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강
곰돌이 푸와 함께
어른의 세계는 어린이의 세계보다 확고하고 이성적일까?
기존의 <곰돌이 푸>-이하 푸-에 대한 논의의 전제는 ‘로빈이 푸의 세계로부터 현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성장으로 보는 것이다. ‘푸의 세계’가 소년 혹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이야기된다. 그래서 푸를 로빈의 ‘어리고 서툰 자아’로 명명하고도 있다.
놀라운 것은 푸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푸의 시’는 마치 없는 것처럼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선행된 연구들은 단지 푸가 ‘머리가 없다’는 것을 푸가 ‘아직 어리다’라는 것과 등가로 보고 이를 푸의 정체성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독자는 푸의 정체성, 또는 ‘머리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푸의 행위와 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푸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어떤 것이 올 때를 예감하거나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이 찾아오면 시를 쓰고 노래로 만든다. 또한 위기의 순간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을 한다. 푸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있다. 그러면 푸는 어떤 존재일까? 직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예술가! 푸와 피글렛 그 밖의 친구들의 행위는 한편의 부조리극이다. 푸가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된다는 건 너무나 멋져!/조그만 구름들은 모두/언제나 큰 소리로 노래를 하지’라고 노래할 때 노래는 이미 행위다. 아니 행위가 먼저이고 행위가 노래가 된 것이다. 피글렛과 우즐을 추적할 때, 이요르에게 꼬리를 찾아 줄 때, 북극 탐험을 할 때, 이요르의 집을 지어줄 때 등등 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연극처럼 관람하게 되는데 이 연극은 초현실적이다. 동음어의 반복을 통해 다른 의미를 연쇄하는 방식 또한 그러하다.
독자-어린이 또는 어른-가 푸에 열광하는 것은 푸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를 열린 존재로 만든다. 예술이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원은 각기 그 수용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푸는 독자에게 문학을 향유시킨다. 푸의 이야기가 지금도 독자에게 사랑받는 것은 문학성-예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간을 고양 시키고 참된 아름다움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그 순간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을 소망할 수 있게 된다. 예술은 일체감-피글렛은 푸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과 이끌림-이요르는 로빈과의 이별을 푸처럼 시로 쓴다-을 준다. 그래서 인간은 커지고 지혜로워진다. 하지만 이것이 어른의 세계는 아니다. 지혜는 세상을 관찰하고 노래하는 자의 몫이다. 그들만이 진정한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1권의 열 번째 이야기에서 로빈은 피글렛을 구한 푸를 칭찬하고 상–로빈은 상을 잃어버리기까지 하고, 상은 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연필이다. 푸는 연필에 쓰여진 알파벳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바꾸고, 이요르는 연필의 무용함을 선언한다-을 주지만, 2권에서 푸는 작은 존재 피글렛의 용기를 칭찬하기 위해 시를 쓰고 노래로 만들어 피글렛을 충분히 행복하게 한다.
현대 사회는 예술가를 골방에 가둔다. 그리고 푸와 그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는, 지식의 세계 혹은 물질의 세계에 골몰하게 한다. 그렇게 어른들이 만든, 만들고 있는 세계는 그래서 더 확고하고 이성적일까?
‘로빈’은 ‘작가의 자아’다. 지금 푸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을 하는 작가’는 로빈의 언어를 빌어 ‘언제까지나 100살이 될 때까지도 푸가 자기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말한다. 이 약속은 작가가 푸를 절대로 잊지않아야만 가능하니, 작가가 푸를 잊지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한다. 푸가 로빈을, 또는 작가를 잊지 않으려면 작가가 푸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 푸와 로빈과 작가는 ‘우로보로스’처럼 꼬리를 물고 있다. 로빈은 푸를 사랑한다. 그래서 푸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고 작가는 로빈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빈은 말한다. 푸는 자기 이야기 듣기 좋아하는 곰이라고.
모두가 일상인이 되기 위해 떠난 자리에서 예술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부단히 증명해야 한다. 푸처럼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그래서, 아마 크리스토퍼 로빈은 이제 더는 나한테 말을 하지 않을 거야.”
“푸는 충성스러운 기사가 된다는 말이, 얘기를 듣지 못해도 계속해서 그저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소리인지 궁금해졌단다.”-329쪽-
로빈이 떠난 자리에서 푸는 계속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른다.
꿀을 잔뜩 먹은 푸를 보며 딸아이는 언제나 다음 장면을 알면서도 계속 ‘그러면 안돼’라고 소리쳤다. 그 외침은 푸를 ‘걱정’하는 것이었을까, ‘야단치’는 것이었을까? 문득 <지각대장 존>을 읽으며 ‘매번 지각하는 존’이 교실 모퉁이에서 벌서는 모습을 ‘흉내’ 내던 딸아이의 행동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공감하는 놀이다. 존재를 망각한 골방의 우리를 빛 속으로 이끌어야 한다.
“푸는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었어. 푸하고 펌프경하고 브라질경하고 인수 분해가 말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고, 모두들(말을 돌보는 인수 분해만 빼고) 훌륭한 크리스토퍼 로빈 왕을 모시는 충성스러운 기사였는데......, 하지만 푸는 간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게 아냐”하고 중얼거렸지. 그러고 나서 푸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어디든 갔다가 돌아왔을 때에 들려주고 싶어하던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머리라고는 거의 없는 곰이 그것들을 마음속에 정리해 놓으려고 애쓰기란 얼마나 헷갈리는 일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어.”
“미련한 곰딴지 같으니”
이제 질문을 바꾼다. 지식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보다 확고하고 이성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