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____
깨소금 여인
이희근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거의 매일 한 번씩 가까운 화산공원에 오른다. 길가의 수시로 변하는 나무와 숲이 무대의 주 배경이지만, 가끔 낯선 새들이 끼어들면 금상첨화다. 그 무대에 출연하여 나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주인공들은 다양하다. 호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녹음기의 가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조로 걷는 음치들, 뒤를 따라오는 이가 있는데도 두세 사람씩 짝을 이루고 걸으면서 남의 흉 보기에 여념이 없는 여인들, 목줄을 한 강아지를 끌거나 안고 다니며 땀을 흘리는 남자 등 제각각이다.
열심히 길을 걷고 있노라면 뜻하지 않은 초대를 받을 때도 있다. 정상의 벤치나 정자에서 쉬고 있는, 내 또래의 퇴직을 한 사람들로부터이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 사양한다. 열심히 볼거리를 찾고 다니는 관객인 나에게 그들은 한가히 앉아 세월을 낚고 있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주인공과 관객의 만남의 연속이다. 역할이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서로 바뀔 때도 있다. 주인공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던 관객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관객의 주인공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1월 초 어느 날이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 때문에 오전에 공원에 오르고 있었다. 흐린데다 미세먼지 때문에 어정쩡한 날씨였지만, 볼거리를 제공해줄 주인공 하나쯤은 만날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서원비를 지나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200m쯤 걸어서 예수병원으로 통하는 샛길과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반대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 산책객과 마찬가지로 안면 전체를 마스크로 가린 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내가 별 관심 없이 지나치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다가왔다.
쿵덕 쿵덕 멀리서 들려오는 방아 찧는 소리
입안에 가득히 고소한 깨소금 맛
얼굴도 식별할 수 없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 여인은 모처럼 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니 어렸을 때의 추억이 떠오르고, 입안엔 깨소금 냄새가 가득한 것처럼 고소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내 귀에도 “쿠웅 쿠웅”하고 규칙적인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날씨 탓인지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방아 찧는 소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병원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방앗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예수병원 옆 주택단지와 아파트 사이에 소규모의 방앗간이 하나 있다. 산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500m이다. 깨소금 냄새가 산에까지 날아올 리도 없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방앗간에서 “쿵덕 쿵덕” 하고 방아 찧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저 “위잉”하고 돌아가는 기계소리뿐이다. 방앗간이 아파트 입구 주택단지 내에 위치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방아 찧는 소리로 착각하고, 입안에서 깨소금 맛까지 느끼고 침까지 흘렸다. 나는 대단한 후각을 지닌 깨소금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파블로프의 개였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는 개가 음식 냄새를 맡으면 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개에게 밥을 줄 때마다 종을 울렸다. 그 실험을 통해서, 개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것이 조건반사이론이었다. 동물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나 학습을 통해서 형성되는 반응을 뜻하기 때문에 교육현장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었다.
나는 가끔 예수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들이 혼자서 공원에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만나는 사람에게 등산로에 대해 묻기 일쑤였다. 깨소금 여인도 이 공원이 낯설거나 오랜만에 올라왔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려오는 소리가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로공사 현장의 굴착기 소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병원 앞 도로는 비탈이 심하다. 게다가 인도가 큰 언덕 밑의 응달에 위치하고 있어서 겨울에 눈이 오면 빙판이 되어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시청에서는 예수병원 측과 협의하고, 도로의 선형 변경을 위한 공사를 진행 중이다. 병원 측에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곳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평탄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도중에 암반이 나타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건상 폭파작업을 할 수도 없어 매일 굴착기를 동원하여 구멍을 파고 돌을 캐내고 있다.
개인차와 경험에 의해 축적된 잠재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자극에 대해 나타나는 반응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깨소금 여인은 그 굴착기 소리를 방아 찧는 소리로 승화시키고, 깨소금 맛까지 느끼는 시적 감흥을 느낀 반면에, 나는 그 여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겨우 파블로프의 개를 연상해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그 소리가 굴착기의 소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주인공인 깨소금 여인의 무드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희근 / 『문학사랑』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 『아름다운 만남』이 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