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아주 멀리 갔다. 늘 여행하는 홍상수는 서울이 아닌 파리에서 전에 없이 소심하고 귀여운 인간들의 세상 적응기를 만들었다. 편견 없는 홍상수의 밝고 명랑한 파리 여행기 <밤과 낮>을 그의 말을 빌려 뜯어본다.
김혜선 기자 | 피곤해 보인다. 홍상수 | 아침 5시에 집에서 나왔다.
김혜선 기자 |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다 와서 그런가? 영화제 내내 한국에선 수상을 점치는 호들갑스런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본인은 별 생각 없었던 거 아닌가? 홍상수 | 그 문제는 예전에 정리 끝났다. 난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가는 걸로 충분히 고맙게 생각한다. 영화를 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수상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들의 약력을 보면 평생 믿고 해오던 영화가 있고 신념과 틀거리가 있는데, 그런 분들이 내 영화 보고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럼 아, 누가 봐도 이건 어려운 일이다, 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든다.(웃음) 선정위원들이 무슨 생각으로 날 불러줬는지는 모르지만, 불러준 덕에 영화가 노출되고 그런 좋은 분위기는 다음 영화를 위한 선의의 투자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그거면 충분하지 뭐. 다 뻔히 보이는데 뭘 기대하나.(웃음)
김혜선 기자 | 그렇게 좀 다른 영화 <밤과 낮>엔 예전과 다른 몇 가지 시도가 있다.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했다. 어쩌다 파리에서 찍겠다고 생각했나? 홍상수 | 단순하다. 해외에서 산 경험이 있으니까 언젠가 해외에서 한번 찍어야지. <해변의 여인> 끝나고서, 그냥 이번엔 해외에서 찍어야겠다고. 그때 떠오른 게 뉴욕영화제 갔을 때 경험이다. 호텔에서 담배 못 피우게 해서 새벽에 호텔 밖까지 나와 길거리에서 담배를 폈다. 마침 휴대전화를 갖고 있어 담배를 여러 대 피면서 서울에 전화를 했다. 집사람하고 통화를 했다. 나는 그냥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서울은 낮이고, 거긴 밤이고. 갑자기 이상하더라. 시간이라는 게 사람한테 일상적으로 절대적인 것처럼 존재하잖나. 변하지 않고. 그래서 영향받고. 그날 그 상황이 내 속에 체크된 거 같다. 그리고 제목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김혜선 기자 | 제목이 ‘낮과 밤’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안 그런 건 ‘밤과 낮’이 어감이 더 좋기 때문인가? 홍상수 |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밤과 낮’이라는 어감이 주는 참 좋은 느낌이 있다. 난 말 자체의 느낌이 막연하게 좋으면 그걸 제목으로 정한다. 이번 영화도 찍으면서 ‘밤과 낮’이 제목이라는 걸 아니까, 그것 때문에도 뭔가가 만들어졌다. 영향받는 거다. 만약 제대로 만들었다면 보는 사람도 딱 부러지게, ‘왜 이런 제목일까’ 하는 이유가 안 떠올라도 영화의 디테일들과 제목이 맺는 관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혜선 기자 | 일기체 형식으로 진행된다. 전작들에서 여행을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여행을 일기체로 담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상수 | 처음에 몇 가지 큰 게 떠올랐다. 첫 번째는 국제통화 경험을 기억한 거고, 그 다음은 줄거리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안 떠올랐고, 남자가 좀 바보 같은 일로 집에서 도망가 여행을 하는데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어떤 선의의 거짓말을 통해서고, 그것으로부터 구제받는다는 거, 그런 영화의 시작과 끝만 떠올랐고 그 시작과 끝이 좋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일기 형식으로 해야겠다는 거였다. 문학작품이든 뭐든 내가 항상 일기 형식을 좋아했다.
김혜선 기자 | 거짓말로 구원을 받는다? 홍상수 | 성남(김영호)은 아내의 거짓말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게 좋은 이유가 있다. 사람이 어떻게든 구원받는 건 필요하다. 근데 구원받기까지의 과정이 정당해야 한다거나, 합당해야 한다거나, 그럴듯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공식적인 생각이 삶에 대한 큰 편견이고 편협한 생각 같다. 실제 삶에선 악의를 가진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다. 난 그런 데서 쾌감을 느낀다. 그 전복적인 느낌 때문에 이 영화의 결말이 좋았다. 누군가 계속 노력을 해서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건 너무 통념적인 것이고 스테레오 타입이다. 사는 데 사람을 아주 갑갑하게 만든다. 자기 테두리를 못 벗어나고 남을 항상 매도하는 이유, 삶을 항상 편협하게 보고 쓸데없이 끙끙대고 사는 이유, 이게 다 통념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김혜선 기자 |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그 사람을 훨씬 행복하게 하는 거라고? 홍상수 |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다, 얼마든지.
김혜선 기자 | 얼마든지, 그럼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건가? 홍상수 | 거짓말이 나쁘다, 라는 건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모든 삶을 죽을 때까지 총결산한 사람이 내린 결론이 아니다. 하나의 믿음,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생각일 뿐. 거짓말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다. 사람은 정말 하루 종일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하루 종일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런 하나의 생각에 매몰될 필요가 없지. 실체와 자기의 생각 사이의 괴리를 쳐다보려고 하는 노력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들고, 거기서 진짜 자유든 행복이든 발생한다. 뻔한 생각들에 매몰돼서 열심히 사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나, 라고 자문하지 않나?
김혜선 기자 | 음… 허구한 날 그런 생각이 든다.(웃음) 홍상수 | 통념적으로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그 감정의 폭을 축소시킨다. 그러니까 그 감정이 그 순간 그 사람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채 경험하질 못해. 근데 거기에 바로 비밀이 있고, 해법이 있다. 그 감정이 얼마나 자기에게 중요한지 느끼고, 그때 자기를 조율하는 모든 근거가 그 감정 안에서 나온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에 대한 결정도 감정을 제대로 느껴보면 안다. 남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 내가 이걸 너무 필요로 하는구나, 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그 다음 결정이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된다. 통념적으로 좀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이만큼 폭이 커져 있는 감정을 확 좁혀서 피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양 넘어가버린다.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다음 결정은 항상 그 사람 자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항상 열심히 사는 것 같고 자기를 채찍질하고 살았는데 마음속에 순화되는 게 없고, 해결되는 게 없어. 왜 만날 노력하는데 왜 그렇게 불우하냐고! 내가 보기엔 많이들 그런다.
김혜선 기자 | 거짓말로 치자면 꿈도 일종의 거짓말이다. <밤과 낮>엔 성남이 꾸는 두 가지 꿈이 나온다. 파리에선 성남이 자고 있는 유정(박은혜)의 발을 애무하다 면박당하는 꿈, 아내의 거짓말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서는 아내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꿈이다. 홍상수 | 우린 설혹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통념 때문에 서로에게 온전히 자기를 다 얘기할 수 없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이다. 어쩔 수 없는 거지. 내가 상대에게 거짓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상대가 믿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얘기 못하는 거다. 계속 사랑받고 싶으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고. 100% 솔직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그래서 꿈을 꾼다.
김혜선 기자 | 서울에서 꾸는 꿈속의 아내 지혜가 목욕을 하는 장면이 있다. 불가해한 장면 중 하난데. 홍상수 | 그건 지혜가 꿈속에서 전처가 된 성인(황수정)과 대결을 하러 가는 거다. 성남이 함께 만나러 가자 할 때 말로는 오랜만에 그러자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지. 뭔가 목욕을 하고, 정신을 딱 차리고 가보겠다 뭐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웃음)
김혜선 기자 | 그 꿈속에서 성남이 선물용으로 가져가던 도자기를 지혜가 길에서 실수로 깨니까 쌍욕을 한다. 욕이 아주 적나라하다. 성남 역의 김영호는 현장에서 거짓말 때문에 돌아온 성남이 허탈한 마음에 개꿈을 꿨다고 하더라.(웃음) 홍상수 | 성남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잘된 거 같지만 그 안을 보면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 사람이 항상 짊어지고 있던 그 문제점은 집으로 돌아왔건 해외로 도망갔건 해결이 안 됐다. 그걸 쉽게 드러내는 방법으로 꿈을 넣었다. 아, 해결된 게 아니구나! 하고. 꿈을 뭘로 채우나 고민했다. 꿈속 아내 지혜는 성남이 파리에서 잠깐 지나친 유학생이었고, 성남은 그때 뭘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지혜는 파리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유정이 그려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그 그림을 그린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화가인 성남은 보자르라는 미술학교에 대해서 약간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인데, 그렇게 볼 때 아, 이 여자는 진짜 보자르, 유정이는 가짜 보자르,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접수가 된 거지.(웃음) 그 무의식이 깨어 있을 땐 몰랐는데, 꿈꿀 때 기어 나온 거다. 심지어 진짜 보자르와 살림까지 차리고.(웃음)
김혜선 기자 | 영화를 90% 파리에서 찍었고, 성남이 아내와 함께 있는 집 장면과 꿈 장면은 서울에 돌아와 찍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꾸는 꿈이니 당연히 서울에서 찍었겠지만, 파리에서 찍으면 안 될 건 또 뭔가? 홍상수 | 난 서울의 외곽, 약간 못사는 동네에서 사랑으로 뭉친 살림살이를 보는 게 좋다.(웃음)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린 그런 상황, 귀엽다고 할까.
김혜선 기자 | 영화 속에서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 촬영 하는 거리에서 성남의 어깨에 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장면. 자기 어깨에 떨어졌다 살아난 새를 보면서 성남이 기뻐하고, 그걸 본 영화 스탭들도 기뻐한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만든 장면인가? 홍상수 | 새가 나온다는 설정은 트리트먼트 때부터 있었다. 공항에서 새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건 미리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새를 훈련시켜야 하니까. 그 장면에서 새가 떨어져 있을 때 가만히 죽은 척하고 있다가, 잡으면 살아난다. 공항에서도 창문으로 날아와 서 있고. 새 조련사에게 부탁해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했다. 참, 우연히 파리에서 헌팅을 할 때 쓰기로 한 성당 안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고, 거기 성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성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새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성자의 머리 위에 새가 있었다. 트리트먼트에 원래 새가 나오게 돼 있었는데, 헌팅 가서 그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잘됐네’ 싶었다. 그런 걸 발견하고 만나는 게 참 재밌다.
김혜선 기자 | 그러고 보면 <밤과 낮>에선 새와 돼지, <해변의 여인>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하 <여자는>) <강원도의 힘>에선 개가 나온다. <생활의 발견>은 김상경이 예지원의 전화를 받을 때 옆에 오리가 보였다. <강원도의 힘>에선 세숫대야 안에 금붕어가 있다. 동물이 자꾸 나온다. 홍상수 | 물어보니까 생각하게 되네. 통념성을 깨거나 흔들어보려는 게 내 태도 속에 있다고 했는데, 동물은 인간의 그런 통념이나 이데올로기로 접수가 안 된다. 인간적 한계 속에서 동물을 쳐다보는 시선은 있지. 쟤는 귀여운 동물, 흉한 동물, 쟤는 우리한테 이익을 주는 동물, 뭐 이런 기본적인 인간의 동물에 대한 태도는 있다. 하지만 걔네들은 우리의 복잡한 이데올로기나 센티멘털리즘, 로맨티시즘, 히로이즘에 접수가 안 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우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게 귀여우면서도 뭔가 깨는 게 있다. 확 깨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 깨는 느낌이 나한테는 추구할 이유가 된다. 사람 중심적인 갑갑한 세상을 쳐다보는데, 뭔가 낯선 하나가 쑥 등장해 아무 상관없이 걸어 다니는 게 좋기도 하고.
김혜선 기자 | 아니 그럼, 지금껏 동물이 나오는 장면마다 트리트먼트에 다 써놓았고 그때마다 동물을 훈련시켰단 말인가? 홍상수 | 그렇다. <여자는>에서 까만 개가 나오는데, 성현아와 유지태가 소파에 있다 방으로 들어가고, 개가 그 방 문 앞에 있다가 안방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안에 있던 김태우가 잠에서 깨 성현아와 유지태가 잠을 잔 걸 알게 되는데, 그 장면 찍을 때도 개를 훈련시켰다. 미리 그 집과 똑같은 구조의 집에 데려가 그대로 하게끔 훈련시켰다. <해변의 여인>에서도 마지막에 개가 고현정이 타고 가는 차를 쫓아가잖나. 그냥 놔두면 절대 안 쫓아간다. 훈련을 잘 시켜야 한다. 잠깐 서 있다가 주인이 차를 타고 시동 걸고 가면 그때부터 뛰게끔. 안 그러면 개가 안 따라가거나 딴 데로 뛰어간다니까.(웃음) 트리트먼트에서 그런 계산이 있다. 어떤 건 미리 준비해야 되겠다고 판단하고 미리 생각한다. 그 어떤 걸 어떻게 구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나도 모른다.(웃음)
김혜선 기자 | 어떤 요소를 일관성 있으면서도 다층적으로 배열하고, 그걸 복합적으로 쌓아올리는 직관이 영화를 찍을 때마다 능란해지는 것 같다. 홍상수 | 어… 고맙다.(웃음) 굳이 그렇게 되는 이유를 찾는다면 작업하면서 영화 안에 어떤 요소들을 집어넣을 때 어떤 사람은 a와 b를, 어떤 사람은 c와 d를 픽업해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걸 하나로 모으지 않고, 병존하게 하면서 계속 간다. 내가 의식하진 못하지만 뭔가를 픽업하고 배열하는 방식이 내 논리 체계를 통과해 나오는 게 아니라 내 몸뚱어리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영화를 찍을 당시엔 딱히 뭐가 안 맞는 거 같아도 찍어놓고 나면 희한하게 연결되는 걸 가끔 느낀다.
김혜선 기자 | 전작들은 반복과 모방이 주요했다면, 이번에는 이중성이라는 키워드가 더 커 보인다. 예를 들어 기주봉 씨가 연기하는 민박집 주인과 성남이 파리에서 뜬금없이 흑인식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이상하게 충돌하는 이중성 때문에 웃게 된다. 그 흑인식 인사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홍상수 | 기주봉 씨가 2층 창가에 앉아 계시다가 건물 밑으로 지나가는 어느 흑인과 눈이 마주쳤단다. 아는 척을 하다가 기주봉 씨가 아예 내려와 민박집 길 앞에서 둘이 얘기를 했다더라. 기주봉 씨는 영어를 못하는데, 둘이 그냥 소통한 거지. 그때 그 흑인식 인사를 배웠다더라. 그 얘길 촬영 며칠 전에 듣고 집어넣었다. 하나의 통념이나 잣대로 영화를 잘라서 설명할 수 없는 물건, 내가 그런 걸 지향하기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래 인물들이 악수하는 걸 좋아한다. 전작에서도 악수하는 장면이 있다. <극장전>에서도 김상경과 엄지원이 악수하고. 이상하게 악수가 좋아.(웃음)
김혜선 기자 | 성남과 유정은 계속 거짓말을 하지만 뻔뻔하고도 이기적인 그 모습이 귀엽다. 김영호와 박은혜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배우의 새로운 면모를 매번 끄집어내는데, 알려진 것처럼 술자리와 가위바위보, 대화 외에 다른 비결이 있나? 홍상수 | 그냥 배우하고 작업하는 방식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말로 하면 별건 아니다.(웃음) 내 희망은 아침에 내가 뭘 쓰더라도 그 배우의 입에 붙는 대사를 쓰고 싶고, 그 배우가 억지로 해야 하는 대사나 행동은 안 했으면 싶다. 이미 글을 쓰기 전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해 파악한 게 스며든다. 내가 뭘 해도 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니까 결과적으로 대사가 배우의 입에 붙는다. 대사가 편하니 그 배우가 스스로 컨트롤해야 하는 부분이 많지 않아도 되는 연기를 하기 원하는 거다. 그걸 위해서 미리 대본을 안 마련해두고, 준비를 못하게 한다. 대사가 편하니까 막 하다보면 배우니까 컨트롤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컨트롤 안 하는 것도 막 나온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거 보면 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근데, 뭐 그게 비결, 비밀씩이나 되나?(웃음)
김혜선 기자 | 2시간 24분으로 러닝타임이 가장 길다. 예전엔 찍어놓고 많이 들어내지 않았나? 홍상수 | 처음엔 대강 붙여보니까 2시간 반 정도 됐다. 뭐, 잘라내겠지 하고 편집실에 가기 시작했는데, 막상 자르려니 그렇게 안 됐다. 맨날 편집실 가도 자르기 싫은 거야.(웃음) 왜 그런가 보니 일기체 형식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좀 한가한 날도 기록하고, 사소한 것에서 받은 감흥도 일기에는 기록돼야 할 것 같았다. 편집하면서 그게 맞다고 판단했다. 성남의 시야와 감각의 세계만 쫓아다니고, 딴 건 모르겠다, 라는 식이어야겠다고. 영화 안에 다른 층위의 강도를 섞으려 한 거다. 장면의 순서를 좀 바꿔볼까도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찍으면서 한 번 바꾸고 거의 트리트먼트 때 순서 그대로 갔다. 형식이 일기체기 때문에 이런 진행에는 어떤 딱 부러지는 논리적 이유가 없다. 완전히 감으로 갔는데, 그래서 <밤과 낮>을 후다닥 써야 뭔가 나올 것 같다, 완전히 나 자신을 믿고 나오는 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다른 때보다 정말 빨리 썼다. 편집실에서 어줍지 않게 손을 대면 뭔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거의 못 잘랐다. 그냥 그 러닝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웃음)
김혜선 기자 | 화면에 써내려간 어설픈 글씨체는 직접 쓴 건가? 홍상수 | <여자는> 때도 작업했던 과천 현대미술관 관장님 글씨다. <여자는> 때 내가 수소문했다. 달필이지만 너무 화려하거나 잘 쓴 글씨 같지 않으면서도 ‘문기’라고 그러나. 많이 글을 써서 글 읽은 분의 기운, 품위 그런 게 좀 있는 글씨체를 찾았다. 아는 분이 그분을 추천해서 <여자는> 때 한 번 받아서 썼고, 이번에도.
김혜선 기자 | 늘 그렇지만 로케이션이 유난하다. 서울도 구석진 곳만 찾더니 파리까지 가서도 성남은 구석진 곳으로 열심히 다닌다. 홍상수 | 돈도 없고, 도피해 있는 사람이 관광지를 유별나게 다니고 싶을 것 같지도 않고. 인물의 성격과 처지의 반영이지. 성남이 본 거만큼만 보여주고, 성남이라는 사람에게 뭔가 남으면 그걸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하찮은 것이라도. 그러다보니까 물에 똥을 치우는 장면도 여행객인 성남의 시선에서는 중요해졌다. 그걸 처음 보는 한국 사람으로선 아, 이렇게 해서 파리에선 똥을 치우나보다, 할 수 있다.
김혜선 기자 | 물에 똥이 흘러가는 장면은 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낯설다. 이런 이미지는 어떻게 떠올리나? 홍상수 | 생활 다큐적인 숏하고 그렇지 않는 숏이 섞여 있는 건데, 역시 앞서 말한 원칙이 중요했다. 상상을 하거나 디테일을 찾을 때 좀 더 일관성을 갖고 찾으려고 했고. 실제로 성남 같은 사람이 그런 처지, 그런 경제적 상태에서 파리를 돌아다닐 때 뭘 경험할까? 들은 바도 있고, 내가 경험한 것도 있는데, 그런 걸 섞어서 떠오르는 것들을 모은 거다.
김혜선 기자 | 물에 똥이 떠내려가는 걸 봤다고? 홍상수 | 실제로 그건 파리에서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보는 풍경이다. 파리 사람들한테는 너무 당연한 풍경인데, 처음 가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눈에 띈다. 파리에 똥이 되게 많은데, 똥을 안 치운다. 그걸 어떻게 치우나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날 아침에 청소부가 물을 흘리고 빗자루로 쓱쓱 밀어서 물에 똥을 흘려보내는 걸 보면, 아 그렇구나 하는 거지. 성남이 그래서 씩 웃는다.(웃음)
김혜선 기자 | 전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영화감독이거나 작가, 소설가, 영화와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남은 화가다. 그 설정이 꽤 중요해 보인다. 홍상수 | 당연히 중요하다.(웃음) 그림과 관련한 디테일이 많이 나오니까. 영화의 엔딩도 그림으로 끝나고. 화가인 성남을 통해서 실체와 예술작품이란 것 사이의 관계 같은 게 보는 사람들에게 포착될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캐릭터의 직업이나 로케이션을 결정할 때 내가 너무 모르거나 너무 아는 건 싫다. 너무 멀면 모르는 거고, 그러면 그걸 다룰 때 처음엔 신선해도 내 반응은 상투적인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리서치를 한다고 해도 자연인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으면 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내가 조금은 아는 걸 갖고 하려고 한다. 인물의 타입이나, 직업이나 로케이션이나. 물론 익숙한 것의 벽에 부닥치기는 하는데, 그걸 조금만 뚫고 들어가면 깊어지는 맛이 생긴다.
김혜선 기자 | 그런 생각은 성남과 유학생 현주(서민정)가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는 그림을 쿠르베의 그림으로 한 것과도 연관이 있나? 홍상수 | 쿠르베를 좋아하는데, 적당히 좋아하는 거지. 세잔의 그림을 훨씬 좋아한다. 사용하기엔 너무 가까울 정도로. 만약 세잔을 선택하게 되면 너무 내 개인적인 주장이 여과 없이 작품 속에 들어가고, 필요한 만큼 주물럭거리지 못한 채 생짜로 들어가기 쉽다.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의 작품은 그래서 피하고 싶었고, 너무 싫어하는 사람의 작품은 관심이 없으니까 뭔가 내가 할 게 없고. 쿠르베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았다. 전시실에 걸려 있는 그림 중에 골라 촬영을 해야 했는데, 그중에서 여성의 음부를 그린 <세상의 기원>이라는 그림이 좋았다. ‘너무 쉽게 가는 거 아냐’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라 더 좋았다고 할까. 유부남이 파리에 도피해 와서 여자들 만나니까 ‘이런 영화니 저런 그림이 나오지’, 그런 느낌 있잖나.(웃음) 어쩐지 쉬워 보이고, 미끈미끈하고 약간 가볍고 뭔가 허투루 하는 것 같고. 그게 성남과 현주가 나누는 대사와도 맞았다. 그 둘의 관계가 처음에 그런 느낌이니까.
김혜선 기자 | 길에서 인부들이 도로를 드릴로 뚫는 장면은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구도를 따왔다고 들었다. 홍상수 | 맞다. 성남이 길을 가는데 카메라가 팬 하면 두 남자가 돌을 깨고 있다. 파리에서 촬영하면서 어느 날 아침 카페로 가는데 인부들이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 꼭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다, 싶어서 스탭들을 시켜 그분들을 몇 시간 붙들어놓았다. 그리고 <돌 깨는 사람들> 그림을 가져와 구도와 동작을 비슷하게 시킨 다음 찍었다.
김혜선 기자 | 성남이 구름을 그리는 화가라는 설정을 한 이유는 뭔가? 홍상수 | 처음에 국내 화가들의 그림을 쭉 보면서 성남이 그릴 법한 그림을 찾으려고 했다. 성남의 성격과 덩치와 인품을 보면서 정했는데, 그게 구름 그림이 됐다. 그 다음에 그림을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했고. 다리 위에서 “구름이 낮게 뜨네요”라는 대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그게 몇 번 반복해서 나오게 했다. 영화 마지막 신에 성남이 집에서 아내와 함께 누운 침실에서 구름 그림이 나오는데, 침실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답답하지 않나. 창문도 없고 빗소리만 들리니까. 더할 나위 없이 답답하고 인위적인 것만 있는 공간이고 인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카메라가 살짝 성남과 아내의 머리 위로 올라가면 구름 그림이 있다. 이건 인위인데, 사람이 사는 공간도 아니고 만들어진 물건인데, 그 내용은 구름이 가득히 펼쳐지는 자연스러운 공간이다. 그 대조와 부딪침이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이 좋았다.
김혜선 기자 | 장면 사이사이에, 어떤 때는 장면 위에 베토벤의 음악이 얹힌다. 참 짱짱하고 상쾌하다.(웃음) 쿠르베도, 베토벤도, 미술이든 음악이든 사람의 행동이든, 어떤 형태들이 뭉쳐서 또 하나의 형태를 만든다. 홍상수 | 성남의 직업을 화가로 택하면서 미술에 대해 자유롭게, 이렇게 저렇게 건드려보고 싶었다. 이 영화가 그럴 수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일기체니까. 또 성남이 화가이고 자기 일에 대해 아직 열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미술적 이미지에 계속 자극받을 것 같았다. 베토벤 음악은 내가 되게 좋아하는 음악이다. <밤과 낮> 트리트먼트를 쓸 때 어떤 오피스텔에 있었는데, 거기 1층에 은행이 있었다. 은행 현금인출기에 돈을 찾으러 가면 인출기에서 이 음악이 나왔다. 몇 달 동안 굉장히 자주 갔는데 갈 때마다 나왔다.(웃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데, 돈 찾을 때마다 나오니까 더 좋더라고.(웃음) 그래서 약간 거기서 취해 머뭇거리기도 했다. 가편집할 때 쓴 음악에 문제가 생겨 다른 걸 찾아야 했는데 그게 떠올랐다. 넣어봤더니 좋았다. 똥이 물에 흘러갈 때 그런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것도 귀엽고.(웃음)
김혜선 기자 | 박은혜가 연기한 유정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지만 웃기는 캐릭터인데, 전작들의 여자들도 대부분 이랬다. 이런 여자를 실제로 좋아하나? 홍상수 | 어렸을 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타입의 여자가 있었지. 그런데 그런 타입의 여자들을 실제로 만나면서 신비감이 다 깨졌다. 자연인, 사람 홍상수로서는 그런 여자들에 대한 신비감이 거의 없다.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변했다. 지금은 각양각색 타입의 여성들이 갖는 매력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됐다.(웃음) 그건 나한테 굉장히 좋은 거다. 감독으로서는 어떤 타입의 인물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을 잡아놓으면 그런 인물의 행동 같은 게 나한테 온다. 내가 짜내는 게 아니라. 자연인으로 변화하는 거보다 영화의 변화가 뒤늦은 거 같다. 자연인으로서는 어떤 타입에서 이미 좀 벗어나 있는데, 영화로 표현할 때는 아직도 전에 접했거나 관심을 가졌거나 그런 타입이 반복되는 걸 보면.
김혜선 기자 | HD 카메라로 찍은 첫 영화다. 화면 느낌은 필름 카메라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홍상수 | 사실 돈 때문에 HD로 찍었다. 제작비를 줄여야 했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영화 찍기 2주 전에 갑자기 영화가 엎어졌다. 2주 남은 동안 운이 좋아서 영화사 봄이 제작을 하게 됐는데, 그때 제작비를 더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난리를 쳤지. 스탭들 중 많은 이들이 돈을 안 받거나 굉장히 조금 받았다. HD는 필름 값보다 싸니까 쓰게 된 거고, 촬영감독도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뭐, 언젠간 HD로 한 번은 작업할 줄 알았다.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 형편이니까. 그래서 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냥 HD로 한다는 거 의식 안 하고 필름 카메라와 똑같이 하면 되겠다 생각했다. 편하긴 하더라. 테이크 여러 번 갈 때 필름 카메라는 롤 체인지 하느라 기다려야 하는데, HD는 그런 게 없으니까 나도 편하고 배우들도 편하고. 하지만 빛이 환한 부분이나 격자무늬, 줄무늬 있는 배경에선 HD가 약한 것 같다.
김혜선 기자 | 갑자기 엎어지고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들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나? 홍상수 | 글쎄. 남이 보면 쟤는 쓸데없이 속으로 자기를 잡는다고 생각할 만큼 난 마음고생을 스스로 하는 타입이다. 외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오히려 심각하게 안 받아들인다. 생겨먹은 게 그렇다. 그냥 뭐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 해.(웃음)
김혜선 기자 | 실제로는 여행을 거의 안 간다면서 왜 계속 여행 이야기를 찍나? 홍상수 | 나도 모른다.(웃음) 게으른가보다. 마음은 가끔씩 일어나는데, 몸이 안 움직여진다. 일로 영화제에 갈 때 겸사겸사 조금 여행한다. 판을 벌리고 논다, 판을 벌리고 쉰다, 이런 걸 못한다. 뭐 하는 사이에 조금 보고 놀고 그런 걸 좋아한다.
김혜선 기자 | 다음 영화도 여행을 가나? 홍상수 | 글쎄, 지금까지도 항상 서울에서 헤매든 지방을 가든 여행 비슷한 것을 했으니까 또 그러지 않을까. 모르지, 구상하다 마지막에 딴 생각이 날지도.(웃음) 가능하면 올해 안에 촬영하고 싶다.
김혜선 기자 | 무슨 얘기인데? 홍상수 | 모른다. 말할 건더기가 전혀 없다.(웃음)
사진 김병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