나드의 저서 등을 옮겨 적었다.


또한 그는 아그네스 수도원의 사가(史家)로서, 그리고 수도원 부원장으로서

자신이 속한 수도원 생활에 최선을 다한 활동적인 명상가였다.

이러한 그의 수도원 생활은 주저「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하여

시대 초월적인 정점을 이루었다.


이것은 수도원 문학의 전형적인 작품으로서

세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인쇄. 판매되고 읽힌,

중세 경건 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책이다.


토마스는 여러 직분 가운데서도 우선 수도원 초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자신의 주요 직분으로 삼았다.

그는 수도원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수도원에서 사본 필사와 서적 집필을 하며

목회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였던 타고난 수도승이었다.


일생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던 토마스는

1471년 7월 25일에 그렇게도 갈망하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한 많은 세상 소용돌이를 벗어나 빛과 찬양의 세계로 떠났다.


◑2. 토마스의 주변 세계


토마스는.. 주변 세계보다는, 자신의 세계에 더 관심을 두었다.

객관적-사변적 사유보다는

내면적-체험적 종교가 그의 일대 실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외적인 요소에 아예 무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세상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으며

그 문제 해결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찰과 관상에서 풀고자 했던 수도승이었다.

그의 수도원 생활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다른 양태였을 뿐이다.


따라서 주변 세계 없는 토마스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그의 성숙한 그리스도 성찰도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세 말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등지고,

이성을 가지고 외부의 객체적인 요소만 가늠하던 경향이 짙던 시대였다.

자연 이에 반하여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하는 두 흐름이 있게 되었다.


그 하나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의 물결이요,

다른 하나는 ‘경건의 실천’ (Praxis pietatis)을 모토로 삼던,

평교인을 망라한  오늘의 경건  운동이었다.

이들은 토마스가 살아 호흡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독일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틀에 잡힌 사유 도식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체험하는 경험 일반을 말한다.


13세기 이후의 신학적 흐름은 

‘옛 길’ (via antiqua: 토마스 아퀴나스계 사상과 스코투스계 사상)과 

‘오늘의 길’ (via moderna: 윌리암 옥캄계 사상)로 양대 진영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 또한 그 시기는

11세기 이후의 십자군 전쟁으로 말미암은 영적 곤핍 상태에 빠져 있었다.


요컨대 민중의 배는 굶주렸고, 지성은 최고로 무장된 역설적인 시대였다.

나아가 성례전주의는 인간의 종교생활을 외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위험에 빠져들게 하였다.


독일 신비주의의 대변자는 누구보다도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e)hart: 1260년 경-1328년)이다.

그는 파리에서 성공적인 학문을 닦고  마이스터 (본래 의미로 신학의 대가)라는

아명을 지닌 도미니코 수도회 신학자이다.

그의 관심사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종교적 체험에 있었다.


여느 신학자와 달리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지 아니하고,

그를 느끼기를 원했고 신앙의 내면화를 강조하였다.


그는 위안을 잃고 상심한 자에게 하나님의 포근한 위로를 전하는 등,

삶의 분석보다는 삶의 구체적 체험에 치중하였다.

즉 그는 ‘학문의 스승’이라는 삶을 떠나 

‘삶의 스승’의 길을 걷고자 애썼던 신학자였다.


세상 만물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떠남의 신학’이나,

세상 소용돌이에서 끊어져 창조주께 돌아가야 한다는 ‘끊어짐의 사상’은

오늘날 사상계에도 끊임없이 솟구치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이 신비주의 사상은 그의 제자 요한 타울러와 시인의 성품을 지닌

하인리히 수소에 의하여 심화 전승되었다.


아울러 루터가 1516년과 1518년 간행한  독일 신학 (Theologia deutsch)도

엑크하르트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독일 신비주의는 그 시원을 클레아보의 버나드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친구들’은 이와 긴밀한 사상적 연계를 맺고 있다.


◑3.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는 

오늘의 경건  운동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중세 말기 경건 문학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책이다.


필사본만도 700여 본 이상이며 9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3,000여판 이상이 보급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장벽을 넘어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성서 다음으로 각광을 받는 책이다.


▲내용

전 4권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각 권 각 장마다

토마스가 직접 제목을 달아 놓았다.

대체로 독자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승들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중세의 민간 신앙을 그대로 담았다.


첫 번째 책은 신앙인의 삶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헛된 지식을 경시함으로,

자극(自剋)과 마음의 통회를 이루어 마음의 평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관건은 겸손에 달려 있다.

이 겸손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용히 따르는 데서 오는 겸손이다.

아울러 이것은 자신을 가만히 성찰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세상의 허영을 벗어나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마음의 단순함이 교만한 지식보다 낫다는 것이다.


두 번째 책은 내적인 믿음생활을 위한 권고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토마스는 세사의 외부적인 관심 보다는

내적인 변화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 변화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예수를 사랑하고 그와 우정을 맺고

그의 왕도(王道)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이룩된다.

인간의 순간적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에 버금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위로야말로 신앙인을 평화로 이끄는 것이다.


세 번째 책은 내적인 위로를 다루는데, 대언(對言)방식이 바뀐다.

즉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와 제자인 신앙인과의 대화체로 글이 전개된다.

주인과 종의 관계, 주님과 아들의 관계로 신앙의 규범들이 상세히 서술된다.


첫 번째 책에서 의지가 강조된다면, 여기서는 은총이 주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한 것도 없기에,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그는 은총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다.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얻어질 수 있으며,

경건한 사람은 언제나 이를 위하여 위안자인 예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책은, 인간이 하나님과 신비적인 합일을 이루는

거룩한 성례인 성만찬을 다룬다.

논술체도 3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제자간의 대화를 통하여

성만찬과 신앙인의 대응 관계를 논한다.


성만찬을 올바로 받기 위하여 인간의 죄된 성품에 대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신앙인은 경건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

특별히 이 4권의 성만찬 내용은,

오늘날 성찬의 의미가 약화된 개신교 교회에 새로운 각성이 될 내용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 어떤 조직적인 사상 체계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심지어 ‘그리스도의 본받음(추종) 사상’ 또한

이 책에서 주도적인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밖에 토마스는 이 책에서 그 당시의 종교적인 관행인 성지 순례와

성물 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바로 이 점에서 토마스는 후대에 가톨릭교회의 내부 개혁이나

루터의 종교개혁과 같은 선상에 있다.


◑3. 후세에 끼친 영향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짧은 시간 안에 수도원 세계를 초월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많은 나라에서 자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독일어로도 벌써 1434년에 첫 번째 책이 번역될 정도였다. 

오늘의 경건운동이 추구하고, 토마스가 이 책에서 뒤따랐던 겸손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에게서 그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도 이와 호흡을 같이한다.

예수회의 창시자인 성 이그나치우스도 매일 이 책을 정독하고

그의 「영신수련」에서, 이 책을 정기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을 넘어서「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경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경건주의의 시조 격인 요한 아른트도 이 책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교회와 개인 경건의 심적 틀을 마련하였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도, 22세에「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참 종교는 심령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책을 통해 자주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현대의 순교자요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도 나찌 정권에 대항하다가

감방에 갇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에,

라틴어로 이 책을 읽으며 묵상에 잠기곤 하였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던 신앙인들은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본받음의 일깨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세계상이나 진부한 논조들 뒤에는

그래도 그리스도 경건을 향한 토마스의 예리한 지적과 포근한 권면이 들어있기에

그 영향력은 오늘도 지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오늘의 경건 -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는 신앙의 사변적-논리적 사고에 반대하였다.

멋지고 고상한 이론적 언어가 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덕행의 실천적인 삶이 참된 신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자기 자신을 무시한 지식(말 뿐인 지식)은,

굉장한 교만이며, 응당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신앙인의 철저한 자기 겸손을 목표로 한다.

자신을 둘러보지 못한데서,

세상 분주함에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한 데서 교만은 고개를 치켜든다.

여기에는 자기 파멸만 있을 뿐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세상 학식을 쌓았던 사람이건, 정치적 우위를 차지했던 사람이건 다 잊혀진다.

위대한 사람은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토마스는 철저하게 청빈한 삶을 꾸린 수도승이었다.

외적으로 무엇인가 치장하는 것이 아름다운 오늘날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

그의 섬기는 사역과 빈털터리로서의 삶은 항시 우리에게 진한 반성을 촉구한다.


늘 바쁜, 믿음 생활의 기쁘고 힘든 순간에,

다시 한 번 경건의 시원한 물줄기를 선사해 주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진정으로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속 시원히 본받아야 함을 일러준다.


토마스는 삶의 분석보다는 삶의 실존적 체험에 한껏 온 힘을 경주한 수도승이었다.

앎의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실천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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