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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69회>
씬 1 충주 관아 외경
군사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것이 보인다. 이곳이 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씬 2 동 관아 안
왕건을 중심으로 하여 제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유금필, 능산, 박술희와 더불어 환선길, 이흔암, 홍유, 김락,배현경, 등이 모여 있다.
배현경 이곳에 온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전투 명령이 하달되지를 않고 있소이다.
환선길 사실이외다. 이거 노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흔암 전투를 하지 않을 바에야 무엇하러 이렇게 대군을 끌고 와있단 말이오이까? 백제군도 이미 몇 십리 밖에 진을 치고 있소이다.
왕건 서두를 것 없습니다. 아직은 좀 더 지켜 볼 일이옵니다.
홍유 이러다가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들의 선제 공격을 받는다면 오히려 낭패가 아니오이까?
김락 허허, 왜들 이리 조급들 하십니까? 이번에 총사로 오신 왕장군께서는 이곳에 오신지 불과 하루밖에 아니되었소이다.
유금필 허허허, 그렇습니다. 군대의 이동이나 전투는 우리 장수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아옵니다.
왕건 모두들 의아해 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곳에 와있는 것은 꼭 전투를 한다기보다도 혹시나 있을 지 모를 백제군의 오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 점들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흔암 오판이라는 것은 뭘 말씀하시는 것이오이까?
왕건 제장들도 아시다싶이 나라 안의 사정이 어렵소이다. 대게 이럴 때에 적들은 기회다 싶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소이다. 그 점을 막자는 것이지요.
박술희 그렇기는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물론, 그렇다네. 그러나 꼭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겠다는 것은 아니야. 적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일걸세. 한편으로는 백제의 시선을 잡아두면서 기회가 되면 낙동강전선을 확보할 걸세.
모두들 ...........(끄떡인다)
왕건 비록 전면전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간계를 쓰게 될 것일세.
이흔암 이간계란 무엇이옵니까?
왕건 서로간에 반목하게 하는 것이지요. 즉, 사불성의 아자개와 백제의 견훤왕 사이에 더욱 틈이 벌어지게 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이들의 사이를 더욱 갈라놓으면서 만약의 사태에 어부지리를 얻자는 것이올시다.
홍유 그래도, 그런 이간계보다도 전쟁이 더 효과적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허허허, 홍장군. 좀 지루하시더라도 참고 기다려보십시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는 큰 전투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의 일이 더욱 중요하고 크기 때문이올시다. 사태를 좀 더 관망하면서 차분하게 지켜보십시다.
씬 3 철원 공역장
곳곳 이미 전각들이 대부분 완공된 모습들이다. 마지막 마무리 작업들이 한창이다. 인부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고, 아지태와 입전, 신방들이 어느 전각 앞에서 현장을 보고 있다. 그 한쪽으로 부상자들이 실려 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아지태 날이 추워졌네. 더 서둘러야 겠어.
입전 주야로 공역이 계속되고 있사옵니다. 부상자들도 속출하고 있고, 죽어 나가는 인부들도 많사옵니다.
아지태 큰 일을 하다보면 다 그런 것이야.
신방 도망친 인부들도 줄을 잇고 있다 하옵니다.
아지태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그런 자들은 모두 체포하는 즉시 목을 베어 성루에 걸어라.
신방 아학사 어른, 모두들 불만이 대단하옵니다. 이제 거의 공사가 마무리 되고 있사오니, 여유를 좀 주시오소서.
아지태 여유라니? 곧 환도를 하게 되어 있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폐하께서 환도를 하시기 전에 한 번 더 오시기로 하였네. 그때는 뭔가를 보여 드려야 해. 서둘러. 서두르란 말이야.
입전 하지만, 아학사 어른.
아지태 긴 말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부가 얼마를 다치고 얼마가 죽건 상관이 없어. 지금 송악에서 환도를 위한 모든 준비들이 끝나가고 있단 말이야. 알아 듣겠는가?
씬 4 송악 왕건의 집 외경
씬 5 동 집 마당
많은 인부들이 숱한 짐바리들을 곳간에서 끌어내어 밖으로 옮기고 있다. 장수장이 이들을 감독하고 있다.
장수장 조심, 조심해서 물건들을 다루어라! 그쪽은 유리 그릇들이니 특히 잘 다루어야 할 것이야. 모두가 철원의 황궁으로 가는 것이니라. 잘 다루어라.
인부들 예.
왕식렴 형제가 그 한 켠을 지나가면서 마당을 보고 있다.
왕신 형님, 요즘 따라 매일처럼 물목들이 곳간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사옵니다.
왕식렴 아직도 멀었네. 할당량을 맞추려면 끝도 없네 그려.
왕신 헌데, 벌써부터 황궁에 쓸 물건들을 옮겨가옵니까?
왕식렴 이미 철원의 황궁은 거의 다 완공되었다 들었네. 그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라는 게야.
그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다.
씬 6 동 집 사랑
왕평달과 두 사부가 마주해있다. 평달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변사부가 묻는다.
변사부 나으리, 이번에 광평성의 광치나가 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감축드리옵니다.
마사부 그러게 말이옵니다. 이런 경사가 어디있겠사옵니까? 광치나의 벼슬은 어찌되었든 신료들 중 으뜸이 아니옵니까?
왕평달 (도리질을 하며) 좋아 할 일이 아닐세.
마사부 어인 말씀이옵니까? 이보다도 더 큰 경사가.........?
왕평달 모르는 소리하지 말게. 경사는 무슨 경사, 이 어지러운 정국에 신료들의 웃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경사가 아니라 흉사나 다름이없네.
두사부 (놀라며) 나으리, 흉사라니요?
왕평달 모르긴 몰라도 평주의 박장자가 속으로는 춤을 출 것이야. 광평성에서 물러난 것을 말일세. 그동안 얼마나 머리를 썩히고 눈치를 받아 왔는가? 신료들이 당할 곤욕을 혼자 다 당해왔네. 이제 그것이 내게로 올 것이란 말일세.
두 사부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 듯 고개를 끄떡인다. 왕식렴의 형제가 들어서며 예를 올리고 앉는다.
왕식렴 포구에 좀 나갔다 오는 길이옵니다. 그동안 나라 밖에 주문해 놓은 물건들을 확인하느라.....
왕신 이러다가 집안 살림이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 같사옵니다.
왕평달 우리 뿐이 아니니라. 그런 불만을 입밖에 내지 말거라.
마사부 나으리, 주군께서는 지금쯤 충주에 도착을 하셨을 것이옵니다. 떠나시기 전에 황궁의 내원과 일단 뜻을 모으기로 하셨다 들었사옵니다만은.....
왕평달 서로가 전략적으로 제휴하자는 것일세. 곳곳에서 불만들이 누적되고 있어.
변사부 그렇사옵니다. 어디를 가든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사옵니다.
왕평달 그 민심을 우리보고 잡아달라는 것일세.
왕식렴 잘 되겠사옵니까?
왕평달 어려운 일이지. 일단은 서로 뜻을 모으고 돕기로 하였지만 어려운 일이야. 어렵고 말고. 그나저나 큰 일 일세. 나를 보고 광평성의 광치나를 맡으라고 하다니.....이건 참으로 좋지 않은 징조야. 잘 못하면 엄청난 함정에 빠질 수가 있는 일이거든. 큰 일 일세. 큰일이야.
고개를 외로 꼬는 평달의 모습에서...
씬 7 동 집 안채
오씨와 유씨(이제부터는 부용을 유씨라 부릅니다)가 다과를 놓고 마주앉아 있다.
오씨 형님, 아주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글세 숙부님께서 이 나라 신료 중에 가장 으뜸인 광평성의 광치나 벼슬을 내정 받으셨다하옵니다.
유씨 그랬는가? 참으로 기쁜 일일세.
오씨 그렇구말구요. 이 집에 영광이 넘치고 있사옵니다. 서방님께오서는 전장터에서 이름을 드날리시고 숙부님께서는 신료 중의 으뜸이 되셨사옵니다.
유씨 정말 그러하네. 그나저나 서방님은 별일이 없으신지 모르겠네? 그 위험한 전장터에 나가 계시지 않는가?
오씨 서방님은 천하의 호걸이시고, 용맹한 장군이시옵니다. 별일이 있으시다니요? 누구든 서방님의 존함을 듣게 되면 머리부터 숙이지 않사옵니까?
유씨 그렇기는 하지만은.....
오씨 염려 놓으시오소서. 저는 나주에서 많이 보았사옵니다. 서방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시고 덕이 많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말이옵니다.
유씨 그걸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밖에 보니 부엌 쪽이 많이 부산해 보이던데.....
오씨 예, 곧 황궁에 들어가 황후마마를 뵈오려 하옵니다.
유씨 황후마마를?
오씨 얼마나 자상하신 분이옵니까? 오늘날 형님과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도 황후마마이시옵니다. 물론 폐하께서도 도와주셨지만, 많은 배려를 해주셨사옵니다.
유씨 나도 알고 있네. 좋은 분이시네.
오씨 안에서 하기에 따라 밖에서 일을 보시는 분들이 큰 영향을 받게 되옵니다. 앞으로도 황궁과는 자주 가까이 해야 할 것이옵니다.
유씨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네 그려.
오씨 서방님께서 아무리 이름을 나시어도 안에서 받쳐드리지 못한다면 그 빛이 결코 크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유씨 그렇겠네 그려. 앞으로 많이 좀 가르쳐 주게나.
오씨 호호호. 가르쳐 드리다니요? 조금만 생각하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옵니다. 참, 형님도.....
씬 8 황궁 외경
씬 9 동 황궁 마당
내군들이 경계를 서며 오가고 있다.
씬 10 동 황궁 대전
궁예가 경전을 보며 참선에 들어있다. 책을 넘기는 그의 표정이 경건해보인다. 그는 법회 때가 아니면 여전히 검소한 차림 그대로이다. 책을 보면서 궁예는 몇 장을 넘기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문다. 그리고, 점점 눈을 크게 뜬다. 다시 지난 장을 되짚어 넘긴다.
궁예 관심법.......?
그리고, 궁예는 얼마를 더 보았을까? 뭔가를 크게 깨달은 듯 경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인다.
궁예 (E) 관심법이라..... 그렇지, 도를 깨닫고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참 나를 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나를 돌아본다? 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지를 넘어서면 나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본다........ 그리고, 상대를 본다. 그리고 천하를 본다..... 그렇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요히 입정(入定: 수행과정 중 참선에 들어 있는 상태)에 임해있으면 참으로 깨달은 자는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관심법이 아닌가? 관심법이라.....관심법이라....... 내가 이걸 왜 여태 관심을 두지 않았을꼬? 관심법이라......관심법..........
궁예는 미친 듯이 다시 경전을 앞 장을 넘겨 읽기 시작한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해 낸 것이다. 그때 밖에서 대전내관이 알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대전내관 (E) 폐하, 광치나와 광평서사, 대룡부령 입시옵니다.
궁예 (생각에서 깨어나며) 들라하여라.
씬 11 동 대전 복도
대기해 있던 박지윤과 왕평달, 유장자가 안으로 들어선다.
씬 12 동 대전 안
세 사랍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앉는다.
박지윤 폐하, 찾아 계시었사옵니까?
그러나, 궁예는 한동안 말없이 그들을 뚫어져라 본다. 한동안 그렇게 하자 세 사람은 당황하며 눈치를 본다.
왕평달 폐하.......
그러자, 궁예는 잠시 입정에 들었다가 다시 눈을 뜬다. 세 사람은 더욱 안절부절이다. 궁예의 안광에 빛이 나고 있다.
궁예 (한 참만에) 잘들 오시었소이다. 내 몇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 원로분들을 오시라 하였소이다.
그들 .......
궁예 이보시오, 광치나.
박지윤 예, 폐하.
궁예 경은 그동안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소이다. 철원의 일은 물론 대 제국의 앞날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지만 사실 고생들이 얼마나 많소이까?
박지윤 (그제서야 조금 풀어지며) 허허허, 뭐 고생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것이 많아서.
궁예 (차갑게) 그래서 부른 것이오. 그 짐을 덜어주려고 말이오.
박지윤 예?
궁예 (다시 한 참 입정에 들었다가 눈을 뜬다) 그대들은 나를 어찌 생각하오?
유장자 어찌....... 생각하시다니요?
궁예 짐은 미륵이오.
왕평달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사옵니까?
궁예 미륵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볼 수가 있소이다. 그동안 광치나께서는 많이 피곤하고 또 힘이 드셨을 것이외다.
박지윤 (잠시 또 풀어지려는 데).....
궁예 (강하게) 그리고, 불만 또한 많았소이다.
박지윤 (놀라서) 폐하, 신이 어찌 불만을......
궁예 허허, 나는 미륵이라 하였소이다. 관심법으로 보면 다 보이는 법이오.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오?
박지윤 아니, 저,저.......
궁예 중생들은 미련하여 때로는 불만도 가질 수가 있고, 조금만 힘이 들면 불평도 하게 되어 있소이다. 그것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예요. 다만, 거짓을 말해서는 아니된다 하는 것이오.
박지윤 (떨며) 예, 폐하.
궁예 광치나 자리는 그만 쉬시고, 여기 왕장자에게 넘겨 주시구료.
박지윤 .......예, 폐하........
왕평달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또한 대룡부령.
유장자 예, 페하.
궁예 철원의 황궁 공사가 막바지를 치닫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그러나, 그 뒤를 대는 일들이 아직도 미흡하다는 게요.
유장자 황공하옵니다, 폐하.
궁예 이것은 호족들이 아직도 짐의 큰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호족들과 지방 수령들을 더욱 채근하시오.
유장자 예, 폐하.
궁예 그리고, 새로이 광치나가 된 왕장자는 대룡부령을 도와 거국적으로 이 막바지 사업을 완성시키도록 하시오.
왕평달 예, 폐하.
궁예 짐이 법회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온 백성과 대소신료들이 그 뜻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자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름 있는 승려들의 도움과 참여가 필수적인 것이오. 전국의 고승들을 불러 매달 열리는 궁중 법회에 참석시키도록 하오. 아시겠소, 광치나?
왕평달 예, 폐하.
궁예 그 동안 짐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모든 것을 순리로써 대해왔소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을 것이오. 나는 내가 지은 경전의 법에 따라 그 이치를 깨닫게 해줄 것이오. 그리고,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관심법을 동원하여 흑과 백을 가리고 정의와 불의를 갈라내어 진리의 세상을 천하에 드러낼 것이외다. 짐의 미륵관심법으로 말이오.
궁예의 그런 강한 표정에서......
씬 13 동 황궁 내원
종간과 은부, 박유, 염상 들이 모여 있다. 염상이 보고를 한다.
염상 방금 전에 광치나 박지윤 장자와 송악의 왕장자, 그리고 대룡부령 유장자가 대전을 다녀갔사옵니다.
종간 .........(끄떡인다)
은부 광치나 자리를 왕장자에게 넘기신 것이 아니옵니까?
종간 그리하셨겠지. 일전에 말씀을 하신 일일세.
염상 뿐만 아니라, 법회를 강화하고 철원의 황궁 공사를 조속히 매듭지으라 하셨다 하옵니다.
종간 그러셨을테지.
염상 특이한 것은 전국의 고승들을 빠짐 없이 순번으로 불러 궁중의 법회에 계속해 참석시키라 하셨다 하옵니다.
종간 전국의 고승들을?
염상 예, 내원 어른.
종간 (한숨) 큰 일이로구먼. 갈수록 태산일세. 고승들을 불러 강제로 새 경전을 공부하게 한다면 또 하나의 엄청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드는 격이 되는 것이야.
박유 그렇사옵니다. 이야말로 또 다른 큰 불만 세력을 더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만류 하셔야 하옵니다. 종교나 신앙을 건드리는 일은 통치자들이 가장 피해야 할 일 중에 하나 이옵니다.
종간 어찌하겠소이까? 폐하께서 바로 미륵이시옵니다. 누가 폐하께 간언을 드릴 수 있다고 보시오이까?
박유 지난 날 송악의 왕씨 일가와 만나지 않으셨사옵니까? 도움을 청하시오소서.
종간 저들도 지금은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미구에 있을지도 모를 사태를 예비하기 위해 만난 것 뿐이올시다. 여전히 저들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올시다.
은부 허지만, 장자 왕평달이 이번에 광치나가 되지 않았사옵니까?
종간 허허허, 글세 모르긴 몰라도 반가워하기 보다는 크게 두려워 할 것일세. 언제 어떻게 날벼락이 떨어질 지 모르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아니겠는가?
박유 서로가 힘을 모으시오소서.
은부 지금 폐하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분은 내원어른과 왕장군 뿐이올습니다.
종간 좀 더 지켜보십시다. 어쨌든 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소이다. 이 바람을 갑자기 잠재우기는 무리예요.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밖에..... 기회가 올 겁니다. 그 기회를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씬 14 황후 전 복도
제조상궁과 상궁들이 대기해 있다. 황후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강장자 (E) 평주의 박장자가 광치나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옵니다.
씬 15 황후전
강장자 부부와 연화, 슬이가 함께 해 있다.
강장자 박장자는 그저 원로의 신분으로만 조정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하는 것이예요. 허허허.....한때 신료 중에 제일 웃자리라 하여 거드름을 피우더니만.......
백씨 그럼, 다음의 후임은 누가 되었다 하옵니까?
강장자 송악의 왕평달 장자가 되었다 하는 구료.
백씨 그 사람이 맡을 바에야....... 폐하께서는 나으리도 생각해 보실만 하신데.....
연화 어머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 그러지 않으셨사옵니까? 외척은 정치에 관여를 해서는 아니된다구요.
백씨 하지만....
강장자 아, 물론 일리가 있사옵니다, 황후마마. 허지만,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그 동안의 경험을 국정에 반영시키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요. 아니그렀사옵니까?
연화 부질없는 생각이십니다. 제가 말려도 말릴 것이옵니다. 그런 생각들은 버리시오소서.
두부부 ......(계면 쩍고)
연화 이보게, 진내관.
진내관 예, 마마.
연화 바깥에 동정은 어떤가 알아보라고 하였는데.... 거리와 백성들의 사정이 어떠하던고?
진내관 (눈치를 보다가) 마마께서 걱정하시는 그대로이옵니다. 과다한 세금과 공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성 밖으로 떠나는 일이 빈번하다 하옵니다.
연화 (한숨) 세상에..... 나는 아직도 모르겠구나.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사면서 철원의 공사를 밀어 부치실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강장자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사실 이 송악보다는 철원이 낫사옵니다. 다 폐하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있어서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백씨 마마, 이 송악은 사실 왕씨 일가의 이름이 더 큰 땅이옵니다. 그래서, 내원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연화 그만들 하시오소서. 진내관은 나가보게.
진내관 예, 마마.
진내관이 나가는데 다시 밖에서 제조 상궁이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조상궁 (E) 황후마마, 송악에서 두 분 왕장군 부인께서 드셨사옵니다.
강장자부부 (의아하고)........?
연화 부인들께서...? 드시라 하여라.
곧 오씨와 유씨가 들어서며 예를 올린다.
오씨 황후마마, 소인들 문안이옵니다. 두 분 어르신께서도 별고 없으셨사옵니까?
백씨 그렇다오, 뭐 별일이 있어야지? 나으리, 우리는 그만 나가십시다.
연화 그렇게 하세요. 그만 가보시어요.
강장자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예......마마....
강장자 부부가 나가고, 그들은 그렇게 마주 앉았다.
연화 슬이야, 밖에 시켜서 다과라도 내오도록 하여라.
슬이 예, 마마. (나가고)
연화 그래, 들 어떻습니까? 이렇게 찾아주니 참으로 뜻밖입니다.
유씨 지난 번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러 왔사옵니다.
연화 무슨 말씀을...... 혼례식에서도 보았지만 왕장군의 큰 부인께서 참으로 참해보이십니다.
오씨 .........
유씨 고맙사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작은 부인께서는 상당히 활달하다고 들었습니다. 나주에서 활약한 일도 들어서 알고 있고, 또 여기 큰 부인을 찾아오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노력을 하셨다구요?
오씨 망극하옵니다, 황후마마. 그저, 소임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슬이가 다과를 내온다. 그들에게 차려주면.....
연화 자, 드세요. (사이) 그래, 두 분은 신혼의 재미가 어떠하십니까?
오씨 낭군께서 전장터에 나가계시옵니다. 신혼이랄 것이 있겠사옵니까?
연화 (유씨에게) 부인은요?
유씨 나라를 위해 나가계시옵니다. 그저 기도만을 드릴 따름이옵니다.
연화 (한숨) 두 분은 좋은 낭군을 모셨습니다. 왕장군은 참으로 좋은 분입니다. 잘 해드리세요.
유씨 ...........?
오씨 고맙습니다, 마마. 폐하와 더불어 황후마마께서도 이처럼 배려를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르겠사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고 문후인사를 여쭙겠사옵니다.
연화 자주들 오세요. 궁중이란 늘 외로운 곳이랍니다. 하기사 두 분도 왕장군이 아니계시니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그렀습니까?
오씨 호호호, 정말 그러하옵니다, 마마.
씬 16 상주 전선
산기슭으로 곳곳에 깃발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인다. 이른바 군사들이 대치해 있는 것이다.
씬 17 동 산야 어느 일각
왕건이 세 가신과 더불어 멀리 산구릉들을 보고 있다.
유금필 이곳에서 삼 십여리 밖에 백제군이 진을 구축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끄떡인다)
능산 지난 번 회의 때 제장들도 말을 하였습니다만은 이번 전쟁은 너무도 무료한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렇지가 않으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네. 이보게, 술희.
박술희 예, 주군.
왕건 백제 쪽에서는 어떤 장수들이 와있다고 했는가?
박술희 견훤왕의 아들인 두 태자와 더불어 매곡성의 성주 공직이 이쪽 조령 쪽을 보고 있다 하옵니다. 그리고, 죽령쪽에는 장군 추허조와 방장군이라는 자가 주둔해 있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끄떡이면서) 이제부터 술희 아우가 할 일이 있네.
박술희 소인이 말이옵니까?
왕건 아우는 사불성의 성주 아자개와 친분이 있지 아니한가? 이번에도 좀 다녀와야 겠네.
박술희 (너무 좋아서) 소인이 다녀오는 것이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내가 친서를 써줄 것인즉 그것을 아자개에게 전해주게. 아주 공손하게 말일세.
능산 무슨.......친서이옵니까, 주군?
왕건 우리는 사불성을 공략할 의사가 없으니, 잘 지내자는 것일세. 그러면서, 견훤왕과의 사이를 벌리는 것이야.
유금필 허허허, 이간계를 쓰시는 것이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술희의 책무가 막중하네. 잘 다녀오게나.
유금필 허허허, 그곳에 견훤왕의 누이 대주가 있사옵니다. 술희 아우가 오직 잘하겠사옵니까?
박술희 허허허, 맡겨주시오소서. 대주 낭자를 보는 일인데 어찌 소홀히 하겠사옵니까? 맡겨주시오소서.
능산 허지만, 주군 과연 우리의 이간계가 저들에게 먹혀들지 모를 일이옵니다. 어쨌든 간에 아자개와 견훤왕은 부자지간이 아니옵니까?
왕건 일단은 시작한 일이니까 추이를 지켜 보세나.
왕건은 그렇게 말하며 먼 전선을 본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18 전주 백제의 황궁 외경
박씨 (E) 세상에 해도 해도 너무하시옵니다.
씬 19 동 황궁 황후전
황후 박씨와 고비, 그리고 능애와 견훤이 함께 해있다.
박씨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아버님은 늘 등을 돌리십니다. 어찌 부자간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
견훤 .........(무거운 한숨)
박씨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신을 보냈사옵니까? 때마다 철마다 선물도 보내드렸고, 문안인사도 드렸사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마치 철천지 원수 보시듯 하시옵니다.
견훤 그만하시구료. 어제 오늘 일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능애 아버님께서도 아무리 그렇다하시더라도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하였사옵니다. 계속해 정성을 다한다면 돌아서실 것이옵니다.
고비 아무리 생각하여도 신첩은 이해가 가지 않사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박씨 그게 다 계모님 때문일세. 그러길래 한 집안이 화목하려면 가장 하기 나름인 게야. 남정네가 귀가 여리면 작게는 집안이 망하고, 크게는 나라가 망하는 게야.
고비 .........
박씨 계모님만 아니 계셨다면 아버님께서 어찌 저리 하시겠는가? 그게 다.......
견훤 (말을 막으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요? 집안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거 왜 쓸데 없는 이야기는 자꾸 하오? 에잉.........
박씨 사실이 그렇지 않사옵니까, 폐하?
견훤 허, 그래도..........?
박씨 우리 황실도 지금부터 잘 단속하시오소서. 아버님의 일을 남의 일 보듯 할 일이 아니옵니다.
견훤 (그예 일어나며) 그만 두라하였소이다. 좋은 방도를 찾아 보자고 하는 자리인데 에잉..... 이보게, 아우.
능애 예, 폐하.
견훤 아무리 모여 앉아 있어봤자 대답이 나올 리가 없네. 상주의 일은 아우가 잘 알아서 아버님의 근황을 좀 알려주어야 할 것이야.
능애 예, 폐하.
견훤이 기분 나쁜 헛기침을 날리며 나가버리자, 박씨가 토라지며 한 마디 더 내뱉는다.
박씨 어제 일을 보면 오늘 일을 안다 하였어. 도대체 폐하께서는 지금 아버님의 일을 보시면서도 느끼시는 바가 없으신 모양일세. 허, 참....
고비 ...........
씬 20 동 대전 복도
내관과 궁려들이 그렇게 서있고, 견훤이 걸어 들어온다. 그들이 예를 올리면, 대전 안으로 들어서고.
씬 21 동 대전
능환과 최승우가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나며 견훤을 맞는다.
견훤 어, 그대로들 앉게. 그래,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는가?
최승우 별다른 것은 없사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그대로 상주 전선은 양군이 대치해 있는 가운데 이렇다할 조짐이 없사옵니다.
견훤 (끄떡인다) 파진찬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야. 저들은 별다른 뜻도 없이 우리의 신경을 잡아두려는 것 같아.
능환 하지만, 왕건이 총사로 와있다는 것은 계속해 마음이 걸리옵니다.
견훤 적어도 그만은 해야 우리가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둔 것이겠지. 파진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어. 그게 맞아.
최승우 그 동안 계속해서 마진국에 가 있는 세작들의 보고를 정리했사옵니다. 마진국은 지금 무리한 철원 환도로 인하여 극도의 위기를 맞고 있사옵니다.
견훤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알기는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최승우 호족과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있다고 하옵니다.
견훤 그야 그렇겠지. 우리도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금성을 잃지 않았는가? 무리한 전쟁 준비를 하다가 말이야.
최승우 하오나, 지금의 마진국은 그 사정이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 같사옵니다. 오죽하면 허장성세로써 왕건이 군사를 끌고 상주에 와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아지태를 왜 암살하려 했겠사옵니까?
견훤 맞아, 뭔가가 있어....
최승우 궁예 왕은 연이어 강력한 통제수단을 드러내고 있다 하옵니다. 물론 그에 따른 신료들과 백성들의 반발은 더욱 커지고 있을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적절히 이용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견훤 바로 그 문제인데, 파진찬은 지난번에 그에 따른 어떤 복안이 있다고 하였네. 아직도 말해 줄 수가 없는가?
최승우 허허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되옵니다. 마진국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할 계책을 마련중이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오소서. 모두 말씀해 올릴 것이옵니다.
견훤 허허허, 하기사 자네는 모든 것이 확실해 진 후에야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
능환 하온데, 상주의 아자개님 일은 어찌 되셨사옵니까? 황후마마와 좋은 의견을 나누셨사옵니까?
견훤 의견은 무슨..... 그저 남의 복장이나 지르는 이야기를 해대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황후도 참 답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 계모님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능환 .........? (답답하다)
최승우 어찌되었든 사위 분인 승평의 박장군과 더불어 공직 장군과 두 분 태자마마께서 가셨사옵니다. 곧 아자개님을 뵈올 것이옵니다.
견훤 그러면 무엇 하겠는가? 모든 게 다 삐뚤어져 있는데?
최승우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옵니다. 문안 인사를 게을리 하지 마시오소서. 그래도 피를 나눈 부자분이시옵니다.
견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이렇게 끓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쯤 편안하게 좋은 사이가 되었다면 아무리 왕건이 온 들 상주를 왜 걱정하겠는가 말이야? 에잉.......
씬 22 상주 사불성 외경
신검 (E) 할바마마, 절 받으시오소서.
씬 23 동 성 안
신검과 양검, 공직, 박영규, 추허조가 무릎을 꿇고 아자개 부부를 보고 있다. 대주와 보개도 그렇게 서있다.
신검 그동안 평안하셨사옵니까, 할바마마?
아자개 그래, 나야 늘 편안하다. 여긴 왜들 왔느냐? 음, 추허조 네놈도 왔구나..
추허조 예......
신검 마진국의 도적들이 할바마마의 영지를 노리고 왔다하여 급히 달려왔사옵니다.
계모 고맙구먼....하지만, 그리 급히 올 필요가 뭐 있느냐? 불이 난 것도 아니고, 성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신검 .......
박영규 할바마마, 소장은 할바마마의 손주 사위 박영규라 하옵니다.
아자개 무슨 사위..?
계모 아, 손주 사위라고 하지 않사옵니까? 손주 사위래요.. 손주 사위.....
아자개 그래서....?
박영규 저희 장인 어른이신 대 백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천하를 호령하시는 삼한의 영웅 호걸이시옵니다.
아자개 삼한의 뭐...? 무슨 호걸...?
박영규 영웅 호걸이시라 했사옵니다. 폐하께서 영웅이시면, 그 아버님 되시는 할바마마 역시도 영웅이 아니시옵니까?
아자개 어흥...흥.......(그 말은 싫지가 않다) 그래서...?
박영규 나라를 세우신 지 오래이온데 아직까지도 상주와 백제국의 황도 전주 사이에 이렇게 벽이 막혀 있다는 것은 천하가 웃을 일이옵니다. 손주 사위의 간청이옵니다. 제발 마음을 푸시옵고, 황제폐하의 정성과 효도를 받으시오소서.
아자개 아서라, 아서... 효도..? 효도 같은 소리 말아라. 효도를 지겹게 받다 보니, 오늘날 꼴이 이 모양이 되었다. 나는 나대로 살고, 저는 저대로 살라 하였다. 더 이상 잔소리 말고 인사들 끝났으면 돌아들 가거라.
공직 소장도 백제의 신하로써 간청 드리옵니다. 천하가 두 분을 보고 계시옵니다. 지금이라도 폐하의 정성을 받으시오소서.
아자개 나 이런..원, 그게 무슨 물건이냐? 주고받고 하게? 아, 어서들 돌아들 가라니까 그러네. 돌아들 가.
대주들 .........(그저 답답하기만 하고)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E)나으리, 성 앞에 마진국에서 온 박술희라는 자가 나으리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아자개 (크게 반가워서) 뭐야? 누가 왔어? 박술희가 왔어?
계모 그렇다지 않사옵니까? 박술희라 하옵니다, 나으리.. 아이구..
그들의 그 반가운 표정에서, 대주도 눈을 감고 박영규 들도 눈을 감는다.
씬 24 동 성 앞문 앞
박술희가 용개를 보며 계면쩍게 웃고 있다.
용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마진국의 장수가 여기에 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박술희 헤헤헤, 우리는 구면이올시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하다니요? 용무가 있어서 왔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용개 서로 칼을 겨누는 적국의 장수가 무슨 용무가 있단 말인가? 썩 돌아가지 못할까?
박술희 이곳의 성주님이신 아자개님께서 아신다면, 이러시지는 않을게요.
용개 그래도, 이자가.... ?
그때 대주와 보개가 다가온다. 박술희가 그만 자지러진다.
박술희 아이구, 나..낭자...? 박술희외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외다.
대주 어쩐 일이시오?
박술희 어쩐 일이라니요? 한시도 낭자를 잊은 적이 없소이다. 우리 폐하께서 이곳 일대를 지키라는 명을 내리시어 불원철리 한 걸음에 달려왔소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외다. 낭자, 많이 보고 싶었소이다.
대주 허튼 소리 말고, 용무를 말하시오.
박술희 낭자...
용개 용무를 말하라 하지 않는가?
박술희 우리 주군이신 왕건 장군께서 아자개님께 보내는 친서를 뫼셔 왔소이다. 특별히 이 몸을 보내시어......
대주 따라 오시오.
박술희 예, 낭자. 낭자,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소이까?
대주 말이 많소이다. 어찌 그리 입이 헤프시오? 따라 오시오.
박술희 아, 예..예..
그만 그렇게 입을 다물며 멋쩍게 쫓아 가는 박술희, 그때 공직과 신검 일행들이 오다가 박술희를 본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선다. 박술희도 그들을 묘하게 본다. 추허조가 울컥하며 한마디한다.
추허조 이자가 바로 그 박술희라는 자가 아닌가?
박술희 헤헤헤, 그렇사옵니다. 소장이 박술희옵니다. 장군은 뉘시온지..?
춧허조 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 집 뒷간 들락거리듯이 왔다갔다 하느냐? 네 이놈 썩 꺼지지 못할까...?
박술희 왜들 이러시오이까? 나는 사자로써 온 것이외다. 아니 그렇소이까, 대주낭자?
추허조 아니, 저,저...그래도...
박영규 허허, 추장군 고정하시오. 사자로 왔다하니 어쩌겠소이까? 그만 가십시다.
대주 어서 따라오시오.
박술희 아, 예..예..낭자.
추허조 어이구, 가슴이야 어이구.
대주와 박술희들이 그렇게 사라지면, 공직이 한숨을 쉰다.
공직 답답한 일이야. 저들에게는 저리 친절하게 해주시면서, 왜 우리에게는 박대를 하신단 말인고?
박영규 본래 성정이 그러하신데 어찌 하겠습니까? 가시지요. 자 그럼 각자 주둔지로 돌아들 가십시다.
그들 그렇게 가고.
씬 25 동 성 안
아자개와 계모가 껄껄 웃고 있다.
아자개 그래, 잘 있었는가? 그동안 무얼 하였고?
박술희 여러 전투를 전전하느라 바빴사옵니다.
대주 ........
계모 그래도 좀 소식을 주지 않고... 우리는 박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오.
박술희 소장 또한 대주 낭자를 줄 곧 잊지 않고 있었사옵니다.
아자개 허허허.. 허지만, 남녀 간의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야. 더군다나, 서로가 적이 아닌가 말이야, 응?
박술희 적이라니요?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서찰을 올린다) 여긴 저희 주군이신 왕건 장군께서 올리는 친서를 뫼셔 왔사옵니다.
아자개 친서? (받아 펼치며) 무슨 이야기인데....? (다시 본다) 허허, 이게 무슨 소린고..? 상부라? 상부라니....?
계모 세상에, 상부라고 했사옵니까? 왕건 장군이 말이옵니까?
박술희 그렇사옵니다. 상부란 큰 형님이나 아버지처럼 모신다는 말이옵니다. 살펴주시오소서.
계모 호호호, 왕장군 아주 예의가 바른 사람이구료.
아자개 그러게 말이오. 군대를 데리고 온 것은 우리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백제 군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경계를 하려고 왔다는 거예요. 우리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아주 예의가 바른 사람이야.
대주 아버님, 속지 마시오소서. 오라버니와 우리를 이간질 시키기 위한 술책이옵니다.
계모 얘야, 하지만 네 아버님을 상부라 하지 않느냐?
대주 속지마시오소서. (박술희 에게) 돌아가시오, 썩 돌아가시오. 아니면, 경을 칠 것이오.
박술희 낭자, 오해이시오. 그렇지가 않소이다. 오해입니다.
대주 여봐라, 무엇을 하느냐? 당장 이 사람을 끌어 내거라.
박술희 낭자, 낭자...
아자개 아니 얘야 왜 그러느냐? 여기 박장군이 무얼 잘 못했다고? 아니, 얘야. 아 왜들 그래?
보개 무엇들 하느냐? 어서 끌어내지 않고.
군사들이 들어와 박술희를 끌어 내간다. 박술희는 안타깝게 소리친다.
박술희 낭자, 이러지 마시구료. 낭자....... 우리가 얼마만에 보았는데 낭자.....
박술희는 그렇게 끌려 나간다. 대주가 눈을 크게 뜨고 따져 묻는다.
대주 아버님, 도대체 어쩌려고 이리하시옵니까? 저 사람은 마진국의 장수이옵니다. 우리의 적이옵니다, 아버님.
아자개 물론 그렇다만은 우리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느냐? 헤헤헤...
대주 아버님.....
씬 26 충주 관아 외경
씬 27 동 관아 안
왕건과 두 가신이 함께 지형도를 펴놓고, 생각에 잠겨 있다.
유금필 과연 전투가 벌어져도 사불성을 공략하지 않으실 생각이옵니까?
왕건 약속은 약속일세.
능산 그러다가, 저들이 서로 손을 잡고 연합군을 형성하여 우리를 공격하면 어찌하오리까?
왕건 이미 다 분석하고 내린 판단일세.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야. 견훤왕이 백제의 황제가 된 지 십 년이 넘었네. 그런데도, 아직 저들 부자는 저렇게 갈라져서 으르렁 거리고 있어.
유금필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옵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요?
왕건 세상 일이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네. 부모 형제간에 오해가 생기면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큰 증오로 대립하는 법일세. 견훤왕 부자의 일이 그와 같은 경우일세.
능산 하온데, 주군. 본격적으로 백제의 영토를 빼앗자는 것도 아니고.... 아지태라는 자가 벌린 뒷치닥거리를 하러 전선에 나와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섭섭하옵니다.
왕건 그런 소리 말게. 우리는 하나도 둘도 폐하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일세. 그 분이 영을 내리시면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것이야. 다른 생각일랑은 일체 갖지 말게나.
유금필 엊그제 내려온 황궁의 전문을 받아보니, 참으로 답답했사옵니다.
왕건 무엇이 말인가?
유금필 철원에 황궁을 다시 짓는 일은 일단 폐하께서 더 큰 나라를 설계하신다는 의미로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법회 문제만은 납득이 잘 가지를 않사옵니다.
능산 정말 그렇사옵니다. 어차피, 모든 백성과 신료들이 폐하를 미륵으로 모시지 않사옵니까?
유금필 대체 왜 이리 단속하고 조이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옵니다. 이제는 매달 한 번씩 대신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고승들 마저도 의무적으로 황궁의 법회에 참석해야 한다 들었사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왕건 허허, 이 사람들이 그런데.. 그게 무슨 망발 들인가?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자네들이 왈가왈부 할 수 있단 말인가? 입들 다물지 못하겠는가? 사람들 하고는.........
씬 28 황궁 외경
씬 29 동 황궁 대전
궁예가 조정에서 올라 온 여러 자기 장계를 훑어보며 끄떡이고 있다. 만족한 듯 접으며 종간을 보고 웃는다.
궁예 이번에 새로이 광치나를 맡은 왕장자는 역시 지난 번의 박장자보다는 나은 것 같소이다. 이것보시오, 내가 지시한 것들이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소이다.
종간 그런 것 같사옵니다.
궁예 철원에서도 공사가 막바지라고 하니, 한 번 더 다녀 올 참이오. 이번에는 내원께서도 함께 가십시다.
종간 신이 말이옵니까?
궁예 암요, 내원도 보셔야지요. 그리고, 광평성의 원로들과 그곳에 가보지 않은 신료들도 다 함께 가보도록 하십시다.
종간 알겠사옵니다, 폐하.
궁예 왕건 아우의 상주 전선도 별 이상이 없고..... 참, 전국의 고승들을 황궁의 법당으로 오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소이까?
종간 오늘이 바로 그 날이 아니옵니까? 이미 많은 스님들이 모여 폐하의 법문을 기디리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허월대사와 더불어 석총이라는 큰 스님이 온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허허허, 석총이라...? 맞아요, 지난 번에 한 번 봤소이다. 거 눈매가 날카롭더구먼. 자, 그렇다면 가 보십시다.
종간 예, 폐하.
그들 그렇게 일어나면서......
씬 30 황궁 법당 외경
마당까지도 많은 고승들이 앉아 있다. 그 주변을 내군들이 경계를 서고 있고, 법당 앞에는 동남동녀들이 연들을 들고 서있다. 화려하다. 법회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씬 31 동 법당 안
허월과 석총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앉아 있다가, 궁예가 들어서자 모두 일어나 합장을 하며 예를 올린다. 궁예는 비단 승복에 금책을 쓴 차림이다. 궁예가 법석에 와 앉는다. 그러자, 모두들 합장을 하고 앉는다. 종간, 은부, 박유, 염상 들도 승려들 뒤에 앉았다.
궁예 잘들 오셨소이다. 그대들은 부처를 뫼시는 제자들이오. 그리고, 나 또한 미륵 부처로써 이 땅에 와 있소이다.
모두들 .........
궁예 나는 경전을 지었고, 새로운 불가의 법을 만들었소이다. 그러나, 일전에 말하였듯이 잘못된 석가의 법이 세상을 혼탁하고 어지럽게 만들었소이다. (목청을 높이며) 물론, 석가의 말 중에는 좋은 구절들이 아주 많소이다. 하지만, 나의 경전만 못할 것이오. 이 미륵의 경전 말이오. 그대들은 나의 경전을 보았소이까?
아무도 대답들이 없다. 허월은 그저 눈을 감고 있고, 석총은 비웃듯 입술을 실룩이고 있다.
궁예 허허허, 아무도 대답들을 못하는 구료? 어렵게들 생각할 것 없소이다. 진리란 단순한 것이오, 그래서 석가모니는 만법귀일이라는 말을 썼소이다. 즉, 모든 법은 하나로 통한다. 그런 말 말이오. 그것을 내가 깨우쳐주려고 경전을 지은 것이오. 미륵 경전 말이오. 이보시오, 석총 대사.
석총 예, 폐하.
궁예 대사는 이들 중 가장 많이 미륵에 대하여 공부한 사람이오. 그 경전이 어떻소이까?
석총 .......
궁예 (사이) 어떻냐고 묻고 있소이다.
석총 솔직하게 대답을 올려도 되옵니까?
궁예 몰론이지. 말해보오.
석총 (단호하게) 그렇다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그것은 경전도 아니며, 불법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며, 오로지 쓸모 없이 중생들을 현혹시키는 요설일 뿐이옵니다.
궁예 ........?
모두들 .......?
궁예 요설이라...? 요설이라.......
석총 또한 더불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폐하께서 어찌 미륵이라 칭하시옵니까? 폐하께서는 미륵이 아니시옵니다.
궁예 뭐라..?
종간 아니, 저...저.......?
석총 폐하, 폐하는 미륵이 아니시옵니다.
굳어지는 궁예의 표정에서.............( 69회 끝 )